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4:14-21 성령의 역사로
현 시대에 대한 예측 가운데, 완전히 빗나간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1943년도에 컴퓨터가 맨 처음 나왔을 때의 일입니다. IBM 회장인 로버트 왓슨이 컴퓨터를 처음 보고, "이거는 만들어 봤자 온 세계에 다섯 대도 안 팔릴 거다." 그랬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들고 있는 스마트폰도, 컴퓨터 원리로 돌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1970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2010년도에 가면 전세계 석유 매장량이 완전히 바닥이 날 것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동차는 물론 모든 석유 제품을 만들 수도 없고 만든 것도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고 예견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땅속에선 석유가 펑펑 나올 뿐만 아니라 21세기에도 넉넉히 쓰고도 남는다고 말합니다. 물론 가 봐야 알겠죠
성도 여러분! 미래를 예측한 단어 가운데 앞으로 복합 위기의 시대(Poly-crisis)가 올 것이다. 대전환의 시대(Great Transition)가 올 것이다. 신냉전 시대 (New Cold War)가 올 것이다. 각자도생의 시대(Era of Self-Survival)가 올 것이다. 이런 말들을 합니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 사실 걱정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걱정마세요. 하나님이 도와 주십니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이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우리를 능력의 손으로 붙잡아 주시고 지켜 보호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가 되셔서 죽은 인생들을 살리시는 놀라운 역사를 베푸셨을 뿐만 아니라, 오순절 날이 이르렀을 때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잖아요. 오늘 성령 강림후 셋째 주일에 우리를 향해 선언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네게 임하셨다”(눅 4:18) 말씀하시며 죽은 영혼을 살리십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 하시면서 맨 처음 설교하신 내용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 이끌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지혜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고 하나님의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서 광야에서 금식하셨고, 하나님의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완수하셨습니다.
다시말해서 예수님의 전 생애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실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때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 할 수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때 사명의 사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악한 마귀는 우리를 시험에 빠뜨릴려고 계속 시험합니다. 우리가 마귀의 실체를 눈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시험합니다.
어떤 때는 물질로, 어떤 때는 대인관계를 통해서, 어떤 때는 사소한 일로, 어떤 때는 스트레스로, 어떤 때는 건강으로, 어떤 때는 신앙적 갈등으로, 어떤 때는 귀문이 닫히고, 마음문이 닫치고, 항상 보던 사람이 보기 싫게 느껴지기고 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시험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랬던 것 처럼 그러한 모든 시험을 물리치기 위해선,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과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어야만이 시험도 물리칠 수 있고, 성령이어야 만이 악한 세력도 물리치며, 성령이어야 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간 우리가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성령 하나님은 어떤 역사를 일으키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성령은 자유의 영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는 세상에 얽매이는 자유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맨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맨처음 이사야서를 펴 들고 회당에서 하신 말씀이 “성령이 내게 임하셨다” 그리하여 "자유케 되셨다" 였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세상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되어진 말씀이 이제 와서야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와 해방과 생명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세상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자유와 해방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과는 달라서 인간의 욕심에 얽매임이 없는 내적 자유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자유는 환경에 종속되지 않는 자유였습니다. 예수님은 거센 풍랑 속에서도 끄떡없는 자유를 가지셨습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아무리 세상 세파의 파도가 몰아치고 날 뛰어도,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평안은 하늘구름 안고 있는 잔잔한 호수와 같은 평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해도 어느 한 사람 거절치 아니하시고 그들을 보듬어 안으시고 감싸시면서 하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밤 낮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뜨거운 정오시간에 수가성의 여인을 찾으셨고 밤 늦도록 가르치는 사역과 치유의 사역과 천국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시고 편안하게 잠을 잘 주무시고, 새벽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새벽 제단 쌓으시면서 사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이 야행성이라 새벽기도 나올 때 주무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새벽제단을 쌓으면, 마음도 편하고 꿈자리도 좋고 하루 일상속에서도, 자유함을 누릴 수 있어요.
예수님의 삶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죄인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높고 높은 하늘 보좌에서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고, 이 땅에 사실 때에도 세상에서 지탄받는 자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사람 저사람 가릴 것 없이 만남의 자유함을 가지셨습니다. 죄인 세리 어린아이 여성 병자 바리새인 율법사 할 것 없이 전부 품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었지만 가난한 자도 부자도 전부 품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셨습니다.
젠슨 황이 최근 우리나라에 와서 보여준 파격적인 행보는 대단한 대중적 친밀감을 보여 줬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자유는 출세 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무한 경쟁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물질의 노예가 된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자유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유를 가장 필요한 곳부터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찾아 다녔던 사람들을 보면 전부 자유함을 찾지 못하고 죄와 허물로 얼룩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육신적으로 불쌍한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과 종교적, 윤리적으로 주변에서 밀려난 사람들에게 자유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포로된 자에게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자유입니다. 육체적인 억압속에 있는 자에게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해방입니다. 정신적인 억압 속에 있는 자에게서 가장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정신적 속박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사도바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오늘 말씀에도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이 놀라운 메시아적 선언 속에는 물질적인 속박을 끊어버리고 하나님 이외에는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위대한 자유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다면 하나님외의 다른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 두려워한다면 하나님 외에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에 보면 너무나도 강력하게 유일신 사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십계명부터해서 너무나 강력하게 나만 믿고 나만 따르라고 야훼 하나님은 모세나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에 가면 다른 신은 없다. 나 밖에 없다. 헛된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라고 말씀합니다.
