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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설교

2026 625 민족화해주일 찬양대 헌신예배

작성자평화의 강가|작성시간26.06.23|조회수39 목록 댓글 0

 

잃어버린 우리 다시 하나 되어 (요한복음 14:4-20)

 

오늘은 6.25민족화해의 주일입니다. 6.25 전쟁은 1950625일 새벽 4시경 북한이 암호명 '폭풍 224'라는 계획에 따라 한반도의 전역을 선전포고 없이 기습 남침하여 발발한 전쟁입니다.

 

19537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될때까지 31개월 하고 3일간 이어진 전쟁은 수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는 물론 그야말로 동족 상잔의 비극이 있었어요. 지금도 그 아픔이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이 피해가 컷던 것은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간의 대리전 양상을 띤 국제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6.25 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자 이 땅에서 UN 연합군과 공산 연합군이 맞붙은 참혹한 국제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쟁이 멈춘 지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분열과 대립은 한 민족을 둘로 갈랐고, 서로를 향한 적대감을 키웠습니다.

 

우리 민족은 남북이 하나였다는 사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본래 한 피를 나눈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언어, 문화, 생활도 이질적인 남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 있어요.

 

특히 젊은 세대로 갈수록 북한은 같은 민족이 아닌 그저 위험한 국가로 인식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마저도, 최근 북한이 보여주는 무관심과 적대감을 학습하며 혈육의 정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저는 이 시대가 헤밍웨이가 말한 것처럼 잃어버린 세대가 된 것 같아요. 헤밍웨이가 로스트 제너레이션 잃어버린 세대라고 말한 것은, 사람들이 1차 세계대전이후 그전의 도덕적 가치, 명예, 애국심, 낭만적 이상이 거짓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로 보면 코로나 이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 영역을 ai가 차지하고 나서,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하고, 결국 길과 진리와 생명까지도 잃어버린 가운데 헤메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의 특성이 뭐냐면 심리학자 나폴레온 힐(Napoleon Hill)의 견해에 따르면, 일곱가지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경제적 불안입니다. 둘째는 실패에 대한 불안입니다. 세 번째로는 질병, 건강에 대한 불안입니다. 네 번째로는 사랑에 대한 불안입니다. 다섯번째는 노쇠에 대한 불안입니다. 여섯째는 자유에 대한 불안입니다. 일곱 번째는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이런 일곱가지 것에 대해 불안해 떨면서, 완전히 바닦이 드러난 상태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첫째, 참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좋은 부모가 되는 길, 좋은 남편이 되는 길, 좋은 아내가 되는 길, 좋은 자녀가 되는 길, 이것 뿐 만이 아닙니다. 행복해지는 방법, 사랑하며 사는 방법, 나를 찾는 방법, 대화하는 방법, 더 나아가 좋은 성도가 되는 방법, 좋은 직분자가 되는 방법을 잃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서점에 가서 무엇하는 길’, ‘무엇하는 방법에 대한 책들을 찾아보십시오. 아마도 수백 권의 책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주제의 책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진정한 에 목말라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듯 우리네 인생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내가 가는 길이, 내가 걷는 길이, 과연 진짜 제대로 된 길인가?’라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져 있습니다.

 

제주 올레길을 일궈낸 서명숙 이사장이 생전에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23년간 기자로 살던 그녀는 번 아웃 탈진 상태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됩니다. 그곳에서 한 영국인 여성을 만나게 되는 데, 그 여성은 무한 경쟁과 아파트 숲에 갇힌 한국을 안타까워하며 "너희 나라야말로 이런 길이 필요하지 않겠니? 어서 네 나라로 돌아가 니가 직접 길을 만들어 보렴"

 

이 말은 거부할 수 없는 소명이 됐고, 그 이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 제주도에 가 수십년간 일궈놓은 제주 올레길에서 수많은 이가 이 길을 걸으며 평화와 위로를 얻고 있습니다.

 

정호승의 시 '봄길'을 보면,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은 바로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멈춰 선 사망의 끝자락에서, 영원한 생명 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엉클어진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과 잇는 유일한 가교가 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담을 쌓는 삶과 길을 여는 삶으로 나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 기꺼이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 역시 이제는 누군가에게 살길을 내어주는 소명자로 살아야 합니다. 갈길을 열어주는 소명자로 살아야 합니다. 누군가의 길이 되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예수의 사랑의 길을 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참된 진리를 잃어 버렸습니다.

