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참된 의미 제1탄
우리들은 흔히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닥칠까?
왜 이 세상은 이렇게 불공평한가?
도대체 왜 하느님은
우리에게 왜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도대체 하느님의 뜻을 모르겠다고 말한다.
물론 이 세상에 고통이 닥쳐온 것은
아담과 하와의 죄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어떤 이는 그럼 왜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 갈 것을
뻔이 아시면서도 내버려 두셨을까?
하며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도대체 왜 굳이
십자가 상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셔야만
하셨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그런 고통을 선택하셨고
왜 우리에게 이런 고통들을 허락하시는지
그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게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진정한 사랑을 서로 나누고 싶고
또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 아닐까?
굶주리고 헐벗은 이웃에게 음식을 먹이고
옷을 입히려면 음식과 옷을 만드는 희생이 따르거나
음식과 옷을 사기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
이미 음식과 옷과 돈이 있다면 그
것을 자기를 위해 사용할 것을 포기해야 하는 희생이 따른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들을 기르고 가르치는데
얼마나 많은 희생과 고통이 따르는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나 사별의 아픔,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시련에 닥쳐 괴로와 할때
그것을 낫게 하고 돕고 싶어도
낫게 하지 못하고 도와주지 못하고
고통도 대신하지 못하고 그저 지켜볼 수
밖게 없는 가슴아픈 수많은 상황들,
그렇다 사랑에는 고통과 희생이 반드시 따르기 마련이다.
사랑은 이웃의 행복을 열망하는 것이며
그 행복을 위해 나를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다.
마더데레사 수녀님이나 슈바이처같은 사람들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병마로부터 치유를 받고
복음의 불모지에 복음을 심어 수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끈다.
또 그 모습을 보고
그를 돕고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 반면 권력자들의 야망과 욕심으로 인해
수 많은 전쟁이 일어나 수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사랑은 고통과 희생이 따르지만
행복을 가져다 주고 미움과 욕심은
당장에는 이익이 될지 몰라도
엄청난 불행과 재앙을 가져 오도록 섭리하셨다.
또 사도행전에 초대교회신자들 모두는
자신의 소유를 모두 공동의 소유로 내어 놓아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극치이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인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온 인류가 이런 사랑을 나누면
헐벗고 굶주리는 이웃과 민족도 없고 전쟁도
있을 수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런 방식을 택한 공산주의자들은
왜 다들 망하고 말았는가?
그것은 진정한 사랑의 정신이 빠졌고
예수그리스도가 빠졌기때문임을 너무나 잘 안다.
사랑의 속성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반면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속성이 있다.
하느님의 사랑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한없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짝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시며 사랑받고 싶어하신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지어내신 목적은
바로 우리와 깊은 사랑을 서로 나누기위함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의 나눔과 교류 그것은 일방적 짝사랑이 아닌
고통과 희생을 서로 주고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죄의 사함을 위해
친히 인간이 되셔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당하시고
끝내는 십자가 상에서 비참하게 돌아 가셨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굳이 하신 이유는
우리도 당신을 위해 당신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인간의 갖가지 고통을 다 당하셨듯이
우리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고통과 아픔 아니
우리의 모든 삶을 예수님께 봉헌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도 베드로도 사도 바오로도
열두사도들도 예수님의 복음때문에 매 맞고 옥살이 하며
갖은 박해를 다 받고 끝내는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초대 교회신자들까지도
역시 박해받았고 로마 네로황제에 의해 순교당했다.
우리도 크고 작은 시련과 어려움이 닥치며
때로는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울때도 있고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은 고통들이 있고
막상 고통을 당해서 하느님을 원망하며 울부짖을 때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고통들을 당할때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봉헌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고통뿐만 아니라 행복까지도
우리의 모든 삶을 산 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죄로 낙원에서 쫓아 내신것은
너무 가혹한 형벌이라고 말한다.
만약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 내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또 불순종 할 수도 있으며 선과 악을 알게 되어
물론 선도 행할 수도 있겠지만 악도 끊임없이
행하게 되어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고통이 없는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희생을 동반한 진정한
사랑의 나눔은 기대하기 어렵다.
