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참된 의미에서 십자가는
흔히 고통이나 고난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참된 사랑과
우리가 그 은혜에 감사하며 드리는 고통을
동반한 사랑 이 세가지 모두를 의미한다.
이 세가지 의미 모두를
그 짧은 글 속에 모두 표현하려했는데
사실 고통이라는 문제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하느님사랑과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에 대해
미흡한 점이 너무 많아서
그 글을 보충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글을 또 쓰게 되었다.
우리는 앞에서 사랑자체이신 사랑의 하느님이라면
우리에게 도대체 왜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도대체 왜 굳이 십자가 상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셔야만 하셨는지 깊이 묵상해 보았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하느님께서 사랑자체이시기에
우리와 고통을 동반한 사랑을
서로 주고 받기를 원하시기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라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도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감사와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지어내신 목적은
바로 우리와 깊은 사랑을 서로 나누기위함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의 나눔과 교류 그것은 일방적 짝사랑이 아닌
고통과 희생을 동반한 사랑을 서로 주고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사랑에는 반드시
고통과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깊이 묵상해 보았다.
그럼 왜 하느님께서는 사랑에는
반드시 고통과 희생이 따르도록 섭리하셨을까?
사랑의 감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사도 베드로의 감정과 생각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했지만
죽음의 고통이 다가오자 그 사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사랑은 고통과 희생을 통해 그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고통과 희생도 그만큼 큰법이다.
부모님의 사랑이 고귀하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자식에게 쏟는 희생과 고통이 그만큼 크기때문일 것이다.
그럼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이며 그 사랑의 성격은
어떤 것인지 좀더 깊이 묵상해보자.
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며
그 사랑을 표현해서 알리고 싶은 욕구가 생기고
그 사랑의 행위를 했을 때
그 사람이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
아무리 고통이 따르더라도
그 보다 더 큰 행복과 기쁨이 따르는 법이다.
사랑에는 반드시 고통과 희생이 따르지만
그 사랑이 진실될 때는 그 보다 더 큰 기쁨과
행복이 보너스로 주어진다.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인 것이다.
예수님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 사랑을 표현해서 알리고 싶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게세마니 동산에서 피땀흘리시며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하고 기도드렸는데
얼핏 듣기에 이 기도는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이
이 정도밖에 안되나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이 의미를 깊이 묵상해보면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깨달을수 있다.
예수님께서 만약 성령이 아주 충만해서
이 고통을 기꺼이 감당해 내겠다는
강한 사랑의 열정이 있었다면
그 긴 시간을 두려움에 떠는 정신적인 고통은 없었을 것이며
십자가상에서 육체적인 고통 또한 그 열정때문에 감소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아버지께서는
예수님에게서 이런 열정을 거두시고
그토록 긴 시간을 두려움과 괴로움에 떨게 하시고
사탄과 사람들을 통해
십자가를 거부하려는 유혹까지 허락하셔서
그 고통을 가중시키신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있을수 없다는 베드로의 유혹앞에
과민반응을 보이시는 모습에서
얼마나 번민하셨는지를 짐작할수 있다.
변화산상에서 베드로가 초막셋을 지어
같이 살자는 바램은 큰 고난을 앞에 둔 예수님께서
더욱 그대로 머물고 싶었셨을 것이다.
어린 나귀를 타시고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실때
이대로 머물수는 없을까하는 마음이 간절하셨을 것이다.
큰 고통을 앞에 두고 행복과 즐거움에 젖어들때
그냥 이대로 머물고 싶은 유혹은 참으로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죽음이 닥쳐오는 극심한 고통중에
십자가상에서 내려오면 믿겠다는 군중들의 솔깃한 유혹에 못이겨
그냥 십자가상에서 내려오셨다면
그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믿겠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어시기에 예수님의 부활도 없게되므로
우리들의 부활 또한 있을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한 결과이므로
우리의 부활 또한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십자가형은 급소가 아닌 손과 발에 못을 박아서
거기서 나오는 피를 완전히 쏟아 내게함으로써
그 고통속에서 서서히 죽게 만드는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런 형벌로써
못이 박힌 손과 발에 온 몸의 체중이 실려
그 고통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이스라엘민족은 이 십자가형을
율법의 저주로 보았고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십자가형은 수치처런 형벌이라고 십자가형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도 바오로도
십자가형은 면하고 목이 잘리는 사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마취제역할을 하는
몰약을 탄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시고
그 고통을 온전히 다 받아들이셨다.