독일의 사진 작가 보리스 엘다크젠이 2023년 전기공이라는 사진을 출품했는데, 소니 크리에이티브 부문에서 1위 최고상을 받았습니다. 수십 년간의 경력을 가진 사진 전문가들이 전기공이라는 작품을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했는 데, 스스로 상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이 사진은 내가 찍은 것이 아니라 AI가 만든 가짜 사진입니다"라고 폭로하며 스스로 상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 시대가 가짜 사진을 걸러낼 준비가 되었는지 시험하기 위해 출품했다며, 경고장을 냈습니다.

 

오래전 중국에 갔을 때 가이드 인도로 갔는데 짝퉁 매장에 갔습니다. 얼마나 큰 매장인지 몰라요. 그곳에 가면 진짜와 얼마나 유사한지를 구별하여, A급 짝퉁, B급 짝퉁, 짝퉁 축에도 못 끼는 진짜 짝퉁 요상한 신조어까지 등장했어요.

 

우리 나라에서도 아빠 찬스, 위장 전입이라는 말이 일상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네 인생은 내가 가지고 있고 내가 아는 것이 정말 진리일까?”라는 고민으로 불안해 떨고 있습니다. 화폐도 위조화폐 가상화폐가 있습니다. 부동산도 가상부동산이 있어요. 그래서 사기꾼이 판을 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길은 우리 내면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상 화면, 가상 게임보다는 내 속에 진짜인 나의 모습에 더욱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굉장한 의미를 줍니다.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22:17)

가짜로 인하여 목말라 하는 시대속에서 참 생명수 되시는 예수님안에서, 새 힘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셋째, 참된 생명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참된 생명력이란 단지 호흡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정신적, 육체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가치있는 삶을 의미합니다.

 

현대인들은 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생명력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 가운데는 내가 정말 건강하게 살고 있는 걸까? 내가 해야할 일들은 하지 않고, 그져 바쁘게만 지내는 것은 아닐까라고 하는 삶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아요.

 

미국 뉴욕에서 발행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 가이드 포스트, 코스모 폴리탄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아서 고든도 이런 고민에 빠졌습니다. 결국은 글을 써야 하는 것에 대한 심한 스크레스까지 겹쳐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자신은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결국 친한 의사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의사인 친구는 아서 고든을 보더니 "자네,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인가?" 라고 물었습니다.

아서 고든은 바닷가에 가서 파도소리, 갈매기 소리를 듣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바쁘게 지내는 분들은 이분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게 됩니다. 사실은 저도 이해가 됩니다.

 

의사 친구는 아서 고든에게 말합니다. “내가 처방을 적어 줄테니, 꼭 내말대로 하게나...” 순서대로 말일세!

내가 적어준 처방을 오전 아홉시, 그리고 정오, 그리고 오후 세시, 오후 여섯시에, 꼭 시간을 맞추어 읽어보고, 처방에 적힌 대로 하게나

 

아서 고든은 처방이 적힌 쪽지를 받아들고, 그 다음날 오전 아홉시에 첫 번째, 처방지를 펼쳤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있었습니다.

"자네가 좋아하는 파도소리 갈매기 소리를 들으러 바닷가에 가게나... "

 

그는 바닷가로 갔습니다. 정오가 되자, 바닷가에서 그는 두번째 종이를 읽었습니다. "자네가 사는 동안에 행복했던 때를 기억해 보게나"

 

그는 지난 날을 회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행복했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리고는 인생이 그리 슬픈 것만은 아님을 깨닫습니다.

오후 세시가 되자 그는 세번째 처방전을 읽습니다. "자네.... 인생의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나..."

