새삼
박소윤
노란 실타래가 바닥에 깔렸다. 누가 실을 풀어놓고 간 줄 알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가느다란 노란 선들이 땅이 아니라 다른 식물의 줄기에서 나왔다. 노란 줄기들은 한 방향으로만 뻗은 것이 아니라, 이 줄기에서 저 줄기로 가늘게 건너가며 여러 겹으로 얽혀 있었다.
살짝 투명한 노란 선이 다른 식물의 줄기를 한두 번 감은 뒤, 다시 풀려 나와 옆줄기로 옮겨 붙었다. 줄기마다 굵기가 아주 조금씩 달랐다. 어떤 것은 머리카락처럼 가늘었다. 서로의 끝과 끝이 허공에서 매듭처럼 포개진 곳도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매듭이 아니라 각자 방향을 틀고 또 틀며 자기 길을 찾아간 흔적이었다.
겉보기엔 엉켜 있는 듯했지만, 그 안에는 저 나름의 질서가 은근히 숨어 있었다.
"새삼스럽다"고 말하던 그 말이 바로 이런 식물에서 비롯되었다. 흙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고 다른 줄기를 타고 살아가는 새삼을 처음 봤을 때는 식물에 붙은 잔가지쯤으로 여겼다. 새삼은 겉으로 보기엔 아무 데서나 잘 번식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존 조건이 꽤 까다롭다.
자기와 맞는 기주식물을 찾지 못하면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반대로 자기와 맞는 기주식물을 만나면 놀라울 만큼 강한 번식력으로 오래 버틴다. 까다로운 건지, 섬세한 건지 경계가 모호하지만 그 복잡한 방식이 묘하게 인간의 관계와 닮았다.
사람도 어떤 자리에서는 금세 지치고, 어떤 사람 곁에서는 오래 머물러도 전혀 피곤하지 않다. 직장에서 버티기 어려워도 나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이 있으면 그 하루는 이상하리만큼 견딜 만해진다. 반대로 결이 맞지 않는 자리에서는 기주를 찾지 못한 새삼처럼 몸 전체가 축 가라앉는다.
몇 년 전에 새로 옮긴 직장에서 처음에 적응이 쉽진 않았다. 점심도 못먹고 밀린 일을 하던 중에 식사를 하고 온 동료가 내게 믹스커피 한잔을 건냈다. 그때 받은 따뜻함이 여전히 내 마음에 뿌리를 내렸다.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주식물이 되지 못하고 꽉 죄기만 하면 그 관계는 이내 죽는다. 새삼이 기주식물을 꽉 조이지 않고 틈을 두며 올라타듯, 가까워지되 지나치게 달라붙지 않고, 멀어지되 완전히 끊어지지 않는 그 미세한 간격을 본능적으로 찾아낸다.
관계는 늘 모순적이다. 가까우면 숨이 막히고, 멀어지면 어느새 연결이 풀린다. 하지만 새삼 같은 관계는 이상하게도 한쪽이 다가가면 다른 쪽이 자연스레 물러서고, 그 거리가 맞춰지면 함께 위로 향한다. 마치 서로의 호흡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새삼의 씨앗인 토사자는 땅속에서 길게는 십 년도 넘게 머문다. 자기와 맞는 기주 식물이 자라기를 서두르지 않고 기다린다. 영화 감독 짐 자무시가 <커피>라는 작품을 열여섯 해 넘게 다듬었다는 이야기를 어떤 인터뷰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도 아마, 씨앗이 흙 속에서 묵묵히 시간을 모으듯 자신에게 맞는 호흡을 기다렸던 것 같다.
오래 기다린 끝에 만난 관계는 마치 내 결에 맞는 기주식물을 찾아낸 새삼처럼 반갑다. 관계도, 작업도, 삶도 결국은 그런 느린 리듬에 기대어 이어진다. 누군가의 곁에 조용히 기대어 함께 자라는 방식이 이렇듯 단정할 수 있는가 싶은 마음마저 든다.
생각해보면 인간도 결국 새삼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새삼이 혼자서는 광합성을 하지 못하듯, 우리 역시 홀로 자신을 지탱할 빛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잠시 내 곁에 머물러 주는 온기, 옆에서 묵묵히 맞춰 걸어주는 한 걸음 같은 것들이 우리의 하루를 붙들어 준다.
새삼이 땅의 뿌리를 버리고 다른 줄기에 가늘고 얇은 선을 감아 생을 이어가듯, 사람도 결국 서로의 삶에 가늘게 붙들린 연결이라는 뿌리로 살아가는 존재다. 새삼의 삶은 식물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인간관계 방식에서도 겹겹이 되살아난다.
누군가를 대할 때 얼마나 자주 내 속도만 앞세웠는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상대의 호흡을 잊어버렸는지 새삼은 조용히 일깨워준다. 조금만 기다려주었다면, 잠시만 여백을 허용했다면 그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새삼의 씨앗인 토사자가 땅 속에서 십 년을 기다리듯 인간도 결국 자기를 알아줄 누군가를 기다린다.
누구보다 먼저 자라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자라기 위해 간격을 조절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누가 내게 다가오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향으로 나를 알아본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편안하다. 새삼이 좋아하는 향기로 자신의 기주식물을 알아보는 것처럼.
삶이란 결국 누구보다 먼저 자라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자라기 위해, 서로의 간격을 조절하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을 통해 새삼 알게 된다. 새삼이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기주를 놓치지 않고 가늘게 위로 뻗어가는 모습은 저녁 무렵 서로의 팔을 가볍게 붙든 노부부가 천천히 길을 걸어가는 풍경을 떠올린다. 하루 끝에 걸린 그 모습을 보면 관계라는 것도 결국 이런 가늘고도 단단한 연결 위에 다시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