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으로 사는 것(시8:1 마13:31–32 눅 10:33-37)
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위엄이 넘치고, 저 하늘 높은 곳까지 주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땅과 아래와 하늘과 하늘 위 끝까지 세상 모든 피조 세계가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2026년도 환경 주일인데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존하라 명하신 깊은 뜻을 깨달아 환경의 중요성을 알고 우리의 사명을 성찰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잘 보전하고 가꾸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되돌려 드리는 귀한 청지기의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이 귀한 사명을 망각하고 우리 인간 뜻대로 살아서 작금의 환경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을 마음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보다 자본을 우선시하는 배금주의가 만들어 낸 죽음의 문화를 만들어 냈고 우리와 벗하는 자연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연과 이웃으로 살며 생명의 문화를 반드시 만들어내야 하겠습니다. 이 일을 행함에 있어 예수님은 우리에게 겨자씨 비유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교회와 더 나아가 한국 교회가 녹색 희망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모든 자연 만물은 우리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지니며, 우리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피조물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이 약속을 증명하며, 모든 피조물에게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 중 대표적인 것이“....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신 요한복음 11장 25절의 말씀입니다. 또한 "20 ....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0-22)는 말씀입니다. 또한 "17 ....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는 말씀입니다.
그 외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되는 엄청난 생명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에게 있어서 생명만큼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가치는 하나님을 통해서 만이 결정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찌 인간의 판단으로 우리 인간의 생명만이 중요하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 나라와는 전혀 다르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예수님안에서 얻은 새 피조물된 은혜가 우리 인간에게서만 멈춰지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안에서 얻는 새 생명을 세상의 피조물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분과 깊은 영적 연합을 이룰 때 시작됩니다. 그 순간 성령의 강력한 역사하심으로 죄에 물들었던 옛 자아는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본질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물론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했을 때 여기서 "누구든지"는 이 위대한 변화가 혈통, 성별, 신분을 떠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모든 만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원리도 예수의 십자가 구속 사건을 통해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1절에 보면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는“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헬, 파스)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구원은 인간의 영혼을 넘어 피조물 전체를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만드는 우주적인 재창조를 말합니다. 사실 우리와 관계되어진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고, 하나님의 생명안에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지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으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새 피조물로 가득차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있는 것처럼 ‘그런즉 누구든지 그 어떤 것이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졌는데 하반절에 나온 것처럼,‘이전 것은 다 지나갔고 보라 새 것이 되어졌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실 때 생명이 있어 숨쉬고 자라는 모든 것들을 만드실 때 하신 말씀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그대로 되어진 모습을 보며 보기에 좋았더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이기주의의 빠져서 세상 모든 만물의 주인이 내가 된 것처럼 너무나도 쉽게 자연 만물을 파괴하였습니다.
현재 에베레스트 산 정상 부근은 온 갖 오물로 발 디딜틈이 없게 되었습니다. 태평양 거대 쓰레기 지대(GPGP)와 같은 해양 쓰레기 섬은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습니다.
특히 특정 면적이 매년 정확히 몇 km²씩 커진다고 보기보다는, 수년에 걸쳐 한반도의 약 7~16배 크기 약 115만~155만 km²에 달할 만큼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지난 50여년 동안 지구상에 살고 있는 야생동물과 새의 개체수가 70% 넘게 줄었다고 합니다. 애통하게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들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세상 속에서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에 발맞추어 지구 온난화와 인간의 종말의 시계 또한 생각보다 빠르게 째깍거리고 있습니다.
산업화 이전 대비 2050년까지 지구 평균온도 상승을 섭씨 1.5도 이내로 막겠다는 세계의 계획은 이미 물 건너갔습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인류는 2030년까지 2019년 대비 43%의 온실가스를 감축해야 합니다. 2050년까지는 무려 대기 온실 가스를 84%를 감축해야 합니다. 하지만, 2050년은 커녕 매년 지구 온난화가 가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후 위기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의 생존을 직간접적으로 위협합니다. 극지방에서는 해양 빙하 감소로 백곰은 물론 펭귄의 생존까지 위협합니다. 툰드라 지역에서 살던 순록이 땅이 녹고 그 속에 있는 바이러스를 인해 하루 아침에 때 죽음을 당합니다.
기후상승은 해수의 온도를 높이고 온실가스의 약 20% 이상은 해수로 들어가 바닷물을 산성화하는데, 이것으로 인해 산호초의 생존이 심각하게 위협받습니다. 양서류도, 꿀벌을 비롯한 곤충도, 심지어 희귀한 여러 식물도 살만한 곳은 줄어들고 생존 조건은 악화해서, 멸종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는 인간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식량부족, 예측 불가능한 전염병의 확산, 물부족, 기후난민 발생으로 인한 갈등과 분쟁 심화 등 일일이 나열하기 힘든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지금 세대보다 이후 세대에 더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세대 간 불평등과 갈등을 조장합니다.