굳이 존재한다고 하면
참으로 지루하고 고통스런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일방적 사랑만이 존재하는
하느님의 인내심만 시험하는 나날들만 계속될 것이다.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분명
하느님께 사랑받는 대상인 동시에
하느님께 사랑을 드려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사랑을 베푸시기만을 원하시는것도 아니요
인간이 하느님을 일방적으로 사랑을
바쳐 드리는 것도 원하시지 않으시며
서로간에 희생을 동반한 진정한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필요로하신다는
사실을 거부하기도 하며
구원은 우리가 지고 있는 고통의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며 위의
말을 잘못 오해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 구원의 길은
인간의 어떤 공로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믿음뿐이다.
우리가 지고 가는 고통의 십자가는
구원받은 자들이 받는 상급과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를 구원해주신데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행위로 인해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너무한 일이라고 말한다.
어떤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예쁜 인형을 선물해 주었는데
처음에는 인형이 너무 예뻐서 안아주기도 하고
입맞추기도 하고 무척 아껴 주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해주지 않는 인형이 너무 야속해져서
난롯불에 그만 던져 넣었다는 얘기가 있다.
또 창세기를 보면 요셉을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이야기가 나오는데
요셉에게 여러번 동침을 요구하지만 끝내 그것을 뿌리치자
그만 무안을 당하고 결국 그것이 분노로 변하여
요셉에게 분풀이를 하여 감옥에 갇히게 하고야 만다.
어쩌면 이것이 현명한 선택인지도 모른다.
왜냐면 그 어린아이가
인형이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계속 상처만 받을 뿐이기에
주인의 뜻에 어긋날때 버리는 것이다.
보디발의 아내 역시
요셉의 마음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간음이라는 윤리적인 문제를 떠나서
요셉과의 관계를 완전히 끈어 버려야만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는다.
예수님도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상에서 우리 죄를 보속하시고 그를 따르는 사람을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시기도 하시고
고통을 통해 행복을 통해 채찍질도 하시고
달래어 보시기도 하시면서 당신의 존재를
알리시지만 우리가 끝내 복음을 거부하며
외면하면 분노를 터트르시고 관계를 끈어 버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하느님의 사랑의 성격에는
부모가 자녀에게 내리는 사랑의 성격과
남녀간의 사랑의 성격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인 동시에
예수님의 애인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이 사랑의 성격에는
우리가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하기를 좋아하고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말씀드리고
함께 예수님과 나누시기를 원하시며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감사드리기를 원하시며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을 때 질투도 하시며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할때 상처도 받으시며
인내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만
그것을 끝까지 외면할 때 분노로 변하고
보디발의 아내처럼 미움으로 변하셔서 분풀이를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하늘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버리고 인간이 되셨다는 것
그것도 모자라 인간이 겪을수 있는 모든 고통 다 당하시고
십자가상에 목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하셨다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떤 혁명이나 전쟁보다 더 큰 엄청난 사건이 아닐수 없다.
어리석은 우리 인간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실로 엄청난 사건이다.
다만 우리는 사랑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할 대상을 찾으시다가 당신모습을 닮은 우리를 지어내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선택하시고
그토록 엄청난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셨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일 뿐이다.
예수님의 이 사랑은 구원받을 자들을
한데 묶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랑이 아니라
우리 각자 한 사람만을 위해서라도
기꺼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수 있는
그런 사랑으로 받아 들여져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오로는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고
죄 많은 나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고 고백했다.
부모가 자녀 열명을 위해 죽을 수도 있고
오직 한 명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랑은
모두 똑같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나 짐승까지도
많은 자녀들을 개별적으로 사랑할수 있는데
사랑자체이신 하느님은 충분히 그런 사랑의 능력을 갖고 계신 것이다.
이토록 엄청난 사랑이 인간으로부터 거부당할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는가?
일방적 짝사랑은 너무나 아파서 하실 수가 없다는 말이다.
최소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인정만 해달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앞에는 인간의 그 어떤 흉악한 죄도 초월하는
용서하는 사랑인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그 어떤 공로나 율법도 필요없고
그 크신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예수를 율법학자들에게 팔아버린 가리옷 유다,
그가 구원받지 못한 것은 그의 죄가 너무 커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도 그만은 구원할수 없었던 것은
결단코 아닐 것이다.