그토록 긴 시간을 두려움에 떠는 정신적인 고통
그것은 오히려 실제로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육체적인 십자가형을
몇 십번을 더 당하는 고통과도 맞먹을 것이다.
이런 나약한 예수님의 모습을
어쩌면 우리에게 보이기 싫은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런 나약한 모습까지 드러내 보이시면서까지
우리를 아니 죄 많은 나를 이토록 진실되게 사랑하시는 것이다.
참으로 예수님은 우리 죄의 문제를
온전히 껴안은 사랑으로 해결하신 것이다.
너희는 한 갓난 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 보는 표이다.
이 표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하늘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버리고 가장 보잘것 없는 비천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
마지막 가시는 길 역시
구유 대신 무덤에 포대기 대신 수의에 싸여
잠시 싸늘한 시체로 누워 계실 것이라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여물통인 구유를 달리 표현하면
밥통, 밥그릇으로 표현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밥통, 밥그릇안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의 밥으로 오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아주 극명하게 드러내신 표현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빵이다고 말씀하셨는데
빵은 이스라엘과 서양의 주식이지만 우리나라의 주식은 밥이 아닌가?
이 말씀을 우리나라식으로 바꾸면
나는 생명의 밥이다로 바꿀수 있겠다.
빵을 밥으로 바꾸니까 좀 이상한가?
아무튼 빵이나 밥의 의미는
그 사람입에서 철저히 씹혀져
그 사람의 영양분이 되어 생명을 유지시킨다.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기꺼이 우리의 밥이 되신 사랑의 의미와
그 사랑의 성격을 예화를 들어서 더 깊이 묵상해보자.
아프리카에 한 선교사가 있었는데
그 선교지역에는 해마다 한 사람을 죽여서
하늘에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선교사는 이 악습을 없애 볼려고
많은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 해, 두 해는
그 선교사의 필사적인 만류에 의해 그냥 넘겼지만
이번에는 큰 폭동이 일어날 조짐을 보여서
도저히 어쩔수 없게 되어 많은 고민끝에
그 선교사는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기를
내일 정오에 어떤 장소에서 큰 삿갓을 쓰고 한 사람이 지나 갈테니
그 사람얼굴은 절대로 죽이기 전에는 보지 말고 곧장 죽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지시대로 한 다음
그 죽은 시체를 제물로 바칠려고 얼굴을 확인했는데
자신들이 가장 존경했던 바로 그 선교사였던 것이다.
그제서야 그 선교사의 평소에 행동이나 말이,
그가 그들에게 베푼 사랑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를 느끼게 되었고
자신들의 풍습이 얼마나 악한 짓이였는지를 깨닫고
눈물로써 뉘우치며 그 악습을 완전히 버렸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예수님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천재지변이나 사고에 의해 비참하게 돌아가신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에 의해 배반당하고
매맞고 조롱당하고 십자가상에서
비참하게 못박혀 돌아가신 것이다.
즉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는데도
우리인간들의 손에 의해 철저히 짓밟히고
씹혀지는 밥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사랑은 십자가상에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예수님의 이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사도행전은 베드로의 첫 설교를 통해서
이들이 용서받는 장면을 분명히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자신들이 용서받는 장면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의 밥이 되신 사랑의 의미는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신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자기민족 이스라엘민족을 위한 기도는
어떤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사도 바오로의 목숨을 노리며
그가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전도사업을 악착같이 방해하여
긴 세월을 감옥생활과 모진 고문에 시달린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모진 인생을
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간절한 기도는
이스라엘백성의 수와 비교할수 없는
훨씬 더 많은 이방민족의 영혼들을 구원했고
마지막날에는 이스라엘 민족도 구원하시겠다는 응답도 받았다.