어느 대안학교에서 활동하는 분이 흰코불소 파투의 기도문을 아이들이 잘 읽을 수 있게 써 놓았습니다.
하나님, 저는 암컷 흰코뿔소 파투입니다. 2018년 45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세상에 남은 북부 흰코뿔소는 엄마와 저, 둘 뿐입니다.
사람들은 코뿔소의 뿔을 얻기 위해 코뿔소를 마구 죽였습니다.
머지않아 저는 세상에 혼자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치지 않는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저의 사라짐은 우리의 사라짐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과학의 힘으로 우리의 멸절을 막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미 우리가 살아갈 곳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마저도 사람들의 욕심이 닿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저의 죽음을 멸종이라 부를 사람들의 심정이 한 죽음을 향한 안타까움에 그치지 않게 하옵소서.
그래서 저의 죽음이 자신들의 멸종과 잇닿은 우리의 멸종의 한 부분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생명의 멸종이 무분별한 개발 때문이라면 그 개발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사소한 욕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욕심을 갈무리하는 지혜를 배우게 하옵소서.
세상에 살아갈 터전을 잃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는 동물들, 그 자리에 뿌리박고 한 걸음도 도망치지 못하는 식물들, 사람의 행패와 기후의 변화로 살아갈 조건과 환경을 잃어가는 생명들을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 세상 모든 생명에게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를 몇 마디 신조로 사람의 마음 안에 욱여넣고 가두는 사람의 비행이 그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모습 그대로 회복하고 지켜나가기 위해 연대하고 행동할 수 있는 용기와 열심을 지으신 만물에 부어주옵소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며 모든 피조물을, 우리의 이웃처럼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둘째,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자세로 우리의 이웃(자연 만물)을 대해야 합니다.
센세니나(Senzenina), 우리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라는 뜻을 지닌 아프리카의 노래 제목입니다.
과거 세계교회가 모여 예배를 드릴 때 불렀던 노래입니다. 이 노래 가사에는 우리가 처한 현실을 “우리 모두가 환각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탐욕을 부추기는 상업자본의 환상이 제공하는 장밋빛에 시력을 잃고, 눈부신 풍요를 향한 과도한 욕망이, 인류사회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눈이 멀고 귀를 닫은 인류는 더 발전하면,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환각 상태 또는 집단적 광기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무질서한 애착과 탐욕에 따라 눈먼 우리들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생명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탐욕을 극대화시키는 정치, 경제, 교육, 종교 시스템을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누릴 경제적 번영이 곧 진보라는 신화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무참하게 파괴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며, 어떻게 생태적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환각 상태에서 깨어나 신음하는 피조물과 함께 아파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말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생태적 희망을 발견해야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눅10:25~37)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고 네가 어떻게 읽느냐”묻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 대답이 옳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비유 하나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강도들에게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맞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그 길을 지나가던 제사장이 그를 보았지만 그냥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그를 보고 지나쳤습니다.
얼마 후 사마리아인는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에게 달려가 상처를 치료하였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자기 나귀에 태워 주막에 들러 보살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 말씀을 통해 선택과 행동을 요청받습니다. 성도여러분! 강도를 만나 신음하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가서 이웃이 되어 주겠습니까?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보았으면서, 왜 그를 치료하지 않고 지나갔을까요?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을 지키면서 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친 사람을 돕다가 죽기라도 한다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었기에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질문을 했던 율법교사도 비슷한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비유를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라고 묻고,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응답합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간호해 주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말씀하셨듯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우리 시대의 강도 만난 자는 누구입니까? 강도 만난 자처럼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방어력도 없이 죽게 된 이들은 누구입니까? 꼼짝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죽어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올바르게 응답하기 위해서, 우리도 이웃의 개념을 모든 피조물로 확장시켜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은 사마리아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웃의 울타리를 인간종을 뛰어넘어 모든 피조물로 확장시킬 때 생태적 희망이 있습니다.
피조물을 이웃으로 대할 수 있는 성경의 가르침과 전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매 창조의 순간마다 보시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 언약은 피조물(무지개)이 하나님 앞에서 주체적인 언약 당사자임을 보여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친밀함으로 메시아 시대를 예언합니다. 시편기자는 피조세계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 공동체 임을 계속 노래합니다.
사도 요한에게 만물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광야로 가셨을 때 사탄의 유혹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막 1:13 )”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관계를 발전시킨 성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만, 성 프란시스가 들의 꽃과 이야기를 나누고 늑대와 친구가 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이웃의 범위”가 점점 더 넓은 “타자”로 확장되고, 마침내 다른 종(species)을 포함하여 만물이 하나됨을 보여줍니다.
11세기 중국의 성리학자인 장재의 서명(西銘)에 나오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서명은 서쪽 창문에 붙여두는 좌우명입니다.
