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우리는 계약의 역사라고 할 만큼
우리에 대한 그분의 새로운 약속으로 이어져 왔는데
이 약속은 우리가 나서서 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그분께서 먼저 제안하십니다.
우리는 이에 두가지 상반된 반응을 합니다.
하나의 반응이 믿음입니다,
하느님을 믿어서 그 약속도 믿게 되죠.
다른 반응은 불신입니다.
약속은커녕 하느님마저 믿지 않죠.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계약으로 부르시고
우리는 응답할 자유를 가집니다.
온 우주를 다 가지신 분께서 무엇이 아쉬워서 우리에게 이러시는 걸까요?
당신께서 낳아 기르는 자식이 아니라면, 이렇게 하시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서 안에서나 우리들 안에서 이렇게 계시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다,
사랑이 오는 쪽은 변함없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사랑에 가득해서 고백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분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움직임으로도 현존하십니다.
사랑이라면 그 무엇이 되어도 마다하지 않으실 분,
단지 우리들을 위해서라면
그래서 그 사랑 앞에선 당신 자신인 그리스도를 희생하시기도 합니다.
사랑엔 주고받는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어느 군주나 왕 치고 우리들과 주고받는 사랑 안에 있었던가요?
군림하는 자는 홀로 존재하거나 단지 받기만 할 뿐입니다.
관계가 없고 차단되어 있죠.
그렇지 않으면 근엄하지도 권위를 갖지도 못한다고 여기니까요.
하느님께서 권위를 가지시는 방법은 참 독특하십니다.
열린 관계 안에서의 사랑, 그리고 계약,
이것만이 그분을 가장 높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우러르게 합니다.
징벌을 하지 않진 않으시나
우리에게 가장 큰 계약으로 사랑을 내걸으셨기에
자비와 용서로 기다려주시고 다시 안아주시고..
사랑의 하느님 아니시면 누구도 이만큼을 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나를 위해 내주셨습니다.
처음엔 하느님 것이었지만
내게 주시고 나서는 내 것이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느님께서는 내게 주실 걸 염두에 두시고
풀포기 하나 창공의 새 한 마리도
나에게 유익하게 쓰이도록 세심하게 준비해두셨습니다.
세상과 나는 하나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따로 떨어져 있다면,
세상이든 나든
하느님께서 하나로 창조하신 피조물이 아니게 됩니다.
세상에는 나, 그리고 나를 위한 풀포기나 새들 말고도
나의 친구, 부모, 그리고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들 또한 어느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고,
살아가며 언제 어디서 내게 도움될지 모르기 때문에
이유 없이 홀로 있는 건 이 땅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 탓하는 사람들,
하느님께서 나와 하나로 내주신 세상을 제대로 가꿔가지 못합니다.
애초부터 자신과 하나인 세상을 탓하니
결국 자신을 탓하는 게 되어서 될 일이 없죠.
세상을 속되고 천하다며 비난하는 사람들,
하느님께서 주신 세상을 몰라보고
그게 정작 그분을 비천하게 여기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교회에서는 물론 외인과의 친교도 중요한 건
어떤 경우에라도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거나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걸어잠그지 말아야겠습니다.
세상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만이 하느님 사랑이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하게 아끼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이기도 한 나,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그런 나와 세상은 처음부터 둘이 아닌 하나였습니다.
오늘도 함께 하소서
예수님
내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가장 평화로운 하나의 이유는
끊기지 않을 듯한 한밤이
희멀건 새벽으로 가는 듯 오는 듯 하나로 섞이어
이내 어김없이 바라볼 수 있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나를 비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생이 가고 천년이 갈 듯
어린아이와 같이 하루 하루 살아갈 뿐,
내게 그 뜻이 무얼 말하는지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
단지 어느 누군가가 내게
무언가를 자꾸 이야기하시고 잡아 이끄시고
그분은 내가 소용없는 일을
왜 그러시느냐 답답한 표정으로 바라봐드려도
첫 태내에 나를 잉태케 허락하셨듯
그 굳으신 기약 하나로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내게 가르치신 그대로
내 모든 한생의 구석구석,
그 못남투성이마저도 사랑하시니
알수없는 느낌의 그 사랑만이
어렴풋이 나를 숨쉬게 할 뿐입니다.
예수님
허구헌 날 기도마저 잊어 하늘 멍하니 바라보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러다가 죽어도 좋습니다 하여 내어맡기니
나의 살아 있음은 물론
어느날 데려가실 그 죽음마저도
이미 다 그분의 것이며
나는 그 사랑 그 뜻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아멘
우리에 대한 그분의 새로운 약속으로 이어져 왔는데
이 약속은 우리가 나서서 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그분께서 먼저 제안하십니다.
