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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1

[스크랩] 양귀자 장편소설 천년의 사랑(상)

작성자김성규|작성시간09.11.05|조회수667 목록 댓글 0

 

 

 

      양귀자 장편소설 천년의 사랑(상)


    작가의 말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지만, 그 해 겨울의 얼마간 나를 꼼짝 못하게 눕혀
놓았던 한 종합병원의 서쪽 병실을 나는 지금도 종종 떠올린다. 흰 시트의 철제
침대가 있었고, 긴 의자가 하나 있었으며, 그리고 넓은 창이 있었던 그
병실에서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깨어 있을 때, 나는 주로 창 밖 풍경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늘 그랬듯이
그곳에서도 나는 하늘과 나무와 구름이 보이는 창의 윗부분보다 사람들이 담겨
있는 창 아래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 내 시선이 닿는
곳에 영안실이 있었다.
  영안실 앞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나 5층의 내병실에선 소리는
잡히지 않았으므로 그곳 풍경은 내게 무성영화의 장면들처럼 매우 의미심장하게
보여졌다. 나는 창문에 코를 박고 끊임없이 열리고 닫히는 영안실의 회색문과
그 앞에서 서성이는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을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내내 고요하기만 하던 옆 병실의 할머니가 숨을 거두었다.
밤새도록 복도가 술렁이더니 오후에 약을 들고 온 간호사가 할머니의 임종을
알려주었다. 창 밖을 내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밤과 아침 동안 복도에서 보았던
가족들이 영안실 앞에 고스란히 모여 있었다. 내가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동안
간호사가 중얼거렸다. 환자들은 영안실이 내려다보이는 서쪽 병실을
싫어한다고. 동쪽 병실이 비면 옮겨 달라는 환자가 많다고.
  할머니가 영안실로 옮겨진 직후 옆 병실에 새 환자가 들어왔다. 저녁 식사가
날라져 왔을 때 나는 옆방에서 들려 오는 식기 부딪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숟가락을 쟁반에 내려놓는 소리, 침대의 스프링이 튕기는 소리, 웅얼거리는
낮은 목소리들을 가려 들으며 나는 잠시 멍하니 내 몫의 저녁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몇 시간전에 한 생명이 질긴 삶의 줄을 놓아 버리고 하늘로 가버린 그
침대 위에서 또 다른 목숨이 삶을 연명하기 위해 밥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죽음과 밥과 삶.
  살고 죽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연결인가 깨닫고
나는 내가 통과한 약간의 호들갑을 부끄러워 했다.호들갑을 떨지 않고 살기는
그러나,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그러고도 한참 동안이나 식어가는 내 밥과 국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때 내가 거기에 있었던 것은 단순히 병원체가 일으킨 반란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는 의사가 처방해 주는 대로 묵묵히 주사를 맞고 약을 복용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늘 이게 아니야 라고 웅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혹독하게 상처입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해 초겨울 나는 첫 장편 (희망)을 출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독자들이
내미는 뜨거운 손, 독자들이 보여준 눈물, 독자들이 보내올 어떤 목소리를 나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마지막 기운 한 점까지 다
바친 소설이었고 이제 이 이상의 신명은 기대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까지
덧붙여서 쓴 소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희미한 여운 밖에
없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그 소설을 읽었다.. 나는 그 소수의 사람들에겐
형제애를 느꼈고 나머지 사람들한테는 상처를 입혔다. 나는 세속적인 어떤 것을
욕망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내가 원한 것은 다만 (희망)으로 연결되는
동시대인들의 벅찬 연대감, 오직 그것 하나 뿐이었는데.
  기다림은 상처가 되었고 그 상처는 기어코 나를 쓰러뜨렸다. 처음에는
중환자실에서, 나중에는 영안실이 보이는 서쪽 병실에서 나는 (희망)을 잊어야
새로운 희망을 만난다고 나를 달랬다. 그러나 나는 쉽게 달래지지 않았다.
그랬으므로 당연히 회복은 더디었고 퇴원 후에도 오랫동안 몸을 추스리지
못했다.
  이 소설은 영안실이 보이는 그 병실에서 구상되었고 첫 문장이 쓰여졌다.
영안실 앞의 그 많은 사람들과 또 영안실 안의 숱한 죽음들을 바라보던 내 머리
속으로 저절로 한 소설의 줄거리가 떠올랐다. (희망)을 쓰기전이었다면 밀쳐
버렸을 이야기였지만, 그러나 그때 이미 나는 좀더 다른 곳에서 소설을
바라보기 시작했으므로 아무도 나를 말릴 수 없었다.
  그러나 곧바로 그 원고를 책으로 묶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시간이 필요하다,
고 나는 서랍 속에 잠겨있는 원고 뭉치를 보며 사람에게 타이르곤 했다. 그리고
거의 5년이란 시간을 보내고서야 나는 이 소설을 다시 고쳐 쓰기 시작했다.
  이미 오래된 증상이지만, 소설을 생각하면 나는 늘 무언가 갑갑했다.
벗어나고 싶었다. 머리를 옥죄고 있는 틀 하나만 벗겨내면 훨씬 다르게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고 그리하여 이 갑갑함에서 빠져나갈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곤
했다. 이 소설을 글쓰기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 하나가 제 손으로 평생 지니고
살던 머리 속 무거운 틀 하나를 벗겨낸 흔적이다.
  그랬더니 참, 많이 숨쉬기가 편해졌다.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도 나처럼 숨쉬기가 편해졌으면 좋겠다. 갇혀있는
사람들, 한계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한테 혹시 산소를 공급하는
구멍이 되지 않을까, 하고 말한다면 변명으로 들릴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변명도 알고보면 모두 진실인 것을.
  1995년 여름
    양귀자

 

 

      I 지금 사랑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 그녀를 말해야 하는 이유


 
지금, 나는 한 여자에 대해 말하려 한다.
  뭇 사람들은 별 수고없이도 누리는 하찮은 행복한테조차 한 번도 이름을
불리워 보지 못했던 여자, 하지만 모든 이들은 한사코 피해 가는 그 많고많은
불행에게는 빠짐없이 호명 당해봐서 누구보다도 절망에는 익숙했던 한 여자에
대해 나는 지금 말하고자 한다.
  아니다. 그렇지않다.
  그렇게 말해버리고 나니 처음부터 그 여자를 잘못 설명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솟구쳐 그만 종이를 구기고 싶어진다. 비록 그러했지만 결코 그것이 생의
전부는 아니었던 한 여자, 라고 첨언하면 좀 나을까...
  나는 그 여자의 눈물을 기록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잦은 눈물과 대책없는
한숨과 감당못할 불행으로 얼룩져 있는 삶만이 그 여자의 전부였다면 나는 이
글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 여자 삶의 표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여자가 살아야 할 진짜 생은 다음 페이지에 있었다.
  나는 그녀의 진짜 생애에 끼어들기로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운명이 내게 준
약속이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그 여자도 이 약속을 인정했었다. 이것이야말로
다른 누구가 아닌 바로 내가 그녀를 말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나를 채근해 댄
강력한 배후였다.
  그렇지만 나의 망설임은 길었다. 나는 거의 5년 동안이나 주저했다. 그녀를
표현하고 싶었지만 나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지레 포기하기도 했다. 그
사이 몇번인가는 책상 앞에 앉아 첫 문장을 써보려 시도해본 적도 있기는
했었다. 깊은 산 속의 정적과 동그란 원으로 비춰주는 정다운 등불, 그리고
한없는 그리움까지 다 준비되어 있었지만 내 펜은 하염없이 허공만 맴돌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깨닫는다. 한없는 그리움이 바로 문제였다고. 그리움이
너무 많으면 마음이 범람한다. 간신히 막아두었던 그리움의 뚝이 무너져 내리면
해야할 말들은 길을 잃고 떠내려 가버리는 것이었다. 홍수난 마음으로 무엇을
적으랴. 내가 이 기록을 진행시키지 못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5년이 지났다. 그녀가 떠난 후 다섯 번의 겨울을 보내고서야 내 눈은
겨우 봄을 알아 보았다. 그 동안은 봄이건 여름이건 내게는 모두 추운 겨울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알게 되었다. 이제는 마음의 제방을 무너뜨리지 않고도
그리움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음을. 그런때가 왔음을.
  그리고 하나 더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내가 꼭 그녀를 말해야 할 이유가
아무리 긴추리고 또 간추려도 여전히 세가지씩이나 된다는 것을.
  그랬다. 내게는 반드시 그녀를 기록해야 할 이유가 세가지나 있었다.
사사로운 감정까지 덧붙이면 백 까지, 천 가지라도 댈 수가 있지만 다
지워버리려 애써도 애써도 결코 지울 수 없는 이유가 셋이나 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지울 수 없었던 그 세가지 이유를 적는 것으로 이 기록의
시작을 감당하려 한다. 스물 여덟 해를 살았지만, 스물 여덟 해를 스물 여덟 번
살았던 것보다 더 깊고 넓은 흔적을 나에게 남겨놓았던 그 사람에 대해서.

    -- 먼저 사랑이 있었다
  첫번째 이유를 말하기 위해 나는 종이 위에 '사랑'이라고 적어본다. 그리고
지운다. 한참동안 종이에 의미없는 점만 찍다가 결국 나는 다시 '사랑'이라고
쓴다. 그것 이외 다른 표현이 없다. 이제와서는 울림도 없는 금 간 종소리 같은
말, '사랑'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써본다.
  이제 막 나는 사랑을 금 간 종소리처럼 울림도 없는 말, 이라고 함부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이면에는 나와 그녀의 사랑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나의
부르짖음이 담겨있다. 부르짖음일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사람들한테는 다
자신들의 사랑만큼은 통속이 아니라는 자부심이 있는 까닭이다. 내 사랑은 그
자부심까지도 넘어버리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 성하상이란 사람을 설명하는 것으로 자칫 길고
장황해질 설명을 압축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 삶의 모양이 보통의 삶과
다르다는 사실부터 먼저 밝히면 이야기가 아주 간단해진다.
  나는 스물 다섯 살까지는 아주 평범한 젊은이였다. 그 나이가 되기까지
보통의 사람들이 거쳐오는 과정을 나 역시도 충실하게 밟았다. 부모와 형제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 대학생이 되었고, 법관이 되겠다는 야망도 품어 보았으며,
가끔씩은 적어도 시시하게 살지는 않겠다며 모험도 꿈꿔보는 그런 젊은이였다.
  그러나 스물 다섯 살의 어느날 내 앞의 한 스승이 나타났다. 나는 그를
통해서 삶의 뒷페이지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변화되었다. 변화되었으므로 나는
이제 예전처럼 살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결국 스승을 따라 현실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의 처음은 이제까지 내가
배우고 익혔던 세상의 모든 지식에 가위표를 치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스물 다섯 살 이후의 내 삶과 공부에 대해서는 기록이 진행되면서 보다
소상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녀를 진술하기 위해선 어차피 나라는 사람 또한
가끔 언급되어져야만 하므로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만
이렇게만 말할 생각이다. 내가 했던 공부는 우주로 통하는 큰 생명을 얻어 그
생명 기운을 세상으로 전파하는 큰 사람을 만드는 공부라고.
  깊은 수련을 쌓아서 우주의 큰 기운을 세상 쪽으로 흘려 보내는 경지에 이른
도인을 우리 수행자들 사이에선 '큰사람'이라고 불리웠다. 처음 나는 그들이
깊은 산 속에 틀어박혀 평생에 걸쳐 명상에 잠겨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아해 했었다. 깨달음이 제 아무리 커도 그것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득도라면, 그 깨달음이 세상과 차단되어 한 사람만의 것으로 그친다면 현실의
빵 한조각보다 더 쓸모없지 않느냐는 내 의문은 젊은이로서는 응당 품을 만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이 의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큰사람들의 수행은 이미 자신을
초월하고, 삶을 뛰어넘어, 이 지구를 위한 것이었다. 우주의 힘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미욱한 인간세상의 사람들을 위해 그들은 기꺼이 우주와의 통로가
되길 자청한 것이었다. 그들이 나누어주는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한다면, 어쩌면
이 지구의 파멸까지도 각오해야 할지도 몰랐다. 우리의 목숨은 숨어서 고행하는
그들에게 많은 부분 빚져 있는 것이었다.
  큰사람의 길을 인정하는 것은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명분없이는
분발할 수 없는 나 같은 젊음한테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나는 비로소
갈등없이 스승의 가르침을 좇을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점점 더 나는 세상과
멀어졌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법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나는 큰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날 나에게 사랑이 닥쳐왔다.
  내게 닥쳐온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내가 사랑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사랑이 나를 선택했다. 도저히 그 사랑을 피할 수가
없었다. 나에겐 다른 선택이 없었다. 오직 그 사랑 하나 뿐이었다.
  다르게 설명할 수는 없을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먼저 대상이 나타나고 그 다음에 사랑의 마음이
쌓이는 것이 세상의 사랑이라면, 나의 사랑은 특별했다. 먼저 알지 못할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부터 쌓였고 그 다음 사랑해야 할 상대가 나타났다.
그리곤 시작과 처음이 자로 잰듯 여일한 간절한 사랑이 재게 시작되었다.
속력을 줄일 수도, 제동을 걸 수도, 그만 멈춰버릴 수도 없는 격렬한 사랑의
마음이 나를 두들겨 댔다.
  그 사랑은 예정된 것이었다. 아주 먼 시간 저편에서부터 결정되어진 특별한
사랑이었다. 그것은 지금의 나, 백년 전의 나, 천년 전의 나,겹겹의 세월 속의
내가 포개져서 발현된 영혼의 사랑이었다. 나는 그 영혼의 사랑을 경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사랑은 기록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경험한 영혼의
사랑, 이 특별한 사랑을 기록하는 것은 살아있는 나의 피할 수 없는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을 아무리 해도 지울 수 없어서 그것이 이 기록의 첫번째
이유가 되었다.

    -- 들어줄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관한 기록이 있어야만 하는 두번째 이유는 아주 절실하다.
  절실하다, 라고 쓰면서 나는 지금 잠시 할말을 잊는 다. 펜도 멈칫거린다.
그녀를 왜곡해 버리면 쓰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나는 근심하기도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말해버리고 나면 말해버린 만큼만 남고 그림자의 질감은 사라지는
법이다. 진실은 어쩌면 말해지지 않은 그 그림자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럼에도 나는 두번째 이유를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스물 여덟
생애가 어떠했는지를 들려줘야 할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아니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그녀에 대해 묻고 또 물을 까만 눈의 생명이
지금 내 곁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누군지, 나는 지금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이 두번째 이유가 아까 말한 첫번째 이유보다 더 오래 나를 붙들고
있었노라고.

 

    -- 지금, 사랑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사실대로 말하자면, 앞의 두 가지 이유만으로는 망설임 짙었던 나를 책상
앞으로 불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세 번째 이유가 나를 거의 강제로 의자에
앉혔고, 펜을 들게 했고, 종이를 펼치게 했다. 세 번째 이유야말로 바로 그런
힘을 발휘한 장본인이었다.
  지금은 나와 그녀의 사랑이지만, 이 기록을 다 마친 뒤에는 힘들고 외로운
세상에 던져진 수많은 당신들의 사랑이도록 하고 싶다, 라는 나의 소망이 이
기록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이유였다. 그 소망이 밀어주지 않았더라면 나,
성하상 개인의 사랑을 이토록 길게 설명할 당당함을 나는 도저히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내게 닥친 사랑이 아주 특별한 것이었음은 이미 말했던 바이지만, 그리고 그
사랑의 처음과 끝에 대해 들려줘야 할 누군가가 내 곁에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내가 경험한 작은 사랑이 나가 큰
사랑으로 넓어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것이 결국은 내 사랑의 완성이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사랑의 완성, 이라고 나는 지금 말한다.
  사랑의 완성, 이라오 나는 여러번 종이에 써보기도 한다. 치켜진 마음 자락
하나가 가만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 지금 내게 보인다. 그 말이 나를
가라앉힌다. 담담해지도록 도와 준다. 세 번째 이유에 이르면 나는 안정을
느낀다. 세 번째 이유가 내게 이 기록을 서두르라고 말하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세 번째 이유한테는 거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리하여 나는 이 글을 쓴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세상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이 글을 쓴다.
  이미 사랑을 끝낸 사람들을 위해서도 이 글은 쓰여진다.
  앞으로 사랑을 시작할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이 글은 쓰여진다.
  그녀, 나의사랑, 세상에서는 오인희라고 불리웠던 한 여자의 생애를
잉크삼고, 나, 성하상이라 이름불리는 한 남자의 정신을 펜삼아 이 글은
쓰여진다...


      II. 꿈한테 추방당한 자 
    -- 겨울, 그리고 시작


  인쇄소에서 가져온 팜플렛 색깔이 영 젬병이다. 칙칙하고
산만하고. 지난 가을의 미스 김과 함께 색상조견표를 꺼내놓고
다시 끙끙대기 시작한다. 원래는 미스 김 담당이지만 일이 넘쳐
아우성일 땐 홍보실 안에 네 일 내 일이 없다. 닥치는 대로,
전천후로 뛰지 않고선 시간 맞추기를 해낼 수가 없다. 증원
요청은 매해 신년기획안 속에 어김없이 끼어들건만 윗사람들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층 로비에서 벌이는 갖가지 이벤트들을 기획하고
담당하는 팀들한테도 수시로 일손을 빌려줘야 한다. 백화점
홍보실 근무가 올해로 4년째. 인희는 이미 고참이다. 정실장을
빼고는 실무를 사방으로 환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 인희 말고는
없다.
  고참은 실무에도 환하지만 몰라도 좋을 뒷배경까지 알게되기
때문에 종종 일이 역겹다. 인희는 그런 역겨움이 올 겨울
심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까도 그랬다. 복도에서 커피를 한 잔 빼서 마시고 있는 데
수입주방용품의 판매원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반색을 했다.
평소에도 말이 많아 싫어하는 여자다. 인희가 모른 척 하는데
다짜고짜 팔을 낀다.
  "언니, 광고 다 넘겼어요?"
신문에 낼 광고 초안을 말하는 것이었다.
  "넘겼어."
  넘기진 않았다. 그러나 뒷말이 무언지 알기에 미리 말막음을
해버린다.
  "증말? 아이, 큰일이네. 언니, 그거 할인율 좀더 높여야
한다는데. 다들 그렇게 높였다는데 나만 곧이 곧대로 했다고
주인아줌마가 난리야. 다른 백화점은 이십오 퍼센트래요. 우린
십 오 퍼센트로 했잖아. 어떡해?"
  곧이 곧대로는. 그 보라색 매니큐어의 여주인이 오죽 알아서
손해보지 않도록 해놓았을까봐. 뻔한 엄살을 듣고있기가 너무
지겹다. 하마터면 말 많은 죄밖에 없는 어린 판매원한테 짜증을
낼 뻔했다. 요즘은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기분이 든다.
  정실장하고도 사사건건 부딪친다. 광고 초안을 놓고도
티격태격했다. 모피나 가죽 쪽을 좀더 키워서 짜지 않았다는
타박에 금방 가시 돋친 소리가 나갔다.
  "다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그러면 다른 것 활자가 작아져서
읽을 수가 없잖아요?"
  단추구멍 눈의 정실장, 그래도 용케 넘어가줬다
  "미스 오, 요즘 저기압이야. 왜 그래?"
  "야근이 며칠째예요. 무쇠도 탈이 나겠어요."
  인희는 얼른 마음을 수습한다. 뾰죽해지는 말투도 둥글린다.
  "그래도 이번 세일의 주요 이벤트가 모피와 가죽의류
패션쇼잖아. 박스로 해서 좀 키워줘."
  정실장은 낭창낭창한 버드나무 가지처럼 끝내 자기 의견을
관철시킨다 고압적이지 않으며 권위적이지 않으나 실속 있게
부하 직원을 부려먹는 정실장이다. 지금은 자기가 강력히 원해서
사보편집부로 옮긴, 홍보실의 진짜 고참이기도 한 주달호씨는
정실장을 노상 '능구렁이'라고 불렀다.
  "이거 어때요. 은은하면서도 화사하고."
  미스 김이 팸플릿 바탕색으로 뽑아낸 은회색을 보고 인희는
이마를 찡그린다.
  "기계로 찍어 내놓으면 또 지저분할걸."
  "그럴까요? 이거하고 두 개를 각각 찍어보죠, 뭐"
  청회색과 은회색으로 결정을 내린 다음 인희는 퇴근 준비를
했다. 토요일, 아직 짧은 겨울해가 남아있을 때 회사를 나가고
싶다. 지쳤다. 기운도 없었다. 나머진 월요일에 정리해서 넘기면
12월 행사들에 차질이 없으리라.
  "가려구?"
  외출했다 돌아오던 정실장이 실눈을 뜨고 묻는다.
  "토요일 퇴근 시간만은 환할 때로 합시다."
  옆에서 사진 담당 윤성기씨가 거들어 준다.
  "야야, 언제 맨날 그랬냐?"
  윤성기씨와 술좌석에서 터놓고 지내는 정실장이 휘휘 손을
젓는다.
  "가겠습니다. 좀 피곤해서요."
  인희는 뒤도 안돌아보고 사무실을 나온다. 안에서
무엇때문인지 와르르 폭소가 터진다. 보나마나 정실장이 '난
오인희씨를 상사로 모시고 있으니까' 류의 악의 없는 비난을
했을테지
  실제로 인희는 정실장이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함을 잘
알고 있다. 마음 약하고 소심하다지만 정실장이 때로 다른
이들한테는 혹독하게 구는 것을 보았었다. 하지만 인희에게는 늘
관대하다.
  "인희씨야 자기 일에 무섭게 철저하잖아. 난 일 잘해내는
부하직원이 제일 예쁘더라."
  그렇진 않다. 인희는 알고있다. 문제는 그 인사기록 카드에
있다. 인희는 정실장이 이제 그만 자신의 인사기록 카드에
기재된 내용을 잊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실장이 품고
있는 불필요한 동정심은 정말 질색이다.

    -- 징후
  새벽에도 몰랐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잠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버릇처럼 창 밖을 한참 내다 보았었다. 커튼은 있지만
좀처럼 창에 커튼을 내리는 일은 없었다. 창이라도 트여 있어야
답답함에 질식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새벽에 이미 지상이 하얗게 물들어 있었으련만 그녀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었다. 생각해보면, 시선은 창에 두었지만 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둠, 외로움, 막막함, 그게 다였다.
그것을 확인하려고 새벽에 일부러 눈을 떴던 것일까.
  폭설이었다.
  지난 주의 지저분한 싸락눈을 첫눈으로 치지 않는다면 오늘이
첫눈이다. 인희는 스물 여섯의 겨울에 내린 첫눈을 마음 속에
새겨두고 그 위에 동그라미까지 쳐둔다. 아직은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관리사무실 쪽의 샛길로 일찍 목욕탕에 다녀오는
젊은 아버지와 볼이 붉은 어린 소년이 손을 잡고 걸어온다.
  등허리로 오한이 솟는 걸 느끼면서도 그녀는 베란다로 나가
머리칼이 젖은 그들 부자의 싱싱한 미소를 내려다 보았다.
예쁘다. 저런 풍경은 언제 보아도 마음이 훈훈하다.
  그들이 사라진 뒤로는 쏟아지는 눈밖에, 쌓인 눈밖에 보이는
것은 없다. 일요일 이른 아침은 한가롭다. 남자들은 이불 속에서
여전히 꿈의 세상을 산보하고, 늦잠을 허락받은 아내들은 눈꺼풀
밑에는 맑은 정신을 담아놓고도 한껏 게으름을 부릴 것이다.
  아이들은, 이런 휴일엔 더욱 일찍 눈이 뜨인다. 그녀도
그랬었다. 실컷 자도 좋으련만 학교 갈 때보다 훨씬 빨리 눈이
뜨여 이불 속이 답답하곤 했다.
  그런데, 이불 속을 빠져나온 다음에, 그때 나는 무엇을
했을까. 어디로 갔을까.
  인희는 그쯤에서 생각의 갈피를 접어두고 안으로 들어온다. 늘
그랬지만 어린 시절로 생각이 미치면 몸을 횝싸는 서늘한
찬바람이 몹시 싫다. 찬바람 속에 오래 머물다간 병이나 얻지.
그녀는 얼른 상념을 흔들어 털어버리고 주방에서 매양 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체온계가 어디 있지, 하는 생각에 찻물만
얹어놓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열 여섯 평. 혼자 살기론 좀 넓지
않냐는 홍보실 식구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인희는 마음 속으로
차갑게 대꾸하곤 했다. 스물 여섯 해를 살아서 그만큼 애쓰고
살아서 겨우 확보한 나만의 공간, 당신들이 내 공간의 의미를
알겠느냐고.
  체온계는 거실의 약상자 속에 얌전히 들어있다. 혼자 살면
물건들이 제멋대로 자리를 이동할 염려가 없어서 '좋다.
체온계를 겨드랑이에 끼고 그녀는 다시 거실 창문에 서서 바깥
풍경을 내다본다. 눈은 아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푸지게
쏟아진다. 나무들이 눈에 덮여 모두 동글동글하다. 놀이터의
미끄럼틀 꼭대기에도 눈이 소복한 게 재미있다.
  아무래도 빨리 저 눈을 밟아보고 싶어 몸이 움찔거린다.
  인희는 성급히 체온계를 꺼내 눈금을 읽다 좀 멈칫했다. 38도
2부. 예상보다 반이 높다. 그래서 새벽에 머리가 지끈거렸던
것일까. 등허리로 치달리는 오한도 발열 탓일게고 몸살이
시작되고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아침을 충실히 챙겨먹는다.
우유도 넉넉히 데워서 조금씩 다 마시고, 토스트도 평소엔 두
쪽인 걸 오늘은 억지로 하나 더 먹었다. 혼자 살면 자기 건강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
  그리곤 눈길 산책 겸 해서 약국까지 다녀오기로 마음을
먹는다. 내리는 눈이 그칠까봐 머리 빗는 손길이 급하다. 거울에
비추인 얼굴, 화사하다. 두 볼이 발갛다. 아까 보았던 머리 젖은
어린 소년처럼.
  아차, 열이 얼굴에도 뻗쳤구나. 인희는 이만큼 화색이 돌면
보기가 좋을텐데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늘 핏기없는 창백한
얼굴이 못마땅했었으니까.
  "독하게 지어주세요. 오늘 중으로 떼내야 하니까."
  그녀의 말에 남자 약사가 의외라는 듯 인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내일은 할 일이 많거든요. 오래 아플 시간이 없어요."
  "약보다는 우선 휴식이 최고예요."
  누가 그걸 모르나. 아무튼 상식적인 말을 아주 진지한 얼굴로
하고있는 사람은 창의성이 없어보여 지루하다.
  아파트 광장을 두 바퀴쯤 돌았다. 그래도 전혀 싫증이 나지
않는다. 피곤함과 두통이 걸그적거리긴 했어도 상쾌했다. 눈발이
뜸해지지만 않았다면 산책을 더 계속했으리라. 흰 것은 품위가
있다. 쓰레기통이라도 눈옷을 입으면 그렇다. 지상에 놓인 모든
사물이 눈으로 인해 저토록 새로울 수 있음에 그녀는 경탄했다.
새롭고 싶은 열망에 살이 데이도록 오래 시달린 자들은 어쩔 수
없이 눈에 매료된다
  약을 삼키고 삼십 분쯤 후에 다시 체온계를 꼽는다. 38도 3부.
도리어 눈금 하나가 더 올랐다. 발열로 인한 두통과 오한,
식은땀 외엔 추가된 증상은 없다.
  오후엔 견디기가 괴로울 정도로 열이 오른다. 약만으론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으나 일요일이라 주춤해진다.
  오후 3시. 체온은 38도 8부까지 오르고 숨이 차다. 추워서
이불을 두 채나 덮고 누워있다.
  오후 4시. 인희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홀로 세상에 서있는
자는 자신의 몸도 홀로 지켜내야 한다. 응급실까지 갈 기운이
있을 때 움직여야 한다. 그녀는 침착하게 옷을 챙겨입고 지갑과
의료 보험카드를 확인해 가방에 넣은 다음 아파트를 나선다.
상기된 볼에 닿는 바람이 상쾌하다. 눈은 그쳤으나 눈세상은
아름답고, 그녀는 씩씩하게 달구어진 몸을 이끌고 병원으로
향한다. 이런 따위의 일로는 슬프지 않다.
  "보호자는요?"
  체온계를 입에 물려놓고 응급실 간호사가 묻는다. 그녀는
고개를 흔든다.
  "혼자 오셨어요?"
  기가 막히다는 듯 재차 묻는 하얀 캡. 인희는 더이상 대꾸 할
필요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옆자리의 복통 환자에게 이것 저것
물어대던 횐 가운의 의사도 그녀를 돌아보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교통사고 환자가 있는 듯 응급실은 어수선하고 소란스럽다.
체온계를 물고 있는 동안에도 혈압이 떨어져 실신한 중년 여인이
앰뷸런스에 실려왔다.
  "열이 39도예요. 원인을 찾아야 하니까 입원하시는 게
최선입니다. 어떡하실래요?"
  아까 신기한 표정을 짓던 의사가 물었다. 피를 뽑아가고,
엑스레이를 찍고, 그리고도 족히 두 시간은 더 누워있다가 나온
결론이었다. 인희는 링겔 바늘이 꽂힌 팔뚝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정실장이 또 펄펄 뛰겠군. 팸플릿 색깔은 잘 나왔는지.