그가 예수를 일곱번씩 일흔번이나 팔아넘겼더라도
용서되는 그런 십자가의 사랑인 것이다.
그가 구원받지 못한 것은
돈에 눈 멀고 자신의 야망에 눈이 멀어
권력으로 내리 누르는 왕이 될 예수님으로 모셨기에
예수님이 하신 사랑의 말씀도 알아 듣지 못했고
자신의 무거운 죄도 용서하시는 예수님으로 알아 보지못하고
무거운 죄책감에 짓눌려 예수님께 용서도 구하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기때문이다.
예수님의 시대 훨씬 이전에
하느님께서는 율법으로 의로와 지고
율법으로 구원되는 길을 마련하셨다.
그것은 인간이 율법을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것인데
그 전에 먼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고
여러가지 놀라운 방법으로 보살피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면서 당신의 사랑과 존재를 알리시고
율법을 통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하시고
그 율법과 사랑을 잘 실천하면 사랑으로 잘 보살피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자 하느님의 은혜는 잊혀지고
율법을 통해 행해지는 인간의 사랑은 변질되고
무거운 멍에로만 여길뿐이었다.
여기에 뭔가 빠진 듯한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바로 하느님의 희생을 동반한 사랑이 없고
인간의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
즉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 율법의 정신을
완전히 이루는 사랑도 없다는 것이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보다 차원 높은 사랑
율법의 정신을 완성시키는 사랑을 하시기로 결단하시고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시기위해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보다 먼저 실행하신 것이다.
흔히 우리는 착하게 살면 구원받겠지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을 하지만
아담의 죄로 인해 잃어버린 구원을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구원이 결코 아니다는 것이다.
인간이 창조된 목적에 의하면 이웃사랑이
인간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보다 우선 될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배우자나 애인이,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같은 자녀와 손자가,
나와 피를 나눈 부모와 형제가
예수님을 거부하며 그런 독선적인 하느님이라면
예수가 아니라 야수라고 비꼬면서
내 말도 듣지 않고 외면할때 내 마음은 찢어 질듯 아픈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위해 눈물흘리며
기도하며 선행하며 자선도 하며 여러가지 서원과 맹세도 드리기도 한다.
이런 모습을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아름다운 영혼으로 보시며
그의 간절한 기도를 항상 귀울여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 사랑을 드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혼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듯이
우리도 이웃의 영혼구원을 위해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믿지않는 이웃을 보면 마음아파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열망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적인 자세이며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오로 그는
누구보다도 예수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한 사람이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이방인의 사도이면서도
동족이지만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지간일 수 밖에 없는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 버림받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온 몸의 피가 땅에 뿌려져도 좋고
자신이 하느님께 저주를 받아 지옥불에 던져져서
이스라엘이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고백했고
그것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 열망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사랑의 원천은 바로
예수님과 원수지간인 그를 직접 만나주시고 용서해 주시며
그의 험난한 인생길에 잠시도 곁을 떠나시지 않으시고
위험을 미리 알려 주시고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 주시고
헐벗고 굶주리고 매 맞을 때 그의 안에서
같이 헐벗고 굶주리고 매 맞으시며 자신을 위로해 주시는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이리라.
또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은
그가 그렇게 사랑받을 수 있도록 고통중에서
기도한 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부제였던 스테파노
그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세를 바로 잡고 무릎꿇고 돌 던지는
원수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 무리에 사도 바오로 그 자신이 끼여 있었고
스테파노를 죽이는 것에 찬동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스테파노의 그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 중에서 가장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데
열성적이었던 그를 만나주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변화시켜 주셨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위한 간절한 기도는
이스라엘백성의 수와 비교할수 없는
훨씬 더 많은 이방민족의 영혼들을 구원했고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오로에게 마지막날에는
이스라엘 민족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묵상하고
부활의 참된 의미를 묵상해보는 것도
참으로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부활의 참된 의미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셔서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다 차지하시고
우리를 전리품으로 다 차지하셨듯이
우리도 고난을 다 받고 나면 우리도 권세와 영광을 차지하고
예수님을 전리품으로 삼고 함께 영원히
예수님과 함께 사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