우리는 이에 두가지 상반된 반응을 합니다.
하나의 반응이 믿음입니다,
하느님을 믿어서 그 약속도 믿게 되죠.
다른 반응은 불신입니다.
약속은커녕 하느님마저 믿지 않죠.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계약으로 부르시고
우리는 응답할 자유를 가집니다.
온 우주를 다 가지신 분께서 무엇이 아쉬워서 우리에게 이러시는 걸까요?
당신께서 낳아 기르는 자식이 아니라면, 이렇게 하시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서 안에서나 우리들 안에서 이렇게 계시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다,
사랑이 오는 쪽은 변함없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사랑에 가득해서 고백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분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움직임으로도 현존하십니다.
사랑이라면 그 무엇이 되어도 마다하지 않으실 분,
단지 우리들을 위해서라면
그래서 그 사랑 앞에선 당신 자신인 그리스도를 희생하시기도 합니다.
사랑엔 주고받는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어느 군주나 왕 치고 우리들과 주고받는 사랑 안에 있었던가요?
군림하는 자는 홀로 존재하거나 단지 받기만 할 뿐입니다.
관계가 없고 차단되어 있죠.
그렇지 않으면 근엄하지도 권위를 갖지도 못한다고 여기니까요.
하느님께서 권위를 가지시는 방법은 참 독특하십니다.
열린 관계 안에서의 사랑, 그리고 계약,
이것만이 그분을 가장 높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우러르게 합니다.
징벌을 하지 않진 않으시나
우리에게 가장 큰 계약으로 사랑을 내걸으셨기에
자비와 용서로 기다려주시고 다시 안아주시고..
사랑의 하느님 아니시면 누구도 이만큼을 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나를 위해 내주셨습니다.
처음엔 하느님 것이었지만
내게 주시고 나서는 내 것이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느님께서는 내게 주실 걸 염두에 두시고
풀포기 하나 창공의 새 한 마리도
나에게 유익하게 쓰이도록 세심하게 준비해두셨습니다.
세상과 나는 하나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따로 떨어져 있다면,
세상이든 나든
하느님께서 하나로 창조하신 피조물이 아니게 됩니다.
세상에는 나, 그리고 나를 위한 풀포기나 새들 말고도
나의 친구, 부모, 그리고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들 또한 어느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고,
살아가며 언제 어디서 내게 도움될지 모르기 때문에
이유 없이 홀로 있는 건 이 땅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 탓하는 사람들,
하느님께서 나와 하나로 내주신 세상을 제대로 가꿔가지 못합니다.
애초부터 자신과 하나인 세상을 탓하니
결국 자신을 탓하는 게 되어서 될 일이 없죠.
세상을 속되고 천하다며 비난하는 사람들,
하느님께서 주신 세상을 몰라보고
그게 정작 그분을 비천하게 여기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교회에서는 물론 외인과의 친교도 중요한 건
어떤 경우에라도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거나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걸어잠그지 말아야겠습니다.
세상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만이 하느님 사랑이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하게 아끼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이기도 한 나,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그런 나와 세상은 처음부터 둘이 아닌 하나였습니다.
오늘도 함께 하소서
예수님
내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가장 평화로운 하나의 이유는
끊기지 않을 듯한 한밤이
희멀건 새벽으로 가는 듯 오는 듯 하나로 섞이어
이내 어김없이 바라볼 수 있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나를 비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생이 가고 천년이 갈 듯
어린아이와 같이 하루 하루 살아갈 뿐,
내게 그 뜻이 무얼 말하는지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
단지 어느 누군가가 내게
무언가를 자꾸 이야기하시고 잡아 이끄시고
그분은 내가 소용없는 일을
왜 그러시느냐 답답한 표정으로 바라봐드려도
첫 태내에 나를 잉태케 허락하셨듯
그 굳으신 기약 하나로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내게 가르치신 그대로
내 모든 한생의 구석구석,
그 못남투성이마저도 사랑하시니
알수없는 느낌의 그 사랑만이
어렴풋이 나를 숨쉬게 할 뿐입니다.
예수님
허구헌 날 기도마저 잊어 하늘 멍하니 바라보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러다가 죽어도 좋습니다 하여 내어맡기니
나의 살아 있음은 물론
어느날 데려가실 그 죽음마저도
이미 다 그분의 것이며
나는 그 사랑 그 뜻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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