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묵주
나는 누이동생 에리카와 함께 방학동안
자주 할머니 집에서 며칠씩 지내곤 했다.
매일 저녁 식사가 끝난 후 묵주 신공을 함께 드렸는데
묵주기도를 드리기 전에 할머니는 낡은 마리아 상본 앞에
빨간 촛불을 켜 놓고는 앞치마 호주머니에서
묵주를 꺼내어 기도를 바쳤다.
평일에는 갈색 빛이 나는 진주 묵주를 사용하셨고,
토요일과 주일에는 유리 진열장에서
제법 많이 낡아 검고 납작해진 진주알 묵주를 꺼내 오셨는데
그 묵주의 십자가는 은으로 된 것이어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는 할머니의 일상에 속하는 이런 습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묵주 기도가 끝난 후 동생이 물어 보았다.
"할머니, 왜 토요일과 주일에는 이 낡은 묵주로 기도하세요?
할머니는 더 좋은 묵주를 가지고 계시잖아요?"
"이 묵주는 너희들이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갖고 계셨던 거야.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일터로 가는 동안 묵주기도를 드리곤 했었지.
그때는 아직 통근 버스가 없던 때라 각자 나름대로 출근했는데
바람 부는 날이나 눈이 오고 얼어붙은 겨울에도
아침 일찍 할아버지는 반시간 동안 걸어서 갔다가 일을 마치면
다시 반시간을 걸어서 돌아오곤 했단다.
할아버지는 매번 하루가 시작되고 끝나는 시간에 묵주기도를 바쳤다.
어느 날 아침 할아버지가 출근길을 가다가
묵주를 집에 두고 온 것을 알고 그냥 바로 출근해 버릴 것인지
아니면 묵주를 가지러 또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망설이다가
집으로 뛰어 오셔서 묵주를 찾아 들고 늦게 출근하게 되었지.
"얘기를 듣던 동생 에리카가 끼어 들었다.
"아이, 할머니, 나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
할아버지도 한번쯤은 손가락으로 묵주기도를 드릴 수 있었을 텐데요.
우리 신부님이 묵주가 없을 때는 열 손가락으로 기도 할 수 있다고
하시던데요."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셨다.
물론 신부님의 말씀은 분명히 옳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묵주가 없어서 허전해 하고 싶지 않으셨던 거야.
그런 후에 서둘렀으나 일터에는 10분이나 늦게 도착하셨어.
그 곳에는 다른 동료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어.
왜냐하면 할아버지가 탄약고 관리인이라 창고 열쇠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일을 시작할 수 없었던 거지.
할아버지가 오자 그들은 서둘러 갱 안으로 들어가려 했었지.
그런데 바로 그 때 천둥 같은 굉장한 소리가 났어.
놀란 그들은 백짓장 같이 된 얼굴로 서로 쳐다 보았단다.
산의 단층이 무너져 내린거야.
다행히도 아직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던 때였단다.
차츰 정신을 차리고 조사를 해보자,
굴속 갱 천정에서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떨어져 내려앉았고
여러 곳의 갱도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단다.
만약 그 날 할아버지가 묵주를 가지러 돌아오지 않고
제시간에 출근했더라면 많은 광부들과 할아버지가
피할 수 없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을 거야.
정말 그것은 하느님의 안배였단다.
할아버지가 돌아오셔서 내게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두 무릎을 떨었을 정도였다.
그 때 너희 아버지는 다섯 살의 어린 나이였어.
이 불의의 사고로 할아버지를 잃게 되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느냐?
내 생각으로는 너희 할아버지가 드리던 묵주기도가
많은 도움을 준 것 같다.
할아버지와 나는 그 사고가 있던 이후로
이 묵주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으며
우리 가정을 큰 재난에서 보호해 준 것을
항상 기억하기 위해 잘 간수하게 되었단다.
그 까닭에 나는 사랑하는 성모님의 날인 토요일과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에 이 낡은 묵주를 사용한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