    -- 들풀 같은 삶
  병실 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그럴싸해서 다행이었다. 누워서
바라보면 일요일에 쌓인 눈으로 그림같이 아름다운 산줄기들이
멀리 펼쳐있고, 앞쪽엔 키가 큰 겨울나무가 음악소리를 낼
것처럼 물결무늬로 서있다
  다시 열이 오르려나. 한기가 들기 시작하면 몹시 기분이
나쁘다. 6인실에서 하룻밤, 1인실에서 이틀밤. 홍보실 식구들도
한 차례씩 다녀갔고 이젠 더이상 올 사람도 없으므로 차라리
홀가분했다. 원인을 못 찾아내고 있는 39도나 40도의 열과
싸우는 일 이왼 다른 증상은 없다. 삶에 대항하는 열병인가.
  입원할 때 언니처럼 도와주던 혜영은 시누이 결혼준비 때문에
어제 시댁이 있는 군산으로 내려갔다. 응급실에서부터 하도
보호자를 ㅊ아대길래 귀찮아서 혜영이를 불렀었다. 혜영이라연
가족없이 홀로 사는 일의 불편함을 그녀만큼은 알고 있을
친구니까.
  이 바쁜 연말에, 내일 모레면 12월인데 여기에 누워있다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 인간의 일이었다. 12월이라면 정실장 말대로
백화점 일년 장사를 한 번에 다 해치우는, 황금 캐는 달인데.
  실만 떨어지면 뚜벅뚜벅 걸어서 나갈 것 같은데. 인희는 방울
방울 떨어지는 링겔을 무심히 세다가 문득 갓 구워낸 빵이
먹고싶다는 생각을 한다. 병원에서 주는 식사는 너무 닝닝하다.
하지만 빵을 사다 달라고 할 사람이 없다. 병원에 들어오고
나서는 혼자인 것이 여러모로 불편하다_ 게다가 링겔병이 자유를
구속한다.
  6인실에선 혼자 누워있는 여자를 홀낏거리는 시선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것까지는 참겠는데 낮이건 밤이건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수면제를 먹고도 잠을 자지 못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하나에도 신경 한 가닥이 파르르 떨었다. 그러면 덩달아
다른 신경들도 부스스 일어났다.
  장기입원 중인 내과의 여자병동은 낮에는 잡담. 방에는 코고는
소리까지 만발한다. 얼음베개를 머리 밑에 놓아두고 뒤척거리는
스물 여섯의 예민함은 건너편 침대의 용수철 튕기는 소리에도
반드시 반응했다.
  하기야 혼자 살아온 나날들이 너무 길어 이렇게 함께 누워있는
일에 금방 익숙해질 수 없다. 게다가 입원 첫밤이었으니
기다려볼 만도 했으나 인희는 기다려보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병실을 옮겼다. 통장 잔고가 쑥쑥 줄 만큼 환자 부담이 크다고
혜영이 걱정했으나 돈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혜영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나 불면의 첫날 밤,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뒤척이며 인희는 되새기고 싶지않은 옛 생각에 시달리느라
더욱 괴로웠다. 이렇게 줄줄이 누워 잠버릇 사나운 아이의
이빨가는 소리에 밤새 악몽을 꾸던 날들이 그녀에게 있었다.
  줄 맞추어 나란히 취침, 그러나 한 시간쯤 후엔 서로 뒤엉키어
누군가의 엉덩이 밑에 코를 박고 자던 나날들. 방 하나에
고만고만한 계집애들이 열댓명 수용되었다.
  그때도 예민했던가. 잠버릇 나쁜 아이들을 피하느라 늘
구석에서 담요를 휘감고 벽을 마주하고 잤다. 물론 열 살이
넘어서 어느 정도 철이 든 다음의 일이다. 철이 들면서 가장
절실했던 것이 있었다. 깨끗한 요와 이불, 오직 그것만이라도
소유할 수 있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혼자만의 방을 갈구 한다는
것은 그땐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밤에는 혜영이하고 나란히 누워 레이스 달린 베갯잇이거나
해바라기 무늬의 예쁜 이불 따위를 서로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
이야길 할 수 있는 유일한 아이가 혜영이었다.
  그 어두운 시절에는 줄을 맞춰 누워서 잤다. 그때는 나중에
어른이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양계장의 닭들처럼 나란히 나란히
자는 지독한 짓만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양계장의
닭들처럼, 이라는 말은 지독하지만, 그러나 옳다. 인희는 그렇게
자랐다. 생후 2개월째, 오인희란 이름과 4월 20일생이란
출생일자가 적힌 꼬리표와 함께 버려졌고 버림받은 목숨으로
어둠 속에서 숨죽여 열 여섯 해를 살다가 '천사원'을 나왔다. 그
이후는 오직 버림받은 천사의 악몽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이
삶의 지주였다. 지금까지도 줄곧.
  인희는 이 삶이, 끝끝내 버티며 뿌리박기 위해 애쓰는
들풀같은 이 삶이 무엇때문인가를 생각한다. 그때도 그녀의
신열은 체온계에서 39도로 들끓고 있었다.

    -- 먼 곳에서도 그녀를...
  믿어지지 않겠지만, 나는 그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녀에게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고 그녀와 전화나 회지로
소통하는 관계를 맺고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인상의
평화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라고 미리 양해를 구하며 말하는 일이
내게는 정말 힘들다_ 아니, 좀 쓸쓸하다. 앞으로도 나는 세상의
상식으로는 좀처럼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렇게 자꾸 말하다보면 어느 순간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실지도 모른다. 나는 진실로 일어난 그대로를
이야기할 뿐이다. 내가 세상 사람들과 좀 다른 방식으로
살고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나를 특별하게
만들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굳이 특별하지
않느냐고 우긴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어느 순간 특별해질 수 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기만 한다면.
  지금도 그해 겨울이 선명히 떠오른다. 그녀가 열에 들뜬 몸을
이끌고 홀로 응급실로 가던 그 일요일에 난 미루와 함께 얼음
박힌 산등성이를 오르고 있었다. 미루는 윤기 흐르는 노란 털을
가진 충실한 나의 친구였다. 미루나무처럼 늘씬한 키를 가졌다고
해서 미루라고 불렀다.
  '미루'라는 이름을 발음할 때마다 난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미어지곤 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나던 날. 그때 그녀가
그랬다. 개를 부르는 것이 나니라 산중의 어떤 영혼을 호명하는
느낌이 드는 이름이라고 그렇게 말할 줄 아는 그녀가 얼마나
좋았던가.
  미루는 나와 함께 산을 오를 땐 언제나 앞장을 서곤 했었다.
그러나 그 일요일에는 녀석이 시종 내 발 뒤꿈치를 밟고 있었다.
나도 어쩐지 발걸음이 무겁고 불어오는 계곡 바람이 너무
드세다는 기분에 조금은 허둥대고 있었다. 그런 때는 산행을
중단하는 것이 옳았다. 아무리 내 손바닥처럼 들여다 보고 있는
산이라 해도 자연이 준비해놓은 숱한 복병등을 다 이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나처럼 꼬리를 사리는 미루 녀석과 함께 마악 오던 길을 향해
돌아서던 참이었다. 발 아래, 이미 얼음장으로 뒤덮여 물 흐르는
소리마저 꽝꽝 얼어붙은 계곡 언저리 어디 쯤에서 난 분명
그녀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를, 그 누군가를 그녀가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가느다란 부름에 대답했다
  무슨 일이요?
  내 대답은 계곡을 따라 온 산에 펴졌다. 내 대답을 받은
겨울산이 다시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무슨 일이요?
  하루가 지나고 월요일 밤에 그녀는 한 번 더 내게로 왔다.
침상에 앉아 온 정신을 모아 기도를 하고 있는데 그 기도 속으로
그녀가 뛰어들었다. 그녀는 나직한 음성으로 무어라고 말했다.
몹시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 추워보인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손을 내밀려 하자 그녀는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 다음날로 곧장 산을 내려갈 준비를 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은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내 정신
속에는 그녀와 교통할 수 있는 여러 가닥의 줄이 있었다. 글쎄
그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간절함이 쌓이면 그리움이
켜켜이 쌓여 키를 돋우면, 그리하여 충만한 사랑으로 영혼의
심지를 돋울 줄 아는 자라면 그 줄들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한테는 한 겨울에 거처를 비우고 산을 내려오는
일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듯 몇 가지
번거로운 일들이 있었으므로 도시까지 나와서 서울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기까지는 꼬박 이틀이 걸렸다. 그 동안에도 나는
끊임없이 불안했다. 나는 모든 신경을 다 그녀를 향해 열어놓고
미세한 떨림도 놓치지 않으려고 온 정신을 기울였다.
  그대 오직 내 하나뿐인 그대여. 내가 지금 간다. 그대는
여전히 닫혀 있겠지만, 그리하여 우리의 운명적인 사랑을 그
닫힌 마음으로 외면하려 들겠지만, 그냥도 나는 어찌할 수 없어
그대에게 간다.
  차창을 스치는 겨울 들판의 메마른 풍경을 보면서 나는 수도
없이 그녀의 얼굴을 그리고 또 그렸었다. 이제와서 생각하면,
그때 그렇게도 나를 옥죄고 들던 알 수 없는 불안을 너무 빨리
털어버린 내 경솔함이 한없이 후회스럽다. 그토록이나 예사롭지
않던 온갖 징후들을 그녀의 퇴원과 함께 묻어버린 것은 확실히
내 잘못이었다. 그녀의 무의식이 나를 불렀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처음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한층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던 것을.
  그렇지만 병실에 들어서 잠든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보았을
때, 들끓고 아우성치던 모든 두려움이 일시에 걷혀버리던 그
불가사의한 느낌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나는 내 하나뿐인
사랑이 온전한 몸으로 잠들어 있는 것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마도 난 더욱 참혹하고 감당키 어려운
불행을 미리 예감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예감은 결국 옳았지만. 날카롭던 예감은 당장의 평온
앞에서 무디어지고 말았다. 아니, 나는 한사코 당장의 평온을
믿고 싶었다.

    -- 오후의 풍경
  불편하다는 것은 마치 정신을 어딘가에 저당잡히고 빌려온
정신 한 조각으로 간신히 세상과 대응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링겔 바늘이 팔뚝에 꽂혀 있는 동안에는 몸이 불편한 만큼
마음도 불편하다. 약병과 바늘을 연결시키고 있는 가느다란
고무줄의 길이만큼만 움직임이 가능하다. 더 넓게 움직이려면 한
손으로 약병을 치켜들고 다녀야 하는데 자칫하다간 피가
빨려들거나 약이 근육으로 새어서 퉁퉁 부어오른다.
  몸이 약병에 구속당해 있으니 마음 또한 자유롭지가 않다.
아프지 않을 때는 예사로 보이는 창 밖의 푸른 하늘조차 열두
가지 의미로 새겨서 보게 되는 것이다. 무력하다는 것, 인희는
조금씩 조금씩 병상의 시간들에 침식당하기 시작한다. 이제 겨우
나흘째, 그럼에도 그녀는 영원히 무력해질까 마음이 불편하다.
힘이 없어 남의 짐이 된다는 것은 그녀가 가장 혐오해 마지 않는
최후의 비참함이다.
  마음이 이 모양일 때는 잠이 비방이다. 취침시간마다 한알씩
처방해 주는 수면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어젯밤에는 간호사
몰래 샤워를 하느라고 고단했던지 약 없이도 신열 속에서
오락가락 얕은 잠을 취했다.
  노오란 알약을 삼키고, 몇 번씩이나 고쳐 눕다가, 인희는
눈꺼풀 밑으로 슬몃 다가드는 검은 잠을 본다.

    -- 스며든 바람
  낮잠에도 꿈은 있다. 키가 큰 나무들이 줄 지어 서있는
신작로에 나비들이 날고 있었다. 아직 매섭게 추운데 웬
나비들이람. 이렇게 일찍 나비를 보았으니 내년 운수는
굉장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던 것일까. 정신은 잠과 꿈 사이의
안개지대에 놓여 있는데 귓전에 잡히는 것은 세상의 잡다한
소음들이었다. 바람이 병실 창문을 덜컹 흔드는 소리,
신경질적으로 울려대는 비명 같은 클랙슨, 복도를 지나는 조심성
없는 구둣발 소리.
  그러다 문득 차갑고 신선한, 비누냄새 같기도 한 어떤
향기로움이 코에 닿았다. 괴어있고 칙칙한 병실공기와는 분명
다른 기운이 섞여들었음을 깨닫기까기 얼마나 걸렸을까.
  인희는 그제서야 감고있던 눈을 활짝 떴다. 그 순간 검정
옷자락이 막 빠져나가고 있는 출입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회색 골덴바지도 보았는데, 환영이었을까.
  뚫어지게 문을 지켜보고 있는데 문의 손잡이가 저 혼자 빙그르
돌아가고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이제 막 병실을 빠져나간
사람이 밖에서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려 문을 닫아 주고 있음이
확실했다.
  누구일까. 의사라면 횐 가운일 것이고 간호사라면 회색
골덴바지일 까닭이 없다. 인희는 링겔병을 세내어 치켜들고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왜 깨우지도 않고 그냥 나갔을까.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 보았다. 복도는 썰렁하게 비어있다.
간호사실로 가보았다.
  "내 방에, 병실에, 누구 찾아오지 않았나요?"
  불확실한 것은 질색이다. 환영을 보았다는 상상을
계속하느니보다는 확인하는 쪽이 인희한테는 편하다.
  "주무셨어요? 아까 어떤 남자분이 오인희씨 병실 묻던데. 검정
파커를 입고 키가 훌쩍 큰."
  간호사 하나가 옷차림까지 정확히 짚어 주었으므로 환영을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깨끗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창호지로 정갈하게 포장을 한 작은 꾸러미를 발견한 것은 다시
침대에 누워서였다. 그것은 출입문 앞에 놓여진 바퀴달린 간이
탁자 위에 있었다. 식사할 때는 그것을 침대 쪽으로 당겨와 식탁
대용으로 쓰곤 했다.
  아까는 왜 못 봤을까. 인희는 막바로 꾸러미를 집어오지
않았다. 가만히 그것을 보기만 했다. 검정색 파커를 입고 잠들어
있는 얼굴을 들여다 보았을 남자가 누구였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사람일 것이다. 늦은 밤, 지친 걸음으로 현관을 들어서면
우편함 속에 들어있곤 하던 횐 봉투의 발신인. 언젠가는 횐 봉투
안에 횐 종이만 달랑 넣어 보내서 쓴웃음을 짓게 했던 산사람.
충견 미루의 주인.
  인희는 꾸러미를 풀었다. 은은하게 배어있는 풀내음. 산의
냄새가 그녀의 짐작을 뒷받침해 주었다.
  '끓인 물을 조금 식힌 다음, 한 움큼씩 넣어 우려 잡수십시오.
많이 마실수록 그대의 몸을 맑게 해주는 심산유곡의 약초
이파리들입니다. 가을 내내 그대 생각 지울 길 없어 별을 따듯
한 잎씩 따 모은 것들입니다.'
  이것 보라지. 이 구닥다리의 고백체 문장들.
  인희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어버린다. 가끔씩 보내오는
편지들도 늘 이런 식이었지. 치열하게 세상과 부딪쳐 싸우다가
우편함 속에서 꺼내어 읽는 그의 편지들은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많이 피곤하거나, 기분이 칙칙한 날은 읽어 보지도 않고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적도 있었다.
  대관절, 이 복잡다단한 세상 가운데에, 그처럼 순간적이고
가히 운명적으로 다가와 맹목의 아집으로 타오르는 사랑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인희는 그가 별을 따듯 모았다는 찻잎 꾸러미를 머리맡에
밀쳐두고 조금 이마를 찌푸렸다. 도대체 입원 소식은 어찌
들었으며, 무방비로 내던져둔 수면 상태의 얼굴을 훔쳐보고
돌아간 그의 행동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 무시하고 지나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거기다 하나 더, 왜 병실 문에는 자물쇠를 달지 않는
것일까...

 

    --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가만, 길을 잘못 들었나봐. 아까 지나친 우레봉에서부터 왼쪽
코스로 잡았어야 했다구.
  혹시나 했더니 역시였다. 인희는 모자를 벗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한심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어쩐지
시원찮아 보이더라니. 괜히 저들을 따라 느닷없는 산행을 시도한
것이 은근히 후회되기도 하는 판국이었다.
  아랫동네에서 원주로 나가는 시외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무리의 여자들이 복장만큼은 야무지게 갖추고 산에 오를 채비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직장 산악회라고 하는데 얼핏 봐도
산행경력은 없어보이는 횐 얼굴의 처녀들이었다.
  여름휴가를 얻어 강원도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니던 인희는
불현듯 그들을 따라 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원주로
나가봤자 특별히 세워둔 계획도 없었고, 눈앞의 푸른산이
그렇잖아도 몸을 던지고 싶을 만큼 매흑적이라고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게 해서 무작정 노루봉 등반팀의 꽁무니에 따라붙은
것이었다. 두어 시간은 족히 걸었는데 그때부터 리더라는 여자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회원들도 꾀가 났는지 이쯤에서 점심이나
먹고 돌아가자고 조르는 쪽도 있고 벌써부터 힘줄이 삐긋했다고
죽는 시늉인 아가씨도 생겨났다. 보아하니 탄탄한 산행 대신
젊은 여자들의 질펀한 수다로 점심이나 때우고 작파할 분위기가
분명했다.
  인희는 풀어놓았던 배낭을 짊어지고 일어났다. 내려갈 길은
알고 있었다
  "왜요? 하산하실래요?"
  리더라는 여자가 점심이나 함께 하자고 붙들었지만 인희로서는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묵묵히 산길이나 실컷밟고, 한없이
땀이나 질펀하게 흘려본 다음, 마음을 헹궈내고 산을 내려올 줄
알았던 기대가 깨어져서 맥이 풀렸다. 홀로 산공기나 실컷
마시고 내려가는 수밖에.
  산은 고요했다. 알려지지 않은 등산 코스인지 띄엄띄엄
산행팀과 만날 뿐 피서객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피서철이 끝난 지도 한참이니까. 홍보실 식구들 말대로
여름휴가리는 말이 무색할 9월 초순이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 끌려다니고 산이나 바다 할 것 없이
바글바글 북새통을 치는 한철에 휴가를 떠나는 이들이 그녀는
정말 이상했다. 사람이 사람값을 못받는 풍경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 끔찍하지도 않나.
  그녀는 별반 풍성한 자태는 못되는, 그러나 흐르는 물만큼은
거울처럼 깨끗한 계곡에서 들고 온 빵과 우유로 허기를 지웠다.
우유 대신 손을 오무려 계곡물을 몇 번 마시기도 했다. 이름
모를 산새가 푸덕이며 날고, 머리가 띵할 정도로 짙게 풍겨오는
산내음이 좋아 한 시간쯤 그곳에 머물렀을까.
  어느 순간 그녀는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무엇이, 거미줄처럼 가는 무엇이 자신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듯한 기이한 느낌이 정말 별스러웠다. 무엇일까. 무엇이 내 몸을
가두는 듯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계곡 위 오솔길로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고즈넉함은 깨어진 뒤였다.
모처럼의 도취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쉬웠지만 더이상 물가에
앉아 있을 흉은 사라졌다. 그녀는 주섬주섬 배낭을 꾸려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였다. 맞은편 숲 속에,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시선으로는 진초록의 덩어리로밖에 식별되지 않던 계곡 건너편
나무숲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있었다. 인희는 멈칫해서 뚫어질
듯이 그림자를 쏘아 보았다.
  그림자는 이내 계곡의 햇살 아래로 몸을 드러냈다. 키가
훌쩍하게 큰 젊은 사내였다. 그 옆에 늘씬하고 탄탄한 몸피의
노란 털의 개가 사내와 나란히 서 있다. 그 둘은 마치 어둠
속에서 빛으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외계인처럼 그녀 눈에
비쳐졌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경악하며
한참을 마주보고 있었다.
  남자는 큰 눈과 숱 많은 눈썹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이
느닷없는 상황에서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던 것은, 게다가 큰
덩치의 개까지 있었음에도 두려움을 품지 않았던 까닭은 순전히
남자의 아름다운 눈 때문이었다.
  "노루봉에 가십니까."
  너무 오랫동안 여자를 쳐다보는 것이 민망했던지 그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목소리도 순하디 순한 눈처럼
부드러웠다.
  "그랬었죠. 하지만 내려가는 길이에요."
  남자는 별로 깊지도 않은 계곡물이 무슨 경계선이나 되는 듯
그 자리에서 멈칫거리며 다시 물어왔다.
  "산을 좋아하세요?"
  참으로 평평한 질문이었지만 묘하게 그 음성은 몹시 목마른
듯. 절실하게 들렸다. 그런데다가 남자의 쏘아보는 시선이 너무
따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내려가는 길이라던 스스로의
말을 확인하기나 하는 듯 짧은 눈인사만으로 이내 돌아섰다.
산을 좋아하느냐는 물음은 묵살한 채.
  한참동안 사내와 개의 모습을 밟으며 산길을 걸었다. 그리곤
여전히 사내의 시선에 묶여있다는 느낌에 놀라 뒤를 돌아보곤
했다. 숲 속에서 내내 지켜보았을테지. 그 음흉함에 새삼 기분이
나빠져 뛰듯이 산길을 걸었다.
  모자를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먼저였다. 숲그늘을
벗어나자 한낮의 해가 정수리에 쏟아졌다. 아, 모자. 땀젖은
모자도 말릴 견 해서 조금 떨어진 바위에 얹어 놓았던 것이
생각났다. 모자를 잊고 왔다 해서 되돌아 갈 것까진 없다.
아쉬웠지만 내처 마을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마을에 다 와서야 모자 속에 넣어둔 손지갑에 생각이 미쳤다.
세상에. 손지갑은 세수할 때 포켓에서 빠져나올까봐 거기에
던져놓았던 것이다. 이 세상의 한 뼘 공간에 존재해도 좋다는
것을 표시한 몇 개의 '쯩'들과 휴가비용이 지갑 안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이런 것을 잊고 다니다니. 그녀는 마을이 내다 보이는 곳에서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되돌아가서 잊은 물건들을
수습해오는 일이 귀찮아서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
때문이었다. 자신의 물건들을 흘리고 다니는 오인희가 아니었다.
감정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마음 못지않게
자기 물건 따위를 이곳 저곳에 빼놓고 다니는 엉성한 인간 또한
가장 싫어하는 그녀였다.
  그녀는 새삼 화가 치밀었다. 이 모든 일이 그 남자와 개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쏘아보는 시선으로 사람을
훑듯 하던 그들이 아니었다면 모자라 손지갑을 두고오는
경망스러운 짓은 하지 않았으리라.
  인희는 별수없이 아까의 계곡까지 돌아가야만 했다.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기나 할는지 이제는 그것을 걱정해야 할 차례였다.
주저앉은 풀숲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마른 풀 따윌 털어대는
그녀의 손짓에는 이미 짜증이 묻어 있었다. 이런 일은 정말
질색이야. 그녀는 거칠게 배낭을 울러메고 오던 길로 돌아섰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남자가 나타났다. 물론 누런 털의 개도
함께였다. 침침한 숲그늘이 훼방을 놓아 얼핏 잘못 본 것은
아닐까 했으나 틀림없이 그들이었다. 남자는 팔을 조금 들어
올리며 꽤나 반갑게 아는 척을 하고 있었다. 인희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시선을 비껴가며 걸음을 옮겼다. 그들 곁을
지나야 아까의 계곡으로 갈 수 있었다.
  "여기, 이것."
  막 남자 곁을 지나치는데 그가 더듬거리며 불쑥 모자를
내밀었다. 꽃무늬가 화사하고 분홍 테를 두른 그것은 분명
그녀의 모자였다. 얼른 모자 속을 들여다 보니까 손지갑도
있었다.
  "미루가 찾아냈어요. 바위 뒤에 떨어져 있는 걸 녀석이 물고
왔지요."
  남자는 자랑스럽게 개의 머리를 쓰다듬엇다. 개도 칭찬받는
것이 기쁘다는 듯 꼬리를 흔들며 눈을 껌벅거렸다.
  "고맙습니다."
  어쩔 수가 없었다. 화를 낼 수도, 그렇다고 활짝 웃을 수도
없어서 그녀는 무뚝뚝하게 고마움을 표시하곤 정면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알맞게 그을은 갈색 피부, 여자에게나 어울림직한
크고 슬프게 보이는 두 눈, 가가이서 확인해도 불량기는 전혀
찾을 수 없을 만큼 선량한 얼굴이었다.
  그날, 마을까지 같이 내여와서 콜라 한 잔씩을 나눠 마시고
그녀가 원주로 나가는 버스에 타기까지 삼십 분쯤 그들은 같이
있엇다. 남자가 머뭇머뭇 그녀를 따라온 탓도 있었고, 고스란히
되돌아온 지갑에 대한 작은 보답이나마 해야할 것 같은 그녀의
예의 바름이 그 삼십 분을 허용했다고 봐야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많은 말이나 몸짓을 그에게 떨구었던
것도 아니다. 몇 마디, 주로 개에 관한 몇 마디와 말과 말
사이의 침묵, 그것이 다였다. 그리곤 버스에 몸을 싣고 그
산골마을을 떠나왔다. 버스에서 뒤돌아보니 남자와 개는 점
하나로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붙박혀 있었다.
  그것으로 그들과의 짧은 만남은 먼지처럼 풍화되어 사라져
가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서울의 일상에까지 강원도의 깊은
산골에서 있었던 하찮은 만남이 끼어들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휴가에서 돌아온 며칠 후, 인희는 우편함 속에서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그녀의 이름과 주소가 한 획도 틀리지 않게
기재된 그 편지의 발신지는 강원도였다. 손지갑에서 주소와
이름을 훔친 것을 용서해달라는 말로부터 시작하는 그 편지를
읽고 그녀는 기가 막혔다. 순수하고 선량해 뵈는 얼굴이라고
믿었던 스스로의 판단이 빗나가 버려서 영 찜찜하던 그녀였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성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귀절을 쓰면 한 귀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 김남조(편지)

 

    -- 그녀, 바위채송화꽃


  물푸레나무 숲에 간다,
  가는 길에 소복하게 피어있는 바위채송화를 만났다, 붉은 줄기
끝에 몽알몽알 피어있는 노란꽃, 하필이면 바위 틈에 씨를
숨기고 자라나 여름에 만개하는 꽃.
  그녀와 함께 여름산을 올 수 있었다면 이 꽃, 바위채송화를
보여 주었을텐데. 돌이끼밖에 살지 않는 거친 바위 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리는 이 작은 꽃을 보았다면 그녀는 무어라고
말했을까,
  그녀를 영원한 시간 속으로 떠나 보내놓고 겪은 큰 혼돈은 내
자신을 산산조각으로 부숴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부숴졌으되
조각나지 않았음이, 적어도 산산히 분해되지 않고 이렇게
진술하고 있을 수 있음이, 지금까지 내가 행한 유일한
극복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또다시 그녀를 기다릴 것이었다.
다른 세상에서 그녀와 해후할 그날까지.
  하지만 아직도 나는 자신할 수 없다. 앞으로 닥쳐올 기디림
속에도 지난 날의 그 기다림처럼 향기가 풍겨나올 것인지. 정말
그랬다. 잘 익은 포도주 모양으로 맑게 빚어져서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온 천지에 깊고 그윽한 향을 풍기던 그
기다림을 다시 내것으로 할 수 있을까.
  물론 알고는 있다. 찰나의 해후란 결국 헤어짐의 첫 장면인
것을. 사랑의 아름다움은 해후의 두서없는 감정보다 차곡차곡
포개어 간수해놓은 길고 긴 보고픔의 시간첩임을.
  그러나, 기다림이 제 아무리 길어도 페이지만 넘어가면
그것으로 반짝이는 눈동자와 침묵의 언어로 달싹이는 입술이
나타날 것임을 알고있을 때와는 다르지 않은가. 수없이 많은
페이지를 넘겨도, 꽃 피는 계절이 수백번 되풀이 되어도, 그대의
검은 속눈썹과 붉은 입술이 지워져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때의
기다림 속엔 무엇이 담겨있을 것인가.
  이런. 대답보다 먼저 눈물이 스며나온다. 눈물은 이 민망한
버릇은 그녀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요즘 들어 생긴 것이다.
그녀를 보내놓고 처음엔 전혀 울지 않았다. 아니다. 그렇게 말할
순 없다. 내 몸이 그대로 하나의 커다란 눈물방울이었으니까.
길이가 거의 이 미터에 가까운, 무게는 오십킬로그램을 훨씬
넘는 거대한 눈물방울.
  그만. 내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오인희라는 이름의 작은 배가
격랑에 휘말리기 시작했던 그 무렵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말고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겐 없다.
  알 수 없는 고열로 입원까지 했던 그녀는 역시 알 수 없는
이유로 열이 내려 세상에 복귀했다. 병실에서의 짧은
만남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던 나 또한 내 처소인 이곳 노루봉
산장에서 미루와 더불어 기도와 명상의 일상을 보냈다. 그녀에게
다녀온 뒤 내 기도시간은 급격히 늘어났다. 연말이 닥쳐서
산장을 찾는 등반객들이 없었던 젓도 기도 시간을 늘리는데 큰
보탬이 되었다.
  나는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지난 늦여름
이후, 전심전력을 다해서 그녀를 명상의 핵심으로 삼았건만 그
동안 한 번도 그녀에게서 응답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녀의 영혼그림자가 내 명상에 비친 경험 또한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그 일요일, 나는 마침내 나에게 응답을 보내는 그녀의
첫 목소리를 들었다. 다음 날 명상시간에는 그녀의 영혼그림자를
보는 행운도 연거푸 얻었다. 마음이 울끈울끈 움직이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비록 그녀가 능동적으로 마음을 모아
보내준 반응이 아니고 그녀의 깊은 무의식이 시킨 것이라
하더라도 나한테는 환희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단지 그것 뿐이었다. 그후로 오랫동안
나는 어떤 응답도 받지 못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나는 배움의 처음부터 찬찬히 들여다 볼 줄
알게 되면, 그리하여 겹겹의 집착과 욕망을 벗어버리는 순간을
맞게 되면 우리의 생각 하나하나가 온 우주 구석구석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내 스승의 말을 터럭 하나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오랜 시간 자취도 없이 떠나있던 스승이 그 무렵
홀연 내 앞에 나타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으리라. 하룻밤을
산장에서 묵고 다시 먼 길을 가던 스승은 신발에 짚을 두르면서
말했다.
  이 짚이 무엇에 소용된다더냐?
  얼음 박힌 산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신발에 짚을 두르는
것임을 모를 사람이 어디 있을까. 스승은 그런 쉬운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레 짐작한 나는 엉거주춤 서 있기만
했었다.
  스승은 대답없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당신이 직접 인을
열었다.
  누군가의 마음에 새끼줄이 둘러져 있다면 기다려라. 새끼줄을
푸는 게 먼저가 아니라 새끼줄이 필요없게 박힌 얼음부터 녹이는
게 순서인 법. 그 다음은 네가 움직이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스승의 말은 언제나 그랬듯이 옳았다. 말하자면 이 글은 내
기도와 명상의 기록이기도 하며 그것에 영향을 받은 한 인간의
삶의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변화를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곤 했었다. 그랬다. 나는
이 깊고 깊은 산 속에서 오직 간절한 염원만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그녀를 읽어내고 또 변화시켰다. 나는 서서히
그녀의 삶에 박힌 얼음덩어리들을 떼 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얼음이 다 녹은 다음에는 물이, 어디로든 흘러가야만
하는 물이 되고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그때, 마지막을 몰랐으므로 나는 얼마나 찬란했던가.