 

아서 고든은 모래 밭에 앉아 인생의 의미와 동기를 생각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을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 왜 저를 이 땅 가운데 보내셨습니까? 무엇인가 내가 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여섯시가 되자 그는 마지막으로 네 번째 쪽지를 폈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제 자네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할 시간이네 그러면 자네 병이 나을 걸세. 자네의 죄를 모두 모래사장에 쓰게나"

 

그는 모래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제 욕망과 출세를 위해 살았습니다. 하나님! 저는 저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하나님 제 생각대로 평생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는 혼자입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구원에 대한 희망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울면서 글을 써내려 갔습니다.

그리고 모래 사장에 일일이 기록했습니다.(, 허물, 상처입은 것, 죄된 것들)

 

그런데 밀물이 들어오면서 파도가 밀려오면서, 그 글씨가 하나씩 지워지기 시작합니다. 밀물과 파도가 그 모든 죄악을 지웁니다. 그 때, 아서 고든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파도가 내 모든 죄악을 쓸어 가듯이, 하나님께서 내 모든 죄악을 다 씻어 주셨구나!”

 

내가 예수님께 이렇게 소중한 사람이었구나, 내 죄를 다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못밖혀 죽으시다니, 그는 돌아서는 순간 다시한번 파도소리 갈매기 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로 들립니다. 그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저도 이번 울등도 독도를 다녀오며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참으로 아름답게 만드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중국 장가게 천문산 만을 생각했지 우리나라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어요. 그리고 언젠가 고성 앞바다에서 보았던 짙은 에메랄드 바닷물 색깔을 이번에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야말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속에서 힐링을 하였습니다.

가이드가 그래요 제발 멀미약 먹지 말라고 올해 이렇게 파도가 없는 날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제가 생각할 때 독도에 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 기도 제목을 가지고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하고자 하니, 이렇게 좋은 날씨를 주셨구나 생각했어요.

어떤 목사님은 차를 운전해야 하는데, 출발 직전에 권사님이 돌아가셨다고 연락와서 못간다고 했는데, 조금 있다가 또 연락이 왔는데 권사님이 살아나셨다고 해서 차를 운전하고 잘 다녀왔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 만나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야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야 행복해 집니다. 예수님 만나야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야 진정 아름다운 믿음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잠언서에 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내 아들아(딸아)”라는 말입니다. 잠언서를 보면, “내 아들아!” 부르면서 권면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참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마르틴 루터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된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열망하시는 자애로운 분이시다. 그런데 참된 지혜는 그런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호세아 66절에서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 경외와 함께,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님을 잘 알고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없는 제사보다 인자와 사랑을 원하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태워드리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첫 사람인 아담부터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216절과 17절에서 아담에게 분명히 명하셨습니다.

“16 ....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처음으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 즉,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은 것에 대한 최초의 지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너무나 쉽게 그 지식을 버렸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참된 낙원으로 가는 길을 잃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는 소통의 진리를 잃었으며,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의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모든 것이 풍부한 에덴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에 못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단지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우리의 현실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재 이 시간에도 또 다른 아담과 하와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의지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운명과 현실은, 더욱더 철저히 파괴되고, 무너지고, 부서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넷째, 우리는 잃어버린 참된 길, 참된 진리, 참된 생명을 찾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5 ....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14:5) 라는 도마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예수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여타의 종교적 진리들과는 다른 대답을 하십니다. 어떤 종교는 참된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을 얻으려면 스스로 고행의 삶을 살라며 고행의 길을 가르쳐 줍니다. 어떤 종교는 자신들이 믿는 경전을 따르며 그것을 지치는 것이 그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참된 길을 찾아 헤매지 말라! 내가 곧 그 길이다. 참된 진리를 알려고 머리를 싸매지 말라! 내가 곧 그 진리다. 참된 생명을 얻으려고 시간과 재산을 탕진하지 말라! 내가 곧 그 생명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네비게이션처럼 길만 가르쳐 주시는 분도 아니요, 여타 다른 종교 지도자들처럼 단지 진리를 전해 주는 사람도 아닙니다.

 

생명과학자 처럼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에고 에이미의 선언으로 멈추지 않습니다. 내가 길과 진리와 생명이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습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14:23)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의 최종 목표는, 영원한 코이노이아라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믿음의 길을 걷는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거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길은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과 하나가 될까요 아니 어떻게 주님 예비하신 곳으로 갈 수 있을까요? 간단해요. 주님의 초대에 아멘하고 응하면 됩니다.