한번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랐을 때 40일동안 모세가 보이지 않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신을 만들어 그것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금식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하나님이 새겨놓으신 십계명 돌판을 가지고 하나님의 산에서 내려오는데 진중에서 춤을 추며 난리가 난 것입니다.
내려가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우리를 출애굽시킨 신이라고 하며 금송아지를 섬겼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어떻게 합니까?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그 자리에서 깨뜨려 버립니다. 이미 십계명의 1, 2계명을 어겼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깨뜨려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든 황금 송아지 우상을 완전히 부수고 가루로 만들고, 태워 재를 만들어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시게 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설자는 나오라 하였을 때 레위 지파가 나왔고, 레위 지파가 모세의 명에 따라 칼로 자기 동족 백성들중에서 우상 숭배에 가담한 자들을 3000명을 죽였는데, 이 일을 다 마치고 나서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출 32:29-30절)
쉽게 말하면 레위 지파가 복을 받게 될 것인데, 레위 지파가 하나님앞에서 헌신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헌신하였다는 말은 거룩하게 하였다. 구별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만든 금송아지를 완전히 부수고 가루로 만들고, 태워 재를 만들어 물에 뿌려 마시게 하고, 우상숭배에 가담한 자들을 제거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한한 것에 얽매여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을 막기 위한 단호한 결단이었습니다.
그것을 출애굽기서에서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우상 숭배를 금했던 것은 우리의 궁극적 관심을 하나님께로만 돌림으로써 참 자유함을 누리게 하려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유일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기독교를 편협한 종교라고 비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비판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기독교는 하나님만을 섬기기 때문에 편협한 종교가 아니라, 그래서 자유로운 종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만이 최고의 참된 신이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허망한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라는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계를 돌아다녀보면 별시런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종류도 수백만 가지가 넘습니다. 이 모든 우상들은 전부다 헛된 것들입니다. 이러한 헛된 것들로부터 자유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거짓 우상을 만들고 거짓 영들을 숭상하는 일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때로는 믿는 자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무수히 부르면서도 하나님에게 매이기 보다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매여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 매이고 물질에 매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사람들은 헛된 우상을 만들고 헛된 신을 숭상하며 살고 있습니까? 탐욕과 무지와 소치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 창고에 무엇인가를 쌓아두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탐욕과 무지와 소치는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령한 지식을 마비시킵니다.
오늘 우리는 “오늘밤 내가 네 영혼을 거두어가면 네가 쌓아둔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선한 인간들은 하나님을 향유하기 위해 세상을 이용하고, 악한 인간들은 세상을 향유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을 향유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 자들은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으로 자유함을 얻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가운데 행복한 인생의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 은혜가 넘쳐 흐르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둘째, 성령은 해방의 영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4장 19절은 주의 성령이 임함으로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은혜의 해는 희년을 말합니다. 희년은 기쁨의 해입니다. 이 기쁨은 사면받은 기쁨입니다. 모든 것이 사함 받고 해방되는 기쁨입니다.
레위기서에 보면 이 희년을 전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해, 모든 사람이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는 해, 더 나아가 땅에게까지도 휴식을 선포하는 해라고 말합니다. 즉 종된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해, 빼앗은 것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해, 자연에 대한 휴식을 주는 해,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는 해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은혜의 해의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요? “죄로부터의 해방”을 말합니다.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는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깨어지자마자, 죄가 세상에 들어 왔습니다.
죄는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 부조리와 모순에 병행해서 오는 문제가 아닙니다. 죄는 모든 문제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 회복을 통해서 참된 해방을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인간은 모든 불안과 분노와 공격과 이기심과 탐욕, 억압과 착취로부터 자유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한 사람은 세상의 잘못된 가치와 질서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은 세상의 가치와 질서에 대해서 두려움 없이 저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은 자신과 이웃을 향해서 뿐만이 아니라 자연을 향해서도 새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이런 귀한 축복의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셋째, 성령은 생명의 영이십니다.
성도여러분! 성령을 받으면 새생명을 얻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성령이 오시면 죽은 것들이 살아납니다. 성령이 오시면 억눌렸던 생명이 다시 일어섭니다. 성령이 오시면 노예되었던 생명이 자유함을 얻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힘을 잃어가던 생명이 활력이 넘치는 생명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모든 짐을 지되 가장 무거운 죄의 짐까지 지신 분입니다. 여러분 죄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아십니까? 다윗은 죄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뼈가 마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죄의 짐을 한 사람 것 만 지신 것이 아닙니다. 아마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 가운데 마음의 짐이 정말 무거운 분이 계실 것입니다.
