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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시곗바늘이 아홉 시에 가까워지면 동화책을 가지고 온다. 등을 기대고 아이가 골라온 책을 읽어준다. 어른이 되어 동화를 다시 보니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많다. 그 중의 하나가 동화책 속 주인공들은 너무나 쉽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다. | |
‘첫눈에 반해 행복하게 살았다’ 뒤에 내포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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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속 왕자님은 춤 한 번 같이 춘 아가씨에게 반해 전국 방방곡곡을 뒤지는 수고를 마다치 않고, [백설공주]의 왕자님은 ‘죽은’ 여인에게 키스를 하는 엽기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또 어떤가… 하지만 성인이라면 안다. ‘첫눈에 반해 행복하게 살았다’라는 짧은 글귀 뒤에 내포된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난자와 정자의 만남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하룻밤을 함께 지냈고, 그 밤에 사랑의 결실이 맺어졌다’는 짧은 문장 안에는 난자와 정자의 치열한 성공 스토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난자를 찾아가는 정자의 험난한 여정은 지난 글(오늘의 과학 [정자가 많은 이유])에서 간단하게 언급한 적이 있다. 출발할 때는 수억에 달하던 정자는 난자와 만날 즈음이 되면 수백 수준으로 줄어들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10만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살아서 도착한 ‘용자’들에게도 난자와의 만남이 쉽게 허락되지는 않는다. 난자는 정자에 비해 매우 클 뿐 아니라 대부분의 ‘공주’들이 그렇듯 가시넝쿨에 둘러싸인 단단한 성벽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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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와 난자의 만남. 그 안에는 치열한 성공스토리가 숨어 있다. | |
난자를 둘러싼 이중의 보호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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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자는 2중의 장벽에 둘러싸여 있다. 투명대와 부챗살관이다. 사진은 시험관에서 수정하는 장면으로, 다수의 정자가 난자를 둘러싼 장벽을 뚫으려 애쓰는 모습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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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경으로 난자를 살펴보면, 난자는 크게 두 겹의 튼튼한 ‘껍데기’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보인다. 즉, 난자는 두껍고 질긴 막인 투명대(zona pellucida) 안에 존재하는데, 이 투명대는 다시 부챗살관(corona radiate, 방선관)이라는 조직들로 둘러싸여 있다. 쉽게 말하자면 보석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이를 투명한 강화 플라스틱 상자에 넣은 뒤, 다시 일명 ‘뽁뽁이’라 불리는 에어캡으로 꽁꽁 싸맨 형국이다.
이런 단단한 이중보호장치는 난자를 외부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수정에 있어서는 일종의 방해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수정란이 되고자 하는 정자는 부챗살관과 투명대를 모두, 그것도 혼자 힘으로만 뚫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정자에게 주어진 마지막 미션이다. 난자는 투명대와 부챗살관의 이중 안전 장치를 통해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뿐 아니라, 동시에 이중으로 설치된 장애물을 거뜬히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하고 건강한 정자를 골라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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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장벽 부챗살관

정자가 맞닥뜨린 첫 번째 장벽은 부챗살관이다. 부챗살관을 만난 정자는 머리의 끝 부위인 첨단체에서 히알루론산 분해효소(hyaluronidase)를 분비해 조금씩 길을 뚫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록 장애물을 설치해놓긴 했어도, 난자가 정자에게 그리 매몰차지는 않다는 것이다. 정자가 히알루론산 분해효소를 분비해 길을 뚫기 시작하면, 난자는 자궁관점액효소(tubal mucosal enzyme)를 분비해 정자에게 힘을 실어준다. 자궁관점액효소는 정자가 분비하는 히알루론산 분해효소의 작용을 촉진시켜 정자가 부챗살관을 뚫는 것에 힘을 보태는 역할을 한다. 난자의 지원에 용기를 얻은 정자는 힘차게 꼬리를 움직여-실제로 정자 꼬리의 운동은 프로펠러의 역할을 하여 정자가 부챗살관을 통과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움직임에 박차를 가한다.
두 번째 장벽 투명대