 

    -- 꿈한테 추방당한 자
  가벼운 감기가 노상 끊이지 않는 듯해서 얼마전부터
노루봉에서 캐었다는 약초들로 차를 끓여마시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입안에 감도는 향이 좋았다. 이슬 얹힌
깨끗한 풀잎 하나를 입술에 물고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구석기
시대의 사람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노루봉의 그 사람한테 생각이
미치면 얼핏얼핏 싱거운 웃음이 새어나와 맛을 흐트려 놓는 게
흠이라면 흠일까, 차는 정말 그윽했다.
  그렇지만 퇴원한 지 그새 한 달이 다 되어가건만 몸은 여전히
개운치가 않다. 느닷없이 열이 치솟았던 것처럼 그 알 수 없는
고열은 사라질 때도 느닷없었다. 입원한지 닷새째 되던 날 아침,
체온계를 들여다보던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열이 내렸어요. 두 시간 전에도 40도 가까웠는데."
  그러더니 체온계를 알콜로 깨끗이 씻어서 이번에는 입에
물렸다. 마찬가지였다. 열은 거짓말처럼 내려가 있었다. 인희는
그날 오후, 혼자 타박타박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 남아 있는
자신의 진찰기록카드에 '불명열' 이라는 병명을 남긴 채.
  "인간의 몸에서 일어나는 그 수많은 질병 중에는 과학의
힘으로 처음과 끝을 밝혀낼 수 있었던 것보다 원인을 모르는
병이 더 많지요 '불명실'은 말하자면 현대 과학의 손길이
닿기애는 저 먼 곳에서 다가오는 병이라고나 할까요." 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인희는 까닭없이 팔에 소름이 돋았다. 불명열,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지시하는 호칭인 듯 여겨지는
것이었다. '불명열'이란 제목에, '오인희, 4월 20일 생'이란
부제가 딸린 정체모를 한 목숨.
  혜영이도 그런 식으로 말했었다. 영양부실에 애정 결핍까지
두루 꿰고 있는 그 시원찮은 삶의 이력서를 상기하면 응당
오고야 말 육체의 무너짐이었다고. 이제부터일랑 제발 몸좀
챙기면서 살라는 하늘의 경고라고.
  그런 다음 두 사람은 똑같이 그 시절의 식탁을 떠올렸다.
끼니마다 빠지지 않고 올라오던 노란 단무지와 바람든 무우로
끓인 퍼석한 무우국, 그리고 고추가루를 세어가며 먹던 시퍼런
김치와 명절이나 특별한 날이면 어김없이 국대접에 담겨오던
기름 둥둥 뜬 돼지 비계국.
  열 여섯에 그 지긋지긋한 식탁을 벗어나면서 인희는 가슴이
떨렸다. 이제부터 구정물통에서 건져온 듯한 밥상 말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채소와 생선과 고기를 내 힘으로 익혀 먹으리라.
하지만 양품점 점원으로 일하며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이나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대학시절이나 별반
나아진 것은 없었다. 채소와 생선과 고기를 제대로 익혀먹는
사람다운 식생활은 아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언제나 무시무시한 집행관처럼 목을 조이고 있는
'학비조달'이라는 대명제가 따라 다니고 있었다. 대신 무우는
절대 사양, 그리고 돼지 비계라면 그것이 단 한 점일지언정 절대
삼키려 들지 않던 고집 아닌 고집만은 톡톡히 실천했다.
  "우리한테 대학은 무리야, 난 취직할래."
  야간여고 졸언반이던 해의 어느 겨울, 학교에서 돌아파
얼음같이 찬 물로 발을 씻으면서 혜영은 그 한마디로 대학의
꿈을 접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한테 대학은 꼭 필요해. 난 여기서 끝내지
않을 거야."
  인희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꿈을 조절하기는 했다.
4년제 대학으로 삼았던 목표를 2년제 전문대학으로.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혜영은 그녀에게 너덜너덜한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등록금에 보태. 졸업해서 멋진 데 취직하면 이자 쳐서
갚아줘. 난 지금 너한테 투자하는거야. 내가 보기엔 넌
유망주야."
  혜영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세상에 대한 증오나 적개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혜영은 끊임없이 그녀의 곁에서 기척을
내며 그녀의 파르르 떨리는 마음을 쓰다듬어주곤 했었다.
미워하지 말아, 성내지 말아, 넘어지지 말아, 잊어버릴것은
잊어버려......
  한때 그렇게 열망했던 자립과 인간다운 삶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학교를 졸업하고, 어엿한 직장을 가지고, 튼튼한 벽이
울타리가 되어줄 정갈한 방 한칸을 소유하고, 하는 식으로
목표를 향해 악전고투할 때는 모든 것을 다 이룬 다음의
허망함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아니, 다 이룬 뒤의
허망함이란 달콤한 정신의 산책쫌이 아니겠냐고 막연히 상상하곤
했었다.
  이제 그녀는 다 이루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태어날 때
이미 약속되어 있는 그 작은 목표들을 그녀는 거의 죽을 힘을
다해 홀로 이루었다. 집과, 밥과, 부끄럽지 않은 입성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데 스물 여섯 해가 고스란히 바쳐졌다. 이루고 나면
막을 내리는 무대처럼 그녀의 삶을 비추던 조명도 스르르
사라졌다. 기운이 빠졌다. 남은 미래를 꾸려나갈 기운을 인생의
기본조건을 해결하는데 다 탕진하고 말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인희는 때때로 억울 했으며, 억울함에 못이겨
절망하곤 했다.
  꿈없이 사는 세상, 꿈의 분량마저도 남들보다 훨씬 모자란
채로 시작한 인생. 인희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자신의
부모에게 중얼거린다. 그래요, 당신들은 내게 꼬리표를 채워
거리에 버렸지요. 그 꼬리표에 내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었다고
당신들은 지금 그렇게 기억하겠지요. 그러나 아니예요. 당신들이
적은 것은 나의 생년월일과 이름이 아니라 어쩌면 이런 말이
아니었을까요. 바로 이 말.
  '오인희, 꿈으로부터 추방당한 자.'
  아세요? 난 그 꼬리표 때문에 이 삶의 망명객이 되어버렸지요.
그래놓고도 당신들은 곧장 새로운 꿈을 품었겠지요.
  정말, 정말, 그랬나요......

 

    -- 침묵의 전화
  전화벨이 울린다, 또.
  인희는 우선 시계부터 보았다. 어제와 또 그 어제와 비슷하다.
텔레비전에서 아홉시 뉴스를 하고 있는 시간. 남의 집에 전화
걸기로는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간. 그 시간에 어제와 그
어제처럼 또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하고 있다.
  받으면 또 침묵일 것이다.
  "여보세요?"
  "......"
  틀림없었다. 침묵만이 건네져오는 기계 저쪽, 상대방이 이쪽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쯤은 확실히 짚어낼 수 있다
  처음엔 약초를 보내오고 병실에도 그림자처럼 스며들었다가
사라진 노루봉의 그 구석기시대 사람이라고 의심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추측을 수정했다. 희미하기는 하지만 수화기 저쪽의
침묵 뒤에는 어떤 소리, 음악이나 웃음 같은 그런 번잡한 도회의
한 배경음이 깔려있었다.
  오늘도 그렇다. 완강하게 표현하는 침묵 사이사이로 균열에
스며드는 습기처럼 사람들이 내는 소음이 섞여있다. 노루봉에는
적요 이외에 저런 소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믿음이
있었다. 적어도 노루봉의 그 사람은 이런 야비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 이런 괴전화는 구석기시대 사람한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수화기를 내리려다가 인희는 한 마디 경고쯤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또록또록한 음성으로 저쪽을 향해 말을 시작했다.
  "여보세요. 난 이런 장난은 질색이에요. 할 말 있으면 하세요.
계속 귀찮게 굴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 거예요."
  그래도 침묵. 인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보던 책을 펼쳐든다.
혜영이만 아니라면 전화 따위에 앙앙불락할 이유가 없었다. 혹시
혜영한테서 전화가 걸려올지 몰라서 전화코드를 뽑아버릴 수도
없다. 스물 여섯의 인희한테 이 세상에서 가장 기다려지는
전화는 단 하나, 혜영의 목소리다. 혜영이 결혼한 뒤로는 특히
전화의 중요함이 더해졌다. 이것저것 시집일로 분주한 혜영은
몸은 빼내올 수 없어도 목소리만은 인색하지 않게 보내주는
친구였다.
  내일은 혜영에게 먼저 전화해서 밤에 흑시 전화를 받지
않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미리 말해야겠다, 고 생각하는 그녀.

    -- 누구의 망설임인가
  8일 밤. 다시 전화벨.
  싱크대 앞에 서있던 인희는 수도를 세게 틀어버린다. 벨소리가
묻힌다.
  11일 밤, 또 전화벨.
  이번엔 좀 늦다. 밤 열 한시가 가깝다. 혹시 했지만 동요하지
않고 켜놓고 있던 라디오의 볼륨을 확 높인다. 집안을 쾅쾅
울리는 [호텔 캘리포니아. 전화벨이 그친 뒤에 볼륨을
낮주려는데 이번엔 레오날드 코헨의 묵직한 음성이 홀러나온다.
인희, 거실에 우뚝 서서 코헨의 나즈막한 음성을 좇아서 자꾸
밑으로 가라앉는다
  14일 밤, 전화벨.
  [위대한 개츠비]에서 위대한 사랑을 열연하는 로시트
레드포드에 빠져있던 인희는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확 코드를
뽑아버린다. 그리곤 아무 갈등없이 다시 영화에 빠진다. 책과
영화를 선택하라면 언제나 책쪽에 손을 들던 그녀였다. 이제까지
지갑에서 돈을 꺼내 영화관람권을 사본 적은 없었지만, 책을
사는데는 별반 주저하지 않았다. 비디오 재생기를 산 지가 얼마
되지 않긴 했어도, 그러나 그 기계를 비디오 재생에 사용해본
경험은 딱 한 번이었다. 혜영의 결혼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담은
테이프가 그 한 번에 사용되었다. 혜영은 괜찮다 했지만 그녀가
부득불 우겨서 비디오 촬영을 계약했다. 삶의 행사들을 일일이
기록할 수 없었던 그녀들한데는 늦었지만 결혼부터라도 치밀하게
증거를 남겨야 한다. 그 증거들은 그녀들보다 자식들의 생애를
증명하는데 더 중요할 터이니까.
  [위대한 개츠비]는 사무실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사진 담당
윤성기씨가 비디오 매니아였다.
  "오인희씨, 요새 외롭지요?"
  "외롭지요."
  인희는 무심하게 받는다. 동료들의 익숙한 농담에는 그녀도
익숙하니까.
  "더 외롭게 해줄까요?"
  "어떻게요?"
  "이것 갖다 봐요. 우리 마누라가 이것 보더니 줄줄 울어요.
그러더니 엄청 외롭대. 너무 외로워 죽고싶데요. 왜 자기한테는
개츠비 같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느냐는거지. 참, 월급장이
시시한 남편 옆에 두고 그럴 수 있어요? 덩달아서 나도
무지무지하계 외로워지더구만."
  인희는 테이프를 받아 가방에 넣었다. 보게 되면 보고 말면
말고. 보여주고 싶다는 동료의 호의를 괜히 긴 말로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 거부감없이 테이프를
기계에 넣게 되었다. 또, 아무 저항감없이 소파에 앉아 그
영화의 시작부터 주욱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희는 생각했다. 앞으로는 핏츠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로 기억하기보다 로버트 레드포드의 [위대한 개츠비]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고.

    -- 그 여자
  따르릉.
  다가간다. 인희, 지긋이 울고있는 전화기를 노려본다. 벨이 울
때마다 램프에 주홍의 불이 화들짝 켜진다. 한 잔의 차를 앞에
놓은 고요함이 깨어져버려서 바싹 신경이 곤두선다. 그,
수화기를 들었다 다시 얹어 버린다.
  다시 찻잔을 받쳐드는데 사즈러지게 벨이 운다. 한 잔의 엽차,
깊은 산의 향내가 전화벨 소리에 놀라 산산히 흩어져 버린다.
램프에 비치는 주홍의 신호, 열 번, 열 두 번, 열 세 번......
  전화기를 나꾸어 채는 그녀.
  "당신, 대체 누구예요? 이젠 정말 끝이에요. 이 전화번호 는
오늘부터 취소예요."
  "아니, 잠깐......
  얼결에 터져나온 음성, 벌써 한 달 이상 밤마다 괴롭히던
침묵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여자였다. 그것도 나이가 지긋한 여자
목소리.
  그러나 그뿐이었다. 자신이 말을 해버렸다고 깨달은 순간
전화를 끊어버린 모양이었다. 인희는 멍해서 한동안 기계를 이
휘젓고 다니는 전화를 귀에 대고 가만히 서있었다.

    -- 둘이 걷는 그림자를 만들어 봐......
  "커피?"
  김이 피어오르는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정실장이 사람 좇은
웃음을 흘린다.
  "커피값은 뭐죠?"
  인희는 들여다보던 4층 전시회 팸플랫에서 눈을 떼며 묻는다.
  "무료. 게다가 보너스까지."
  "또 무슨 싱거운 말씀을 하실려고......"
  인희는 별수없이 피식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는다.
미스 김은 인쇄소에, 윤성기씨는 출장. 오늘은 정실장과 둘이
근무 중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남은 인생도 좋아지겠지?"
  정실장은 연신 벙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않고 있다.
  "때론 남은 인생마저 망치겠죠."
  "왜 그래? 왜 망할 것부터 생각해? 인희씨는 그게 탈이야."
  "누구 소개시켜주겠다는 말씀이면 그만 두세요. 아시잖아요.
전 사람이라면 멀미가 나요. 요즘엔 더욱."
  "무슨 일 있어? 뭐지? 누가 추근거리는구나. 그렇지?"
  "그래요. 중년여인이."
  "뭐?"
  "밤마다 장난전화질을 해대는 사람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중년여인이에요. 흥미있지요? 멀미나지 않게 생겼나 보세요."
  "하기야 요샌 아줌마들도 되게 심심한 모양이더라. 멋진
남자들은 다 어디가고 하필 늙은 아줌마가 추근거리누 쯧쯧.
그러니 내가 나설 밖에."
  정실장은 갑자기 진지해진다. 전에도 농담처럼 신랑후보
보여줄테니 함께 나가자는 말은 여러 번 했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우선 아주 구체적이다. 깨복장이 친구의 막내동생인데
나이는 이제 서른이고 성실하고 직장이 탄탄하다는 등등.
  "봐. 여기 사진도 가져왔어. 내가 녀석들 만날 때마다 우리
사무실에 굉장한 신부감이 있다고 떠들었더니 아예 사진들고
와서 신청을 하는거야."
  숨통은 괜찮은지 적이 근심되는 꽉 조인 넥타이, 목둘레를
빳빳하게 두르고 있는 와이셔츠의 깃, 사진인 탓이겠지만 박제된
표정의 무미건조한 얼굴. 인희는 별 생각없이 정실장이 내민
사진을 오래 들여다본다. 그 옆에서 정실장은 계속해 사진의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가를 피력하고.
  "어쨌거나 만나주기는 해야 돼. 이번엔 절대 그래야 한다구.
내 체면도 있고, 또, 뭣이냐, 신랑감되는 본인한테 틀림없이
선을 뵈주겠다고 술김에 막 큰소리를 쳤거든."
  단지 그것만은 아닐게다. 인희는 정실장이 말하지 않은 부분도
알 수 있다. 이번엔 꼭 성사시켜주고 싶을 만큼 성실하고 착한
젊은이였을테지.
  정실장이 인희의 결혼에 여동생의 결혼 못지않게 신경을 쓰고
있음을 그녀는 안다. 그녀의 인사기록 카드를 본 다음부터
정실장은 스스로가 오인희의 보호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명절연휴 같은 때는 정말 진심으로 자기 집에 와서 지내라고
매번 당부하기도 한다.
  그는 이 가냘픈 여자가 스물 몇 해를 혼자서만 견디며 살아온
것이 너무나 갸륵하다. 삼촌이나 오빠도 없이, 하다못해
외사촌이거나 고향의 아저씨 한 사람 없이 우뚝 혼자라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앉는다.

 

    -- 한 걸음씩
  우편함 속에 든 두툼한 편지 한 퉁. 인희는 슈퍼에서 사들고
온 식료품 꾸러미를 왼손으로 바꿔들고 편지를 꺼낸다.
  노루봉에서 성하상. 미루의 주인이 보낸 편지였다. 하기야
성하상 그 사람 말고는 이 우편함에 넣어질 긴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다.
  "일찍 오시네요. 하기야 봄이 되고는 해가 길어졌으니. 그건
그렇고, 아까 웬 아주머니가 찾아왔더랬어요. 아가씨 혼자
사느냐고 묻던데, 아시는 분이세요?"
  경비아저씨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그녀를 손짓해
부르더니 일러주는 말이다. 손님이라곤 간간 혜영이가 들르는 것
외엔 전혀 없었는데 웬일이냐는 표정이 역력하다.
  누굴까. 열쇠를 열어 빈 아파트로 들어와 핸드백과
비닐봉지들을 내려놓으면서도 내내 그 생각이다. 짐작이 갈 만한
사람도, 일도 없다. 사가지고 온 반찬거리들을 주섬주섬 꺼내어
대충 정리를 해놓고, 엽차 한 잔을 오래도록 마시고, 빨래감들을
욕조에 담궈놓을 때까지도 방문객의 존재를 짐작하지 못했다.
  이제 그만
  인희는 애매한 일로 자신의 신경을 혹사시키는 일에 염증을
느낀다. 그 생각은 떨쳐버리자. 고무장갑을 손에 꿰고 힘들여
빨래를 문대볼 작정을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조금은
섬ㅉ했으나 아직은 어둡기 전, 인희는 별수없이 가만히 수화기를
들어 올린다.
  "인희씨? 곧장 집으로 퇴근했구먼. 난 이제 막 사무실에
들어왔지. 광고 원고는 신문사에서 가져갔나? 그리구말야 인희
씨가 행여 잊었을까봐 전화한 건데, 내일, 알고 있지? 오후 두
시. 예쁜 옷으로 입고 나와야 해. 지난 주에 입었던 그 겨자색
투피스, 그거 예쁘더라. 다소곳하고. 자, 내일 아침에 보자구."
  인희는 그만 피식 웃어버린다. 겨자색 투피스를 입고 출근
하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전화를 하는 정실장을 미워할 수 없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겨자색 옷을 꺼내 침대에
걸쳐 놓고 받쳐입을 블라우스도 챙겨둔다. 방을 나서려다 문득
구김이 간 스커트가 마음에 걸려 돌아선다. 인희는 다리미판을
펼쳐놓고 스커트를 다리기 시작했다.
  노루봉에서 온 편지는 한밤중에야 다시 그녀의 눈에 띄었다.
소파에 길게 누워 책을 읽다가 그만 들어가 잘까 하는 생리에
일어서는데 거실 바닥에 그게 있었다. 퇴근해서 돌아와 핸드백과
함께 던져둔 것을 여태 잊고 있었다.
  그녀는 길게 손을 뻗어 편지를 집었다. 두툼했다. 먼곳에서
부쳐온 편지답게 겉봉은 이미 새 봉투의 빳빳함은 다 사라진
채였다 그의 실쭉길쭉한 글씨를 새삼스레 찬찬히 훑어 보다가
인희는 봉투를 뜯고 알맹이를 꺼냈다
  그가 보내온 많은 편지들, 대개는 한눈으로 스윽 훑어보고
버리거나 더러는 뜯지도 않은 채 휴지통에 집어넣던 그  편지들
중에서 그녀가 거의 처음으로, 정신을 기울여서 끝까지 성실하게
읽은 첫번째 편지였다.

 

    -- 편지 1
  가슴이 벅차서 단 한 번에 마저 불러버릴 수 없는 그대의
이름, 인희.
  울먹이던 꽃망울이 양지쪽부터 비죽비죽 손톱만하게
피어납니다. 내가 보는 하늘도 어제와 다르고 구름도 까닭없이
부풀어 올라서 이마를 대면 노곤한 단잠에 빠져들 듯합니다.
  오늘은 장작불을 한 번 밖에 지피지 않았습니다. 겨우 내내
바싹 마른 장작은 연기도 없이 푸른빛으로 잘도 타오릅니다.
푸른 불꽃 사이에 그대 얼굴이 어른거리고 그러면 난 또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대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대는 내 일상의
어디에든 가리지 않고 출몰합니다. 나의 하루는 그대를 향한
대기상태입니다.
  이틀 전부터 내 명상 속의 당신 모습에 고뇌가 비칩니다. 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적이 안도합니다만 마음에 걸리는 잡념이
그대에게 생긴 듯합니다. 수척한 그대 얼굴을 보게 될까봐 늘
조마조마한 나날들입니다. 제발 평온 속에 계셔주길 빕니다.
그대의 평온만이 내게 평화를 줍니다. 나의 이 마음을
나무라셔도 할 수 없습니다.
  어제는 그동안 작업했던 목기들을 마을로 가져갔습니다. 내가
만든 나무그릇들은 관광기념품 가게에 진열됩니다. 돌아오는
길에 필기도구 몇 개와 편지봉투, 그리고 백지 한 묶음을
사왔습니다. 이제는 그대에게 띄엄띄엄 보냈던 글들을 바짝
당겨서 써보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가득 차 오르는
이야기들을 그대에게 덜어주지 않고는 이토록 눈부신 햇살에
바로 설 수 없다는 기분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내게 다가오는 그대를
상상하지도 않습니다. 원하고자 할 때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원하는 것은 그대 삶의 아름다움, 광휘, 기쁨
같은 것들입니다.
  그대가 기쁠 때 나도 기쁩니다. 우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반나절을 달려야 만날 수 있지만 그대의 기쁨은 빛의 속도로
내게 옵니다. 마찬가지로 그대의 슬픔도 그렇게 내게 옵니다.
나는 기뻐하는 그대를 위해 매일 숨 쉬고 매일 잠을 잡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나의 편지들이 그대의 기쁨에 그늘이 되지 않기만을
소망합니다. 흑여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눈 앞이
캄캄해집니다. 편지봉투와 백지 묶음을 들고 산장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그 생각에 몇 번이나 휘청거렸습니다.
  만약에 이 글들이 그대 삶에 훼방이 된다면 언제라도
쓰레기더미 속에 처넣으시길 바랍니다. 나는 내 편지가 그대
우편함에 잠시 머물렀던 것만으로도 큰 행복으로 여기겠습니다.
당신의 손으로 꺼내어져 쓰레기통 속에 던져지는 것만도
행운입니다. 나는 지금 한 점의 가식도 없이 그대에게 말합니다.
그대는 내 삶의 변치 않는 주인이지만, 그대에게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겠습니다.
  맞는지 모릅니다만, 지난밤 꿈에 당신이 흘리는 코피를 내 두
손으로 받아냈습니다. 코피가 잦으면 보내드린 약초를 두곱으로
진하게 우려서 마셔보길 바랍니다. 그 약초 속에는 열을
다스리는 이파리가 많이 들어있습니다.
  나는 요즘도 계속하여 당신이 앓은 열병을 극복할 약초들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 일이 내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당신은
모를 것입니다. 그대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내게 기쁨을 주는
대상입니다. 그대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나날들에 축복을
바칩니다.

 

    -- 사랑의 불가사의
  그녀도 종종 그런 느낌을 비추었지만, 때로는 나 스스로도 이
사랑이 환상 속에서 빛어진 그림자놀이 같은 것은 아닐까 해서
가슴이 철렁했던 적도 많았다. 나 역시 세상살이의 온갖 관념과
미신에 젖을 대로 젖은 사람인지라 수만리 밖에서 홀로 견디는
사랑은 가끔씩 의혹의 바람 앞에서 수척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래. 우리를 현혹하는 저 '구체성'이란 말. 삶도, 환희도
절망이나 비탄까지도 구체적인 모습을 띄고 있어야 인간의
냄새를 풍기는 것인 줄 배웠던 내 젊음의 갇힌 공부들.
  그런 것들이 날 얼마나 옥죄었던가. 살에 박히는 밤중의
아픔에 튕겨져나와 결국 여기로 도망쳐온 내가 아니었던가.
평화의 기쁨을 얻는데는 구체성이란 가면을 뒤집어 쓰고 앉은
지적인 허영이나 감정의 왜곡은 정말 지긋지긋한 훼방물이었지.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지적 조작이나 감정의 왜곡에 나만큼
능란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낌새는 기독교재단에서 운영하던
고등학교에 다녔던 시절에 이미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월요일
첫시간에 들어있던 채플이 생각난다. 그 시간에는 아이들을
괴롭히고 고민에 빠뜨리는 순서가 하나 있었다.
  출석부 번호대로 앞에 나와 올리던 대표기도라는 것. 그날의
대표기도 차례가 된 녀석들의 그 민망해하고 곤혹스러워 하던
얼굴들이 지금도 선명히 떠오른다. 개차반같은 행동으로 날마다
문제를 일으키던 녀석 하나가 '주님. 저희 죄를
용서해주시옵고...' 하는 기도말을 외울 땐 일제히 킥킥거려서
나중에 운동장을 열 바퀴나 도는 호된 단체기합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오히려 대표기도를 성공적으로 끝낸
뒤에 나는 주목받는 아이가 되었다. 그때까지 아이들은 내가
그저 키나 훌쩍 크고, 순해 터져버린 성격에, 가끔씩 고리타분한
고사성어를 섞어 점잖게 한마디 할 줄 아는 아이 정도의  평범한
급우로만 여겼었다.
  보나마나 그렇고 그런 몇 마디 기도를 대사 읊듯이 해치우고
내려올 줄 알았던 내가 비감에 찬 목소리로 제법 격식을 갖춘
기도의 첫 대사를 내놓자 교실 안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신있었다. 나는 교묘한 언어들을 골라서 녀석들의
술렁임에 쐐기를 박았다. 경박한 자들의 경박한 호기심을 이리
저리 끌고 다니는 재미가 정말 굉장했다. 공중기도하는 형식이
은연중에 원하고 권장하는 것이 곧 대중을 향한 선동이라고 믿은
나는 그대로 실천했다. 처음엔 낮은 음성의 비탄을 나중에는
감정을 송두리째 내놓고 엎드러 비는 통한을, 마지막엔 이
쓸모없는 육체 속에 새 영혼을 주실 그 분 세게 바치는 헌사로
전무후무하게 긴 기도를 끝냈다.
  믿어지지 않을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단상에서 내려와 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아직도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녀석이
다섯 명쯤 있었다. 기가 막히게도 그애들은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교실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이어 부르게 되어
있던 찬송가는 1절을 다 부르도록 가냘프기만 했다.
  솔직히 나도 놀랐다. 마음 먹고 한 번 해본 기도이긴 했지만
반응이 그토록이나 클 줄이야. 그때 놀란 담임은 훗날 내가
법대에 응시하겠다고 말하자 몇 번이나 '신학교에 진학할 줄
알았는데...' 하고 말했다.
  담임선생님은 영 잘못 짚었던 것이다. 나는 보다 현란한
지식의 세계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는 냉정이
요구되고 뭇 감정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솔할 줄 알아야 되는
학문이 바로 법학이 아니던가. 신학은 결코 나의 그런 허영을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분야였다. 신학대학으로 진학하기엔 나는
너무 간교했고 담임이나 친구들은 그런 내 음험한 속셈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내게는 밖으로 드러나는
'나'를 감쪽같이 조작할 수 있는 기교가 넘쳤다는 뜻이다.
  법대 진학은 차질없이 이루어졌다. 대학생활에서 나는 지적
허영을 충분히 즐겼다. 그리곤 서둘러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이내 사법고시에 도전했다. 내 허영심은 도전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으므로 수석 합격자가 될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조용한 암자의 방 한 칸을 구한 것이
말하자면 궤도 수정의 첫 신호가 된 셈이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고시촌에서 합숙을 한다거나 고시생 전문 하숙집에서 기거하며
대학도서관을 이용했다면 글쎄,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거의 틀림없이 나는 목표를 달성하고 예정된 길을 달려
현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의외로
고집이 센 편이어서 어렸을 적부터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기필코
이루어내곤 했으니까.
  그러나 고집을 발휘해보기도 전에, 거창한 계획표와 타오르는
투지를 뜨거운 심장 속에 담아놓고 산골짜기에 숨겨진 그 암자를
찾아가던 날, 내 인생은 그만 급커브를 돌고 말았다. 커브조차도
나는 고집스럽게, 아찔한 속도로 돌고 만 것이었다
  나의 이런 성향은 내 부모가 공평하게 물려준 기질에
연유했다. 아들의 대학 진학을 앞두고 급작스런 발병으로 기어히
세상을 떠났던 내 어머니는 온 몸에 넘쳐흐르는 끼를 어쩌지
못하다가 그것이 한이 되어 일찍 생을 마친 분이었다. 어머니는
격정적인 몸짓으로 무대를 휘어잡던 연극배우였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결혼 전까지만 연극배우였던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아버지는 엄격한 사대부집안의 종손으로 대학교수였다. 자로
잰 듯한 언행과 잡기를 경멸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며 평생을
보내다가 지금은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연구서를 집필하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 불행했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남으로 해서 더욱 굳건한 도덕주의자로 변모해 갔다. 물과
불같은 두 사람이 어떻게 결혼에까지 이르렀는지 진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시집 식구들 몰래 필사적으로 바깥세상을
탐욕했다. 이름을 바꿔서 연극무대에 서는 대담함도 몇 차례나
되풀이 되었다. 아버지, 특히 할아버지와 백부들은 어머니가
광대인 것을 씻을 수 없는 수치로 여겼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끌려와 시집 식구들에 둘러싸인 채 가족
재판을 받곤 했다. 어느 날인가는 눈에 불을 파랗게 켜고 시집
어른들에게 대들다가 아버지 손에 끌려 광에 갇히기도 했다,
  어머니의 끓어오르는 피는 아들 넷을 연거푸 낳아 기르면서
조금씩 사그라 들었다. 막내였던 나는 자라면서 어머니의 한결
같은 푸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너만 안 낳았 더라도,
자식이 셋만 되었어도 도망가고 말았을텐데.
  어머니는, 천성적으로 배우였던 어머니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원했던 조신한 현모양처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가족들은 안심했다. 나이가 나이니 만큼,
결국은 무대의 꿈을 버렸구나, 하고. 아버지는 그즈음
어머니에게 집을 맡기고 2년동안 외국의 대학에 머물렀다.
어머니는 그 사이 무대로 돌아가버렸다. 집에서는 여전히
현모양처였지만, 복귀한 무대에서 어머니가 맡았던 역할은 뭇
남자를 전전하다가 병으로 죽고마는 늙은 카페 마담이었다.
  불행은 또 다른 이의 행복이란 말은 정말 욺은 것이었다. 별
생각없이 귀국했던 아버지는 밤마다 집을 비우고 무대에 서서
반라의 옷차림으로 열신하는 아내를 목도했다. 그 연극이
그토록이나 대성황을 이루지만 않았더라도, 그리하여 조용하게
공연이 끝나기만 했더라도 아버지와 가족들이 알아챌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만큼 어머니는 완벽하게 두 가지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신문과, 잡지와, 그리고 마침내 텔레비전의
화면에까지 등장하였으므로 당연히 집안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집으로 끌고오는 대신 영원히 바깥 세상으로
추방했다. 어머니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네 아들은 하루 아침에
어머니와 완벽하게 단절되었다. 형들은 어지간히 자랐던 탓에 큰
충격도 받지 않았다. 막내였던 나만 암흑 속으로 멀어졌다. 난,
사실을 말하면, 어머니가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권위에 눌려서, 어린 마음이 간직하고 있던 어머니에 대한
원망에 갇혀서 그 뒤 한 번도 어머니를 찾아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굳어 있었을까.
  나는 속 마음을 숨기고, 겉으로는 형들처럼 아버지에 순종하며
학업에 정진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쫓겨났던 어머니는
그렇게 매혹당했던 무대에 더이상 서지도 못하고 곧바로
입원했다. 인후암이었다. 어머니는 만 2년간 투병하다 끝내
숨졌다. 어머니의 병이 깊어졌을 때, 외가에서 자주 연락이
왔었다. 의식이 삼아 있을 때 자식들을 보게 해주자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단칼에 무 베듯이 말하곤 했다, 그 여잔
에미가 아니라 배우였소. 배우답게 죽으라 이르시오. 어머니는
끝내 가족들한테 외면당한 채 임종했다. 우리는 어머니의 부음을
신문에서 읽었다. 어머니의 이름 앞에 붙은 '연극인'이란 칭호를
보며 난 비로소 후두둑 눈물을 떨구었다.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자리, 연극인.
  어머니가 죽은 뒤,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풀었다. 아버지
가, 그토록이나 바위같이 단단했던 아버지가, 아무도 몰래 몇
년간 어머니의 병원비와 생활비를 모두 부담하고 있었음이
밝혀진 다음이었다. 나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모두를 그냥
사랑했다, 라고만 기억하기로 했다.
  지금, 아버지와 내가 서로 연락을 끊은 채 살고있는 것과
어머니 일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아버지는 세 아들이 모두
자신의 뒤를 이어 학자의 길을 걷는 것으로 만족했다. 나머지
아들 하나쯤은 저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나는 세 명의
형이 아버지를 둘러싸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멀리서
확인만 할 뿐이었다. 형들만으로도 아버지는 충분히 꿋꿋할 수
있으리라. 내게는, 노루봉의 나에게는,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의 이야기는 훗날 나의 유일한 사랑인 그녀에게 도란도란
털어놓았었다. 내가 어떻게 자랐으며, 부모님이 어떤
분이었는가를, 그리고 어떤 사건을 계기로 존재의 영험함과 놀랄
만한 평화의 시간들과 부닥치게 되었는지를 말할 때 그녀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끝없이 투명한 눈빛으로, 한없는 고요함의
영혼으로, 그토록이나 열심히 내 이야기를 받아들이던 그대.
  그런 그대를 사랑함이 왜 의혹이고 환상이었는가. 사랑의
시작이 그토록이나 섬광 같은 아찔함이었듯, 사랑의 진행 역시도
이미 내 의지는 아니었다. 나를 초월한 그 무엇이 쉴새없이
강풍을 일으켜 나를 그녀에게 밀어부치던 그 놀라움.
  내 짧은 사랑은 하나의 경이요 필연이었다.

