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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이토록 어려운 시기에 있어

작성자jjr71|작성시간19.03.09|조회수26 목록 댓글 0

이토록 어려운 시기에 있어
우리의 목자를
아름다운 얼굴과 깨끗한 제의(祭衣)의 사랑스런 인물로 기대해선
차라린 잘못이다.
오히려 찌들고 보잘 것 없는 괴롬의 존재를 찾아봐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린
타볼산의 예수 보단
갈바리아산의 예수를 맞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
단 하나 그럴지라도 그분의 심령만큼은 티없는 자여야 한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참된 목자를 가리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출 때의 깊은 체험이 내겐 있다.
보이티야가 교황으로 처음 뽑히셨을 때,
난 큰 충격을 받았었다.
지극히 곱기 만한 얼굴의 전임(前任) 교황들에 비해
일면 험악하게 느껴졌던 첫 인상의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실망감에 몸서리쳤지만,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바로 위의 생각이 나를 크게 깨우치게 만들었다.


그 뒤 성 막시밀리안 꼴베 신부를 깊이 접한 뒤
그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우리는
수난의 예수를 그려볼 때 그 슬픔만 강조할 뿐,
보기 흉함이나 추함은 간과하길 잘한다.
다시 말해 "거룩한 슬픔"으로 그분의 모습을 입힐 뿐이다.


그러나 사실로 생각해 볼 때,
거기엔 필히 "언짢고 찌푸릴 정도의 추함"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 예를 들어
예수의 수난 받는 얼굴과 모습이
오직 거룩한 아름다움으로만 끝까지 빛나고 있었다면,
제자들의 도망이나
갑작스레 돌변한 군중들의 모욕과 조롱을
도체 완전히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그 순간의 예수에게선
타볼산의 그 빛도,
산상수훈이나 기적을 일으킬 때의 그 위엄도
모두 사라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거기에
하느님의 아들의 그 영광은 한 점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에서의 실망과 절망이
모든 제자들에게 덮쳤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상처 입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의 예수,
어둠에 짓눌려 괴롬을 겪고 있는 그분으로부터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믿음을 버린다면,
우리는 참된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잃게 된다.


"에이 저 치가 하느님이라고!"
그렇게 느껴질 때일수록
더욱 그분 곁에 가까이 다가서 머물러 있다면,
결국 부활의 영광에 참된 동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처음으로 부활의 예수를 뵈온 자는,
비록 먼발치로나 끝까지 예수의 십자가 곁에 머물렀던
마리아 막달레나 같은 갈릴리 여인들이었다.


실망이나 절망을 무릅쓴(개의치 않는다는 뜻이다!) 동참,
거기에서 근본적인 변화는 성취되고
명실상부한 동반이 이뤄진 것이다!


그 때 "마리아!" 하면 "랍보니!"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를 막달레나가 처음 뵙는 이 장면은
성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마태복음 25장31절 이하'의 정신에로 연결되어 나아가게 된다.


거기 언급되고 있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이 겪고 있는
굶주림과 목마름, 나그네 됨, 헐벗음, 병듦, 감옥에 갇힘 등등의
상황 그 모습은 결코 아름답게 보여질 성질의 것이 못된다.


그것은 분명 외형적으로 추하기만 하고
저주스러울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일 따름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얼굴은
거룩한 슬픔으로 후광(後光)을 입고 있는 그런
성인(聖人)들의 상본처럼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 어려운 시기에 있어서,
특히 우리의 구원이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에 언급된 것처럼
오직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와의 하나됨으로만 이뤄질 것이라면
그들과 진정으로 함께 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과 자세는
바로 그런 주관적인 환상을 떨쳐버리고
오직 그들 자신과 무조건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랑 뿐이어야 한다.


수난의 그날
주님에 대해 그 환상을 지녔던 제자들은 모두
주님 곁을 떠나가며 배반했으나,
그런 환상이 아닌 오직 주님 그분 자체를 사랑했던
여인들은 끝까지 그분을 모셨고
기어힌 부활의 기쁨도 가장 먼저 맛보았듯이 말이다.


사실 참된 사랑은 모성애가 그러하듯 무조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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