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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수필

푸른 숨결에 잠기다 / 김도이

작성자유진|작성시간26.06.23|조회수28 목록 댓글 0

푸른 숨결에 잠기다

김도이

 

 

  업무에 지친 어느 오후, 무심히 올려다본 하늘이 너무 푸르러서 울컥, 가슴이 일렁였다. 어린 시절, 나의 여름은 언제나 하늘빛으로 시작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봉창 문을 넘어 쏟아져 들어오던 그 투명한 푸르름. 너무 맑아서 되레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 오던 서늘한 빛깔 속으로 나는 맥없이 빨려 들어가곤 했다. 마치 하늘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고, 나의 어린 영혼은 그 부름에 기꺼이 온몸을 적셨다.

  그 시절 나는 숨조차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매일 아침을 깨우던 가슴의 떨림, 쿵쾅거리던 심장의 고동은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으리라. 뭉게구름이 돛단배처럼 떠다니는 하늘 아래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늘은 깊고 투명한 물빛으로 말없이 나를 껴안았고, 나는 그 품 안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한 점 깃털이었다.

 

  그 하늘을 지붕 삼아 우리는 날마다 모험의 지도를 그렸다. 친구들과 논두렁을 지나 산길을 오를 때면 세상은 오직 우리만을 위해 설계된 거대한 놀이공원이었다. 푸른 벼가 초록의 파도를 일으키는 논을 지나면 거친 산자락이 시작되었고, 그곳엔 머루 열매들이 잊힌 기억처럼 손끝에 매달려 있었다. 달콤하고 시큼한 즙을 입가에 묻힌 채 우리는 개울 물소리를 이정표 삼아 걸었다.

 

  물소리가 깊어지는 윗구시밭골엔 어김없이 커다란 둠벙이 우리를 기다렸다. 너럭바위에 허물처럼 옷을 벗어 던지고 큰둠벙으로 풍덩, 풍덩 몸을 던지던 순간의 해방감이란! 차가운 물살이 발목을 간질이고, 수면 위로 흩어지는 윤슬이 별빛처럼 일렁이던 찰나들. 우리는 게처럼 옆으로 헤엄치다 숨을 참고 깊은 적막 속으로 잠수했다. 물속은 서늘한 청보랏빛이었고, 물 밖의 바위는 한낮의 해를 삼킨 듯 뜨거웠다. 그 극렬한 온도 차가 주는 쾌감에 취해 우리는 지칠 줄 모르고 물과 바위를 오갔다.

 

  “한 번 더!” 미정이의 외침과 함께 다시 다이빙! 까르르 터져 나오던 웃음소리가 산울림이 되어 돌아왔다. 그 웃음 속엔 내일의 걱정도, 어제의 후회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오직 지금이라는 찬란한 순간만이 파문처럼 번져나갈 뿐이었다.

 

  시퍼렇게 질린 입술은 이제 달아오른 바위로 돌아갈 시간이라는 신호였다. 바위 위에 배를 깔고 누우면 대지의 온기가 심장까지 전해졌다. 누군가 주변의 이끼를 살살 문질러 손톱 위에 올렸다. 햇살 아래 바스락거리며 마른 이끼가 붉은 흔적을 남기면, 손톱 끝엔 작고 붉은 채송화 한 송이가 피어났다. 그 보잘것없는 치장에도 우리는 천하를 얻은 듯 신이 났다.

 

  놀이에 취해 있다 보면 어느덧 서쪽 하늘이 발그레한 수줍음을 띠었다. 허기가 발걸음을 재촉할 무렵 도착한 집 마당에는 드럼통 위 가마솥이 김을 뿜고 있었다. 솥 안에는 감재와 북감재가 포슬포슬하게 익어가고, 불쏘시개를 삼킨 장작불은 거친 숨결처럼 일렁였다.

 

  우리는 바구니를 둘러앉아 뜨거운 감재를 이리저리 굴렸다. 델 듯한 열기에 손가락을 귓불에 갖다 대면서도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저녁이 조금씩 식어 손끝에 내려앉을 때까지, 우리는 그 구수한 기다림을 즐겼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너른 마당에 펼쳐진 덕석은 우주로 향하는 창이었다. 나란히 다닥다닥 누워 바라본 하늘에는 은하수가 터진 둑에서 흘러나온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있었다. 어둠은 깊을수록 포근했고, 별들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은근히 유혹했다. 우리는 그 밤의 바다를 유영하며 통통 별을 하나씩 건져 올렸다. 그렇게 별을 꿰어 만든 목걸이를 목에 걸고서야 긴 여름밤의 하루를 마무리지었다.

 

  그 시절, 시간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았다. 하루하루가 영겁처럼 느껴졌고, 이 푸른 여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축제 같았다. 하늘의 푸르름도, 개울의 차가움도, 별들의 반짝임도 모두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세월은 쏜살같이 흘렀다. 온몸을 채웠던 그 전율은 설렘과 뒤섞여 젊은 날을 투명하게 물들였고, 이제 그것은 희미한 떨림으로 기억 속에서만 일렁인다. 여름은 다시 오지 않았고, 어른의 시간에는 다른 계절이 찾아왔다. 많은 일이 지나갔고, 그 모든 떨림은 이제 고요한 별자리처럼 제 자리에 흩어졌다. 남은 그리움만이 빛의 기둥이 되어 솟구친다.

 

  지금도 문득, 무심히 덮쳐오는 비릿한 풀 내음이나 서늘한 바람의 숨결에 가슴 한 켠이 물결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푸르게 번진 기억의 실타래를 따라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하늘이 너무 투명해 눈물이 날 것 같던 그 시절로. 큰둠벙의 물보라 속에 몸을 던지고, 쏟아지는 별빛을 주워 담던 그 단편의 여름으로.

 

  그때의 나는 하늘의 작은 조각이었고, 물결의 일부였다. 비록 시간은 나를 멀리 데려왔지만, 나는 여전히 그 푸른 숨결 속에 잠겨 영원히 그 여름을 유영하는 꿈을 꾼다.

 

  나에게 그리움은 언제나 그날의 물빛을 닮은, 시리도록 푸른색이다.

 

ㅡ2026 글로벌경제신문 시니어신춘문예대전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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