 

    -- 다가오는 사람
  오래 기다린 사람같지 않게 남자는 담담한 표징이었다. 표정
뿐만 아니라 그녀가 자리에 앉고 한참이나 지나도록 자신의 오랜
기다림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시끌법석인 도회의 천박한
커피솝에서의 90분이 그에게는 도무지 아무 것도 아니란 듯이.
  "그래서 오늘은 안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별수없이 인희가 먼저 90분의 기다림에 변명의 운을 떼었어도
싱긋 웃고 그만이다. 괜찮은 남자. 그녀는 일단 좋은 점수를
매겼다. 두번째의 만남이지만 그런대로 점수를 깎아 먹을 언행은
하지 않고 있는 남자였다.
  오후에 '김진우'라는 이름을 대며 그가 전화를 해왔을 때
인희는 얼른 그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었다. 정실장의 성화로
이른바 맞선이란 것을 본 지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도 그랬다.
  공교롭게도 정실장이 자리에서 '김진우씨?' 라고 되묻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반색을 하고 빙글빙글 웃어대는 바람에
겨우 눈치를 챘다. 일이 밀려서 오늘은 안되겠다고 무작정
미루다가 남자의 고집에 밀렸다. 일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고,
정실장이 내일로 미루어도 괜찮다고 연신 부추겼어도
단골고객들에게 우송하는 상품정보지의 편집을 다 끝내고서야
일어섰다.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첫
만담에서부터 의외로 호감을 가진 상태였지만 그뿐이었다.
사람을 만나고, 무언가를 이야기해야 하고, 그러면서 서로의
소통을 위해 조금씩 자신의 사적 공간을 내보이고 하는 절차들이
그녀에게는 사뭇 피곤했다. 이것 역시 가족이라는 울타리 없이
혼자 살아 버릇한 그녀의 폐쇄성있지도 모른다.
  다른 것은 모르지만 사람에게 가까이 간다는 일은 그녀에겐
몹시 힘들었다. 그것은 마치 난해한 숙제처럼 귀하고
번거로웠다. 하지 않아도 될 숙제라면 무엇때문에 노트를 펼치고
연필을 들 것인가.
  "왼손잡이가 아니군요."
  남자가 불쑥 말했다.
  "네?"
  "스푼을 오른손에 쥐고 계시잖아요."
  "그래서요?"
  "지난 번엔 쥬스를 마셨구요.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는 제청을
한사코 거절하셨잖아요. 식사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눈에 띄게
냉정해지시더군요."
  우회해서 핵심을 찌를 줄도 안다, 이 남자는. 결코 만만치가
않다. 저 사람 좋은 웃음의 뒤를 다 알아내기까지 얼마나 되곤한
시간들이 흐를까.
  "맞아요. 난 왼손잡이도 아니고, 같이 밥이나 먹지요."
  시간은 이미 식사 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두 사람은 미친
듯이 뒤엉켜 있는 도심의 뒷골목을 뒤져서 겨우 호젓하고 깨끗해
보이는 한식집을 하나 찾아냈다. 수많은 간판들, 등심, 삼겹살,
순두부, 일식, 매운탕들을 다 젖히고 그가 택한 음식점이었다.
  값은 좀 센 듯해도 차려져 나온 백반은 품위가 있었다. 단정한
방안 풍경도, 수발을 드는 여자들의 횐 앞치마도 어느 식당과
달랐다.
  "굉장한데요."
  인희는 솔직하게 숱한 반찬 그릇에 담긴 내용물들에 감탄을
했다. 여러가지 나물들. 이름도 알 수 없는 젓갈들, 깔끔하게
담아낸 부침개와 아직도 김이 오르는 잡채며 생선조림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손쉽게 요리할 수 있는 종류로만 식단을
짜서 살아온 그녀였다. 어머니가 끓여준 된장찌개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그 흔한 입맛조차 갖주지 못한 스산한 세월을
지나오며 인희는 설렁탕이거나 김치찌개 같은 식당용 요리에
길들여져 있었다. 갈치속젓이거나 꼴뚜기젓 같은 것은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다.
  그녀에게 하고많은 식당을 다 젖히고 제대로 차린 한정식을
맛보게 한 그 남자의 깊은 속셈은 그날 이후에, 그것도 한 다리
건너 정실장에게 들었다.
  "인희씨에게 가정집 요리를 맛뵈고 싶었대. 어머니의 솜씨,
고향의 맛 같은 그런 거 말야."
  어머니의 솜씨.
  인희는 문득 볼이 확 달아오르는 수치심에 고개를 숙였다.
가엾은 여자야. 자네가 잘 돌봐주라구. 그럼요. 그래서 제가
고향을 맛볼 수 있게 그런 음식점을 고른 거라구요...
  두 남자가 그녀를 놓고 수근거렸을 말들이 머리 속을 벌떼처럼
윙윙거리시 날아다녔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사라지지 않던 '어머니의 솜씨'라는 말이 점점
김진우란 남자의 전체를 판독할 수 있는 부호로 여겨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 필경 따뜻함으로 채워진 심장을 가졌을 것이다. 그라는
남자는 결혼을 사업으로 생각하는 이 시대의 많은 미혼 남들과는
다름이 틀림없다. 사업을 합께 할 상대로 이 오인희란 여자처럼
부적격이 또 있을까.
  그라는 남자는 한 인간이 지닌 쓸쓸함을 같이 느끼고 함께
어루만져 줄 소양을 지녔으리라. 그라는 사람은...
  그러다 문득 인희는 픽 웃어 버렸다. 인간에 대한 오해는 늘
이렇게 비롯된다. 한 인간이 보여준 몇 가지 언행을 확대
해석하고 마음떨림을 보태는 이 작업은 결국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파국을 맞는다. 잘못은 전적으로 오해한 사람에게
있다. 조심할 것. 사람을 믿는 일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할 것.

 

    -- 일요일의 비
  일요일 오후.
  비가 몹시 내리는데도 혜영은 그녀를 위해 새로 담근 김치 한
통을 들고 왔다. 얼굴이 수척했다.
  '어제 병원에 다녀왔어. 올 겨울엔 엄마가 된대 "
  혜영은 담담하게 자신의 임신 소식을 알렸다. 결혼 2년만의
임신이었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고집하던 혜영이었다. 세상에
내팽개쳐져서 긁히고 할퀴며 살아온 이력은 스스로만으로도
충분하다던 혜영의 고집을 남편이 결국 꺾은 모양이었다.
  "잘했어."
  인희는 그렇게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혜영의 마음은 곧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녀 또한 만약 결혼을 한다해도 아이는
낳지 않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품고 있었다.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 이 삶이.
  이렇게 말할 수만 있다 해도 그녀나 혜영이 출산을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혜영의 남편은 이 세상에 혈육 한 점 남기지 않고
떠나는 것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으리라. 그들 부부처럼 서로의
밑바닥까지 다 감싸주며 아늑한 체온을 나누는 사이라면 혜영의
고집은 정말 고집일 뿐이다.
  "맞아. 그이한테 잔인하게 굴고싶지 않았어. 알잖니, 그 사람.
강아지만 봐도 기어이 한 번 안아보고 가야 직성이 풀리는데. "
  혜영은 '우리 부침개나 해먹자' 하면서 금방 말꼬리를 돌려
버렸다. 결혼 안한 친구에게 남편 자랑하는 것, 또는 부부생활
내비치는 것 등을 끔찍이도 자제하는 혜영이었다. 결혼이라는
안정권으로 먼저 달아난 것으로 친구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여기는, 딱하도록 착한 친구였다.
  해괴한 일은 그날 밤에 일어났다. 남편이 초상집 밤샘하러
갔기 때문에 집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혜영이랑 함께 아파트
가까운 곳에서 냉면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옆집 여자를 만났다.
  "아니, 집에 없었어요?"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가쁘게 말을 이어갔다.
  "세상에. 마침 집에 없었구나. 난 또 집에 갇혀서 꼼짝도
못하고 당하는 줄 알았지."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멎고 인희는 자기 집앞 복도에
널려있는 깨진 병조각들에 소스라쳐 놀랐다.
  "말도 마세요. 현관문을 걷어차며 고래고래 악을 쓰는데. 경비
아저씨가 와서 겨우 끌고 갔어요. 술을 엄청 마셨더라구요 혀가
꼬부라져서 말도 제대로 못해요."
  "누군데요?"
  짐작도 못할 이야기라 인희가 여자의 말꼬리를 자르고 물었다.
  "낸들 알아요? 한 오십 되었을까, 행색은 영락없이
거렁뱅이더라구요. 경비아저씨가 이 집 주인과 무슨 관계냐고
물어도 횡설수설이고, 아이구, 주머니에서 소주병이 두 개나
나오더라니까요. 그걸 내던져서 박살을 냈으니..."
  "집을 잘못 찾았겠지."
  혜영은 쓸데없는 일에 신경쓸 것 없다는 투로 말했으나 인희는
뭔가 꺼림칙했다.
  집에 들어와 바로 경비실에 인터폰을 걸었다.
  "술주정뱅이인가봐요 딸네 집에 왔다고 고집을 부리길래 그
아가씨한테 댁같은 아버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다니까
금방 딴소리를 하고... 아무튼 워낙 술에 취해 있어서 따질
계제가 못되었어요. 염려 마세요. 다시 찾아오면 경찰서에
넘길테니까. 아까 잠깐 자릴 비운 새에 그만 널름 올라간
모양이에요. 죄송스럽구만요."
  경비는 그저 책임을 다 못해 미안하다는 말뿐이고, 혜영은
집을 잘못 찾은 술주정뱅이의 실수라며 대수롭잖게 넘어가지만
밤새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혹에 잠겨야만 했다.
  "그 밤, 나란히 이부자리 속에 누워서 혜영이 소근거렸다.
이렇게 포근한 잠자리에 누워 두 발을 쭉 뻗고 있으면 문득 겁이
나곤 해. 내가 이렇게 호강해도 좋은건가 하고 말야. 등에 닿는
푹신한 요의 감촉이 너무 근사해서 어쩔 땐 눈물이 핑 돌기도
해."
  "바보 같은 소리."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그녀도 가끔씩 그랬다. 그런 밤에는
꼭 악몽을 꾸었고 새벽에 잠이 깨면 너무나 삭막해서 오들오들
떨곤 했었다.
  "그래. 난 바보야.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생각나니?
시청에서 손님이 오는 날에는 이불장의 쓰레기 같은 담요는
창고에 처박혀지고 노오란 천을 씌운 솜이불들이 차곡차곡
개켜져 있었지. 그 이불이 너무 고와서 살짝 꺼내 한 번 덮어
보았다가 총무할머니한테 얼마나 당했다고."
  생각이 났다. 그 냄새나는 몸뚱이에 새 이불이 당키나 하냐며
매몰차게 머리통을 쥐어박고나서 이불을 탁탁 털어대던 그
흉물스런 노파.
  원생들이 총무할머니라고 불렀던, 그러나 인희의 어린 마음
속에는 마귀할머니로 새겨져 있던 그 사람. 어디
인희뿐이었을까. 총무할머니의 가시돋친 말이나 차가운 눈매에
마음을 다쳐보지 딴은 아이가 없을 정도로 그나마 스산한
세월들을 더욱 힘겹게 한 사람이었다
  인희의 기억으로 당시의 총무할머니는 오십을 갓 넘긴
나이였다. 원장을 '원장할아버지'로 호칭했으므로 원장의
부인이고 실질적으로 천사원 살림을 도맡아 보던 총무를
'총무할머니'로 불렀을 뿐이었다.
  원장할아버지는 서울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대전의 천사원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내려왔었다. 어린 인희의 판단으로도
원장할아버지는 정말 좋은 분이었다. 마귀할멈 같은
총무할머니와 어떻게 결혼했을까 하는 의심이 들 만큼 온후하고
정다운 분이었다. 그렇지만 원장할아버지는 천사원 내부 사정은
전혀 몰랐다. 천사원에 와있는 주말 동안에도 늘 바빴기에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래도 원장할아버지가 와있는 주말에는 천사원에 생기가
돌았다. 무언가 상을 받은 아이들은 허리춤에 상장을 감추고
있다가 그가 지나가면 불쑥 내밀곤 했다. 그러면 원장할아버지는
그애가 누구든 덥썩 안아주며 볼을 부볐다.
  "아이구, 우리 강아지가 상장을 받았구나. 아이구 요 예쁜
강아지."
  원장할아버지는 정말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한참을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그것이 좋아서 안겨서
칭찬받는 게 좋아서 한사코 상장을 감추고 있다 내밀거나, 예쁜
들꽃 한 송이를 불쑥 선사하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곤 했었다.
물론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는 그 일이 부끄러워 가만히 참긴
했었다.
  원장할아버지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조금 주고 서울로
돌아가면, 총무할머니가 일주일 사이에 그 신뢰를 바싹 깨부수고
재까지 뿌리는 형국이었다고 하면 적당한 표현이 될까. 인희는
지금도 그들 두 사람이 부부인 것에 여전히 고개가 갸웃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총무할머니, 소등 시간 후에도 불이 켜져 있으면 우당탕
방문을 열고 들어와 매섭게 스위치를 내려버리던 사람. 이불이
짧아 발이 나온다고 말하면 양말 신고 자면 되지 별 호사스런
소리도 다 한다고 눈 홀기던 그 할머니.
  인희는 더이상 그 시절의 악몽 같은 시간을 생각하기 싫어
이불을 끌어당긴다. 옆에서 혜영이 한숨처럼 큰 숨을 내쉬며
돌아눕는다.
  "좋은 이불을 덮으면 멋진 꿈이 꾸어진다는 동화를 읽었었지.
그렇다면 요즘은 늘 멋진 꿈을 꾸어야 할텐데. 그러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되더라."
  혜영은 슬픈 말도 색깔없이 말한다. 색깔없는 목소리 속에
묻은 어슴프레한 절망을 나눠 가지며 인희는 눈을 감았다. 두
사람 분량의 멋진 꿈이 살금살금 다가오다 놀라 달아나지 않도록
가만히 눈을 감고 고요히 잠을 청했다

  나는 꿈도 혼자 꾼다
  그러므로 내 꿈에는 색깔이 없다
  오, 이 묽은 무채색
  꿈속에서 나를 보는 시간이
  너무 짧다

  저녁에 나 혼자 서 있는 앞에는
  허허, 벌판
  가끔씩 보는 나무는 건강하지만
  언제나 꿈속에서 나 혼자 있듯이
  나무는 혼자 서 있다

  혼자서 꿈을 꾸고 있는 그는
  나처럼 혼자 중얼거리고
  노을을 배경으로 우두커니 이켠을 보고 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다 점점이 사라진다

  꿈도 이제 혼자서만 꾸어야 하는 시간이
  무서운가보다


    -- 박해석 [허허, 벌판]

    -- 그 남자의 선물
  "인희씨? 여기 백화점 정문입니다. 나오실 것은 없구요. 정문
안내한테 뭘 맡겨놨으니 퇴근할 때 잊지 말고 찾아가세요.
출장이라서 한 일주일 서울을 떠나있을 겁니다. 돌아오면 다시
전화할께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그녀가 무어라 말할 사이도 없이 김진우의 전화는 끊겨졌다.
시끄러운 소음으로 보아 정문 옆의 공중전화인 것은 확실한
듯했다. 곧장 내려가면 그를 볼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잠자코
하던 일을 계속했다.
  퇴근 때 정문 안내에게 들렀더니 꽤 묵직한 보따리를
내어주었다. 안내양이 오히려 내용물이 궁금하다는 듯
풀어보라고 성화였다.
  "말쑥한 남자가 와서 맡긴 건데 아휴, 냄새가 굉장해요. 혹시
된장같은 거 아닌지 몰라."
  무심코 보자기를 풀어보니 종이상자가 나오고 상자 속엔 작고
예쁜 두 개의 항아리가 들어있었다.
  두 항아리 속엔 정말 된장과 고추장이 너무나 얌전하게 담겨져
있었다.

    -- 편지 2
  오늘 노루봉에 올랐습니다. 여긴 노루봉 정상입니다. 이
향긋한 바람이, 이 청정한 하늘이, 이 벅찬 평화가 너무
아까워서 그대에게 짧은 편지를 씁니다. 바람과 하늘과 그리고
온 우주의 평화를 담아 그대에게 보냅니다.
  좋은 기후 속에 있으면 사람의 몸과 마음도 부드러워집니다.
나는 그대가 이 화창한 봄에 더욱 건강을 키워서 푸른 나무로
우뚝 서길 기대합니다. 당신의 안녕없이는 내게도 안녕이
없습니다. 당신은 내 삶의 영원한 지평입니다. 멀리 있어도,
떠나간다 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강요도, 헛소리도 아닙니다. 나는 그대가 언젠가는 이 말들을
이해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왜 내가 그대로 인해 우주의 평화를
더욱 절실하게 누릴 수 있는지를, 이 터무니없는 집착이 결국은
섭리에 의한 택함이었다는 진실을 그대는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대도 서두르지 마십시오. 온갖
일들이 예정된 날들이 다 지난 뒤에, 그때 그날이 옵니다. 내가
아무리 소망을 거듭한다 한들 정해진 순서를 뒤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아니 나는 그대 방황의 맨마지막 자리에
서있는 운명입니다. 나는 운명에 손대지 않습니다. 하물며
온전한 그대의 사랑을 얻게 될 그 운명임에야 어찌
손대겠습니까.
  또 내 말이 길어질까 두렵습니다. 단지 바람의 향내만
전하겠다는 글이었습니다. 그대, 잠시도 내 정신을 놓아주지
않는 그대의 아름다운 이름을 이 바람에 새깁니다. 부디
건강하길.

 

    -- 생의 주의 사랑
  뭔가 달라졌다. 어쩌면 호흡하는 공기가 달콤해졌을까 아니면
세상을 밝히고 있는 전등의 족수가 바뀌었을까. 달고 밝다. 달고
밝음을 주의할 것.
  인희는 요즘들어 스스로에게 잦은 경고를 내린다. 조심할 것,
주의할 것, 명심할 것,....
  자신의 감정상태에 자주 제동을 건다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일상에서의 일탈이 일어나고 있다는 징조이다. 그것을
느낀다, 그녀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어둠이 재게 깔리는 초저녁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골목에서 놀고
있을 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영애야, 두호야, 순희야...
된장이거나 김치냄새를 묻히고 나온 아낙들이 각자 하나씩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간 뒤에도 호명을 기다리며 머뭇거리던
슬픔. 이름을 불리워보지 않은 자는 모른다. 자욱하게 몰려오던
외로움을.
  그녀에게 있어 삶은 호명당하지 않은 자의 자욱한 외로움을
향한 질긴 투쟁이었다. 그것은 정신을 뜯어 고쳐야 하는
힘들고도 대대적인 싸움이었다.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통용되는
상식에 역으로 대응할 것.
  남들이 외롭다고 느끼는 모든 일에 담담하자. 남들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일에 시큰둥해지자. 남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모든 일에 반기를 들자. 남들과는 다르게 세상을 읽는
독법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단지 다르기 위해서 다를
뿐인 대응은 배격했다. 그것은 정신의 고립만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그녀가 원한 것은 고립이 아니라 독립이었다. 상처받지
않고 독립할 수 있기를 희구했다. 상처만 피하려다 보면
세상에서 고립되고 말 것임을 우려했다.
  철저하게 스스로를 훈련했다.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덜 다치며
사는 법을 익혀야 했다. 두리반상에서 이마를 맞대고 저녁밥을
먹은 기억이 없는 자는, 지독한 복통이 와도 배를 문대줄
어머니의 약손을 가지지 못한 자는, 비오는 살의 교문 앞에서
우산을 들고 하교길을 맞으러 나온 가족을 곁에 두지 못한 자는,
그런 자는 다르게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하여 피까지 차가운 인간이 되었던가. 그녀는 스스로의
엄격한 훈련이 거기까지 이르기를 바라기는 했었다. 한때는
저기에 이르렀다고 믿기도 했다. '천사원'을 나오던 날이
그랬다. 의례적인 인사들을 받으면서 시종일관 차감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이, 단 한 번의 돌아봄도 없이 천사원 마당을 가로지를
수 있었던 것이, 그리고 뒤늦게 외출에서 돌아온 총무할머니가
천사원 정문 앞에서 그녀를 껴안으려고 했을 때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이 모두 이를 깨물며 견딘 훈련의 결과였었다.
  그때 얼마나 흥분했던가. 삼들은 모두 휩쓸려 가고야 마는
감정의 파도를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거의 환희를
느꼈었다. 물론 열 여섯의 덜 여문 정신이 보여준 어쩌면
유치하달 수 있는 경험이기는 했다. 세월이 더 흐른 뒤에도
때때로 비슷한 환희에 휩쓸리는 수가 가끔 있었다. 그것이
결국은 또다른 감정의 파도임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그런 순간들이 적잖은 위안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정신의 살집이 채워지고 뼈대가 자리잡았다. 이제
후련으로 닥달하기로는 너무 자라버렸다고 생각되는 지금에
와서도 그녀는 가끔씩 마음을 다잡곤 했다. 마치 한동안 연습을
게을리 했던 운동선수가 시합에 임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처럼. 육체의 근육이 그렇듯이 정신의 근육 또한 단련없이는
불어지고 만다.
  풀어졌는가.
  그 동안 풀어졌는가.
  인희는 마음의 끈을 바싹 다잡아 쥐고 달콤한 공기와 밝은
세상을 경계한다. 이건 무슨 장난이 아닐까. 총무할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매일갈이 쏟아지던 그
힐난,
  "장난치지 마! 느그들 주제에 장난질이 당키나 해!"
  그래. 아이들의 구슬이나 딱지 혹은 종이인형 따위를
빼앗아가며 장난치는 녀석들은 저녁을 굶기겠다던 총무할머니의
말이 옳다. 장난에 현혹당했다가는 밥이, 일상이, 간신히 얻어낸
평화가 산산조각으로 부숴져 버리리라.
  김진우.
  다가오는 그 이름을 향해 인희는 뒤돌아선다. 달콤해지지 말
것, 세상이 환하다고 느끼지 말 것.
  그러나, 그럼에도, 자꾸 뭔가 달라져 가고 있음을 그녀는
안다.

 

    -- 대화
  "선물을 고르는 방법이 꽤나 독특하시데요. 그걸 어떻게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의외였어요."
  "아, 그거...."(대수롭지 않다는 남자의 표정.)
  "시장에서 샀던가요?"
  "아니, 그런 걸 시장에서 사기도 하나요?
  " 어머님한테 직접 부탁하셨든가요?"
  "그럴 수도 있었지만."
  "그럼 누구한테?"
  "큰형수한테 장독대 보물들을 좀 덜어 주십사고 간청을
드렸지요." (씨익 웃는 남자.)
  "설마 여자한테 줄 선물이라고 털어놓지는 않으셨겠죠."
(여자는 결코 웃지 않는다.)
  "눈치야 채셨겠쪼."
  "다른 사람한테도 이런 선물을 하시나요? 된장, 고추장이
번거롭다면 예를 들어 딸기잼이나 장아찌 같은 종류로."
  "처음입니다." (비로소 웃음을 거두는 남자, 자세를 고쳐
앉는다.)
  "왜 내가 그 처음이 되었죠?"
  "인희씨는 내가 보낸 된장, 고추장 맛이 어땠다는 말씀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는군요."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인다.)
  "제 질문에 답을 해주세요."
  "왜, 왜냐고 묻지 좀 마세요. 그러고 싶었어요. 꼭 필요한
것일 수 있겠단 생각도 용기를 주긴 했지요."
  "그렇군요. 역시 그랬어요." (여자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다물어 버린다.)
  "뭐가 역시 그랬다는 이야기죠?"
  "..." (여자, 답을 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표정이다.)
  "무슨 뜻인지 해명을 해주셔야지요."
  "그렇게 캐물었으면 내게도 기회를 주는 게 대화의 예의가
아니든가요?" (남자도 썩 집요하다. 그러나 짜증의 기미 같은
것은 없다.)
  "알고 싶으세요?"
  "네."
  "말씀 드리죠. 꼭 필요한 것이 몇 가지 있기는 하지요. 누구나
그렇듯이 말예요. 하지만 된장이나 고추장이 바로 그것은
아니었어요. 나한테 그런 것이 꼭 필요하리라고 믿은 것은
진우씨 오해일 뿐이었죠."
  "아니, 내 말은, 고추장이란 그것, 흑은 된장만을 말하는게
아니었어요. 일테면 그런 것으로 가시화되는 인희씨의 결핍된
부분들을," (그때 여자가 말을 자르고 나선다.)
  "바로 그것이 오해라는 거지요"
  "무엇이? 결핍이?"
  "결핍이 있다고 믿는 정신이."
  "아, 인희씨. 말장난 같지만 지금의 인희씨 말들이 내게는
결핍의 확실한 징후로 들리는데요." (남지는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담배를 비벼 끈다.)
  "역시 말장난처럼 들리겠지만, 징후로 파악하는 인식의 고
정관념 또한 진우씨의 오해일 밖에요." (여자는 빙긋 웃는 듯
하다.)
  "아니, 그래, 좋습니다. 그 오해를 해독하기 위한 시간은
이제부터라도 충분할테니까 유념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된장과
고추장을 보낸 것은 아주 유효한 일이었네요.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도 대단한 수화이니까요.
그렇지요?"
  "그렇군요" (여자는 좀더 확실히 웃는 표정이다.)
  "이젠 겁이 나서 출장지에서 무심코 인희씨가 생각나 사들고
온 것도 내놓지 못하겠어요. 이거, 어떡하지요?" (남자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얹어놓는다.)
  "노리개군요."
  "맞아요. 옥으로 빚어 속에 사향을 넣었다는군요. 옥향이라고
부른대요." (남자는 조심스런 말투로 설명한다.)
  "옥향...."
  "예 이 옥향, 접수하시겠어요?"
  "접수할께요. 예쁜데요."
  "아이구 천만다행입니다. 등에 식은땀이 흐를 지경입니다."
(남자는 밉지 않게 넉살을 부리고 여자는 허수없이 그의 밝음에
전염되어 버린다.)

    -- 짙어지는 의혹
  한동안 끊겼던 괴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금요일 저녁이었다.
때이른 수박 한 덩이가 관리실에 맡겨져 있다가 그녀에게 건네진
다음이었다. 지난달에 한 번 찾아와 아가씨 혼자 사느냐고
묻고갔던 아주머니가 낮에 찾아와 맡겨놓고 갔다는 것이었다.
  수박의 처자가 바로 괴전화 속의 중년여인이었다는 사실은
본인의 말로 밝혀졌다.
  "저, 아가씨가..."
  목소리는 여전히 머뭇거리고 심하게 불안한 기색이었다.
  "말씀하세요."
  인희는 비로소 입을 여는 목소리에 긴장했다. 누구일까.
  "아니, 할 말은 없고... 나는 그저... 그러니까 내가...
불쾌하겠지만..."
  횡설수설이었다. 도대체 맥을 잇기가 어려운 말에 긴장 대신
짜증이 스며 나왔다. 정신건강에 이상이 있는 여자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그 난리를 피웠다는 말을 듣고, 아휴, 영문도 모른 채 당했을
것이라서... 그러니까, 아니, 다른 말은 필요없고,
미안하다고... 말도 안되는 짓이지만 그래서 수박을... 이상하게
생각말고..."
  인내에도 한계가 있었다. 인희는 더이상 그 횡설수설을 참아낼
수 없었다. 요령부득의 말이 더 계속되기 전에 여기에서 이
정신나간 여자를 거절해야 했다.
  "수박은 관리실에 그대로 있으니 찾아가든 말든 알아서
하시고, 이 따위 헛소리를 치료해 줄 병원부터 찾아가세요."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곧장 수박을 들고
관리실로 내려갔다. 내일 찾으러 오지 않으면 아저씨들이나
나누어 잡수라고 말했다.
  그러나 수박을 떠맡기고 돌아오면서 내내 찜찜한 마음이었다.
정신병자는 아닐 것이다. 수박을 사들고 정확히 그녀를
찾아왔으며, 수박을 왜 사왔는지 설명하려고 전화도 했다. 집과
전화번호를 확실하게 알고있는 이 여자, 끝없이 주저하고 심하게
떨어대던 그 목소리.
  착오라 해도 기분은 나빴다. 틀림없이 누군가의 착각으로
그녀가 이 관계 속에 끼어 들었겠지만 그래도 찜찜하다. 착오라
해도 왜 하필?
  그러다 문득 지난 일요일, 혜영이가 와서 자고갔던 그 비오는
일요일의 일에 생각이 미쳤다. 그녀들이 저녁을 먹고 돌아왔을
때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었던가. 난데없는 술주정뱅이가
찾아와서 그녀의 현관문을 걷어차며 고래고래 악을 쓰고
돌아갔다고 했다.
  '그 난리를 피웠다는 말을 듣고, 어휴, 영문도 모른 채 당했을
것이라서,'
  머리를 스치는 여자의 그 말. 혹시 술주정뱅이의 주정을
사과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틀림없었다. 전화 속의 여자 목소리는 분명 그때 그 일을
사과하는 것이었다. 수박은, 지금 관리실에 돌려주고 온 그
수박은 사과의 표시이고.
  인희는 불현듯 온몸을 떨었다. 요근래 그녀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괴이쩍은 일들을 이렇게 한 줄에 꿰어놓고 상상을
하니까 일시에 연결이 돼버리는 것이었다. 잦은 괴전화, 낯
모르는 여자의 방문, 역시 낯 모르는 남자의 행패, 수박, 여자의
횡설수설,
  뭔가 풀릴 것 갈았다. 인희는 꼼짝도 않고 앉아서 줄곧
그것들의 연관관계를 풀었다. 남자와 여자는 부부이다. 바로
그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큰 의문은 해소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서부터가 오히려 더욱 깊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들 중년의
부부가 왜? 무엇때문에
  그녀는 다시 관리실로 내려갔다. 마침 그때 술 취한 사내를
끌어냈다는 경비가 근무를 하고 있었다.
  "아이구, 신경쓰실 일이 못되는구먼요. 술이 엔간히
취했어야죠. 첨엔 여기가 딸네 집이라고 박박 우기다간 나중에는
또 딸은 아니고 그냥 아는 집이라고 했다가, 술주정뱅이야 원래
나오는 대로 뱉는 법 아닙니까."
  딸?
  딸이라고?
  인희는 그만 거기서 길을 잃고 만다. 이 수수께끼를 어찌어찌
풀어볼 것도 같았는데 딸이 어쩌구 하는 바람에 긴장이 스르륵
풀려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대체 그런 허황한 소리를 어찌
단서랍시고 챙겨 듣겠는가 말이다. 두 사람 다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고 더이상 헛소리에 말려들지 않겠다고 작정하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하기야 안팎이 모두 오락가락하는 정신이란 것도 해괴했고
자신이 그들 부부에 어찌 끼어들게 되었는지 그 부분도 적잖이
석연찮기는 했다. 허나 그뿐, 인희는 일단 생각의 헝클어진
실타래를 뭉쳐서 치워 버렸다. 내일은 홍보실 식구끼리의
야유회가 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청명한 얼굴로
들바람을 쐬고 싶었다.

