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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학자의 대명사인 곤충기의 저자 - 장앙리 파브르

작성자겨울의 꿈|작성시간11.12.07|조회수642 목록 댓글 0

 

“죽은 동물을 수집하고 해부하고 비교하는 것은 파브르의 자연 연구법이 아니었다. 그 일은 파브르 이전에 살았던 다른 연구자들이 이미 다 했으며, 거기서는 배울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파브르의 방법은 동물을 끈기 있게 관찰하고 거기서 관찰한 것을 조심스럽게 기록하는 것으로, 때로는 몇 년씩 걸린다(…)그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실수를 범하지도 않았으며,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잘못된 지식들을 검토하지도 않고 베껴 쓰는 관행을 따르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가 관찰하고 스스로 검토하고 철저히 생각한 것에 대해서만 말을 하고 글을 썼다.” -마르틴 아우어

 

 

가난 속에서 자라나 교사가 되다 

장 앙리 파브르는 1823년 12월 22일에 프랑스 남부의 생레옹 뒤 레브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이름이 ‘앙리 파브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장 앙리 파브르’라고 해야 맞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그를 ‘파브르’라고만 지칭했다). 워낙 가난한 산골이다 보니 세 식구의 생계를 해결하기도 벅찬 까닭에, 파브르는 불과 3세에 부모 곁을 떠나 조부모의 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7세 때에야 고향 생레옹으로 돌아와서 가족과 함께 살며 학교에 다녔다.

 

파브르는 어린 시절부터 명민해서 거의 독학으로 읽기를 터득할 정도였지만, 공부보다는 살림을 도와야 할 때가 더 많았다. 그가 난생 처음 맡은 일거리는 집에서 키우는 오리 떼를 돌보는 일이었다. 오리를 물가로 몰고 갔던 첫날, 그는 반짝이는 돌멩이를 발견하고 호기심을 느낀 나머지 주머니에 가득 담아서 집으로 가져간다. 부모님은 장차 집안을 이끌 큰아들이 쓸모 없는 돌멩이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고 야단을 친다. 파브르는 훗날 곤충 연구를 하면서도 종종 이런 오해와 비난을 들어야 했다.


 

그가 10세 때에는 온 식구가 인근의 도시 로데즈로 이사를 갔다. 부친은 이곳에서 카페를 운영했지만 생각만큼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로도 몇 번이나 다른 도시로 이사를 다니는 동안, 파브르는 학비 면제로 중학교를 다니면서 그리스어와 라틴어 같은 기본적인 교양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1839년에 운 좋게도 아비뇽의 사범학교에 입학시험을 봐서 장학금 수혜자가 된다. 고리타분한 고전 위주의 교과 과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2년 만에 학교를 속성으로 졸업하고 교사가 된다.

 

초기 사진작가인 나다르가 촬영한 파브르의 모습. <출처: en.wikipedia.org>


겨우 19세에 불과한 이 신임 교사는 카르팡트라스의 중학교에 부임한다. 당시에는 교사에 대한 처우가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평균 일당이 웬만한 일반 근로자보다도 훨씬 낮았다. 초중등학교 교사만이 아니라 대학 교수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별도의 개인 재산이 없는 사람이 월급만 가지고 버티기가 힘들 정도였다. 파브르도 처음에는 대학 교수를 지망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정작 자리를 제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해야만 했다. 교수 월급만으로는 온 식구가 먹고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전 세대보다는 종교적 색채가 줄어들었지만, 이 당시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고전 교육 위주로 과목을 편성했다. 반면 의욕 넘치는 청년 교사 파브르는 대부분 시골 출신인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과목을 편성했다. 특히 훗날 기술자나 상인이 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직접적인 관찰과 실험을 통해 가르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심지어 자신의 전공 분야가 아닌 고급 수학을 가르쳐 달라는 어느 만학도의 요청에 둘이서 함께 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파브르는 공부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교사가 된 이후로도 계속해서 독학에 열중했다. 1846년에는 대입 자격시험에 합격했고, 1847년에는 수학, 1848년에는 물리학, 1854년에는 박물학 분야의 학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이 즈음에 그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학문. 학문이 전부다.” 1844년에 그는 동료 교사인 마리 세자린 빌라르와 결혼했다. 첫 딸과 첫 아들이 한 살도 못 되어 죽는 비극을 겪었지만, 이들 사이에서는 네 명의 자녀가 더 태어났다.