 

마태복음 1128: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누가복음 1417: "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

요한복음 737: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사야 551: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를 받아드리고 아멘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것만이 예수님과 하나되는 유일무이한 수단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라는 생명의 참포도나무에 접붙이는 가장 중요한 접착제는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통해 예수님께 접붙여지는 인생은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참된 길을 찾게 되므로, 그것을 통해 생각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참된 길을 몰라 갈팡질팡했던 생각들을 모두 정리하고, 가치있고 긍정적인 생각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만나게 되면, 예수님이 주시는 생각속에서 꿈과 소망을 품게 됩니다.

 

예레미야 2911: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우리의 생각은 이만하면 됐다. 더 이상 안된다. 이런 생각들을 많이 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인간적인 생각을, 먼저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는 일부터 하셨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아브라함, 야곱, 모세, 히스기야, 여호사밧 왕도 하나님의 생각을 가질 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도 이에 해당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생각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우리의 사상이 바뀌고,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소망과 꿈을 가진 인생은, 다시금 자신의 생각과 꿈을 향한 큰 믿음으로 무장되어 지고, 그것을 반복해서 입술로 고백하므로 실현시키는 능력을 발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왜 신앙생활 할까요? 믿음의 여정이 무엇일까요? 사실은 잃어버린 나를 되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너 때문에 나를 못찾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특히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너 때문에라는 생각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식 때문에 아내 때문에 남편 때문에 저 사람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이런 모습은 정말 안타까운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요?

가인이 하나밖에 없는 형제 아벨을 죽이고 뭐라고 합니까? "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4:9)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가인에 말에 얼마나 무서운 생각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 말처럼 우리는 정말 표현 할 수 없는 죄악된 모습으로 꽉 차 있습니다. 로스트 제너레이션 잃어버린 세대가 된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세대에 형제 관계속에서 방성대곡한 요셉의 모습이 없으면 구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구원이 없어요. 왜 구원을 잃어버렸어요. 가인과 같이 되었으니까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이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만났을 때, 요셉은 원망 대신 핏줄의 이끌림으로 크게 울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북녘 땅의 형제들을 향한 복음적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생활에서도 형제 자매를 함부로 대하고 구덩이에 멀어 넣은 것이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요셉은 형들을 멀리 밀어내지 않고 가까이 부르며, 자신을 당신들의 아우라고 밝힙니다. 그렇습니다. 단절된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출발점은 우리가 한 피를 나눈 형제임을 다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픔의 과거를 하나님의 생명 구원 역사로 해석했습니다. 우리는 분단의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이 이 민족을 하나로 묶어두신 요셉과 같은 눈물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은 아주 오래전 참된 길, 참된 진리, 참된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찾으려고 세상적인 온갖 노력들을 경주했습니다. 그러다가 대다수의 사람은 지쳐서 포기했고, 어떤 사람은 거짓된 길로, 어떤 사람은 거짓된 진리로, 어떤 사람은 거짓된 생명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 그것들을 찾으려고 헤매서는 안 됩니다. 잃어버린 원인은 우리가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분이 곧 참된 길입니다. 그분은 참된 진리입니다. 그분은 참된 생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된 길을 찾고, 참된 진리를 알며, 참된 생명을 얻은 자는 그 순간부터 인생이 바뀝니다. 소망을 품게 되며, 그분의 모습을 통해 말과 행실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의 문 앞에서 노크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 잃어버린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부활과 생명되신 예수님께 찾은 바 된 사람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남과 북 민족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예수님께 찾은 바 된 사람으로서, 우리가 하나 된 모습으로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귀한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역대하 20장 강해

 

우리가 역대하 19장에서 여호사밧이 하나님 보시기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20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평화를 주실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의 나라를 외국 연합군의 침공이라는 커다란 곤경에 놓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에게 두려움과 절망이 밀려왔습니다. 그 때 여호사밧은 어떻게 했는가를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나아가 간구했습니다.(3-7)

