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은 욥의 신앙이 단순히 자신의 부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닌지 시험하고자 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은 상대방의 반응과 태도나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변한다. 출애굽기에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었는데도 어려움과 고통이 닥치자 하느님을 원망하며 불평했다. 사도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너도 나를 배반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전직이 목수이신 예수님께서는 저희 어부들의 생리를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희 어부들은 배가 위태로울 때 다른 동료들의 생명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며 물속으로 뛰어들기도하는 의리로 뭉쳐진 한 배를 탄 집단인걸 모르시는군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을 배반할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는 예수님을 잡으러 온 병사의 귀를 자르며 예수님을 위해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도리어 그 병사의 귀를 고쳐주시며 아무런 저항없이 끌려 가시는 것을 볼때 내가 이런 분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가치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내가 예수님을 안다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며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야 만다. 예수님을 따른 군중들 역시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서 곧장 궁궐까지 진격하셔서 자신들을 식민지에서 해방시켜 주실줄 알았고 그들의 신분도 상승시켜 주실줄 알았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기에 그동안 수 많은 사랑의 말씀과 기적을 베푸셨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실망한 나머지 율법학자들의 선동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이에 비해 예수님의 사랑은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매질을 하고 갖은 모욕과 멸시를하며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고통을 허락하셔도 어떤 처지에 놓여도 우리가 여전히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기를 바라신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요구이시다. 사탄은 이런 인간의 속성을 잘 알고 욥을 시험했던 것이다. 참고로 전직이 목수이신 예수님의 직업의 상징적인 의미를 묵상해보면 사도 바오로는 교회를 성전건물로 비유하고 우리를 성전건물을 구성하는 돌들로 비유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건물을 지으시는 목수이시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목수의 주된 재료인 나무, 못, 망치로 즉 나무로 된 십자가에 망치에 의해 못박혀 돌아가심으로써 교회를 세우시고 지금도 계속 교회를 건설해나가시는 분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목수의 재료로 사용되었던 흙으로 당신의 성전인 우리를 지으내셨다. 의로운 욥을 보고 사탄은 하느님께서 욥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때문이라며 욥을 시험해 보실것을 권한다. 그래서 그는 갑자기 큰 재앙을 당한다. 위로하기 위해 온 친구들은 공의로우신 하느님이 살아계신데 까닭없이 네가 재앙을 당할리 없다. 네가 큰 죄를 범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회개하라고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친구들만은 의롭게 살아온 자신을 잘 알고 죄없이 비참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줄줄 알았지만 오히려 욥은 친구들의 몰이해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욥은 당한 고통도 고통이지만 사람들의 외면과 사랑하는 아내, 친구들의 비난이 더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사람들의 외면 못지 않게 욥을 더욱 괴롭혔던 것은 왜 하느님이 자신을 외면하는가에 대한 의문이었을 것이다. 욥은 철저한 몰이해와 고독속에서 기대고 의지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래도 하느님뿐이라는 것을 알고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한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엘리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무슨 뜻이 있어 고통을 허락하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는 욥을 직접 만나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은 인간보다 훨씬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면서 욥은 피조물일뿐이며 당신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시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그러므로 욥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어떤 상황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 모든 것을 선의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믿고 그 어떤 고통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셨던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의 선의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단지 야훼께서 욥의 소유를 전보다 두 배나 돌려 주시기위함뿐일까? 욥은 그 엄청난 고통속에서 사람들의 외면과 사랑하는 아내, 친구들의 비난속에서 자신의 고통스런 마음을 진정 이해해 주고 위로해주기를 그 고통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가지기를 간절히 바랬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괴로웠고 더 간절히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욥을 직접 만나주셨고 그의 죄없음을 인정해주셨고 그의 마음을 속속들이 훤히 다 아시면서 그의 고통은 죄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권리와 선의때문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욥은 그의 마음을 진정 이해주시고 받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깨달았으며 그가 전에 고아와 과부를 돌볼 때 그저 불쌍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진정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며 그들의 고통을 온 몸으로 껴안은 사랑이어야 함을 누구보다 절실히 깨닫게 해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욥은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욥은 사람들의 몰이해와 비난으로 인한 철저한 고독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그의 고통스런 마음을 훤히 다 아시고 그의 죄없음을 인정해주시며 그의 기도에 귀기울여 주시며 응답해주시고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는 하느님께서 만나주시는 체험을 통해 그의 삶은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과 기쁨속에서 그의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함으로써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자신의 아픔과 고통으로 여기며 고통받는 이웃을 더욱 더 깊이 사랑할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욥의 원망과 교만을 그의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던 것을 모두 용서해주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심하게 상처를 주었던 친구를 용서해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바라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인격성숙과 인격완성을 위해 이웃에게 부당한 비난과 모욕과 멸시와 손해를 보는 고통을 이웃에게 밥이 되는 고통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해야하는 아픔과 고통을 허락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욥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기도보다는 죄인의 겸손된 기도를 부서지고 낯추인 마음을 더 원하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라고 고백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욥은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당신께 무슨 큰 손해라도 된단 말씀입니까?"하고 지껄였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아니 나를 마치 이 세상에 나 밖에 없는 것처럼 대하시고 내가 죄를 짓는 것을 내가 예수님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처럼 여기신다. 하느님께서는 때로는 어처증환자처럼 나의 마음과 행동을 깊이 간섭하시기도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나와 개별적으로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시고 우리 각자에게 다른 인생길을 예비하시고 이끌어 주신다. 한 가지 깊이 묵상해 볼것은 하느님께서는 욥을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있을 법한데도 그런 말씀이 이상하게도 없다는 것이다. 아니 욥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을 요셉을 모세를 다윗을 예언자들을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성서를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열두제자들을 사도 바오로를 신자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분명히 있다.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희생적 사랑이 없었기때문이 아닐까? 욥기는 고통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욥에게 왜 이런 엄청난 고통이 닥쳤는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사탄과의 내기 즉 과연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경건한 신앙이 존재하는가, 그 대가가 고통일지라도 하느님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는가하는 논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천상의 이 논쟁 사실을 전혀 모르는 욥은 그 고통의 이유를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사랑이 진정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기위함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욥기를 읽은 우리는 그 원인이 천상의 논쟁에서 비롯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그런 선의보다는 욥이 자신의 고통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기를 그 엄청난 고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니 더욱 더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하기를 바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그런 고통을 허락하셨고 그 고통을 통해 단지 선의로 이끌어 주셨다는 것이다. 그 선의가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많은 이들은 이 선의 즉 우리의 인격성숙을 위해 우리를 단련하고 인내를 주고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고 이것이 궁극적인 이유라고 생각하지만 보다 더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이유가 더 있다는 것이다. 그 근원적인 이유를 십자가의 참된 의미라는 글에서 명쾌하게 설명해 놓았다. 그 글이 욥기를 보다 더 깊이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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