물론 이것은 사도 바오로 혼자만의 기도응답은 아니지만
비록 이스라엘지도자 계층은
예수님께 버림받았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은
예수님의 기도에 의해 거의 모두 용서받아서
박해와 핍박속에서 끝내는 로마 네로황제에 의한 박해로 인해
순교로써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멋지게 표현했음을 잘 알고 있다.
누구보다 복음때문에
모진 고통과 시련을 당한 사도 바오로에게
그 고통의 의미도 알려주셨는데
그것은 많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예수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도들과 그들을 따르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사랑은
인간의 어떤 흉악한 죄도 깨끗이 용서받을수 있지만
그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우리의 희생과
사랑의 몫으로 남겨주셨다는 말씀이다.
순교는 선교의 씨앗이며 밑거름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들의 순교와 울부짖는 기도가
교회말살이 아니라 세계선교의 씨앗이며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부제 스테파노의 순교의 고통과 기도가
사도 바오로가 있게 한 씨앗과 밑거름이 되었던 것 처럼 말이다.
사실 로마네로황제의 대 박해 이후
200여년이 지난 392년에는 그리스도교가
로마국교화가 됨으로써 세계복음화의 기틀을 마련한다.
이것 역시 박해자들을 위해 순교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용서의 기도를 드린 덕분임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될것이다.
창세기를 보면 요셉이 자신을
이집트 노예로 팔아 넘긴 형들을 용서하는
감명 깊은 이야기가 나온다.
요셉은 그 모든 일을 하느님의 섭리로 돌리며
"하느님이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이 곳 이집트로 보낸것입니다" 하며
형들을 너그럽게 용서한다.
그는 하느님의 선의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 주셨다는 것을 철저히 믿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형들을
하느님을 용서하듯이 쉽게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도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
배후에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많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예수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 위함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었기에 그런 용서와 사랑이 담긴 기도를 할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수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수 많은 상처들을 주고 받으며 살고 있다.
이 상처들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믿음의 눈으로 보며
나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선의임을 깨닫고
그를 예수님을 용서하듯이 용서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할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밥으로 오셨다는 이 표현은
사랑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죄인들을
그렇게 사랑하시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죄인들이 회개하여 사랑자체이신 하느님아버지의 품으로 뛰어들어
예수님처럼 사도 바오로처럼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다.
이 의미는 너희가 죄를 짓고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이
내가 십자가상에서 못 박히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뜻이다.
내 사랑하는 외아들을 죽였더라도
아니 그 밖에 그 어떤 흉악한 죄를 더 지었더라도
나의 이 간절한 사랑을 깨닫게 해서
너를 구원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의 표현인 것이다.
너의 죄악이 바로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행동임을 깨달아서
죄악에서 돌아서서
예수그리스도인 나를 사랑할 힘을
너에게 주기를 원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엄청난 사랑을 베풀어 주신 예수님과
하느님아버지의 보람이요 기쁨인 것이다.
이런 사랑을 깨닫고 느끼며
기뻐하는 우리 또한 이 간절한 하느님의 바램에
기꺼이 동참해야함은 물론이다.
구원의 길이 믿음인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바로 자신의 혼자의 힘이 아니라
이웃의 도움과 사랑을 통해 이루어 지도록 하기위함일 것이다.
즉 사랑이 이웃의 행복을 바라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면
이웃의 최고의 행복인 구원을 위해
자신의 기도와 희생을 통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드러내게 하기위함일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해야하고
그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에게 갑작스럽게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닥쳐올 때
감사하기는 거녕 하느님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한 말씀만하소서의 저자이며 가톨릭 신자인 소설가 박 완서씨는
남편을 사별하고 불과 1년도 안 되어
가장 사랑했던 외아들을 잃게 되었다.