적군의 침공에 대한 보고를 들은 여호사밧은 두려움 가운데서 여호와께 낯을 향하여 간구하였습니다. 여호사밧이 위기 중에 한 첫 번째 일은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대 연합군이 물밀 듯이 침공하므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사밧은 문제와 위기를 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3). 성도들은 환난 날에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편 4211절에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2:11)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4031절에 보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40:31)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환난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환난의 파도가 밀려올 때, 먼저 할 일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환난을 큰 문제로 보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는, 지금 우리가 당면한 어려움보다는 하나님이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하나님은 그 환난을 통해서, 더 좋은 길 더 크신 은혜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심한 환난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팔려 갔습니다. 노예가 되었습니다. 감옥에 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를 시험에 들게 하는 문제나 사람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 환난의 크기보다 더한 은혜의 복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환난을 만나거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이 환난을 통해서 어떤 복과 은혜를 주시렵니까?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해 보십시오. 그 믿음의 그릇 크기만큼 반드시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환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심각한 문제로 바라보지 마십시요! 오직 하나님께로 낮을 향하고 그만 의지하십시요! 그러면 여호사밧을 도우셨던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문제도 능히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여호사밧은 백성들에게 금식을 공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왕의 모범을 따라 백성들도 모여 기도했습니다.(4)

 

그러면 여호사밧은 어떻게 기도하였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고 기도하였습니다.(6) 그는 과거에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그 어느 대적도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였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였습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였습니다.(7) 전쟁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깨닫고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이 있음을 바라보았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였습니다.(8,9절 대하 6:22-39) 여호사밧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오늘 12절 하반절에 보면,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사밧에게 응답이 왔습니다.

그 내용이 14절부터 19절까지 나오는 데, 그 중에 15절 하반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전쟁을 맡아 주관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여호사밧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낯을 향하여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중가운데에 레위사람 야하시엘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게 하셨습니다.

아하시엘을 통해 승리에 대한 확신을 주시며 용기를 주시며 방향도 제시해 주셨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격려까지 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믿음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일을 서서 지켜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일단 맡기고 맡긴 것은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찬양대원들이 출전했습니다.(16-20)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모압과 암몬, 마온 세 나라의 연합군이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유다 나라에 쳐들어왔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여호사밧 왕이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고 공포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야하시엘을 통해 구체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오늘 16절과 17절입니다.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16,17)고 말합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이 출정하는 데, 칼이나 방패나 창으로 무장하지 않았습니다. 찬양하는 사람들이 큰소리로 찬양했습니다.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19)

 

이와 같은 말씀은 칼이나 창이나 방패로 무장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무기로 싸우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싸우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흔들리는 군사는 싸움에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견고한 군사는 싸움에서 이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의 마음이 견고할 수 있을까요? 오늘 20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맡겨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한 가지를 맡기면, 한 가지를 맡아 주시지만 모든 것을 맡기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맡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면 전폭적으로 견고해지지만 부분적으로 신뢰하면 부분적인 견고함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여호사밧과 유다 민족의 무기는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기도였고 감사 찬송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기도와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 찬양하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21)

 

21절에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노래하는 자는 오늘의 찬양대원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예복을 입었다는 것은 제사장이 예복을 입듯이 왕이 왕복을 입듯이 찬양대원들이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예복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전쟁터에 나가면서 군복을 입은 것이 아닙니다. 총칼을 든 것이 아닙니다. 성가복을 입고 찬양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 하나님께서 복병을 두어 그들을 이겼고 나중에는 적군끼리 서로 죽이는 대 살육전이 벌어졌다고 했습니다.

 

오늘 22절에 보면,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22)

 

이렇게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어려워도 찬송하면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승리하게 해 주십니다. 다윗은 이 진리를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찬양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찬양하는 4000명을 두었습니다.(대상 23:5)

역대상 257절에는, “그들과 모든 형제 곧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효가 이백팔십팔 명이라고 했습니다. 288명의 찬양대원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역대하 512절에 보면 솔로몬 찬양대 중에 나팔수가 120명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찬송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22:3)

찬송하면 생각지 못했던 기적과 은총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넷째 날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고 했습니다.

그곳은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브라가 골짜기의 뜻은 축복의 골짜기혹은 찬송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오늘 성도님의 처소와 삶의 중심이 이러한 브라가 골짜기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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