    -- 풀밭에서
  아카시아 향내가 온 천지에 가득하다. 바람에 눈처럼 아카시아
꽃잎이 흩어지곤 했다. 잎사귀를 반짝이며 흔들리는 나무들,
땅에서 풍겨오는 훈김, 밟히면 밟히는 대로 누워서라도 자라는
연초록 작은 풀들.
  아름답고 향기로운 계절이다. 점심 후의 나른함에 휩싸여 있던
미스 김은 나무둥치에 몸을 기대고 졸고 있다. 사진담당
윤성기씨와 맥주잔을 기울이던 정실장은 아까부터 잔을
들어보이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이다.
  "일루 와. 이런 날 한 잔 안하면 죽어서도 후회할걸."
  이상하다. 인희는 정실장이 죽어서도 어쩌고 하는 말에 훔칫
놀랐다. 그녀도 여태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름으로
가는 문턱, 이토록 청청하고 온화한 대기 속에 앉아서 문득
떠오르는 게 죽음 그 이후였다.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했던가. 목숨이 스러지고 땅에
묻혀 먼먼 훗날 이름모를 잡초거나 지천에 깔린 저 아카시아
꽃잎 하나로 이 세상에 다시 얼굴을 내밀 수 있을까.
  아름다움이나 행복함을 느끼는 감정의 이면엔 세상에 대한
끝없는 애착이 있는 법이다. 그녀는 모처럼 근교로 나와 초록의
덩어리 속에 자신을 쉬게 하면서 세상이 참 아름답다고 느킨다
그리곤 이내 자신의 느낌에 낯설어 한다.
  이 세상은 언제나 남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남의 것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수치일까, 동화일까,
  그때 정실장이 기어이 거품이 넘실넘실한 종이컵을 들고 그녀
곁으로 왔다. 정실장은 지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기분 좋을
때 그는 자꾸 앞머리를 치켜 올리는 버릇이 있었다.
  앞머리를 치켜 올리며 정실장이 은근히 물었다.
  "진우 그 자식이 못되게 굴진 않아?"
  마치 못되게 굴면 한 대 후려치고 말겠다는 투다.
  "우린 아직도 탐색 단계예요. 건너뛰지 마세요."
  인희의 말에 정실장이 손을 휘휘 내젓는다.
  "무슨 말씀. 진우가 부모님들 앞에서 색시감 데려오겠다고
공표를 했다던데?"
  부모님한테 인사를? 인희는 말없이 맥주거품에 입술을 대본다.
쓰고 달다. 쓰지만 달고, 달지만 쓰다. 진우라는 그 사람이
그렇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를 떠올리면 쓰고 달다. 나는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쓴 쪽으로? 아니면 달콤한 쪽으로?
무엇이든간에, 나는 결국 어디에 기댈 것이다.
  쓰지만 달다, 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쓴 것을 감내하고 행복을
지향하겠다는 자세이다. 반대로 달지만 쓰다는 말은 달콤함의
유혹에 넘어가서 절망과 맞부딪치는 일은 가급적 피하겠다는
뜻을 포함한다. 나는 어느 쪽인가.
  인희는 종이컵 가득 채워진 맥주를 거의 단숨에 들이키고는
정실장에게 빈 잔을 내보인다. 기분이 좋은 정실장은 얼른 잔을
채운다. 그때서야 졸음에서 깨어난 미스 김이 한 마디 거든다.
  "하여간 실장님 때문에 다들 술고래가 된다니까요. 언니도
소주 한 병이 기본이라면서요? 아휴, 난 다 배워도 술은 못
배우겠어."
  미스 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인희는 홍보실
근무경력만큼 음주경력도 늘어나서 미스 김 말대로 소주 한
병쯤은 기본이다. 내키면 가끔씩 집에서도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흔치는 않지만.
  술은 탱탱했던 흥분을 느슨하게 풀어준다. 인희가 술을 마시는
날은 그런 날이다. 너무 당겨져 있어 신경이 끊어질 것 같다는
기분이 들면 냉장고에서 소줏병을 꺼내 혼자 식탁에 앉는다.
  소주는 맑다. 맑은 것이 좋다. 그녀는 한 잔, 두 잔, 거듭 될
때마다 자신이 소주처럼 발효되어 맑아지고 싶다고 소망한다.
무언지 더럽고 탁한 것에 둘러 싸여 있다는 느낌이 늘 그녀를
괴롭힌다. 그녀는 생각한다. 내가 정말 더럽고 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혹시 나 스스로가 아닐까. 출생의 비밀
  버려진 생명. 그 속에 온갖 더러움과 추함이 다 담겨있지
않은가. 아, 더럽고 추한 출생의 비밀.
  야유회는 즉흥적인 계획만큼이나 싱겁고 덤덤하게 끝났다.
땡볕이 나오기 전에 풀밭에 앉아 조촐하게 도시락이나 먹어
보자는 긴급제안을 한 사람이 미스 김이었다. 마침 한가했던
때인지라 정실장이 며칠 뒤 토요일로 날을 잡았고, 오후부터
흙먼지를 날리며 자가용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그들은 일찌감치
자리를 걷었다. 정실장과 윤성기씨는 시내로 나오자 이내
술집으로 빠졌고 미스 김은 뭔가 아쉬운 듯 인희에게 약속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냐. 집에 가서 쉴래."
  "언니 집에 나도 가면 안될까요? 언제부터 가보고 싶었는데."
  "나중에. 지금은 피곤해."
  인희는 미스 김이 다른 말을 하기 전에 단호하게 거절한다.
세상이 .모두 제 편이라고 믿으며 자라온 미스 김 같은 사람은
이만한 거절에도 금세 낯이 붉어진다.
  "언니는... 좀 이상해."
  야속한 빛을 감추지 않고 돌아서는 미스 김의 뒷모습을 오래
쳐다보다가 인희는 불현듯 맹렬한 노여움을 느낀다.
  내가 이상한 것은 절대 내 잘못이 아니야. 절대로.

    -- 예감이 싹트다...
  노루봉에서 보낸 편지 두 통이 한꺼번에 도착했다. 날짜를
살피니 하루 간격으로 쓴 글들이다.
  앞에 쓴 편지에서 그는 날을 확정해서 서울에 오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탑을 쌓듯이 그리움을 쌓았는데 이제는 더이상 마음을
얹을 데가 없노라고 했다. 그대에게 가서 모아둔 그리움을
불사르고 돌아오면 숨쉬기가 훨씬 편할 것 같다고 써있다.
  그리고 다음날 쓴 편지에서 그 사람은 자신의 말을 지우고
있었다.
  '... 지쳐서 쓰러지더라도 이 고통이 행복임을 잠시 잊었나
봅니다. 그대에게 가고 싶은 마음이야 하루에도 수천 번 이지만,
그렇지만 욕망을 이기는 기도 또한 수천 수만 번에 이릅니다. 이
욕망이 식은 다음에 다가올 사랑을 나는 더욱 원합니다. 이곳에
남아서 계속 그리움의 탑을 쌓는 것이 아직은 나의 길입니다...'
  그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일까. 무엇에 기대어
이토록이나 절절한 사랑을 만들 수 있을까. 인희는 비로소
그에게서 오는 힘, 어떤 영혼 같은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편지의 마지막 귀절.
  '당신이 다른 누구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나는 당신이
택한 그 사람까지 내 사랑 속에 품겠습니다.'
  그는 멀고 먼 그곳에서 끊임없이 그녀를 향해 줄을 던지고
있다. 그 줄이 어느 날인가는 그녀를 송두리째 묶어버리고야
말리라는 막연한 예감, 인희는 이 어렴풋한 예감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오래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 전환점에서
  인생의 급커브.
  지난번 아마도 나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다 말았을 것이다.
내가 왜 법관으로서의 야망을 포기하고 산에 머물게 되었는지를.
  사법고시 돌파를 위한, 그것도 수석합격을 목표로 한 내
야심찬 계획과 타오르는 투지를 심장에 담고 산속의 암자를
수소문하러 다닐 때만 해도 나는 내 인생이 그처럼 어이없이
궤도 수정을 하리라곤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 중이던 큰아들, 국내에서 박사 코스를 밟고있던
둘째아들, 그리고 의과대학 졸업반이었던 셋째아들에 이어
막내까지 순탄하게 수재 소리를 들으며 학업에 정진하고 있었던
터라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도 오히려 행복한 듯이
보였었다. 내가 법대에 진학한 것도, 그리하여 사법고시를
계획했던 것도 그런 집안 분위기를 생각하면 사실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남자들만 살고 있었다 해서 집안이 썰렁했던 것도 아니었다.
둘째 형은 요리를 좋아했고 셋째 형은 결벽증에 가까운
청소광이었다. 막내였던 나는 형들이 시키는 일에 다소곳했다.
살림을 돌봐주는 아주머니가 일주일에 서너번만 드나들어도 집은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보다 도리어 훈김이 돌았다. 아버지는
아내가 사라짐으로 해서 가정의 온전한 평화를 맛본 사람이었다.
늘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애를 태우던 아내 정실과 사랑은
많았지만 안주함은 천성에 맞지 않았던 아내가 있었던 시절에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아버지의 너털웃음을 나는 어머니 죽음
이후 더 많이 보았다.
  아버지는 재혼의 의사가 분명히 없었다. 우리 형제들도 그런
아버지를 이해했다. 아버지에겐 학자의 명예와 자신의 뒤를 잇는
아들 넷으로도 여생이 충분했다. 나에게 수석합격을 바라도록
암시를 준 것도 아버지였다.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거부감도 느끼지 않았다. 나에게 주어진 행운 가운데 하나는
어떤 갈등도 없이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반목하고, 아버지를 증오하고, 결국 평생 아버지를
극복하려 애쓰며 사는 아들들을 나는 많이 만났다.
  아버지에 대해서, 그리고 당시의 집안 분위기에 대해서 이토록
설명이 긴 까닭은 나에게 닥쳐온 궤도 이탈에 행여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의혹할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면 반드시 그 일에 대한 동기와 배경,
그리고 정신분석을 행하려고 덤빈다. 그렇게 해서 밝혀지는
사실들은 모두 진실일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그런
억지 분석에 의해 억지로 이해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 이해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것의 진실은 우주와 인간 사이에
묵계된 영원한 약속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된다. 나는 이 일들을 통털어서 섭리라고 부른다. 섭리의
법칙을 아는 사람은 우연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주의
질서와 우주가 베푸는 큰 은혜 속에는 우연이란 실수는 없다.
  내게 벼락처럼 다가와 인생을 감전시키고 만 이는 처음에 한낱
나그네에 불과한 초라한 유랑걸객의 모습으로 내 효에
나타났었다. 남루한 입성과 먼지와 땀으로 범벅된 더러운
머리칼. 나는 냄새 때문에 코를 움켜 쥐어야만 할 정도였다
기인이나 도인에 대해서 그 동안 내가 알고있는 지식은 전혀
없었다. 이미 말했듯이 우리 집안의 형제들은 아버지 기운
밑에서 한결같이 반듯하게 정도만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누를 길
없는 정열로 한평생을 살다간 어머니가 있었지만, 그러나
어머니의 정열을 탐하기로는 집안 가풍이 너무 엄격했었다.
그즈음 내게 있어 어머니는 우리 집안에 정녕 잘못 뛰어든
불나방이었다. 유랑걸객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도 그랬다. 내 인생에 날아든 불나방, 금방 날아갈
불나방이려니 했다.
  범서선생을 처음 만난 곳은 경기도 가평 부근의 어느
암자였다. 그곳을 소개해준 선배들 말로는 아예 고시공부
학생들만 방을 내주기 때문에 합격자가 가장 많이 나온 전통적인
고시암자라고 했다.
  산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다. 오리나무 숲을 지나면
소나무 숲이 나오고 다시 상수리나무가 무리지어 있는 숲을
지나는 식으로 한없이 산 속을 더듬어도 보여야 할 암자의
종적은 묘연하기만 했다. 마침내 나무 그늘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암자의 기와지붕을 발견하고서야 나는 땀 젖은 얼굴을
말리려고 풀숲에 앉았다. 바로 그때 한 사나이가 암자 쪽에서
휘청휘청 내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암자에서 내려오는 사람이었기에 그 사람을 주목했을
것이었다. 인간이란 자신의 마음만큼만 보는 법이었다. 스스로가
고시준비생이었기에 나는 그 사람도 거의 십년 가까이 고시에
매달리는 만년낙방생 쫌이 아니겠나 추측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모습이 내 시선에 붙잡힌 순간부터 갑자기 내
숨이 가빠지는 것이었다. 늘어뜨리고 있던 두 손과 두 발에도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이런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마치
누군가 내 몸의 어느 구멍에 대고 산소를 마구 불어 넣는 듯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축늘어져 있던 풍선에 공기가
들어가면서 팽창하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 비슷한
것이었다.
  순간의 착각이겠지. 나는 일부러 그를 보지 않기 위해서 땀을
닦았던 손수건을 집어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가 내 가까이 오고있다는 느낌만큼은 너무나 선명했다. 왜냐면
내 속에 주입되는 어떤 기운, 산소같은 것, 이 기운이 점점 더
세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거의 숨을 헐떡일 지경이었다.
  그리곤 정점 이었다. 터질 것 같다는 기분의 절정이었을 때,
그가 한 줄기 바람을 날리며 내 곁을 스쳐갔다. 그리곤 점점
멀어졌다. 그와의 거리가 멀어지는 꼭 그만큼씩 내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팽창했던 풍선의 바람이 빠지는
그대로의 현상이었다. 그의 자취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을 때,
내 몸에 들어왔던 그 이상한 기운도 모두 빠져나갔다. 나는
그대로 서있을 힘도 추스리지 못하고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에게 지금 막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곰곰 생각
했다. 그때의 나로서는 그동안 배우고 익힌 지식으로 이 기이한
현상을 풀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다지 흡족하진
못했으나 그런대로 납득할 만한 몇 가지 이유를 밝혀냈다. 그날
나는 다소 무리를 했던 것이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서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가평에 도착했을 때는 습기 많은 초여름
날씨가 잠시도 나를 그 조악한 시가지에 머무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요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바로
시외버스에 올랐다. 그러니까 아침부터 지금까지 내가 섭취한
영양이라곤 산 아래 구멍가게에서 마신 차가운 우유 한 잔이
전부였다.
  게다가 지난 밤에는 몇몇 친구와 더불어서 당분간의 이별을
아쉬워 한다는 명목으로 근래에 없는 폭음이 있었다. 술을 별로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한 번 마시면 지나치다 할 만큼 마시는
것이 내 술버릇이었다. 그랬으므로 당연히 몸이 허해 있을
것이었다. 잠시동안 호흡이 고르지 못하고 몸을 주체할 수
없다고 느낄 만한 사정으로는 그런대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나를 분석하긴 했지만 멍한 기분을 되돌리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십여년간 보통 사람들과 같은
상식 속에 살아온 나였다. 그리고 한없이 빛나는 젊음의
나이였다. 한참을 그늘에 앉아 팔다리를 주무르는 동안 나는
다시 완벽하게 몸과 마음을 회복했다. 그때쫌에는 이미 홀연
나타났다 사라진 유랑걸객인지 만년 고시낙방생인지 하는 사람의
기억은 까마득하게 지워졌으며 충격이었던 기이한 체험도
일시적인 육체의 반란 정도로 자연스럽게 접수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렵게 찾아간 암자에서 나는 또 한땐 맥이 빠져야
했다. 보살할머니 말인즉 당분간 빈 방이 없어서 학생들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본당에 절이 생긴 이래 가장 큰 불사가
있어서 타지에서 온 스님들에게 방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살할머니는 실망하는 나를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딱하지만
어째. 좀처럼 이런 일은 없는데, 학생이 하필 이런 때 와서
어떡하누
  나는 별수없이 다시 오던 길을 되짚어 내려갔다. 본당에 급히
가야한다는 보살할머니를 붙잡고 늦은 점심공양을 부탁하기도
뭐해서 선 자리에서 되돌아 선 셈이었다. 사실은 만약의 경우
암자에 방이 없을 때를 대비해서 포천 쪽의 다른 암자도 한군데
알아놓고 있었다. 그랬으므로 나는 마음이 급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거처를 정해서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이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기 전에는 안심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산을 내려가는 내 걸음은 급한 마음만큼이나 빨랐다.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어도 손등으로 훔쳐내면 그뿐이었다. 산을 거의
다 내려와서야 가방끈이 파고 드는 오른쪽 어깨의 통증이
극심하다는 것을 깨닫고 왼쪽으로 가방을 옮겨맸을 정도였다.
바로 그때 그가 한 번 더 내 앞에 나타났다. 산 위에서 만났던
그 유랑걸객.
  나는 내 앞을 가로막는 누군가 때문에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놀라는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보면서 그 사람이
말했다.
  "방이 없다는 것은 길이 없다는 뜻이지요. 지금 혜월사로
간다고 해도 마찬가집니다. 어디로 가도 지금 이대로의 당신을
받아줄 방은 없습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너무나 놀라서 다리가 휘청했다. 기가
막혔다. 대체 어떻게 나의 다음 행선지가 포천의 혜월사인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는 빙긋 웃으면서 내 앞에서 물러 났다.
나는 떠나려는 그를 붙잡고 나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어디로?"
  나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어디로
  이것이 훗날 내 스승이 된 범서선생에게 던진 나의 첫
물음이었다.

    -- 행복이란...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지고 난 다음의 서울 하늘은 말 그대로
파랗다. 모처럼 한가한 오후 시간, 인희는 손지갑 하나만 달랑
들고 백화점 뒤의 시장으로 나갔다. 아무 생각없이 복닥거리는
시장길을 걷는 일은 언제라도 즐거웠다.
  시장은, 백화점이 보여주는 그 세련된 상업주의에 비하면
얼마든지 인간적이고 열려있는 공간이다. 인희는 백화점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으므로 그곳에 흥미를 잃은 사람이었다.
인희에겐 쾌적한 쇼핑공간에 내걸린 값비싼 상품들을 보아내는
일이 처음에는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살아내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해본 적이 없는, 단무지나 비계국을 먹으며 성장했던 한 인간의
과거 따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젊은이들의 옷에 대한 탐욕을
그녀는 분노에 가까운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그들이 한 계절에
기분 풀이 삼아 사 입는 옷값만 있었더라도 한 학기 등록금을
충당할 수 있었다. 새벽의 입시생 과외 아르바이트, 일 주일
두번씩 달려가던 여중생의 그룹과외, 제과점의 저녁 판매원
아르바이트, 천사원을 나온 이후에 그녀는 단 한 끼의 식사도
마음 편하게 해본 적이 없었다. 밤마다 통장의 잔액을
들여다보며 앞날의 생계를 궁리했던 그 기나긴 날들.
  삶은 정녕 불공평한 게임이라고 절망하기도 했었다. 이건
너무해. 이럴 수는 없어. 그렇게 마음 속으로 비명처럼 외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인희는 이 현실을 수긍했다.
누군가의 행복이 또 다른 누구의 불행을 담보로 이루어진 것임을
부정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무언가.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더이상 남의 행복에 담보가 되는 불행을 맞아들이지는 않겠어.
인생에 대해 탐욕을 품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요구할 것은
당당하게 요구하겠어...
  그렇지만 북적이는 백화점 안의 욕망 가득한 공기는 여간해서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늘 두통이 왔고 인상이
찌푸려졌다.
  "언닌 정말 이상해. 신나잖아? 세일 정보 빨리 알아내서 기찬
옷 빼내는 게 우리 같은 직원들의 유일한 권리인데 왜그래?"
  미스 김은 자꾸 도망가려드는 인희에게 그렇게 타박을 놓곤
했지만, 인희에겐 미스 김이 더 이상할 뿐이었다.
  그렇게 많은 옷이 있는데도 단지 세일이기 때문에 또 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도 월급의 대부분을 옷값에
투자한다는 삶의 방식은 그녀한테는 도저히 택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에겐 오직 그녀 자신만이 지켜줘야 하는 앞날이
있었으므로.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 온갖 의무들이 모두
그녀만의 책임인 것을.
  먹거리들이 쌓여있는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자 이내 옷가지들을
팔고있는 시끄러운 노점 거리가 나타났다. 인희는 그곳에서
간편히 입을 수 있는 티셔츠 한 장을 샀다. 그리고 돌아서는데
아기를 업은 새댁이 땀을 흘려가며 남자 티셔츠를 고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손에 들고 있는 크고 작은 비닐봉투들, 자꾸만 뒤로 뻗대고
있는 등의 아기,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송송 솟아있는
땀방울들 아마도 남편의 옷을 고르는 것이리라. 색깔이
그럴싸하면 칫수가 안맞는 듯하고, 몸에 맞추자니 남편이
싫어하는 색깔인 것 같고, 새댁은 좌판의 옷들을 뒤적이고 펼쳐
보며 오로지 옷 고르는 일에만 잔뜩 몰두해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냉풍이 매장 전체를 서늘하게
식혀놓은 백화점 안에선 손가락 하나로 이것 저것 값비싼 옷을
간단하게 사들이는 세련된 차림의 여자들한테서는 이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인희는 백화점에서 마주치는 그런
여자들을 볼 때마다 막연한 불안을 느킨다.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삶의 이치를 저이들은 알고 있을까.
  열심히 정성을 다해서 나도 누군가에게 줄 옷을 고르고 싶다
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를 위해서 시장의
좌판에 널린 옷을 뒤적이며 땀을 흘리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인희는 사람들 틈에 끼어 옷무더기를 헤집는다. 그녀도 열심히
그 일에 몰두한다. 색깔과 크기를 가늠하며 한참을 뒤적인다.
  회색 기운이 감도는 청색의 줄무늬 셔츠를 골라놓고 그녀는
돈을 치른다. 그때쯤엔 아이를 업은 새댁도 판단을 굳힌듯이
허리를 폈다.
  티셔츠가 담긴 비닐봉투를 달랑달랑 혼들며 회사로 돌아오다가
그녀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옷은, 엎드려 한참을 뒤적여
골라낸 이 옷은 김진우라는 남자한테 어울릴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를 떠올리며 고른 것이기 때문에.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데,
왼통 풀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 김춘수 [서풍!!]

    -- 풍경하나
  오후에 3층 행사장에서 주부를 위한 교양강좌가 열리기로 한
날이었다.
  "사랑의 방법? 그런 것도 교양강좌 제목이 되나?"
  바깥에서 돌아온 정실장이 여류시인이 정한 강좌 주제를 물고
늘어졌다. 사실을 말하라면 그런 주제에 대해서 가장 관심이
많을 사람이 바로 그였다.
  "왜 그런 책도 있잖아요? 사랑의 기술이라든가 누가 썼는지는
잊었지만."
  마침 행사 협조를 부탁하러 와있던 사보 편집부의 주달호씨가
냉큼 끼어든다. 책이라면 잠 안올 때의 효과있는 처방이라는
사실 외엔 관심이 없다고 부러 과장된 태도를 보이면서 정실장은
계속 빈정거린다.
  "그거, 소녀경 같은 야한 책 아냐? 주달호씨, 그 책 갖고
있나? 그럼 좀 빌려보게."
  "아이구, 왜 그러세요? 누굴 호색한으로 몰아붙이려구요
지은이가 누구였더라. 그 사람 굉장히 유명한 사람인데."
  주달호씨는 도움을 청하는 표정으로 홍보실 식구들을
휘둘러본다. 인희는 시덥잖은 말장난을 빨리 끝내버리고 싶다.
  "에리히 프롬이잖아요."
  "그래요, 프롬, 에리히 프롬. 하여간 이 방에선 인희씨 말곤
지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까. 좀 읽어요. 읽어서
남주나?"
  "얼씨구, 그런 말 하는 누구는 어제도 보니까 만화 나부랑이
읽으며 낄낄거리더라."
  카메라에 필름을 끼우고 있던 윤성기씨가 타박을 주었다.
옆에서 미스 김이 깔깔 웃어댔다.

    -- 사랑의 이중성
  사랑의 기술에 관한 이야기는 며칠 뒤 김진우를 만났을 때
다시 이어졌다. 그날 인희는 강좌를 듣지 않았다. 시간은
있었으나 강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달작지근하고 한없이
환상적인 그이의 시나 수달에 진작부터 염증을 느껴왔던 터였다.
사랑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한테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호들갑 같은 것이 그녀는 싫었다.
  김진우라는 사람이 호기심을 나타낸 것은 사상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일상을 궁금해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양치질을 하는지, 출근길의 버스에서는 또 어떤 상념에
잠기는지, 회사에서는 어떤 일을 즐겨하며, 점심은 주로 누구랑
함께 하며, 퇴근 후에는 무엇을 하는가...
  하기야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시간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그의, 혹은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싶다. 그의, 혹은 그녀의 스물 네 시간에 나의 스물 네
시간을 포개고 싶다...
  "근무 외에는 줄곧 책만 읽으신다면서요?"
  회사 내부의 일로 한동안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는 그는
일하는 기계 같다는 불만을 참는 일보다 그녀를 만날 수 없는
것이 더 괴로웠다고 고백하는 용감함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내 하는 말이 혹시 책벌레가 아니냐고 묻는
것이었다.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수집하세요?"
  "인희씨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무조건 싫어하시는군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진우는 이제야말로 그녀를 감싸고 있는 안개를 걷고야
말겠다는 표정으로 바짝 다가 앉는다. 그런 그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마치 고등수학을 푸는 수험생처럼 보인다.
  이 남자의 보기좋은 모습 중의 하나는 바로 저 소박함인가.
인희는 남자의 굳게 다문 입술을 바라보며 슬몃 웃음을 깨문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내 자신에 관한 말이 아니예요. 사적인
것을 넘보는 무분별한 호기심에 대한 혐오일 뿐이지요."
  "사랑이 포합하는 그 호기심은 어떡하구요. 인희씨가 알고
있는 사랑의 기술 중에는 연인에 대한 한없는 관심을 자제하는
비법 같은 것도 있습니까?"
  사랑의 기술? 인희는 그제서야 지난번의 교양강좌가 떠올랐고
정실장이 이 남자한테 어떻게 부풀려서 이야기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사람한테서 사랑의 간접고백을 받은 셈이
되었으니 뭐라고든 답변을 해야만 했다. 이 비슷한 말이 오늘
벌써 두번째다.
  "물으시니 대답하는 것이지만, 전 아직 연인끼리의 사랑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남자의 얼굴이 표가 나게 변했다. 그런 남자를 보기가 마음에
걸린다. 인희는 책상 서랍에 잠겨있는 푸른 줄무늬 셔츠를
떠올린다. 그것을 이 남자한테 스스럼없이 전할 수 있는 날이
언제일까. 아니, 그럴 수 있는 날이 오기는 올 것인가.
  "부모님께서 다음 주 가운데 날을 잡아서 보자고 하십니다.
저는 적어도 일방통행의 무례한 사람은 되기 싫습니다. 희망은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인희씨의 마음을 잘못 짚은 것인가요?"
  인희는 그만 말을 잃는다. 내가 원했던 것은 이런 말이
아니었을까. 스스로는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나는 지금 이
남자한테 기울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진우라는 사람을 만나면 그녀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이
부드러워진다. 마음의 매듭이 풀리고,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적의가 물러지고, 본래의 품성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에 대해 냉정하기가 힘이 든다.
  그와 동시에 마음의 또 다른 쪽에서는 익히 알고 있는
수수께끼일 뿐임에도 모르는 체 기울어지는 스스로에 대해
냉소가 일고 시간을 허투루 쓰고 있다는 낭패감에 시달리게
된다.
  왜일까. 왜 나는 그처럼 똑같이 진지하고 열성적일 수 없을까.
그녀는 자신의 이중성이 혐오스러워 그와 같이 앉아있는 이
자리까지 견디기 어렵다.
  "내가 너무 빨리 나가고 있다면, 그것이 거슬린다면 조금만
참아줘요. 나는 마음을 정했고, 그래서 굳이 지체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생각입니다. 물론 인희씨는 아직 나에 대해 모호한
감정일 수도 있어요. 기다리지요. 말했듯이 난 일방통행은
싫습니다."
  진우의 음성은 부드러웠고 그녀를 향한 눈길도 따사로웠지만,
그러나 인희는 그 순간 남자에게서 까닭모를 냉기를 느꼈다,
마치 한 손으로는 악수를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가슴팍을 떠미는
듯한 기분이었다.

    --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 이후의 날들은 온통 자기 검증의 시간들이었다.
거리에서도, 홀로 앉아 창을 보면서, 사무실의 근무시간에도
그녀는 쉬임없이 스스로를 분석하고 정리하고 있었다.
  한 치의 마음도 움직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마음없이 두
번 이상 한 사람을 계속 만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렇지만 그
마음을 확실하게 붙잡아 둘 수 있다고는 자신할 수 없었다.
  때때로 지난 만남에서 그에게 받았던 차가운 느낌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순간도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인희는 어느
하루를 바쳐 그때의 알 수 없는 소외감 같은 것을 분석해보고자
애를 쓰기도 했다. 그것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는 언젠가
반드시 그 일로 크게 마음을 다칠 것이란 막연한 예감이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다음 월요일, 점심에서 돌아오니 그의 전화가 있었다는 메모가
책상에 놓여 있었다. 아직 한 번도 그의 직장에 전화를 해본
적이 없었기에 인희는 다시 올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날 오후에 그의 전화는 없었다.
  김진우의 전화는 수요일 오전에 다시 왔다.
  "일방통행, 취소했습니다. 마음에 부담이 되었다면
털어버리세요. 부모님들한테 솔직히 말씀드렸지요. 아직은 이
못난 아들한테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고집 센 아가씨라고
했습니다. 내 말, 맞지요?"
  그가 억지로 밀어붙이길 원했었던가. 남자 쪽 집에 선보일
약속이 취소됐다는 말에 안도하면서도 한쪽으론 맥이 풀리는
까닭을 모르겠다. 인희는 감정없는 목소리로 잘 하셨다고
대답했다.
  "그 대신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이번 일요일에 다른 약속이
없으시면 제가 인희씨 아파트를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말하자면 초대해달라고 강요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그런 일, 할 수 없어요. 미안합니다."
  그가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수다스럽게 과장을 하고 있는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녀는 거침없이 그의 부탁을 거절해버린다.
그런데 김진우라는 그 남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가히
저돌적이다.
  "아뇨. 저도 이번만은 절대 물러날 수 없습니다. 제가 왜 주말
낚시팀에 끼었게요. 직장 동료들끼리 낚시를 가는데 인희씨
생각나서 바쁜 일 다 밀쳐두고 신청을 했답니다. 토요일
떠났다가 일요일 오후에 서울 도착입니다. 매운탕 거리가지고
가서 직접 기가 막힌 찌개 맛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인희씨는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되니까 장소 제공까지 거절하시면
안됩니다."
  어쩔 수가 없다. 그녀는 그 앞에서 또 부드러워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부드러움 뒤의 후회가 두렵기는 했지만, 그러자
가차없는 거절의 말이 입술을 비집고 나와주지 않는다.
그녀한테는 좀처럼 없는 현상이다.