마취과 전문의 과정에 있던
앞날이 창창하던 26살의 외아들이 죽자
발작하다시피되어 십자가와 성모상을 내팽개치며
수많은 날을 하느님을 원망하고 증오하며 저주하였다.
그녀의 고백을 들어보면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
내 살의를 위해서도 신은 있어야만 해"
그 원망과 울부짖음과 증오도
하느님의 현존을 확신했기에 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고통스런 상황일지라도
하느님을 떠나거나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를 내팽개치고 하느님을 증오하더라도
하느님 앞에 머물러 하느님과 담판을 지어야 한다.
그녀는 먼 훗날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었을 때
하느님이 안 계셨더라면 지금 보다 훨씬 더
불쌍하게 살았으리라고 고백했다.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이런 혹독한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는
아마도 그녀의 글 "한 말씀만하소서"를 통해
수많은 영혼들이 그녀의 글을 읽고
하느님사랑은 진정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하느님께 돌아오게 하기위함일것이다.
참으로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는
기쁘기도 하지만 두렵고 떨리기도 한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목숨을 건 사랑,
인생전부를 건 사랑을 해야 하기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큰 고통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기쁨과 행복이
세상이 감히 알수없는 평화가 반드시 따른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사랑의 기도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예화를 들고 마무리 하겠다.
수녀가 되기로 했지만
한 남성의 열렬한 구애로 그와 결혼을 했는데
그는 결혼전의 약속과는 달리
자신은 물론 그녀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결국 냉담을 하게 되었고
그런 그녀를 가슴아프게 여기며
줄곧 그녀를 위해 기도를 해오던 한 자매가
그녀에게 단기성령세미나를 받아 보라며
간곡하게 권유하는 바람에 거기에 참석했는데
그녀는 수녀가 되기로 한 결심까지 버리고
냉담까지 하게 된 것이 큰 잘못임을 깨닫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의 그런 신앙생활을
내버려두지 않고 술주정과 갖은 욕설과 폭력으로 말렸지만
그녀는 오히려 남편의 구원을 위해
더욱 열심한 신앙생활을 할뿐이었다.
그러기를 몇 년이 흐른 후
남편은 알콜중독으로 병원생활을 하게되고
아내의 간곡한 권유에 의해 신앙생활을 하게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지를 깊이 반성하게 되었고
병이 회복된 후 곧바로 레지오와 연령회에 입단하여
믿지 않는 이들의 장례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염을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썩은 냄새가 진동하여 모든 사람들이 염을 하기를 꺼리는데도
웃으며 열심히 봉사하는 그를 보고
믿지 않는 이들이 스스로 성당을 나오는 모습을
수없이 많이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아내의 발까지 씻어 주고 아내에게
더 없이 잘 해주었다고 한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자란 아들들은
모두 사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긴 고통과 기도는 남편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영혼들도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섭리였던 것이다.
이런 예화는 수없이 많다
앞의 예를 든 아프리카 선교사 역시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그의 고통을 통해 그 아프리카인들에게
그 선교사의 사랑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사랑임을 깨닫게 해주셨던 것이다.
사실 나는 단순한 지식전달이 되지나 않을까? 참으로 두렵다.
이 글을 쓴 목적은
이 글을 읽는 이들의 마음에
하느님사랑을 깨닫고 영혼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을
영혼구원에 대한 갈망과 열망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이것은 어쩌면 나 자신의 욕심이요
교만이며 망상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열심히 기도드릴 따름이다.
다음에는 구약성서에서 백미로 손꼽히며
고통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는 욥기를 함께 나눌 생각이다.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많은 의견을 듣고 싶다.
사실 앞 글도 기존의 교리설명방식과 많이
달라서 많은 의견을 보내줄줄 알았다.
하지만 참 내용이 좋았다는 의견은 많았지만
구체적인 내용언급은 전혀 없었다.
아무튼 많은 의견바란다 이메일은
jjrr71@hanmail.net와
jjr71@netian.co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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