이런 과정을 거쳐 부챗살관에 길을 내고 나도 아직 투명대가 남아 있다. 부챗살관에 비해 더욱 질기고 튼튼한 방어벽인 투명대는 정자들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관문과 같다. 실제로 임신이 잘 되지 않아 고민하는 부부들 중에는 정자가 투명대를 뚫고 들어가지 못해 수정이 일어나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수정된 배아가 투명대를 뚫고 나오지 못해 자궁에 착상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될 정도로 투명대는 매우 튼튼하고 질기다. 참고로 너무도 질긴 투명대로 인해 임신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 날카로운 피펫을 이용해 정자를 직접 투명대 안쪽으로 찔러 넣어주는 세포질 내 정자 주입술과 수정된 배아에게 인위적으로 투명대를 벗겨 내 주는 보조부화술 등이 개발되어 시도되고 있다. | |

세포질내 정자 주입술. 질긴 투명대를 뚫어 정자를 넣어주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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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자는 자신이 가진 무기 주머니를 비워 모든 것을 끄집어 낸다. 정자의 첨체는 단백질 분해효소인 에스트라제(에스트라아제, estrase), 뉴라미니다아제(neuraminidase), 아크로신(acrosin) 등의 다양한 효소를 분비해 끈질기게 투명대를 공략한다. 난공불락일 것만 같았던 투명대가 정자의 끈질긴 효소 공격으로 인해 틈이 벌어지면, 정자는 이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그 틈으로 자신을 밀어넣는다. 최초의 정자가 투명대를 통과하는 순간, 투명대는 순식간에 물리적 특성이 변화되는데, 이 후부터는 어떠한 슈퍼 정자도 투명대를 뚫을 수 없게 된다. 이를 투명대 반응(zona reaction)이라 한다. 마치 마법의 성이 왕자에게만 길을 허락하고, 나머지 도전자들에게는 가시덩굴로 위협하는 것처럼 말이다. | |

수정의 과정을 그린 그림. 이 그림은 여러 개의 정자가 붙는 공간적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정자가 난자에 유입되는 시간을 순서대로 그린 것이다. 화살표 방향대로 시간이 경과된다고 이해하면 된다. 본문의 투명대는 이 그림에서 젤리막과 난황막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여기에서 난황주위강이란 난자와 난황막사이의 공간을 말한다. 피질과립은 정자가 난자내 침입시 일시적으로 방출되는 물질로 추가적인 정자 침입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진 물질이다. 액틴은 단백질의 일종으로 정자 운동에 관여하는 물질이다. 첨체 과립은 정자의 첨체에 들어 있는 물질들을 말한다. 첨체 반응은 정자 머리 속의 애크로좀에서 효소가 나와 난막을 녹이는 반응이다. 그림에서 접합된 세포막은 정자의 효소 활동으로 인해 난자의 세포막과 정자의 세포막이 융합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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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정자만 허락한다 - 투명대 반응

투명대 반응은 하나의 난자에 다수의 정자가 유입되어 비정상 수정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난자를 둘러싼 정자는 줄잡아 수백은 되지만, 난자에게 필요한 것은 딱 하나 뿐이다. 그러나 가끔씩은 두 개의 정자가 1초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투명대를 뚫고 들어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일단 난자는 투명대를 뚫고 들어온 정자는 모두 수정에 참여시키기에 이런 경우 난자 하나에 정자가 두 개 결합되어 염색체 수가 정상인의 1.5배(난자나 정자에 비해서는 3배)에 달하는 배아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런 경우를 세배수체증(triploid conception)이라 하는데, 이들 대부분은 심각한 이상을 일으켜 유산되는 경우가 많고 극히 드물게 출산까지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생존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정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이런 과정을 모두 거치고 서로의 핵이 합쳐져 수정이 이루어지면 난자와 정자는 길고도 복잡했던 과정을 뒤로하고 생식세포로서의 운명을 다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이어지는 동화의 끝은 결코 끝이 아니라 더 복잡하고 더 다양한 문제들로 뒤엉킨 새로운 시작이라는 사실을. 마찬가지로 정자와 난자는 이제 수정란이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수정란은 난자와 정자가 자신을 만들기 위해 그러했듯, 이제는 아기가 되어 무사히 태어나기 위해 더욱더 복잡해진 위협들과 더욱더 다양해진 고비들을 무수히 넘기고 생존을 위한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 |
- 글 이은희 / 과학저술가
- [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 [과학 읽어주는 여자], [하리하라의 과학 블로그] 등 많은 과학 도서를 저술하였고, 2003년에 과학 기술도서상을 수상하였다. 연세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과학기술학 협동 과정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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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네이버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