 

 

획기적인 곤충 연구로 명성을 얻다

파브르가 곤충 연구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849년에 찾아왔다. 코르시카 섬의 주도 아작시오의 중학교에 물리 담당 교사로 부임한 파브르는 고향인 프랑스 남부와는 또 다른 섬의 특이한 자연 경관과 동식물에 크게 매료되었다. 마침 연구차 그곳을 방문한 저명한 생물학자 에스프리 르키앙이며 모켕 탕동과 교류하면서 파브르는 더욱 곤충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불과 2년 만에 열병을 앓고 쇠약해진 까닭에 결국 육지로 다시 전근했지만, 이후로도 곤충에 관한 파브르의 탐구열은 식지 않았다.

 

이 당시에만 해도 곤충학은 미지의 학문이나 다름없었다. 생물학에서도 특별히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았으며, 책에서도 종종 잘못된 주장이 답습되어 게재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곤충학을 말 그대로 맨 밑바닥에서부터, 즉 가장 간단한 관찰로부터 재구성하는 것이 파브르의 소명이었다. “기하학자는 만들어지고 생물학자는 타고난다(…)나는 무한히 작은 것을 해부하고 있다. 나의 메스는 가느다란 바늘이며, 나의 해부대는 커피 잔 받침이다. 나의 표본들은 십여 마리씩 성냥갑 속에 갇혀 있다.”

 

1853년에 아비뇽 국립고등학교로 부임한 파브르는 본격적인 곤충 연구에 돌입했다. 나아가 이전처럼 단순히 표본을 만들고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 속에서 생태를 구체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중요함을 인식했다. 가령 그는 어느 저명한 곤충학자의 책에서 노래기벌이 비단벌레를 잡아 애벌레의 먹이로 사용하는 대목을 읽다가 의구심을 품었다. 노래기벌이 죽인 비단벌레가 시간이 오래 지나도록 썩지 않는 까닭은 일종의 방부제를 주입하기 때문이라고 그 곤충학자는 설명하고 있었다.

 

각고의 노력과 관찰 끝에 파브르는 노래기벌이 비단벌레를 죽여서 방부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경을 마비시킬 뿐임을 알아냈다. 즉 비단벌레는 아직 살아있는 상태로 노래기벌 애벌레의 식량이 되는 것이었다. 파브르는 이 놀라운 사실을 밝힌 논문을 이듬해에 발표해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1856년에는 프랑스 학술원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이후 버섯과 기타 곤충의 습성에 관한 여러 가지 논문을 줄줄이 발표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브르의 경제 상황이 단번에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파브르는 평생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개의 학사 학위까지 취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 정식 교사도 아닌 임시 교사로 일했다. 교사 경력 10년 차인 시절에 그의 연봉은 웬만한 부잣집 마부가 받는 연봉보다도 더 적었다. 생활고를 타개하기 위해서 그는 상업적 전망이 좋은 염색 원료의 제조법을 연구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여러 권의 교과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아서, 그는 종종 부족한 월급을 쪼개 책과 실험 도구를 마련해야만 했다.


파브르의 모습. 사망 직전인 1910년대 초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출처: en.wikipedia.org>

 

 

마침내 찾아온 영광, 그리고 말년의 생활

곤충 연구를 시작한 지 10여 년 만에 파브르는 과학계에 널리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865년에는 루이 파스퇴르가 파브르를 찾아와서 누에의 전염병 연구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1866년에는 프랑스 학술원에서 상을 받았고, 교육부 장관을 만나고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급기야 황제 나폴레옹 3세를 알현했다. 이 당시에 파브르와 우정을 맺은 또 한 명의 저명인사는 영국의 철학자 겸 경제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었다. 1868년에 파브르가 부당하게 학교에서 쫓겨나자, 밀은 서슴없이 거금을 빌려주기도 했다.

 

파브르가 30년 가까이 몸담았던 교육계를 떠나게 된 계기는 약간 엉뚱했다. 평소 수업에서도 종교 색채를 가급적 배제했던 그의 태도에 불만을 품은 학부모들이 “공개 강연에서 여학생들에게 꽃의 수정에 관해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졸지에 그를 부도덕한 인물로 몰아버렸던 것이다. 이런 음해에 질려버린 파브르는 결국 교사 및 박물관 일을 그만 두고 오랑주를 거쳐 세리냥의 외딴 집으로 이사했다. 1879년부터 1915년까지 그는 세리냥에 살면서 평생의 대작이 된 [곤충기]의 집필에만 전념했다.