    -- 그 이후
  경비실의 아저씨한테 수박 잘 먹었다는 인사를 듣고서야
이상한 전화 속의 여자가 생각이 났다. 혹시 몰라서 이틀을 더
기다렸다가 여럿이 나누어 먹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이 비로소 착각한 사실을 깨달았거나, 아니면 오해에서
벗어났다고 믿어도 좋을까. 애매모호한 일에 시달리는 것은 정말
질색이다. 한 번 더 접근을 해오면 그땐 정말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인희는 새삼 다짐한다.

    -- 약속을 기다리며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무엇을 해도 안정이 안된다.
  차라리 잠이나 자자고 눈에 수면안대를 대고 누웠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시는 날은 FM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잠깐씩 휴일의 낮잠을 즐기는 맛이
어디였던가. 잠속에서 얼핏얼핏 듣는 빗소리는 또 얼마나
아늑했던가.
  인희는 일요일의 평화를 앗아간 김진우라는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아니, 이럴 줄 알았으면서도 일요일의 방문을
허락한 스스로가 미웠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이토록이나
마음의 갈피를 못 잡는 지금의 자신이 정녕 기이했다. 왜 담담
할 수 없는가.
  물리적인 어떤 힘에 의해 가해지는 충격이 아니고는 적어도
자신의 마음에 관해서는 얼마든지 담담함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어온 그녀였다. 말하자면 세상을 살면서 원하지 않는 어떤
일로 정신의 평화를 깨뜨리는 어리석은 일은 절대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사실로 그렇게 살았었다. 마을을 다치기로 하자면
하루에도 열두번씩 상처를 입었어야 할 그녀였다. 다쳐야 할
마음은 갇혀있던 '천사원'에서 모두 다쳤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이상 더 세상에 우롱당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한 인희였다.
다시는 이 세상에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그녀는 결심하고 또
결심했었다.
  세상에 마음을 주지 않으면 마음을 다칠 일도 있다. 상처란
마음을 바깥으로 내보낸 자만이 맛보게 되는 독약이다. 나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을까. 아니면 김진우라는 남가는 예외라고
생각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이미 온몸으로 세상을
경계하던 예전의 그 날카로운 오인희가 아니란 말인가
  김진우와의 약속은 그냥 '일요일 오후' 였다. 주말의 낚시
여행에서 돌아와 서울에 도착할 시간이 정확히 언제일지는 그도
자신할 수 없다고 했다. 일요일 아침에서부터 그가 오기로 되어
있는 일요일 오후까지의 그 긴 터널, 그것을 통과하는 일이
그녀에게는 그렇게도 힘이 들었다.
  마침내 아파트의 벨이 울린 시각은 정확히 오후 다섯 시 이십
오 분이었다. 그가 왔을 때, 인희는 이미 자기와의 싸움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오인희라는 여자는 그런 여자였다.

    -- 남자와 여자
  "지독히도 긴 하루였습니다. 정말 내 생애에 이렇게 긴
일요일은 처음입니다." (남자는 한숨을 쉬듯이 말한다.)
  "여행은 잘 다녀오셨어요?" (여자는 이 첫마디를 그가 오기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가장 평이하고 무난한 언어들을 고르고
골라서 담담하게 첫인사를 꾸미고 싶었다.)
  "여행이요? 아, 가긴 갔지요. 십리도 못가 발병이 나서
문제였지만."
  "계획이 잘못 되었나보죠?" (여자는 사실 남자의 말을 제대로
새겨 듣지 못하고 있다. 남자가 앉아있는 이 거실의 풍경이
너무나 어색해서 여자는 다른 것에 몰두할 수가 없다. 이
들떠있음, 여자는 또 기분이 언짢다.)
  "어제 비가 굉장했잖아요. 그래도 가겠다고 부득부득
나서더라구요. 비가 와야 낚시도 운치가 있다나요 기세도
당당하게 폭우를 뚫고 출발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고속도로를
달린 지 십분도 못 되어서 와이퍼가 고장이 나질 않나, 한
친구가 복통을 일으키질 않나, 하여간 자잘한 사고가 연달아
일어났어요. 그러더니 기어이는 엔진에 빗물이 들어가서 시동이
꺼져버리지 뭡니까. 결국 차는 도로변에 세워놓고 지나가는
시외버스 세워서 다시 서울로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자동차
주인 말로는 운전경력 5년에 그런 일은 처음이라고, 아마도
하늘의 계시가 아니겠냐고 그러대요. 말하자면 그 여행에 액운이
끼어서 하늘이 미리 막아주는 것이래요. 그럴싸 하지요?"
(남지는 지신이 너무 수다스럽다고 생각한다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선 다소 떠드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의
동요없는 표정은 아무래도 남자를 무색하게 만든다, 저 여자는
너무 차가워. 남자는 문득 여자의 냉랭함에 아득해진다. 이 좁힐
수 없는 거리, 저편의 여자, 그리고 수다스러운 남자. 그는 입을
다문다.)
  "뭘 좀 드시겠어요? 차를 한 잔 준비할까요?"
  "커피를 주세요. 아니, 번거로운데 그만두시죠." (남자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정말 차를
마시고 싶어서 마시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의례적인 절차,
의미없는 행위, 이런 것이 강조되는 만남에는 진실이 없다.
비지니스만 있을 뿐이다. 그럼 지금 여자가 말하는 차는, 아니
내가 말하는 커피는?)
  "잠시만요." (여자는 차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나온다.
주전자에 물을 얹어놓고 그것이 끓기를 기다리며 여자는 등뒤의
기척에 신경을 쓴다. 그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거실
정면의 벽에 걸린 그림을? 나의 뒷 모습을? 여자 혼자사는
집안의 이모저모를? 가만, 탁자 밑에 던져둔 묵은 편지며 영수증
따위를 살펴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여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한 남자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든 그것은 이미
여자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여자는 다만 그의 살피는 시선과
마주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처럼 사적인 공간에서는
시선의 얽힘처럼 부자연스러운 것도 없다는 것이 여자의
생각이다.)
  "인희씨한테 일요일 오후에 방문하겠다는 말을 한 이후부터
몹시 힘들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일요일 오후가 오지 않더란
말입니다. 아니지요. 드디어 일요일도 오고, 오후도 왔는데,
내가 인희씨한테 가도 좋을 오후가 언제인지를 모르겠더라구요.
너무 일러도, 너무 늦어도 안된다는 생각때문에 온종일 그
오후만을 생각했어요." (남자는 여자의 둥을 보며 말하고 싶지
않아서 앞의 벽을 쳐다보고 혼자말처럼 말한다. 여자가 앞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말이 더 잘 된다.)
  "설탕은 몇 스푼 넣을까요? 이 짧은 말을 하기가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것일까. 세상의 많은 여자들은 날마다 남자에게 이런
말을 하면서 어떻게 살까. 여자는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며
세상의 보통 남자 여자들의 관계에 대해 절망한다. 여자는 한
번도 보통으로 살아보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보편화된 명제도
여자한테는 낮설기만 한 일이다.)
  "설탕은 하나면 됩니다." (남자는 거의 일어설 듯이 해서
대답을 한다. 이상한 일이다. 여자한테서 그런 질문을 받는 일이
몹시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차가움을 강조하는
여자에게 섭섭해 하던 마음도 일시에 사라져버리고 돌아서 있는
여자의 어깨가 굳어있는 것도 애닯게 보인다.)
  "매운탕은 없었던 일로 해야겠지요?" (남자가 부엌에서 파를
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얼마나 끔찍해 했던가. 여자는 우선
그럴 염려가 없어진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인다.)
  "매운탕이 왜요? 물고기가 많이 모여있는 곳은 물가가
아니예요. 시장이나 백화점 식품부에 가보세요. 없는 게
없답니다." (남자는 오는 길에 백화점에 들려 매운탕에 필요한
재료 일습을 사가지고 왔었다. 여자는 남자가 들고 온 쇼핑백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여자의 냉랭함을 방심으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어떨까. 남자는 여자의 방심함에서 그들
관계의 익숙함을 읽어보려는 희망을 갖는다.)
  "그럼 정말로..."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드러낸다.
평온으로 가던 마음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하고 여자는 아연한
눈길로 그제서야 남자가 들고온 쇼핑백을 쳐다본다.)
  "아무 걱정 마세요. 인희씨는 그냥 앉아계시는 게 나를 돕는
거예요. 이거 한 두 번 해본 짓이 아니예요. 우리 어머니한테
확인해보세요. 집에서도 곧잘 요리를 하거든요. 아버님은 내가
끓인 매운탕을 안주로 소주를 잡수면 아주 그만이시래요."
(남자는 여자가 보여주는 난감한 표정이 마음에 걸려 또 말이
많아진다. 이 여자는 왜 내가 보여주는 진실에 마음을 선뜻 실지
못하는 것일까. 남자로서는 여자와의 거리를 좁혀보기 위해서
고심 끝에 이런 자리를 만들어본 것인데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되기 시작한다. 정말 어렵다. 이
여자는 도무지 난해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남자에게는 여자의 이
난해함이 풀 수 없는 매력이다. 그것이 왜 매력이 되고 그것이
또 나중에는 왜 염증의 원인이 되는지에 대해선 남자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누구라도 그렇다. 사랑은 언제나 하나의
이유로 시작되고 단지 그 이유때문에 사랑은 끝난다.)
  "하시겠다면 하세요." (여자는 남자가 비워놓은 찻잔을
치운다. 남자는 어색하게 담배를 한 대 피운다. 그 사이 여자는
가랑비 흩날리는 바깥을 쳐다본다. 집안에 퍼지는 담배연기
바깥을 적시는 가랑비, 두 사람은 잠시 따로따로의 시간을
갖는다. 남자는 자신의 부족한 유머 능력이 아쉽다고 생각한다.
몇 시간이고 여자들을 웃기는 친구를 그는 알고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나 여자는 남자가 분위기를 뭉개 보겠다는
의도만으로 듣기 역겨운 허튼 소리를 자꾸 해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실없는 농담이나 무례한 행동이 유모어라고
믿는 어리석은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 그럼 요리를 시작할까요. 인희씨는 불과 물과 그릇만
제공해 주십시요. 다만 한 가지, 내 소원은 인희씨가 오늘의
저녁식사를 맛있게, 정말 맛있게 먹어주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이 말을 하는데 왜 목이 메일까. 남자는 여자가
눈치챌까봐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간다. 남자의 뒤를 따라 여자도
주방으로 간다. 이제부터 어떤 시간들이 펼쳐질지, 여자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III 우주의 큰 힘
    새롭게 변화되던 그날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어디로?
  그날 내가 느닷없이 나타난 유랑걸객을 향해 터뜨린 부르짖음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알건 모르건 간에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순간마다 고통 속에서 내지르는 비명이 바로 그것 아니었던가. 그날 이후의
날들을 생각해보면 그날의 내 물음은 진정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인간 삶의 핵심적인 화두를 입밖으로 터뜨린것이었다.
  다시, 그날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날을 말하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십 년
이상을 살아온 날들과 결별하고 갑자기 새로운 삶으로 뛰어들기 시작한
전환점을 소상히 설명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내 삶을 말하기가 어렵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이런 식으로,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찬란한
스파크가 일어나듯이 찰나에, 인생의 전환점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경험이 도움이 되길, 그리하여 마침내 우주의 섭리에 자신의 운명을 연결시키는
날을 맞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게 가득하다.
  어디로 가야 하느냐는 내 물음에 유랑걸객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었다.
부지불식간에 절박한 부르짖음을 내뱉은 나는 사실 조금은 민망했다. 아무리
놀랍다기로서니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 온통 속을 드러내 보이다니, 그것은
평소의 나답지 않은 경박함이었다.
  곰곰 따져보니 나의 다음 행선지가 포천 혜월사인 것을 알아맞춘 것도 그토록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고시생들이 몰리는 암자는 대충 정해져 있는
법이어서 산과 연관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야 얼추 짐작으로
가능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쯤에서 나는 아마도 평상심을 되찾았을 것이었다. 그 사람 역시 가평도
아니고 포천도 아니라면 어딘가 다른 암자를 추천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내
물음에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자기가 대체 무엇을 알겠는가. 나는
잠시나마 혼란에 빠졌던 스스로를 나무라면서 그를 떨치고 서둘러 마을로
내려갔다. 그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린 지 오 분이 채 안되었다, 미친 듯이 달려오는 봉고차에 떠받치고
말았다. 그 산골 마을에 봉고차가 질주하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는
의식을 잃으면서도 내게 일어난 이 사고를 이해할 수 없어서 답답했다.
공중으로 붕 날아오르면서 내가 느꼈던 그 답답함. 왜 이렇게 일이 꼬이나,
하는 그 안타까움이 말하자면 여태까지의 '나'가 행한 마지막 의식행위였다.
그런 다음 나는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얼마 후,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놀랍게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누워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내가 왜 여기 누워 있는지 머리 속을 더듬어야만
했었다. 어딘가 통증이 있다거나 핏자국이라도 남아있었다면 금세 봉고차를
떠올렸겠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 흔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저만큼 앞에, 나에게 등을 돌린 채 꼿꼿하게 앉아있는 그 사람을
발견했다. 나에게 어디로 가도 길이 없다고 한 그 사람, 바로 그였다. 그제서야
그의 눈 앞에서 봉고차에 받쳐 공중으로 붕 떠올랐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는
왜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숲의 풀밭에 눕혀놓은 것일까.
  나는 이슬 묻은 몸을 부르르 털며 일어났다. 어찌된 일인지 그에게 물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몸이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몸이, 육체가 질량감없이 몹시 가뿐한 것이었다. 나는 똑똑히 느꼈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이 주는 무한한 상쾌함을.
  그뿐만이 아니었다. 누더기를 벗어던진 듯 말끔하게 비워진 머리 속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육체가 가벼워지고 머리가 가벼워졌으므로. 나는 마치
새처럼 공중을 훨훨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팔을 한 번 힘껏 벌려
보기도 했다. 발끝으로 땅을 툭 차기만 하면 비상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자유.
  그때의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말은 자유, 바로 이 말뿐이리라.
누구나 다 굳건하게 추상의 언어라고 믿고있던 그 말이 이토록이나 생생한
느낌의 구체적 언어였다는 것을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몸과 마음의 매듭이
툭툭 끊어져 나가고 비로소 완벽한 자유의 사람으로 변한 나는 묵묵히 그
유랑걸객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몰랐지만, 그러나 그가
이제부터의 내 길을 지시해줄 사람이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빙긋 웃으면서 내 손을 잡아 편히 앉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푹 잤나?"
  "네."
  "그럼, 자네가 갈 길을 가게."
  "선생님이 아시잖습니까. 인도해주십시오."
  나는 아무런 거부감없이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자네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할 생각인가."
  "선생님과 같이 가겠습니다. 사법고시를 목표로 했던 삶은 제 삶이 아닌 듯
싶습니다. 모호한 이 깨달음을 확실하게 붙잡아 주십시요."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를 놓치면 생의 진실을 놓치게 될 것이라고
믿었으므로 그를 따라가겠다는 내 마음은 자꾸 절박하기도 했다.
  "그러세. 그러나 나는 자네와 오래 있을 형편은 못되네. 자네가 혼자 정진할
수 있을 때까지 작은 도움은 될 수 있을 것이네."
  그의 허락을 받고 나는 얼마나 기뻤던가. 나는 혹시 그의 입에서 홀로
정진하면 길이 보일 것이라는 식의 말이 나올까봐 내심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다. 이대로 혼자가 되고싶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가게 될까봐 두려웠다. 이 상쾌한 자유의 느낌, 비상하려는 몸의 가벼움을
되물리고 이전의 현실로 돌아가기가 그토록이나 싫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한 순간에 일어날 수 있는지 의심하는 마음들이 깊을
것임을 나는 안다. 내게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특히
나처럼 맹랑한 신비주의를 극심하게 혐오했던 사람이라면 여기쫌에서 이 기록을
덮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예전의 나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덮어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휙 던져버리고 두번 다시 이런 기록 따윈 들여다
보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의 나라면.
  그러나 그건 나에게 닥친 일이다. 어쩌면 그런 나였기에 남들보다 더 일찍
선택된 것인지도 모른다. 더이상 진실을 훼방하지 말라고.
  범서선생을 따라 산생활을 시작한 뒤 나는 서너번 도시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내가 전적으로 이전의 생활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에만 집중한 것은
범서선생이 시켜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스승은 현실의 생활과 조화를 이루며 새
생명의 세계를 펼쳐나가라고 충고했지만 내가 고집을 부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게는 공부에 대해서 유별난 욕심이 있었다. 배우는
것이라면 집중해서 몰입하고 싶어하는 성격은 우리 집안의 내력을 들여다 보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사법고시를 포함해서, 그 동안 내가 추진해
가고 있던 인생의 목표가 허망한 욕망의 몸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한시라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 나를 범서선생은 깊고도 깊은
눈빛으로 지켜보곤 했다.
  그때는 스승의 그 깊은 눈빛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진정 알지 못했다.
스승은 늘 이렇게 말하기만 할 뿐이었다.
  서두르지 마라. 서두른다고 순서가 바뀌지 않아. 너한텐 너만이 풀어야 할
업이 있는 걸 어쩌랴.
  그 말씀은 나는 조급함을 다스리라는 가르침이라고만 여겼다. 서너번 도시의
집으로 돌아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느긋하게 몇 주일 머물다 돌아오면 공부에
새로운 힘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택한 산생활에 기이한
흥미를 나타내거나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 때문에 그나마의 도시
나들이도 서너 번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내게 닥쳤던 놀라운 경험을 섣부르게 입 밖에 냈던 내가
잘뭇이었는지도 몰랐다. 흔히 신기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그렇듯이
나 역시 몇몇 지인들에게 범서선생과의 만남을 이야기했었다. 모두들 내가
갑자기 고시공부를 중단하고 일 년 남은 대학까지 포기해버리는 까닭이
무엇인지 대단히 의아하게 생각하는 중이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아무나 붙잡고 내가 배우고 있는 우주의 섭리에 대해 떠벌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동안 삶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보였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몇에게만 성실하게 보고했건만, 돌아온 것은 자제하려 애쓰는
냉소와 숨길 수 없어 드러나는 경멸이 전부였다. 냉소와 경멸이면 그나마
괜찮았다. 얼마가지 않아 사람들 사이에 내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심지어는 발작을 하는 장면을 보았다고 증언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돌연한 변화를 얼마나 심각하게 고려했는지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큰형까지 부랴부랴 귀국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들은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애써 믿으려는 눈치였다. 일 년쯤 휴학하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해본 다음이면 마음이 바뀔 것이라고 아버지는 끝내 내 앞에서
태연하게 굴었다. 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음으로써 아버지의 희망을 부러
지우지는 않았다.
  나의 이야기를 어떤 의심도 없이, 반박과 검색없이 들어주고 전폭적으로
믿어준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오인희 그녀 뿐이었다. 나는 우리들 사랑이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던 나날 중의 어느 하루, 그녀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그녀는 단 한 점의 의심도 없이, 마치 마른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이 내 이야기를 전폭적으로 수긍했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었다.
  "당신에게로 오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눈시울을 적시며 그렇게 말해주던 그대, 고개를 갸웃하며 귀 기울여주던
그대, 말과 말 사이의 침묵까지 환하게 채워주던 내 사랑 그대.
  더 이상은 말을 이을 수가 없다. 아무리 마음을 행궈내도 그 무렵의 그대를
기억하는 일은 내게 너무 잔인한 고통이다. 그러나 나는 내게서 이 고통이
떠나기를 원치 않는다.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그대의 흔적, 나는 뼈를 저미는
이 괴로움 속에서 그대의 존재를 느낀다. 그리고 안심한다. 나, 이 삶을 다
떨구고 그대에게 가리라. 그대가 있었음을 알기에 즐거이 그대에게 가리라.

    휴가계획
  여름 정기세일이 끝나고 이내 홍보실의 휴가가 시작되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인희는 다른 사람들이 날짜를 다 잡은뒤에 자신의 여름 휴가를 계획했다.
일주일, 주말까지 보태어서 일주일이란 시간이 그녀에게 주어졌다. 늘 그랬던
것처럼 홀로 배낭을 둘러메고 발길 닿는 대로 떠나볼 생각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혜영이 뜻밖의 전화를 해왔다.
  "너, 올해도 혼자 구름에 달 가듯이 떠돌아 다닐 생각이겠지?"
  그렇게 말하는 혜영이도 사실 산행이라면 지리산 단독등반의 경험만 두 번인,
무서움 모르는 처녀시절을 거친 경력자였다. 인희가 일행없이 다니는 여행의
홀가분함에 빠진 것도 근원을 캐자면 혜영에게서 학습한 결과일 수도 있다.
  "처녀가 요즘 세상에 혼자 다니는 것도 위험하고, 너한테 사람과 어울리는
법도 가르칠 겸 해서 세운 계획인데, 너, 이번엔 우리랑 함께 휴가를 보내는 게
어떨까?"
  혜영의 거창한 서론이 어처구니가 없어 인희는 피식 웃고 만다. 그러나 그들
부부랑 함께 하는 휴가라면 그렇게 나쁠것도 없다. 혜영의 남편은 대범하고
과묵해서 자잘한 일로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어지는 혜영의
말이 의외였다. 그애의 입에서 '노루봉'이란 말이 나왔을 때 인희는 다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번 네가 열병 앓아 입원했을 때 결혼했던 우리 시누이 있잖아. 너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결혼식 준비하느라 난 시골 내려갔던 것, 기억나니? 그
새신랑이 놀랍게도 강원도 원주 근처에 별장이 하나 있다는구나. 별장이라니까
지레 놀랠 것은 없고, 그냥 낡은 농가를 하나 잡아둔 모양이야, 주변의 산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대. 두 사람이 일주일 거기서 보내고 엊그제 돌아왔는데
우리더러도 자꾸만 가서 쉬었다 오라는구나. 치악산 줄기줄기가 그림처럼
둘러싸여 있는데 집앞의 노루봉 오르는 계곡이 정말 기가 막힌대. 함께 가보지
않을래? 방도 두 칸을 쓸 수 있는 집이고 텃밭에 상추랑 풋고추, 옥수수가
주렁주렁이래."
  노루봉?
  인희는 금방 그 사람, 성하상이 떠올랐다. 하염없이 일방적인 그 사람,
구석기 시대의 언어로 말하는 듯한 그 편지들. 그가 노루봉을 헤매고 다니며
채취했다는 향기 그윽한 찻잎. 이 모든 것이 이상하게도 한꺼번에, 삽시간에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 저 밑에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노루봉이라고 넌 들어봤니?"
  혜영이 반갑게 되묻는다.
  "글쎄, 작년 여름휴가에 우연히 그곳에 들른 것 같기도 하고..."
  "그랬니? 난 치악산은 가봤어도 노루봉은 금시초문이야. 그 동네가 일년
사계절이 다 절경이래. 그것보다는 앞마당에서 가지 따다가 무쳐먹고, 호박잎
뜯어서 쌈 싸먹었다는 우리 시누이 이야기 들으니까 막 가고 싶더라. 그렇다고
그 좋은 곳에 우리만 가기도 그렇고, 모처럼 말 그대로 쉬러 가보지 않을래?
몸이 무거워지기 전에 나도 이 도시를 한 번 떠나보고 싶어."
  그러고보니 혜영이도 벌써 5개월을 넘기고 있는 몸이다.
  지긋지긋한 입덧이 끝나고부터 배가 조금씩 불러온다는 이야기만 듣고 요즘은
만나지를 못했다. 그애랑 시골의 한적한 동네에서 일주일쯤 쉬고 온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과, 노루봉이란 곳이 원주 근방이라면 분명 그 늠름한 개, 미루의
주인인 성하상이란 사람이 사는 노루봉 산장일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서로
엇갈려 그녀는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망설일 것 없어. 나 결혼한 뒤로 너랑 언제 오붓한 여행을 해봤니? 그
사람은 사홀 휴가 끝나면 서울로 돌아간다니까 나머지 시간은 우리 둘이 원없이
보내는거야. 어때 좋지? 그렇게 결정하는거지?"
  혜영은 절대 이처럼 다그치는 성격이 아니었다. 혜영이 이토록 원한다면
그곳이 고난의 땅이라 해도 함께 가야 했다. 설령 노루봉을 오른다 해도
성하상이란 사람과 마주친다는 우연이 쉽게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같이 있고 싶음
  같이 휴가를 보내자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휴가는 항상 막바지에 잡으신다구요?"
  카페에서 만나자 대뜸 묻는 말이었다. 인희는 피식 웃었다. 정보를
제공해주는 정실장이 있는 한은 사무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에게 숨길
수가 없다. 하기야 정실장이 아니더라도 그에게 휴가일정 정도는 말해줄 만큼
가까워지기는 했다. 진우도 그녀의 이런 좁혀진 감정을 모르지 않는다.
  "휴가계획을 함께 세워보면 어떨까요? 남해안 일주, 무인도 탐방, 이런 것
어때요? 물론 어떤 경우에도 합숙은 안할테니까 걱정마시고."
  합숙? 인희는 그의 이런 농담 아닌 진담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김진우라는
사람에게 그녀는 많이 익숙해졌다. 어린왕자처럼 말한다면, 그에게 이미
길들여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날, 일요일 오후의 매운탕 요리는 결국 그녀에게 좋은 추억 하나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물론 김진우라는 사람의
성실성도 크게 영향을 끼쳤지만 인희도 상당한 노력을 보탰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가 주방에서 땀을 뻘뻘 홀리며 요리를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김진우라는 사람을 탐색하는 짓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깨달았다.
  그랬다. 부질없고 또 부질없었다. 그는 오인희라는 대상을 향해 치밀하게
접근해오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그를 제어하기에는 이미 역부족이었다.
그녀 또한 처음부터 치밀함으로 대응했다면 다른 결과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를 거부할 뚜렷한 이유도, 그에게서 도망칠 커다란 이유도 없다. 무엇으로
그를 막을 수 있단 말인가. 흘러가는 대로 버려둘 수 밖에.
  인희는 혜영의 전화 내용을 그에게 고스란히 옮겨 주었다.
  "그 친구가 가자고 하면 전 무조건 가야 해요. 저한테는 유일한 친구거든요."
  김진우는 잠시 실망의 기색이다.
  "이런, 제가 한 발 늦었군요."
  "진우씨가 빨랐다 해도 나중에 혜영이 연락 받았으면 당장 흔들렸을걸요."
  인희는 피식 웃는다. 이만한 내용의 말들이 술술 나오는게 스스로 신기하다.
  "친구분한테 저도 묻어가게 해달라고 졸라볼까요? 방이 두개라면서요? 절대로
후회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이건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싶다. 진우는 눈빛을 빛내며 진지하게
매달린다. 그녀처럼 사람 사귀는데 까다로운 여자가 휴가를 함께 갈 정도로
마음을 주고 있는 부부라면 그에게도 중요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함께
산골마을에 파묻혀 지내고 싶다. 간절하도록 그들의 휴가 속에 끼어들고 싶다.
그녀와 같이 산내음을 맡고 싶고, 그녀와 같이 별을 보고 싶다. 김진우는
자기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같이 있고 싶음'으로 확인한다.
  인희는 느닷없는 그의 제안에 쩔쩔매고 있다. 그와 단둘만의 휴가라면
한마디로 자를 수 있지만 이런 경우에는 마땅히 할 말이 없다. 혜영이에게 그의
존재를 알린다면 당연히 그의 존재 의미도 밝혀야 한다. 휴가를 같이 간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와 그녀의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한다는 뜻이 된다.
  그가 처음에 어떻게 왔던가. 그가 오인희라는 여자에게 다가오기 시작한
동기는 무엇이었던가. 그녀는 비로소 눈 앞에 다가온 결혼이라는 실체를 더듬는
기분이었다. 그가 부모님을 만나지 않았느냐고 했을 때도 그렇지는 않았다.
그것은 타인에 의한 결혼의 압박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엄연히 그녀 스스로에 의한 결정이 눈 앞에 닥쳐
있었다. 휴가를 함께 간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는 전제 조건을
수락하는 것이 된다. 김진우도 지금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는 지금 연달아
밀어붙이고 있는 셈이다.
  "좋습니다. 혼자 결정하기가 힘이 든다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친구분하고
상의를 하셔서 제가 끼어들 자리가 있다면 제발 데려가 주십시요. 이거, 매번
좀 너무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번번이 저는 애달프게 사정이나 하고, 이
김진우라는 인간이 왜 이렇게 몰락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그러셨지요 어떤 경우에도 남한테 아쉰 소리 하는 사람이 되지는 말라고.
사나이는 모름지기 당당해야 사람값을 한다구요."
  가금씩 이 남자는 어머니 이야기를 잘 한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그에겐 유독
남다르다는 느낌을 인희는 갖는다. 그의 어머니는 어떤 분일까 아니, 세상의
어머니들은 대체 어떤 존재들일까.

