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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용서 받아야 할 나

작성자jjr71|작성시간22.10.09|조회수44 목록 댓글 0

용서 받아야 할 나


    김수환 추기경의 [세상 사는 이야기] 중에서

    왜 이토록 사랑하기 힘든가 
     우리는 참으로 사랑할 줄 압니까? 
    누군가가 성서(Ⅰ고린 13, 4∼7)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사랑의 찬가',
     즉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시기하지 않습니다.
     자랑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에서
     '사랑' 대신 '나'를 대치시켜 보아라. 그리고 반성해 보아라,
     그러면 네가 참으로 사랑을 지닌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오래 참습니다.
    나는 친절합니다.
    나는 시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례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나는 성을 내지 않습니다.
    나는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나는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 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우리 중의 누가 이 반성에서,
    이 채점에서 "나는 합격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선 나부터 낙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알 수는 없지만, 많은 분들도 아마 "나도 낙제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아시는 일이지만, 어쩌면 완전 합격자는 우리 중에 아무도 없을지 모릅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대로,
    우리 중에서 '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죄란 결국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을 거스르고 사랑을 깨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이라는 말은 하기도 쉽고 실제로 많이 쓰는데,
    참으로 사랑하기가 왜 이렇듯 힘이 듭니까?
    누구도 사랑이 제일 좋은 줄 알고, 사랑이 있으면 우리의 모든 문제,
    가정의 문제, 사회의 문제, 교회의 문제,
    온 세계의 문제가 다 해결될 수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잘 알면서도 자비심을 가지지 못합니다.
    남을 믿지도 사랑하지도 못합니다.
    믿고 사랑하면 다 해결되는데, 왜 이것이 안 됩니까?
    많은 분들은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치유의 은혜를 입으면,
    이를 보고 놀라고 '큰 기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서면 이를 보고 놀라고 '큰 기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그것은 '큰 기적'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찬미해야 될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누군가가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을 바꾸어 사랑할 수 있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더 큰 기적이요 가장 큰 기적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죽은 생명의 부활'과 같은 큰 기적입니다.
    우리는 물욕을 떠나 청빈의 마음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힘들지만 가능합니다.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그 가난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헌신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까지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함께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듭니다.
    수도자나 성직자에게서 보듯이 청빈(淸貧), 정결(淨潔), 순명(順命)은 거의 완벽합니다.
    그런데 형제와 같이 함께 사랑으로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은 전적으로 사랑하는 것 같은데, 사람은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도 봅니다.
    모순입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대로 눈에 보이는 형제를 미워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압니다.
    앞서 이야기한 사도 바오로의 '사랑의 찬가'에 비추어 낙제라면 낙제인 것이 분명한데,
    이 사랑이 결핍된 마음을 누가 바꿀 수 있습니까?
    바로 나 자신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용서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맺힌 것을 풀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에는 용서가 포함됩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稅吏)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겠느냐"하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을 빌어주라"
    고 까지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이 용서를 할 수 있습니까?
    가끔 우리는 "용서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는 여전히 미움과 원한의 뿌리가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마음에 맺힌 것을 완전히 풀지 못합니다.
    어떤 때는 나에 대해서, 남이 보기에도 크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기는 오히려 쉽습니다.
    그 사람이 워낙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반대로 대범해질 수 있습니다.
    이 때에도 "용서한다!"면서 실은 상대를 무시하려는 오만과 앙심이 흔히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섭섭하게 해 준 사람, 무시하는 사람,
    나는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듭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용서할 줄을 모릅니까?
    왜 용서가 힘들고 마음에 맺힌 것을 풀기가 힘듭니까?
    근본적인 이유는 나 자신이 얼마나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남을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은 자주 갖는데,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갖고 있지 않습니다.
    별로 잘못한 것이 없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용서를 받아야 할 필요를 많이 느끼는 사람이 남을 용서할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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