“하늘은 나의 아버지이고, 땅의 나의 어머니이다.
나 같은 작은 생명체도 그 가운데서 친밀한 자리를 찾는다.
우주를 채우는 것을 나는 나의 몸으로 여기고
우주를 인도하는 것을 나는 나의 본성으로 여긴다.
모든 사람은 나의 형제 자매이고,
모든 만물은 나의 동반자이다.”
이렇게 성경과 전통에서 피조물은 단순히 물질이 아닌 우리의 이웃임을 보여줍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존재하는 만물을 부모, 형제, 벗이라는 동양의 가르침은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좀 더 나아가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라고 증언합니다.
이런 가르침에 따를 때, 우리 시대의 강도 만난 이웃은 신음하는 피조물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이웃은 파괴되는 산림, 독성 물질로 오염되는 바다, 멸종을 눈앞에 두고 있는 많은 생명종, 주거지 파괴로 인해 난민의 길을 떠나는 기후 난민들입니다.
피조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는 것이고, 우리의 이웃과 형제자매를 괴롭히며 죽이는 자해적 행위입니다.
최근 중국에서 한 낮에 초속 37미터가 되는 모래 폭풍이 일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멀쩡하던 날씨가 단 2분만에 백미터가 넘는 모래 폭풍이 밀려와 하얼빈을 덮쳤습니다.
엄청난 모래 언덕이 생기고 도심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순식간에 나타나는 엄청난 폭우 공항 비행기까지 삼기는 쓰나미, 섭씨 50도 되는 일교차 사실 내겐 아직 너무 먼 남의 일 같은 느낌이 들지만, 지구촌 곳곳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야말로 생명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지구촌이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바꿔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파괴된 환경을 보며 신음하는 피조물을 보고 그냥 지나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물음 앞에 진지하게 따르고자 하는 이들은 행함으로 생태적 희망의 길을 걸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저는 셋째,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한 두가지 제안입니다.
첫째,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와 한국교회환경연구소에서는 지난 2008년부터 창조세계의 온전성을 회복하기 위해 몽골 사막 한 가운데 직접 삼림을 조성하는 <은총의 숲>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현재 은총의 숲에는 비술나무, 포플러, 짝드, 사와, 비타민 나무 등 현지 기후와 토양에 적합한 25,000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15년간 조성된 숲이 지역 주민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는 것과 동시에 생태환경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둘째, 행동해야합니다. 그레타 툰베리는 스웨덴에서 학교파업을 이끌었고,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기후위기에 저항하여 행동하는 활동가입니다. 툰베리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 운동을 시작했고,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 Z세대들은 기후위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자신들의 미래가 지구와 연결되어 있으며 지구를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미래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툰베리는 이런 연설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2078년에 75세가 됩니다. 만약 내게 자녀가 있다면, 그들은 나와 함께 하루를 보내며 당신에게 아직 행동할 시간이 있었는데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물어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자녀의 미래를 빼앗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열린 기후지옥의 문을 닫고, 하나님이 보시기 “심히 아름다운” 지구공동체를 돌보는 일에 헌신을 해야 합니다.
시인 오스카 햄머스타인 2세가 지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에 나온 시입니다.
종은 누가 그걸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다.
노래는 누가 그걸 부르기 전에는 노래가 아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도 한쪽으로 치워 놓아선 안 된다.
사랑은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니까.
종은 울리기 전에는 단지 쇠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종소리를 낼 때 종으로 존재합니다. 아름다운 노래도 묻혀 있다면 노래가 될 수 없습니다. 노래는 부르고 연주할 때 음악이 됩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 피조세계에 대한 아무리 큰 사랑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작은 실천이라도 하지 않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생태위기 시대를 함께 걷는 그리스도인 여러분, 이 시대의 사랑은 말과 혀가 아닌 저와 여러분의 작은 손과 발로 겨자씨 하나라도 심는 생태적 전환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천국이 마치 가장 작은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실천하는 작은 환경 운동, 즉 일회용품을 줄이고, 쓰레기를 줍고, 자연을 아끼는 이 작은 행동들은 세상의 눈에 보잘것없이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씨앗이 생명을 품고 자라나면, 마침내 울창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안식할 수 있는 거대한 쉼터를 제공할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환경 보호의 실천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심는 작은 실천의 씨앗이 거대한 생명의 숲을 이루어, 신음하는 이 땅의 모든 피조물과 미래 세대가 평안히 깃들 수 있는 생명력 넘치는 안식처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창조 세계를 보전하는 일에 주저함 없이 일어나야 합니다. 환경 보호를 위한 작은 실천을 비웃는 세상을 향해 당당히 맞서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생명을 품은 겨자씨가 되십시오.
오늘 결단한 여러분의 작은 헌신이 이 땅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거룩한 큰 나무로 성장하게 될 것을 믿음으로 선포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