    풀리지 않는 숙제
  혜영은 김진우의 제안을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휴가는 휴가일 뿐, 결혼과
연관짓는 그녀의 태도가 도리어 논리의 비약이라고 나무랐다. 그렇게 모든
문제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지만 말고 여유를 가져보라는 충고도 했다.
  인희는 갑자기 복잡해진 휴가계획으로 떠나기 전날까지 줄곧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치 커다란 숙제를 앞에 둔 기분이었다. 풀어야 할 숙제, 그러나
풀리지 않는 숙제

    두번째 여름
  그 여름을 어떻게 이야기할까. 그녀를 다시 만났던 그 해의 두번째 여름.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떨린다.
  그녀가 내게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제
서서히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이미 오전부터 명상과 기도 속에서 이 여름을
예비하고 있었다.
  우리의 첫번째 여름이 그랬던 것처럼.
  내 앞에 나타날 여자의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그 어떤것도 모른 채
기다리기만 했던 우리들의 첫번째 여름보다도 다음 해의 두번째 여름이 훨씬 더
견디기 어려웠던 까닭은 무엇일까.
  사실, 우리들의 첫 여름이 닥치기 전에도 나는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마음
전체를 명상에 맡기고 광활한 우주 속을 날아다니는 정신 체험을 거듭하며
한없는 자유를 구가하던 나날 속에 어느날 갑자기 그녀가 끼어든 탓이었다.
처음에 나는 명상시간마다 어렴풋하게 한 여자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었다. 그저 아직 다 떨치지 못한 세상의 한 인연이려니 여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점점 짙어지는 그림자를 마주하며 명상에 잠기는 날이
거듭되면서 나는 홀연 깨달았다. 한 여자가 내게로 오고 있구나.
  그러나 그 이상은 깨치기 어려웠다. 왜 내게로 오는지 그 여자와 나는 어떤
인연인지, 그리고 앞으로 그 여자와 나는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 모든 것을
심호하게 해석하기론 내 공부가 너무 짧았다. 나의 스승 범서선생에게 생명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 깊이 사숙한 뒤에야 나는 명상 중에 자꾸 나타나
뭔가를 호소하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의 생애에서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나의 사랑, 과거와 미래를 잇는 내 사랑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여자의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그리고 내게 나타날 시간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알고있는 것은 명상속에서 바람처럼 스쳐가던 여러가지
표정의 희미한 얼굴 윤곽과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나는 계절이 여름이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때가 닥치자 새벽 명상 속에서 그녀가 나타나는
그날이 바로 오늘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날, 나는 그녀를 보았다. 첫눈에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었음을 알아보았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는 내 염원도 곧 이루어졌다. 그녀는 지갑을
떨어뜨린 줄도 모르고 산을 내려갔고 나는 그 지갑 속의 신분증명서를 통해
현실 속의 그녀에 대해 알아냈다. 지갑을 잊고 가게 만든 것이 자신의
부주의라고 그녀는 생각했겠지만,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나중에 더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그 모든 일은 모두 내가 홀려보낸 염원의 기운과
사랑의 기운이 도모한 조화였다. 내게 닥친 그 섭리에 대해선 이미 말했듯이
좀더 시간이 흐른다음 처음과 끝을 세세하게 기록할 생각이다. 지금 말고 좀 더
나중에.
  우리들의 두번째 여름에는 어떤 섭리가 작용할 것인지 그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름의 며칠을 통해 한치의 빈틈도 없이 예비된 섭리가
펼쳐졌다. 우리 두 사람이 예사롭지 않은 한 운명의 끈에 묶여있음을 알아채고
놀라던 그녀, 고정관념과 진실 사이에서 멍해지던 그녀의 검은 눈동자, 미루를
부르던 그녀의 낭랑한 음성과 어찌할 줄 모르고 허공을 젓던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들.
  말하자면 그 두번째 여름은 우리 두 사람이 필히 거쳐야 할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녀가 취했던 동작 하나 하나를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하기야 나한테 비추어졌던 그녀의 모든 모습은 벌겋게 달군 쇠로 가슴에 모조리
각인되어 있으므로 특별히 그 여름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그 여름은 특별하다. 그녀가 사랑이라고 믿고있던 한 남자와
나란히 서있는 나의 여자를 보아내야 하는 형벌과 함께 한 시간이었으므로
특별한 것이다.
  물론 나는 나의 영적 능력이 보아낸 우리들의 미래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남자의 삶에 예비된 여자는 그녀, 오인희가 아님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나도 뜨거운 마음과 활활 타오르는 몸을 가진 건장한
남자였다. 운명적이든 아니든, 이미 나는 그녀를 죽도록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질투나 욕망은 명상과 기도로 정진하고 있던 나같은 사람에게도
역시 칼처럼 무서운 흉기였었다. 나는, 그 여름, 수시로 마음을 베이고 피를
흘렸었다,

    휴가의 처음
  김진우가 약속장소인 시외버스 터미널에 임시번호판을 단 새 차를 가지고
나타났을 때 인희는 솔직히 언짢은 기분이었다. 계약은 진작에 했던 것이고
다만 이탠 여행에 긴요하게 쓰일 것 같아서 출고날짜를 좀 앞당긴 것 뿐이라며
그는 변명 아닌 변명을 길게 늘어 놓았다, 하지만 인희는 싱글싱글 웃고 있는
그를 한 번도 마주보지 않는 것으로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다.
  "덕분에 편한 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되었군요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생긴 남자분하고 동행하게 되어서 기분이 좋으네요."
  혜영이가 평소에 잘 하지 않던 싱거운 소리까지 하며 분위기를 맞춰주는
바람에 인희는 뾰족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크고 작은 가방들을 무겁게 들고
나와서 김진우를 기다리고 있던 혜영의 남편에게 미안한 기분이었다. 가난하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이들에게 번쩍거리는 새 자가용 따위로 위축감을
안겨주는 김진우라는 남자. 인희는 뭔가 하나 무너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여성 두 분을 만원버스에 모시는 게 민망했는데 김형 덕분에 체면이
섰습니다. 고맙습니다. 허동규라고 합니다."
  혜영의 남편은 역시 괜찮은 사람이었다. 김진우도 첫눈에 동규씨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인희가 무엇때문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오인희라는 여자. 많이 어렵고. 많이 모호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김진우에게 있어 이 여행은 오인희라는 여자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첫번째 기회였다. 생각지도 않게 처음부터 부딪친 셈이지만 그러나 서두르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시작이었다. 시간은 충분했다. 그는 난해한 과제를
떠맡았을 때 느끼는 맹렬한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 오인희라는 여자한테서 그는
늘 이런 식의 정복욕을 느꼈다. 어쩌면 그것은 그의 천성인지도 몰랐다. 어려운
문제 앞에서 해답을 구하지 않은 채 물러선 경험은 한 번도 없는 그였다.
난이도 높은 고등수학에서나 쩔쩔 맸을까. 하기야 그의 인생에 있어 그리
어려운 과제가 주어진 적도 많지는 않았다. 김진우의 살아온 길과 오인희의
그것은 그렇게 달랐다.
  김진우는 그 몇 시간 뒤 또 한 번 일행을 당혹하게 했다. 장마가 길어지는
바람에 뒤늦게 휴가를 떠나는 차량이 고속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어 자동차는
시종 저속운행이었다. 김진우는 아버지 차로 몰래 닦아놓은 운전솜씨를 발휘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천천히 가지요. 피곤하면 제가 운전해도 좋습니다. 저야 봉고차만 죽 운전을
해왔습니다만."
  동규씨도 공장에서 제품 배달을 하고 있는 솜씨 좋은 운전수였다. 앞자리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달리는 동안 줄곧 자동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동규씨가 혜영을 돌아보았다.
  "배고프지 않아? 당신, 요새 세 시간 간격으로 배가 고프다고 그랬잖아."
  아내의 부른 배를 힐끗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더할나위 없이 부드럽다.
  "아, 점심식사 말입니까? 그것이라면 염려하지 마세요. 뒷 트렁크 열어보면
아이스박스에 간단히 준비해온 음식이 좀 있습니다. 가만 계십시오. 어디
시원한 그늘에 차 세울 데가 있는지 살펴봅시다,"
  진우는 인터체인지가 나타나자 이내 국도로 접어들었다.
  얼마 가지않아 한적해 보이는 샛길이 나타났다. 그늘도 풍성해서 잠시 쉬어
가기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그는 간단히 준비해 왔다는 음식을 꺼냈다.
  "세상에, 언제 이렇게 진수성찬을 마련했지요? 우리는 그저 휴게소에서 대충
사먹을 생각이었는데..."
  혜영이 말문을 있지 못하고 인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김진우가
차리고 있는 풀밭의 점심식사를 보고만 있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색색의
재료를 넣어 깔끔하게 만 김밥이야 그렇다쳐도 알루미늄 호일에 맵시있게
감겨진 구운 갈비 온갖 양념을 넣어 먹음직스럽게 버무린 홍어회, 해파리 냉채,
찬합의 칸칸마다 오밀조밀 다른 모양으로 채워진 표고전, 생선전, 고기산적.
  "자 여기 새로 담은 김치도 있습니다. 저는 우리 어머니 김치 없으면 밥을
못먹는 못된 버릇이 있어서 넉넉하게 담아왔습니다. 드세요. 아니, 왜들 구경만
하십니까?"
  "진우씨 어머님은 이 정도가 간단한 요리인 모양이지요?'
  어쩔 수 없이 인희 입에서 이런 가시박힌 말이 튀어 나온다. 그러나 김진우는
인희의 말에 가시가 담겼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럼요. 이건 우리 어머니가 어젯밤과 오늘 아침에 간단히 준비한 거예요.
우리 어머니가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면 그 솜씨를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랍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때 인희가 그의 말을 여지없이 잘라버렸다.
  "잘못했군요. 진우씨 어머니도 모셔왔어야 되는건데, 그래야 본격적인 요리가
어떤 것인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지요."
  이번에도 혜영이 나서서 인희의 뾰죽한 가시를 막아주었다.
  "진우씨 어머님께 감사드리는 일은 차후에 의논하기로 하고 빨리 먹기나
합시다. 난 더이상 못참겠는데요."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는 그렇게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치루어졌다. 인희는
혜영이네를 생각해서라도 자신이 경솔했다고 깨달았다. 왜일까. 이 끊임없는
거부감과 모래가 섞인 듯한 이질감은 정말 왜일까.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한 차 속에서 혜영은 연필과 메모지를 꺼냈다. 그리고
혜영은 메모지에 이렇게 썼다.
  '점심은 정말 맛있었음.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주시는 어머니를 가졌다 해서
비난받아야 한다면 너무 잔인하지 않을까?'
  인희는 그것을 두 번이나 읽었다. 그리고 가만히 친구의 손을 잡았다. 그애의
말이 옳다, 김진우라는 사람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은 그녀가 더 잘 안다.

    두 여자, 두 남자
  별천지였다. 아니, 딴세상이었다.
  서쪽 하늘에 깔린 붉은 노을이 온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시각에 그들은
산밑 마을의 작은 집에 여장을 풀었다. 서울을 떠난 지 거의 열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열 시간 저 편에는 이런 별천지도 있는 법이었다. 고즈넉한 석양
밑에 누워있는 산과 들과 집들, 그러나 열 시간을 뒤돌아 달리면 탁한 공기와
달구어진 빌딩과 뒷골목의 상한 쓰레기가 나타나는 세상
  그리고 인희는 이 땅이 낯설지 않았다. 조금 전, 버스 정류소가 있는
수더분한 거리를 지날 때 그녀는 지난 해 여름을 선명하게 기억해냈다. 지갑을
찾아준 그와 콜라 한 잔을 나누어 마시던 가게도 찾아냈다. 주인 곁에
다소곳하게 앉아 슬프도록 검은 눈으로 그윽히 자신을 바라보던 매끈한 몸매의
미루도 갇힌 기억 속에서 튀어 나왔다.
  혜영이 별장이라고 하던 집은 도시의 때가 묻어있는 그 거리에서도 상당히 더
들어와야 했다. 자갈이 튀어오르는 험한 길이 노루봉 밑자락을 싸감으며
가물가물 이어져 있고 또 그 길을 따라 띄엄띄엄 집들이 보이는 동네였다.
  "자, 여성 여러분은 우물가에서 물이나 길어다 주십시요. 청소와 저녁식사,
그따위 모든 일에 절대 간섭해서는 안됩니다. 위반할 시에는 엄한 벌칙이
기다리고 있으니 각오하시기 바랍니다."
  재빠르게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김진우는 긴 시간 차를 운전한
사람답지 않게 활발했다. 그가 몰아내는 바람에 집안 청소와 식사를 남자들에게
맡기고 여자들은 물을 길러 나왔다.
  마당 왼쪽에 계곡에서 끌어온 파이프를 묻어 우물로 썼던 자리가 있었으나
오랜 시간 사람이 가꾸지 않아서 막힌 듯 했다. 그래도 물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집에서 저만큼 바라보이는 곳에 손질이 잘된 우물이 있었다. 역시
산에서 끌어온 물이었는데 이가 시리도록 차갑고 또한 달콤했다.
  "밝아. 참 밝은 사람이야."
  혜영이 플라스틱 바가지로 물을 퍼담으면서 밑도 끝도 없이 문득 말했다.
  "난 밝은 것에 익숙하지가 못해. 그래서 저 사람한테 끊임없이 낯설음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야."
  그래. 우리한테는 정말 낯선 분위기라는 것, 인정해. 우린 원래 어둠의
존재들 아니니?"
  돌아보며 서글프게 웃는 혜영이 모습에 인희도 피식 웃고 만다.
  "그래도 그 낮설음에 끌리는 것 아닐까? 네가 진우씨와 자주 부딪치면서도
이만큼 오게 된 것도 다 그 때문이고."
  그럴지도 모른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소유한 사람에게로 가는 막연한
호기심. 결핍은 필연적으로 충족을 원한다.
  "너는 어땠어? 동규씨한테서 어떤 낯설음을 발견했지?"
  "결혼할 무렵에 너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을거야. 나에게 아버지가
있었다면 아마도 이런 사랑을 주었을 것이라고. 동규씨는 내가 몰랐던 아버지의
존재를 일깨워준 사람이야. 무한정 너그럽고 끝없이 관대했어."
  혜영이 작은 회사의 경리로 일하다가 거래처 사람으로 만난 이가 동규씨였다.
야근이라도 하는 날에는 만두를 품속에 간직하고 회사 앞 골목길에서 혜영을
기다려주던 사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는 오후면 비닐 우산을 갖다주고
묵묵히 돌아서던 사람. 그는 따뜻한 가슴으로 혜영의 시린 마음을 녹여 주었다.
  "가만, 저기 동규씨 나온다. 네가 행여 무거운 물통 들고 올까봐 저러는거지.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야."
  인희의 놀림에 혜영도 지지 않는다.
  "그 뒤를 봐. 진우씨도 정신없이 뛰어오는데? 저 극성, 정말 못 말려."
  석양을 밀어내며 은은하게 덮여오는 푸른 어둠, 그리고 달려오는 두 남자.
인희는 조금씩 덥혀오는 가슴을 내밀고 힘껏 맑은 산공기를 들여 마셨다.

  겨울밤
  노천 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 김광규 [밤 눈]

    빛과 어둠
  아침
  인희는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옆에서 혜영은 아직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홀몸이 아닌 탓에 피곤도 훨씬 더했으리라. 웅숭그리고 자고
있는 혜영에게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고 그녀는 방을 나왔다.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부엌에는 아무도 없다. 잘못 들었을까. 인희는
뒤꼍으로 돌아가본다. 옛주인이 버리고 간 커다란 항아리 두어 개가 지키고
있는 쓸쓸한 장독대 그 옆으로 넓은 잎사귀를 펼치고 있는 후박나무 한 그루,
뒷벽에 잇대어 늘어서 있는 녹슨 농기구들이 정겹다.
  옛주인들은 어디로 떠났을까, 자신들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집이 도시
사람들의 여름살이에나 며칠 쓰이고 방치되어 있는 것을 알기나 할까. 그녀는
풀들이 웃자라 있는 뒷마당에서 몽당연필 하나를 주웠다. 앞뒤로 깎여있는 그
연필, 문득 천사원 시절의 쇠필통이 떠올랐다
  서툰 솜씨로 애써 깎아놓은 몽당연필들은 쇠필통 안에서 이리저리 구르다
연필심이 모조리 부러져 버리곤 했다. 아침자습 시간에 책받침을 깔고 다시
연필을 깎다가 손을 베면 인형그림 그려진 푹신한 필통 속의 길다란 연필들이
그렇게 부러웠다.
  천사원의 노랭이 총무할머니는 손으로 쥘 수 없을 만큼의 몽당연필
다섯자루를 가져가야 겨우 새 연필 한 자루를 내주었다. 다른 애들은 학교
쓰레기통을 뒤져서 일부러 몽당연필을 만들기도 했지만 인희는 결코 고런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이미 어린 소녀의 자존심은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강했다.
  그리고, 4B연필이 떠오른다. 4B연필과 함께 한 알의 사과도 생각난다.
미술시간의 준비물이 4B연필과 사과 한 알이었다. 도화지는 지급받고 있었지만
따로 4B연필을 지급할 총무 할머니가 아니었다. 너희들에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사줄 돈이 어딨니? 머리통은 뒀다 어디 쓸려구 그래? 짙은 심 연필에 침 묻혀
쓰면 까짓 미술시간쯤이야 넘길 수 있잖아.
  그러면 어린 인희는 짙은 심 연필을 뭉툭하게 깎아서 쇠필통에 간직한다.
그렇게 해도 사과 한 알의 숙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어린 인희는 알고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사과 한 알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다음날 아침, 어린 인희는 책가방을 들고 천사원 뒷산으로 올라간다. 학교는
산과 반대편에 있고, 그 길로 등교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환히 보인다. 인희는
등을 받쳐줄 따뜻한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고 그것에 기대어 앉는다. 너무 많이
빨아서 상표가 지워진 하얀 운동화 위로 기어 오르는 개미들과 하루 종일 산에
있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날 오후, 어린 인희는 담임선생님의 방문을 받는다. 학교를 졸업하고 갓
부임한 젊은 여선생은 총무할머니에게 곧 이곧대로 말한다. 3월달에도 한 번,
4월달에도 한 번, 5월에는 지금까지 두 번 결석했다고. 이런 데서 자라는
아이들한테는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다고. 천사원의 다른 학생한테 물어봐도
모른다고만 해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노라고
  총무할머니는 사감선생님을 부르고 사감선생님은 인희를 호출했다. 사무실로
들어서는 인희를 보고 담임선생님은 몹시 반갑다는 듯 환히 웃었지만 어린
그녀는 저도 모르게 벌레를 보듯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말았다.
  진실로 애정이 있다면, 학급에 하나 뿐인 수용시설의 학생에 대해 진심으로
애정을 가졌다면 4B연필과 사과 한 알의 숙제가 어떤 상처를 주는지 짐작할 수
있어야 했다. 교육대학을 갓 졸업한 그 신선한 의욕만 가지고, 3월달에는
집에서 읽은 동화책 한 권씩 가져와서 친구들과 바꿔 보기로 하는 독서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긴다거나, 4월달에는 각자 화분 하나를 마련해 꽃씨를
심어보자는 더욱 아름다운 제안을 해서 어린 그녀로 하여금 학교 대신 뒷산으로
발길을 옮기게 해서는 안되었다.
  5월달에는 더욱 심했다.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를 써서 국어시간에 모두
발표하자고 했다. 어린 인희는 고개를 숙이고 그런 말을 하는 담임선생님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틀림없이 학급에 하나뿐인 고아, 오인희라는 학생의 이름을 깜빡 잊었을
것이라고 만약에 고개를 들어 선생님의 시선이 마주친다면 선생님도 몹시
당황해 하리라 짐작하며, 홀로 온갖 생각을 다하며, 자꾸 책상 밑으로 숨던
그녀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선생님은 그녀를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일부러 오인희, 하고 호명을 한 다음,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모든 반 친구들이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어린 그녀를 주목하고 있는
그때에. 어깨까지 찰랑이는 긴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긴 뒤, 좋은 향기
뿜어내는 온갖 화장품으로 정성들여 화장을 한 얼굴에 천진무구한 웃음을 가득
띄운 채.
  "그래. 인희는 고마우신 원장님한테 편지를 쓰면 되겠다. 얼마나 고마운
분이시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린 그녀는 자신의 몸이 풍선처럼 탁 터져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린 그녀보다 훨씬 많이 배웠고, 어린 그녀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지만 그러나 결핍과 고통 속에 자란 어린 그녀보다 아주 많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했던 어여쁜 처녀 선생님이었다.
  담임선생님이 다녀간 날, 어린 그녀는 사감선생님한테 엉덩이를 다섯 대
맞았고 총무할머니한테는 모진 악담을 들었다. 커서 뭐가 될려고 벌써부터
새앙쥐처럼 슬슬 뒷구멍이나 파니? 너같은 기집애한텐 공부도 아깝고 밥도
아깝다. 밥 버러지...
  뒤꼍, 후박나무 그늘 아래 주저앉아서 그녀는 흙 묻은 몽당연필 위로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옛날의 슬픔이 마음을 움직여서 만들어낸 눈물은 아니었다.
그냥 아주 맑은 눈물 한 방울이 그렇게 솟았다. 정적 속의 깨끗한 아침에 그
옛날의 밥 버러지 한 마리가 앉아있다고 생각하니 견디어 온 시간들이 너무
대견했다. 주저앉을 수도 있었는데, 어긋나버렸을 수도 있었는데, 아. 차라리
폭발해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런데, 고요히 여기까지 타박타박 걸어온
스스로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잘했어, 오인희. 잘해냈어, 오인희. 이제는 다른
시간이 오고 있잖아. 짐승의 시간 말고 좀더 나은 시간...
  그때였다.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그녀의 등에 닿았다. 등에서 퍼져오는
사람의 체온은 너무나 안온하고 부드러워서 그 손에 얼굴을 묻고 싶을
만큼이었다.
  "이런, 아침부터 울고 있었군요."
  진우는 뒤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서 남자의 손을 비꼈다. 벗어나려는 여자를 남자가 가로막았다. 물이
묻어있는 머리칼, 옅게 풍겨오는 비누냄새. 그는 싱싱하고 단단하게 보였다.
그것이 또 여자를 낯설게 했다. 그녀는 자신의 허리에 닿아있는 남자의 손을
가만히 떼어냈다.
  "도망가지 말아요."
  남자는 손에 힘을 주었다. 남자의 또 한 손이 그녀의 젖은 눈자위를
어루만졌다. 그의 손에서도 옅은 향기가 풍겼다. 여자는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그대로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남자는 추워하는 여자를 자신의 품 속에
조심스레 안았다.
  "당신은 아주 작아. 아주 작아."
  팔에 힘을 주며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당신은 작아. 아주 작아.
위에서 속삭이는 그 소리가 여자에게는 주문처럼 들렸다. 그래요. 나는 아주
작아요. 너무 작아서 하늘의 햇빛도 내게 닿지 못해요. 난 한 번도 원하는 만큼
빛을 받지 못했어요.
  그리고 남자의 입술이 그녀에게로 왔다. 남자가 받쳐든 여자의 얼굴에 은빛
아침 햇살이 비쳤다. 여자는 빛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고,
비수처럼 꽂히는 남자의 입술에 몸을 떨었다. 어디선가 산새가 울었을까.
그녀는 그 짧은 순간에 산과 하늘과 새와 노래를 다 생각했다. 또 행복과
평화와 휴식과 영원도 함께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미루와 그의 주인
  "인희씨, 아파요? 안색이 좋지 않은데."
  진우와 함께 바위에 걸터앉아 뒤쳐져 오는 여자들을 기다리던 동규가 가까이
온 인희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그들은 아침 식사 후 곧장 노루봉 등산에 나선
길이었다.
  "그래. 안좋아 보인다, 우리도 여기서 좀 쉬었다 갈까?"
  몸이 무거우니까 집에 남는 게 좋겠다는 남편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선 혜영도
인희의 얼굴을 살핀다. 혜영은 친구가 아침부터 왠지 기운없어 하던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인희씨, 말씀만 하세요 제가 업고 천 리라도 걸을테니까."
  진우는 말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업을 듯이 등을 돌려대고
있었다. 인희는 별수없이 피식 웃고 만다. 미워할 수 없는 사람. 뒤꼍에서의
시간들을 삭일 수 없어 여태껏 쩔쩔매고 있는 자신에 비하면 얼마나 거침없는
모습인가.
  "오랜만에 산에 오르니 좀 힘에 벅찬 것 뿐이에요. 정 힘에 겨우면 제가
알아서 혼자 내려갈께요"
  "인희씨 내려가면 물론 저도 함께 갑니다. 명심하세요. 형님은 혜영씨
보호자이고, 난 인희씨 보호자라는 사실을."
  저 능청. 혜영 부부는 짐짓 박수를 치며 진우의 엄숙한 선언에 동의하고
나섰다. 진우는 그것 보라는 듯 그녀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인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인희의 손을 잡았다.
  "자, 출발합시다. 지금부턴 보호자와 피보호자가 떨어지면 안됩니다."
  진우는 그녀의 손을 꼭 쥐고 걸었다. 앞서가던 혜영이 뒤돌아보며 말했다.
  "진우씨, 잊지 마세요. 보호자 임무는 하산과 함께 즉시 해제되는 겁니다.
아셨조?"
  "그럼요. 이 산사나이가 딴 소리야 하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잡고있는 그녀의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올리는 기분으로 걸어보세요. 그럼 훨씬 힘이 덜
들겁니다."
  "아마 진우씨보다 제가 더 산을 많이 탔을걸요. 이 노루봉도 사실은 작년
여름에 거처간 산이에요. 계획에 없던 코스여서 중간에 내려오긴 했지만."
  "혼자서요?"
  "그래요 늘 혼자 다녔어요. 그게 편해요."
  그가 걷기를 멈추고 인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젠 혼자 다니지 말아요. 혼자가 편하다는 생각은 제발 버려요."
  그러나 인희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뚫어지게 진우의 뒤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숲그늘에 누가 있었다. 휘청하도록 큰 키, 주위를 감도는 이름모를 정적을
다스리는 듯 보이는 고요한 얼굴, 그리고 남자 옆에 붙어있는 늘씬한 개
한마리.
  미루.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개의 이름을 불렀다.

    우주 속의 큰 힘
  혼란스러웠다.
  흔들리고 있었다.
  마음은 내 몸을 빠져나와 부질없이 그녀와 그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아무리
불러들이려 해도 한 번 빠져나간 마음은 좀체 돌아올 줄을 몰랐다. 수련을
시작한 이후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망연자실했던 경험은 거의 처음이라고 할
만큼 드문 일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주잡은 두 손,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다정하게
나누는 대화, 창백했던 그녀의 볼에 발갛게 비치는 홍조, 앞뒤없이 그저
사랑에만 빠져있는 남자. 운명이 어떻게 비껴가리라는 것이야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너무 힘들었다. 감당할 수 없어서 나중에는 그들을 피해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도망갈 수도 없는 운명이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나는
그녀를 만나야 했다. 그녀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거듭해서 머리를
울리는 경고의 내용은.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안간힘을 쓰며
명상의 자세로 돌입했다. 그녀에게 내가 여기 와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부질없이 맴도는 내 마음을 불러들이기 위해서.
  그리고 마침내 평정을 찾는데 성공했었다. 떠돌았던 마음이 제 자리를 찾아
돌아오고, 감은 눈 저 너머로 은빛 지평선이 펼쳐지면서 온 몸에 주입되는
신선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여늬때의 명상에서처럼 내 몸은 이내 공중으로
떠오를 듯 가벼워졌고, 은빛 지평선에서 뿜어내는 에너지가 쉴새없이 목울대로,
심장으로, 팔과 다리로, 퍼져나가는 기분에 마음이 고무되었다.
  흐트러졌던 정신이 반듯해지고, 처져있던 몸이 우주로 열리면서 가벼워지는
것으로 순간의 혼란은 수습되었다. 이제 본래의 '나' 로 돌아왔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나는 고요히 눈을 떴다. 그와 그녀가 저만큼 앞에 오고 있었다.
나는 마음의 결을 다듬어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그녀 쪽을 향하는
자세였다.
  그녀는 이내 내 손바닥에서 뻗어오는 기운을 감지했다. 남자는 강렬한
눈빛으로 뭔가 그녀의 대답을 원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나의 세계 속으로
들어온 뒤였다. 그녀는 분명히 미리 나의 존재를 감지했다. 눈으로 보기도 전에
내가 있음을 예감했고, 이내 눈으로 그 예감을 확인했다.
  그녀의 그런 행동들은 내게 너무나 의미심장했다. 내가 일으키는 파장대로
순순히 응답하는 그녀를 직접 내 눈으로 보는 심정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것은 곧 그녀의 에너지 주파수가 내 주파수에 미리 맞춰져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의 운명과 내 운명이 사용하는 주파수가
동일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 한 번 더 강조해 말한다면, 이 말은 그녀와
나의 생이 오랜 시간 예비된 섭리에 의해 한 끈에 꿰어져 잇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누구는 섭리를 받아들이고 누구는 섭리를 외면하는
것도 모두 같은 이치였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제각각의 부모를 만나 세상에
태어나지만 수백년, 수천년 누적되어온 전생의 인연들은 육체의 부모와
관계없이 섭리가 부여한 대로의 영적 주파수를 지니고 태어난다.
  영혼과 영혼이 만나 진동하는 힘의 파장이 그리는 무늬와 세기, 이것을 우리
도반들은 '주파수'라고 칭한다. 앞에서 한번 설명했지만, 우주가 품고있는 영적
질서를 '섭리'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처럼, 앞으로도 나는 하나씩 하나씩
영적인 언어들을 풀이하면서 이 기록을 진행할 것이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어떤 사람은 이미 마음의 동요를 느끼며 호기심을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영적 주파수가 센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영적 주파수가 약한 사람들보다 훨씬 빨리 자신의 마음을 우주와 연결시킬 수
있는 소질을 타고 난 것이다.
  나의 경우가 그러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전혀 정신의 세계에 현혹된 적이
없었으며, 대학에 들어와서도 차돌처럼 단단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있던
나였지만, 그러나 범서선생이 보낸 몇 차례의 진동만으로 즉각 삶의 행로를
바꾸었다.
  스승 범서선생은 영적 주파수가 몹시 센 한 젊은이를 첫 눈에 알아보았다.
스승은 내게 영적 주파수를 발동시켰고 내 무의식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아무런
수련엾이도 그 첫날에 당장 몸 전체가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자유와 해방의
경계로 뛰어 오르는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내가 지닌 남 다른
주파수의 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파수가 약하거나 무늬가 희미한 사람은 영적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누구라도 수련과 정진을 거듭하면 강한 주파수를
가질 수 있으며 파장의 진동이 그려내는 무늬도 선명해진다. 주파수가 약한
사람들이 강한 사람들에 비해 불리한 점은 단 한가지 뿐이다.
  섭리를 파악하고 영적 능력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데 소극적이라는
것, 그것 뿐이다. 한 번 정진의 길로 들어서면 누구라도 우주와 하나가 되는
놀라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겠다던 내가, 그래서 가방 가득 무거운 전공서적을 담아
조용한 암자를 찾아가던 내가, 예기치 않은 순간에 기이한 체험을 하고 스승을
따라 몸과 마음을 맡긴 곳은 지금의 노루봉에서 멀지 않은 치악산의 한
움막이었다.
  움막이라고는 하지만 범서선생이 몇 년에 걸쳐 끊임없이 보수하고
개조하였기에 콘크리트 건물보다 더 튼튼하다는 느낌을 주는 거처였다.
  움막 뒤에는 역시 오랜 기간 도반들의 수련생활을 받아들이며 점점 정교해진
동굴이 하나 있었다, 스승은 주로 그곳에서, 나는 움막의 섶자리 위에서 각자의
공부에 돌입했다. 범서선생의 가르침은 맹렬한 학구욕에 타오르는 내 갈증을
단시간에 가라앉혀 주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 몇 달간은 오히려 나의 맹렬한
지식욕이 바로 암초라고 일러준 것이 유일한 가르침일 정도였다. 스승은 내게
세상에서 배워온 잡다한 상식과 과학적 사고로 무장된 학교의 지식을 버리라고
누누히 일렀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향기가 나는 법, 누가 새 술을 찌끼
가득한 헌 부대에 붓겠느냐고.
  첫날 느꼈던 몸의 비상, 그 무한한 가벼움의 원리를 궁구하느라 움막에서의
명상시간 대부분을 허비하고 있었던 나는 끊임없이 스승에게 물었었다. 근거를
일러주세요. 이치가 뭡니까? 왜 그럴까요? 믿어지지 않는데요...
  그럴 때마다 스승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스스로 알아지리라. 스스로 깨닫지
않는 이치는 헛것이다.
  이론의 근거를 탐하던 내 질문의 횟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명상
중에 다시 한 번 그 자유의 느낌을 경험한 뒤부터였다. 움막 안에 앉아있는 내
몸이 광활한 우주를 떠다니는 듯한 기분, 불기둥 하나가 육체의 구석구석을
통과하면서 무한한 에너지를 주입하는 듯한 그 기분을 다시 경험한 것은 산
생활이 거의 반년째인 무렵에 일어난 일이었다. 스승이 요구한 대로 혼자의
힘만으로 자유와 해방의 경계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범서선생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맨 먼저 본 것이 무엇이더냐?"
  "어둠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본 것은?"
  "어둠을 서서히 밝히는 빛무리였습니다."
  "그 다음엔?"
  "눈을 감았는데도 뭔가 알 수 없는 선과 점들이 무늬를 만들며 흘러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무늬를 따라갔더냐?"
  '네. 한참을 보고있으니 눈꺼풀 안쪽부터 조금씩 조금씩 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좋아.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이려는 네 마음이 문을 만든 것이다. 그 문이
열릴 수 있게 한참 더 집중하고 난 다음에는 어땠느냐?"
  " 감은 눈이 뜨거워지면서 눈을 통해 계속 어떤 기운이 들어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머리가 뜨거워지고 심장이 뜨거워지고, 배가,
팔이, 다리가 모두 불길에 닿은 듯한 기분이었지만 전혀 고통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온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가벼움을 느꼈습니다.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어 저는 제 몸 바깥에 있다는 기분이기도 했습니다. 육체에 달라붙어
있던 영혼을 분리시키고나니 그럴 수 없이 자유로웠습니다. 너무나 자유로워서
다시는 육체라는 옷을 입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래. 그것을 바로 '광안' 이라고 한다. 수행의 첫 단계이자 마지막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핵심이었는데 그것을 네 혼자 써낸 것이다. 광안을 얻게 되면
이 무한히 넓은 우주와 나라는 존재가 서로 연결되었다는 진실을 확연히 이해할
수 있지. 그뿐이 아니다, 광안이란, 우주가 끊임없이 이 세상을 향해 보급하고
있는 저 무한한 에너지를 우리 몸으로 받아들이는 귀중한 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이미 범서선생은 광안으로만 우주와 연결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주와의 문을 내는 방법은 정말 방법일 뿐이어서 사람에 따라서는
머리 꼭대기로 체험하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빛의 눈으로, 또는 소리의 귀로
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련이 정점에 달하면 어디서나 그냥 마음을 열어서 마음
자체로 우주와 통하는, 마음이 곧 넓은 대문인 도인도 종종 있다고 했다.
  나는 스승 범서선생이 어느 경지였던지는 확실히 모른다.
  그러나 스승이 보통의 경계를 훨씬 뛰어넘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스승은 한 달씩 곡기를 끊고 명상에 잠기는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으며 내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담겨있는지 그대로 보아내는
혜안을 지닌 분이었다.
  그 무렵에는 스승의 그런 모습들이 불가사의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세상에 불가사의라는 것은 없다고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우리의 머리를 장악하고 있는 기계적인 사고력이나 닫혀있는
상상력으로는 불가해한 일들이지만, 그 고정관념에서 조금만 벗어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생명의 신비를 경험한
어떤 학자가 말했둣이, 이제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는 것처럼
머지않아 영혼과 영생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진리 역시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순결하고 아름다운 삶.
  나는 스승의 그 말을 들으면서 얼마나 고무되었는지 모른다. 내 삶이 바로
그것에 바쳐진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찬란한 헌신인가. 사법고시를
통과해서 결국 판사가 되고 변호사가 된다 해도 내가 과연 인간의 영혼까지
판결하고 신호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기는 커녕 제도가 빚어 내는 오류와
인간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아주 많은 영혼한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
십상일 것이었다. 그런 끔찍한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단순한 열정만 믿고 그
오류와 오해의 길에 뛰어들기 전에, 범서선생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진정한
나의 행운이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예비된 순서였겠지만. 그리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게 예비된 길 속에는 놀랍게도, 그녀, 오인희도 있었다. 어떤
공부보다도 더 나를 집중 시켰으며, 어떤 수련의 경우보다도 더 많이 나를
미궁에 빠뜨리고 말았던 그녀가 있었던 것이었다...