사소한 일로 벌어지는 벌어지는 마음의 짐도 무거운데, 죄로 인한 짐은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이 회개한 후에도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인류의 모든 죄의 짐까지 다 짊어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나려고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든 인생을 향하여 수고한 짐, 가장 무거운 죄 짐을 지고,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현실 도피적으로 살라 혹은 현실의 고통을 잊는 망각 속에서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 다시 말해 너희는 죄와 허물 많은 세상속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하였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 지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고, 내가 심히 번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하며, 처절한 몸부림을 치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고통 없는 삶을 구원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은 고통을 없애주는 분이 아니라, 고통속에 내려오셔서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인가? 고통을 넘어서지 못해 무너질 것 같은 인생 한가운데서 우리를 보듬아 안아주시는 평강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던 서강대 장영희 교수가 암까지 걸려 투병 생활을 하며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 이렇게 넘어지기를 수십 번, 남보다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에 좀 더 자주 넘어졌고, 그래서 어쩌면 넘어지기 전에 이미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번번이 죽을 힘 다해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나는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생명’을 생각하면 끝없이 마음이 선해지는 것을 느낀다. 행복, 성공, 사랑, 삶에서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이 단어들도 모두 생명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한낱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살아있음’의 축복을 생각하면 한없이 착해지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벅차다. 그러고 보니 내 병은 더욱 더 선한 사람으로 태어나라는 경고인지도 모른다.”
성령은 우리에게 새생명을 줍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새 힘을 줍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생기는 어려운 일을 마주보고 당당하게 맞서게 해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실패할 수 있지만, 그래도 끝까지 해보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우리가 근심거리로 가득 차 있을 때, 희망조차 소용없게 보일 때도 성령은 힘을 주십니다.
성령은 실패하면서도, 넘어지면서도 싸우게 합니다. 무슨 일을 해도 포기하지 않게 합니다.
성령님은 생명을 빈곤하게 하고, 죽이는 문화 속에서도 생명을 풍성되이 만듭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으로서 살리는 영입니다. 성령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연약한 자의 생명을 활동적이고, 약동하는 생명으로 바꾸십니다.
이렇게 교회에 성령이 충만하면 교회의 아름다운 기초들과 전통들이 활기있고 생기있게 변화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섬기는 일 속에서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고, 풍성한 보람이 있게 만드십니다.
이제 아픈 과거를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시대 상황에 맞게 변화되고 발전되시길 바랍니다. 성령의 자유와 해방과 생명이 우리 모두 가운데 충만하길 축원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힘있게 만들어 어떠한 좌절도 실패도 다 물리치고 주님의 권능 아래서 살게 만듭니다.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면 어떤 죄된 영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듭니다. 성령은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합니다.
성령은 무능력한 사도들도 능력있게 만드셨습니다. 성령받은 베드로를 보십시요! 성령받는 빌립을 보십시요! 성령받는 이성봉이나 김익두와 같은 사람들 보십시요! 신의 악단에서 주인공으로 나온 박교순이나 김태성과 같은 사람들 보십시오. 성령받은 자들은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말씀을 마치며 우리는 우리 삶속에서 항상 성령받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사야 2장 3절에 보면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성령)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했습니다.
이러한 예언의 말씀대로 보혜사 성령 강림이 우리 안에서부터 일어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1절에 보면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령 받았습니다.”
오늘 이시간 우리가 성령받기를 원합니다. 성령체험하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주워지기를 원합니다. 성령세례받기를 원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역사를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성령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도 하고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만들어 회개케 하시고 우리의 영혼에 은혜를 부어주시어 우리의 영혼이 잘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모여 성령받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시간시간 드려지는 예배가 풍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모이는 것은 약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십시요! 때로는 전혀 기도하기에 힘쓰십시요!
기도할 때 불같은 성령이 임합니다. 바람같이 시원한 성령이 임합니다. 불의 혀와 같은 것이 우리 위에 새겨져 마음이 하나되고 성령의 교통하심과 임재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주의 영이 충만해야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충만해야 주를 위한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를 위한 핍박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이 재미로써 끝나지 않고 충만한 주의 사랑과 은혜로써 새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13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은 또한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14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벧전 4:12-14/새번역)
능력이 있어야 영광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어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저도 성령의 능력안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늘로부터 내려주시는 주의 은혜를 공급받는 자로써, 무엇이 부족하며 무엇이 연약하겠습니까?
오늘 이 성령강림절 셋째 주일에 전부다 성령받읍시다. 성령 충만합시다. 그런 믿음을 가집시다.
“나와 언제나 함께 하신 성령님이 나를 언제나 붙들어 주신다. 성령님이 나를 언제나 새롭게 해 주신다. 성령님이 나를 생명력있게 해 주신다. 영광의 은혜로 가득채우신다. 능력있게 해 주신다. 할렐루야!”
이런 은혜로 가득하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로 충만하게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