    만남
  오고야 말 것이 왔다는 느낌,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맞닥뜨렸다는 알지 못할
체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이었을까.
  숲 그늘에 가려서 오직 푸르게 빛나는 서늘한 눈밖에 보이지 않던 그 사람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오직 기다리고만 있었던
사람처럼 보여졌다. 그녀는 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대상이 바로
자기였음을 한순간에, 벼락치듯이 깨달았다.
  미루.
  그녀의 나즈막한 부름에 개는 소리도 없이 달려와 그녀의 운동화에 코를
부비며 사랑을 표시하고 있었다. 지난해 단한번 스치듯이 만났을 뿐인데도
미루는 그녀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인희는 가만히 미루의 부드러운 목털을
쓰다듬어 본다.
  김진우는 이 돌연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서 몹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는 숲속에서 걸어 나오는 키가 크고 눈빛이 형형한 남자를 보았다.
길에서 혼자 만났다면 은연중에 겁을 먹고 피할 만큼 덩치가 크고 날쌔게 생긴
개도 보았다. 여자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개를 어루만지는 것도, 말없이
다가와 바람에 긴 머리칼을 나부끼며 조용히 여자를 바라보기만 하는 수상한
남자도, 진우에게는 모두가 현실의 일이 아닌 듯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 남자와 개는 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 그렇게도 세상과 사람에 대해
냉냉하기만 하던 오인희라는 여자의 저 설명할 길 없는 온유함은 또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것보다 저들과 그녀는 정말 어떤 관계란 말인가? 그녀에게
저 남자는 누구인가?
  영원 속의 한 순간처럼, 정적만이 주위를 감싸는 시간들이 흘렀다. 아무도
입벌려 말하지 않았다. 개의 훈훈한 숨결이 손에 퍼부어지는 것을 느끼며
인희는 무언가 말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은 머리 속에서 흩어져
사라져 버리고 그 빈 자리에 대신 뜻밖의 평화가 찾아드는 것은 웬일일까.
  이 기이한 정적을 깬 사람은 역시 진우였다.
  "인희씨, 이 사람, 누구예요?"
  그가 누구냐고?
  성하상, 이것이 그의 이름이다. 그외,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미루와
함께 노루봉 산장에서 기거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그밖에 불쑥불쑥 날아오던
편지 속의 그 이해할 수 없는 정신의 언어들이 전부이다.
  그를 어떻게 설명할까. 이 느닷없는 마주침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친화력을 어떻게 진우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인희는 난감한 얼굴로 성하상의
푸른 눈을 쳐다본다. 그때 성하상이 노래를 부르듯이 미루를 불렀다.
  "미루, 미루. 이리 온."
  주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미루는 그녀를 떠나 주인에게로 갔다. 성하상은
곁에 온 미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환한 얼굴로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오실 줄 알았어요. 두번째 여름이 있을 것을 알았지요"
  그녀는 남자의 환한 미소에 감염당해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의 검은 눈동자, 푸르도록 깨끗한 흰자위가 어쩌면 저리도 빛날 수 있는지
의아해 하며.
  그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눈이 내뿜는 저 푸른 빛 때문이었으리라.
무언가 마음을 잡아끄는 묘한 기운이 저 눈에서 내게로 오고 있지 않은가.
  정말 이상해. 알 수 없어. 인희는 여전히 말을 잊은 채 남자의 눈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이봐요. 대체 뭐하는 사람이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어떤 기운을 김진우도 느꼈다. 그는 서둘러 두 사람
사이로 끼어 들었다. 인희는 그런 진우의 팔을 잡아 당기며 제지하는 시늉을
한다. 남자가 다시 허리굽혀 미루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인희는 진우를 뒤에
두고 한 걸음 남자 곁으로 다가왔다. 자신도 모르게 취한 행동이었다. 저
사람이 지금 나를 부르는구나, 하는 느낌이 먼저였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생각하는 사이 발이 먼저 나갔다.
  "오세요. 조금만 더, 오세요. 당신에게 말할 게 있어요."
  성하상이 말했다. 그녀는 또 한 걸음, 한 걸음 남자에게로 갔다. 다가오는
여자를 보고 미루가 꼬리를 흔들었다. 인희가 문득 그 자리에 멈추었다. 미루도
흔들던 꼬리를 멈추었다. 그리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말할 게 있어요. 불을, 이글거리는 불의 혀를 조심하세요. 내 말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나직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오는 동안 인희는 미동도 하지않고 옆모습만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과 음성에 서려 있는 어떤 위엄, 혹은 비장함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불을, 이글거리는 불의 혀를 조심하세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개와 함께 남자는 숲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두
사람은 한동안 그들이 사라진 숲속을 흘린 듯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이 그들을 만나기 전의 현실로 돌아온 것은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진우가 먼저 그녀의 손을 현실로 잡아 끌었다.
  "자, 혜영씨 부부가 기다릴테니 일단 갑시다. 가면서 이야기합시다."
  인희는 그가 이끄는 대로 산을 올랐다. 진우란 남자가, 터질 듯한 의문을
간신히 참고 있는 한 남자가 곁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한 태도였다. 묵묵히
걷기만 하던 진우가 저만큼 앞에서 쉬고 있는 혜영 부부를 발견하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비명처럼 외쳤다.
  "누구예요? 잘 아는 사람이죠? 그렇지요?"
  불현듯 현실 속으로 돌아온 인희는 흠칫 몸을 떨었다. 분노와 의혹으로
흉하게 구겨진 이 남자, 그녀는 남자의 일그러진 얼굴을 외면했다. 이 남자가
오늘 아침, 후박나무 그늘 아래서 내게 입술을 준 사람인가. 인희는 남자의
세속적인 상상에 반항하기라도 하듯 굳게 입을 다물었다.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지금 막 그녀가 겪은 그 기이한 순간들을 그녀
스스로 이해하기 전에는 어떤 말도 입벌려 할 수가 없다. 인희는 대답을
채근하고 있는 진우를 앞질러 혜영에게로 달려가 버리고 말았다.

    푸른 별, 그리고 욕망
  "춥지 않아? 윗옷 하나 내다줄까?"
  혜영은 남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동규는 옷을 꺼내려고 방에 들어가고
그 사이 진우는 찬물에 담가 놓은 맥주를 더 가져 오기 위해 우물가로 갔다
  "아, 참 좋다. 저 별들 좀 봐, 별이 보석같다는 말. 정말 실감난다."
  인희는 혜영의 감탄에 같이 밤하늘을 올려다 본다. 흩뿌려 놓은 듯한 수많은
별들, 나직한 풀벌레 소리, 차갑고 싱싱한 밤기운.
  그들은 지금 휴가의 두번째 밤을 멍석 깐 마당에서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낮에는 혜영의 무거운 몸을 생각해서 산중턱에서 점심만 먹고 바로 하산을
했었다. 내려오는 길에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한가한 시간도 보냈다.
  산에 있는 동안 진우가 내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것을 인희는 보고 있었다.
그 뒤 다시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진우는 온몸으로 성하상과 그 중견
미루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완강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여사를
의식해서인지 열심히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거, 인희씨가 술꾼인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는데요. 그런 줄 알았으면
서울에서 매일같이 술집에 데려갔을 텐데, 난 그저 맛있는 음식이나 찾아
먹이려고 둔하게 굴었으니."
  그렇게 말하는 진우도 상당히 취해 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시작한
멍석에서의 술좌석이 벌써 두 시간째다. 혜영은 줄곧 과일과 과자만 주워 먹고
있었으나 인희는 앞에 놓인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술만 마셨다. 처음에는
동규의 주장에 따라 소주를 마셨다가 진우가 인희를 염려해서 맥주로 바꾼
것이었다.
  "모르셨어요? 인희 얘는 한 번 마시기로 하면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술이
센걸요. 아마 우리 동규씨보다 인희 주량이 더 셀걸. 그렇지?"
  인희는 빙긋 웃고 만다. 대신 동규가 그렇다고 인정을 한다.
  "김형도 인희씨한테 못 당하는 것 같은데 뭘."
  동규의 말에 혜영이 크게 웃는다. 그 사이에도 진우는 집요하게 인희의
시선을 붙잡으려고 그녀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는다. 그러는 그에게서
인희는 끈끈한 욕망을 읽는다. 아니, 욕망을 읽어내는 스스로가 싫다. 별은
저토록 아름다운데, 대기의 숨결은 이토록이나 깨끗한데, 이 순결한 시간에
끈적거리는 것은 정말 싫다고 생각한다.

    '나'에서 '우리'로
  툭, 툭.
  처음부터 인희는 저 소리를 듣고 있었다. 가볍게 방문의 손잡이를 치는 저
소리. 그녀는 창호지 문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
  툭, 툭
  "나가봐."
  혜영이가 속삭인다.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인희는, 어둠속에서 홀로 낯을
붉혔다. 뭘 두려워 하니. 혜영이 다시 낮게 속삭였다. 인희는 조용히 일어나
벗어 놓았던 스웨터를 어깨에 걸친다. 혜영은 벽을 향해 돌아 누우며 짐짓 삼베
이불을 뒤집어 쓴다.
  "커피를 한잔 끓였어요. 향기가 너무 좋아서."
  진우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밀면서 씩 웃었다. 웃는 남자 앞에서 그녀도
어쩔 수 없다. 커피잔을 받아들고 인희는 마당 귀퉁이의 돌에 걸터앉았다.
진우도 잡초가 듬성듬성 박힌 맨땅에 풀썩 주저 앉는다.
  많이 되었어야 열한 시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사방에 불빛이라곤 한 점도
없다. 오직 하얀 달빛과 푸른 별빛이 세상을 밝힌다. 구릉지대에 들어선
마을이라 띄엄띄엄 인가는 있어도 마치 숨겨진 그림찾기처럼 절대 한눈에 다
보여지지 않는다.
  "정말 고요하지요? 이렇게 좋은 곳이 있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여기도 머잖아 시장바닥처럼 들끓을텐데 그러면 우리는 그때 어디로 가야
하지요?"
  우리? 남자는 분명 '우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자는 그말이 너무 서먹하다.
이제까지 한 번도 그 말이 뜻하는 분위기를 경험해보지 않아서일까. 그녀는
사람들끼리 모여 우리가 되어 사는 일이 남자에게는 그렇게도 익숙한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아까 만난 사람, 누구예요? 이야기할 수 없는 사이인가요?"
  남자가 불현듯 여자의 무릎에 손을 얹으며 정색을 하고 묻는다. 역시 이
남자는 그것을, 그것을 알지 않고는 잠들 수 없었던 모양이다.
  "작년에 여기에 한 번 온 적이 있었다고 했지요? 그때 잃어버린 내 지갑을
찾아주었어요, 그 사람이. 이게 다예요."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라 해도 말하지 않고 있으면 저 혼자 풍선처럼
부풀려진다. 남자를 이유없이 괴롭히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뭔가 남김없이
털어놓지는 않았다는 느낌이 그녀를 석연찮게 만든다.
  "됐어요."
  남자는 여자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는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여자의
머리를 얹어놓는다. 인희는 그가 시키는 대로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달빛 젖은
앞산을 본다. 그러고 있는 남자와 여자를 감싸며 고요히 달빛이 흐른다.
  남자는 여자의 길고 가느다란 손을 가만히 쥐어본다. 이 여자가 내 어깨에서
쉬다니, 비로소 아까부터 그를 괴롭혔던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한 손으로는 여자의 작은 두 손을 쥐고, 또 한 손으로는 여자의 볼을
쓰다듬는다. 그래도 여자는 자는 듯이 가만히 있다. 이 여자에게 가시가 없는
순간을 보기는 지금이 처음 아닌가. 남자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구 말을 쏟아놓기 시작한다.
  "인희씨. 우리 서울에 돌아가면 서둘러요. 우선 우리 어머니부터 만나고,
빨리 날을 잡고, 그리고 우리 함께 살아요. 알고 있었겠지만 나는 마음이
급해요. 여기에 오면서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아세요? 휴가기간 동안 인희씨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라도 뛰어들자, 그렇게 다짐하고
왔어요 이젠 바다에 뛰어들 일은 없으니 얼마나 다행이예요."
  소나기 같다. 물기없이 바싹 마른 땅으로 내려 꽂히며 풀썩풀썩 흙먼지를
일으키는 거센 소나기 갈다. 강한 빗줄기에 땅은 이리저리 함부로 패이긴
하지만. 그래도 목마른 땅은 비에 젖어 고즈넉히 가라앉는다.
  인희는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신도
남자처럼 가슴이 뜨겁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나, 그러나 모두들 이렇게
사랑을 시작하고 함께 사는 것이 아니겠냐고 생각했다. 가슴은 서서히 데워질
것이었다. 하기야 얼마나 오래 추운 가슴으로 살았던가. 불기 한번 닿지 앓았던
냉방은 구들을 덥히는데 각별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었다.

    불꽃의 혀
  다음날 아침, 진우의 제안으로 휴가일정이 바뀌어졌다. 사흘을 묵고난 후에
남자들부터 떠나고 여자들은 이틀이나 사흘쯤 더 쉬었다 오기로 했던 것이 처음
계획이었다.
  진우는 아침밥을 지으면서 느닷없이 계획을 바꾸자고 했다.
  "형님은 어쩔지 모르겠지만 난 인희씨를 여기에 놓아두고 절대 혼자 갈 수
없습니다. 보세요. 밤에 호랑이라도 내려와서 겨우 구해 놓은 내 색시감을
물어가 버리면 난 어떡하라구요. 못해요. 난 그렇게 못해요."
  혜영은 아마 눈치를 챈 듯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인희를
돌아보았다. 지난 밤의 시간들이 두 사람 사이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리라고
짐작한 듯했다. 그 짐작이 틀린것은 아니었는데도 인희는 친구에게 확실한
태도를 보일 수 가 없었다. 인희는 일부러 끓어 넘치는 밥에만 신경이 쓰인다는
듯이 버너의 불꽃을 적당히 줄이는 데만 몰두하였다.
  "그래 그게 좋겠네. 사실 인희씨보다 우리 마누라가 더 걱정이라고. 이
나이에 겨우겨우 자식 하나 낳아볼까 하는데 나도 불안해서 내일 올라갈 때
함께 가자고 말할 생각이었어."
  "좋아요. 그럼 내일 모두 함께 여기서 철수하는 겁니다. 아셨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겁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버너 앞에 오도카니 앉아서 김이 오르는 코펠을
쳐다보고 있던 인희가 짧은 비명과 함께 튕겨지 듯 자리를 피했다. 버너는 분명
그때까지 아무 이상이 없었다. 마루에 앉아 있던 다른 사람들이 돌연한 그녀의
행동에 놀라 벌떡 일어났을 때까지도 모든 것은 다 정상이었다.
  일이 터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커다란 불꽃이 버너
위로 치솟았다. 버너가 폭발한 것이었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밥냄비가 저만큼에서 나뒹굴 지경이었다.
  너울거리는 불꽃이 아침 마당을 붉게 물들이는 것을 보면서 한동안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인희는 겁에 질려 타고 있는 버너와 그 주위를 핥고 있는
시뻘건 불의 혀를 바라보았다. 만약 피하지 못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불꽃의 잔인한 혓바닥은 또 내 인생을 어떻게 훼방했을까. 그런데 어떻게 이
재앙을 피할 수 있었는지 그녀는 의아했다.
  세상의 모든 재앙은 언제나, 유독, 그녀에게만 우호적이었지 않았던가.
  그것에 대한 의문은 불길이 수그러든 다음, 아예 형체를 잃고 녹아버린
버너를 쓰레기통에 버린 뒤에 혜영이 먼저 표현했다.
  "난 정말 알 수가 없구나. 인희, 너, 버너가 터질 것을 어떻게 알았지?
불꽃이 이상했니? 가스 새는 냄새가 났어? 사실 나도 그때 밥이 다 되었나 해서
버너를 보고 있었거든. 좀 떨어져 있었다 해도 전혀 이상한 것을 못 느꼈어.
그런데 넌 어떻게 미리 몸을 피했지? 너, 그냥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어떻게 될
뻔 했니, 생각만 해도_ 끔찍하다."
  혜영은 진저리를 쳤다. 진우는 그때까지도 멍한 표정이었다. 버너는 진우의
것이었다
  "모르겠어. 아무튼 위험을 느꼈으니까 피했겠지."
  인희는 모두의 의아해 하는 시선을 감당하지 못해 마지못해 그렇게 설명하고
만다. 하지만 강렬한 의혹에 빠진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그녀에게 일어난 것이었다.
  사고가 나기 직전에 진우는 자신들이 결혼을 결정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혜영 부부가 그것을 눈치채고 빙글빙글 웃는 모습이 보기
민망했던 그녀였다. 그러니까 사실은 버너의 불꽃이나 밥이 되어가는 상태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이 없었다. 그녀는 단지 뒤에 있는 그들의 대화에서 비껴
있으려고 버너 앞 자리를 고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당신에게 말할 게
있어요. 불을, 이글거리는 불의 혀를 조심하세요. 내 말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그러나 갑자기 그 목소리가 떠오르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만 하고 있던
그녀였다. 아니, 그 말이 뜻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답답했을까. 느닷없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녀의 등을
후려쳤다. 틀림없이 그랬다. 그녀가 짧은 비명을 지른 것은 등을 밀어내는 그
상한 손길에 놀라서였다. 보이지 않던 먼가의 손이 그녀를 불구덩이에서
후려치듯이 밀어 내었던 것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보이지 않는 손에 떠밀려 몸을 피했던 인희였다. 그 뒤에
버너가 터지고 불길이 솟았다. 어찌 의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희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진우를 보았다. 진우도 이제 막
수수께끼 같았던 그 말을 상기했던 것일까.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수력, 마음을 담은 손
  그녀의 둥을 후려친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내가 그랬다.
  물론 그 자리에 나는 없었다. 그 시간 나는 분명히 노루봉 산장의 내 처소에
있었다. 그러나 위험을 알리기 위해 그녀의 등을 후려친 사람은 분명히 나,
성하상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반문하겠지만 그 의혹하는 마음부터 풀어야 한다.
그래야 그날의 일이 불가사의가 아니고 우주와 인간이 힘을 합해서 해내는
실제의 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련을 거쳐서 광안을 뜨게 되면 이미 말했듯이 원할 때마다 우주와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몸의 문이라고 표현하지만 어쩌든 그것이 인간과
우주를 연결시키는 통로라는 정도만 알고 있어도 충분하다. 통로를 만들 줄
아는 자는 당연히 그곳을 통해 우주와 출입할 수도 있게된다. 육체는 놓아두고
정신만 빠져나올 수도 있으니, 우리의 몸 속으로 우주의 힘을 불러들일 수도
있다.
  먼저 내가 명상 중에 본 장면 하나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녀가
이곳에 오기 며칠 전부터 명상 속에서 그녀가 불길에 휘감겨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장면은 내가 광안을 뜨고 있을 때 보아낸
것이었다. 나는 그 영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녀, 내 사랑 오인희에게 또 하나 준비된 재앙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내 사랑 오인희에게는 그녀에게 닥칠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힘을 보내줄 나,
성하상도 예비되어 있었다. 이 모든 섭리는 그녀로 하여금 우주의 인연들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기회를 주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해서 내 마음도 안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웠다. 우주의 섭리를 이해하는 내
방식이 옳은 것인지 때때로 불안하기도 했다. 만약, 만약에 잘못되는 것이
우주의 섭리라면 그녀는 또 하나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불행을 맞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 김진우라는 남자의 오해가 있을 것을 염려하면서도 그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온 정성을 다해 그녀에게 경고했다. 아직
마음이 열리지 못하고 몸의 문을 만들지 못한 상태의 그녀가 내 경고를 어떤
식으로 이해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실제로 수초 후에 불길이 그녀를 휘감게 될 아슬아슬한 지경에서도 그녀는
다른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나는 아침부터 명상에 들어가 위험에 대비했다.
언제 그녀에게 위험이 닥칠지 그것을 미리 알 수는 없었다. 나는 광안을 뜨고
내 몸의 문을 열어 우주의 큰 기운을 받아들이며 기다렸다.
  너에게 위험이 오면 내 몸도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이윽고 내 호흡이 가빠지는 순간이 몰려왔다.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그녀에게로 가는 모습도 광안 속에 비치었다. 나는 다시 경고했다. 불을,
이글거리는 불의 혀를 조심하세요! 그러나 그녀는 내 경고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해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모든
에너지를 모아 마음의 결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팔을
뻗어 손바닥을 펼쳤다. 몸 속의 충만한 기운들이 팔을 통해 손으로 모여들었다.
손이 몹시 뜨겁다고 느껴지는 순간, 나는 그녀한테 손을 보냈다. 육체는 산장
내 거처에 있었지만 마음 속의 손은 정확히 목표에 도착해서 그녀를 위험에서
밀어내었다.
  그 손의 힘을 우리는 '수력' 이라고 칭한다. 공부를 위해서는 개념을
표현하는 용어들이 필요한 것은 어느 학문이나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범서선생은 그 용어들이 족쇄가 되는 것을 몹시 우려했다. 스승은 용어를 배운
다음에는 곧 그것을 잊어버리라고 이르곤 했다. 그래야 말에 의한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스승의 가르침대로 나 역시 공부의 호칭들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냥 그것이
드러난 진리를 표시할 수 있는 대표언어라고만 여긴다. 말하자면 '수력'이라고
부르기 싫으면 '손힘'이라고 칭해도 좋고, 그것도 싫으면 '마음이 날아가서
그녀를 깨우쳤다'라고 길게 풀어도 좋다. 거듭 말하지만 크게 수행을 쌓은
도사들이야말로 손 따윈 사용하지 않고 마음과 생각만으로 남에게 에너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도력이 미약한 우리들에겐 방편이 필요하다. 손바닥으로 기를
모은다고 생각하면 쉽게 남에게 에너지를 전달 할 수 있다. 육체의 어떤
부분보다 손이 우리를 빨리 집중시키므로 손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날, 폭발현장에 있었던 네 사람 모두 강하게 가졌던 의혹의 전말은
이것이다. 정리하면 아주 간단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녀에게 내 마음을 담은
손을 보냈다. 왜냐하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평화를 맛보다
  수수께끼를 풀어주겠다는 듯이 성하상, 그 사람이 그녀에게 왔다.
  인희가 홀로 뒷산의 오솔길을 산책하고 있을 때, 그녀가 여기에 올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는 미루와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이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당신 곁에 내 영혼을
보내 놓고 있었습니다. 내가 한 일은 그것 뿐입니다. 나는 당신을 지켜낸 것이
기쁠 따름입니다. 당신이 다치면 내 영혼도 다치니까요."
  그는 풀밭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 미루도 평온한 표정으로 엎드려 있다.
둘의 모습은 석양의 황금 노을을 배경으로 그림처럼 고즈넉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아니,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오인희는 말을 더듬거나 말끝을 흐리는 버릇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현실인지 환상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는 냉정한 그녀도 아귀가 맞는
질문을 만들어 내기 힘들었다
  "무엇 때문이냐구요. 물론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이지요. 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십니다, 당신은. 그것도 대답은 하나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호흡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지금 당장 내게 주어진
과제니까요. 당신을 철저히 사랑할 수 있음으로 해서 우주의 섭리에까지 나의
미약한 마음이 닿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말을 하는 동안 한 번도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다. 미루는 정말
놀라운 개였다. 주인이 하늘을 보면 같이 하늘을 보고, 주인이 그녀를 바라보면
저도 같이 시선을 준다. 둘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존재를 갈이 한다.
그녀에게는 그 둘이 영혼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남자는 소매가 긴 웃옷을 입고 있었다. 아마도 처음에는 와이셔츠로 만들어진
옷인데 칼라 부분을 동그랗게 잘라내고 입은 듯 싶었다. 그렇지만 옷은
깨끗했고 큰 키의 남자에게는 헐렁헐렁한 윗도리가 잘 어울려서 보기에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남자의 눈이 아름다웠던 것은 알고 있었으나 가까이서 보는 그의 눈은
슬프도록 검고 깊었다. 약간 두드러져 보이는 광대뼈 때문일까. 아니면 석양의
엷은 햇살이 그늘을 만들어서일까. 남자가 풍겨주는 분위기에는 산장에서
등산객을 거두는 산사람의 것이라 하기에는 맞지 않는 여릿여릿함이 어려있었다
  어제 그를 우연히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인희는 그에게서 알 수 없는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길을 잃고 헤매던 양이 낯선 짐승들
사이에서 적대감과 두려움만 느끼다가 같은 종족인 양을 만났을 때의 반가움
같은, 그런 감정이었다.
  저 사람도 나처럼 헤매이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인희는 얼른 마음
속으로 고개를 흔든다. 그에게서 엿보이는 단단한 평화는 바위같다. 미세한
떨림에도 크게 반응해서 심하게 마음을 다치는 나와는 다르다, 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런데도 종족을 보는 그리움과 정다움이 있다. 지난 여름까지
합해서 겨우 세 번 얼굴을 보는 것인데도 아주 오랜 인연의 세월을 함께 거친
사람처럼 여겨진다.
  미루, 그녀는 어제처럼 가만히 개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미루는 맑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미루, 이리 온. 인희는 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여자를 남자는 기쁨에 찬 표정으로 보았다. 미루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가 내민 손에 가만히 얼굴을 얹으며 낮은 자세로 누웠다.
그녀는 미루가 보여주는 다정한 몸짓이 너무나 좋았다. 개의 부드러운 털을
어루만지며 그녀는 말했다.
  "가봐야겠어요 미루하고 헤어지기는 싫지만."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미루는 몸을 일으켜 주인 곁으로 가버렸다.
그녀는 손을 부비며 어디 먼 곳을 보다가, 땅을 보다가 하면서 겨우 입을
벌린다. 이런 말을 해야 하나.
  "부탁이 있어요. 편지, 이제 그만 하세요. 곧, 결혼을 할지도 모르고..."
  인희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낯을 붉힌다. 어쩐지 남의 말을 하는 기분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거짓을 말하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러나 남자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아니, 동요는커녕 그녀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다.
  "가세요. 하지만 당신은 곧 내게로 다시 옵니다. 나는 그것을 압니다. 당신이
내 말을 믿을 수 있다면,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당신이 받을 상처를 아주
많이 줄일 수 있을 텐데 그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인희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저 사람이
사는 세계는 어디일까. 혹시 나도 저 세계에서 살다가 잘못 길을 들어 상처뿐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돌아갈 길을 찾아내기만 하면 누구나 저 세계로 귀향
할 수 있는 것일까.
  이상한 일이었다. 알 수 없는 소리만 하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인희는 조금도
그를 의심하거나 경멸하지 않았다. 그러기는 커녕 그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가서 미루의
부드러운 털에 손을 묻고 평온이 시간을 갖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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