 

1885년에 부인 마리가 사망했다. 두 사람은 40년 넘게 해로하며 네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87년에 65세인 파브르는 23세인 마리 조제핀 도들과 재혼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세 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며, 그 중 한 명인 폴은 훗날 사진 기술을 배워서 부친의 도해판 저서의 제작을 돕기도 했다. 이 당시 파브르는 특유의 검정색 모자에 소박한 옷차림으로 종종 길가에 엎드려 곤충을 관찰하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광인 취급을 받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말년이 되면서 파브르에게는 갖가지 영예가 답지했다. 1908년에는 프랑스 남부를 대표하는 시인 프레데리크 미스트랄이 그를 방문했다. 1904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미스트랄은 파브르를 여러 차례 노벨상 후보로 추천했지만, 아쉽게도 수상에는 실패했다. 1910년 4월 3일에는 78세의 곤충학자를 위한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개최되었지만, 1913년이 되자 그는 더 이상 연구를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리고 1915년 10월 11일, 장 앙리 파브르는 세리냥의 자택에서 타계했다.

 

파브르는 매우 온화하고 겸손한 인물이었다. 학생들도 교사인 그를 매우 존경했다. 특유의 챙 넓은 검정색 모자는 잠잘 때를 빼놓고는 결코 벗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고, 소박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영위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내용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어찌하겠느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모릅니다.’ 이 대답에는 학술적인 분위기가 풍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 대답은 나를 정직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파브르가 1879년부터 1915년까지 30년 넘도록 살았던 세리냥의 자택 전경. <출처: en.wikipedia.org>

 

 

한 곤충학자의 회상을 담은 책, 파브르 곤충기

우리나라에서 파브르의 [곤충기]는 누구나 어린 시절에 한 번씩은 읽어보는 필독서로 여겨질 만큼 유명하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가 접한 [곤충기]는 그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 책은 파브르가 평생에 걸쳐 수행한 곤충 관찰 기록을 토대로 1879년부터 1907년까지 무려 28년에 걸쳐서 10권으로 간행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두 종류의 완역본만 해도 쪽수가 각각 3천 쪽과 4천 쪽에 달할 정도로 방대하다. 따라서 이 책을 완독한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곤충기]가 관점에 따라서는 상당히 산만한 책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곤충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종종 끼어들었기 때문에, 단순히 “곤충기”라기보다는 원제인 “곤충학적 회고록”이 더 정확한 제목이라고 하겠다. 쇠똥구리와 매미, 전갈과 나나니벌, 개미와 파리에 이르는 다양한 곤충의 이야기인 동시에 저자인 파브르의 자서전이기도 하다. [곤충기]가 의외로 어떤 정답이나 결론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특징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이 책에 감탄한 그의 독자 중에는 찰스 다윈도 있었다. 그는 심지어 파브르에게 편지를 보내서 곤충의 습성을 알아보는 실험을 제안했다. 하지만 파브르는 다윈의 학설에 오히려 반대하는 쪽이었는데, 단순히 완고하고 보수적인 성품 때문이라기보다는 나름의 원칙 때문이었다. 파브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답습되던 곤충에 관한 갖가지 오해를 관찰과 검증을 통해 논박한 철저한 경험주의자였다. 심지어 “보는 것이 아는 것이다”라는 지론을 실천하기 위해 매미 유충을 직접 먹어보기도 했을 정도다.

 

파브르의 입장에서는 우선 복잡하기 그지없는 곤충의 기원을 진화로 설명하려는 다윈의 학설 자체가 무리처럼 보였다. 게다가 진화의 수수께끼를 뒷받침할 만한 중요한 증거들(가령 멘델의 유전 법칙이라든지)은 다윈과 파브르의 생전에만 해도 제시되지 않았다. 파브르는 학사 학위 취득 과정에서도 당대의 주류 이론인 자연발생론을 조목조목 반박해 심사위원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진취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진화론에 대한 반대는 파브르의 완고함 탓이 아니라 다윈의 학설이 아직 설익은 탓이었다.

"[곤충기]를 읽는 독자는 이 책에서 비록 본능에 대한 정의를 얻을 수는 없지만, 그 본능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인지는 파악하게 되며, 살아 움직이는 그림과 같은 생생한 표상을 얻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곤충기]를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같다고 말했으며, 빅토르 위고는 파브르를 ‘곤충들의 호메로스’라고 불렀다(…)이 책에는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들, 영웅적인 투쟁들만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삶, 그 거친 아름다움도 담겨 있다.” - 마르틴 아우어

뒤집어 말하자면, 파브르의 저서는 지나치게 문학적이라는 이유로 과학자들에게는 경원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곤충기]가 지금까지도 고전 중의 고전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까닭은 단순히 그 과학적 가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당대에는 그보다 더 정확하고 중요한 과학 저술이 더 많았을지 몰라도, 지금껏 꾸준히 애독되는 작품은 파브르의 [곤충기]뿐이다. 다른 일반적인 과학 저술에는 없는 다른 뭔가가 파브르의 책에는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뭔가는 파브르의 인간적 매력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고독과 평화 속에서 자연을 탐구하다

프랑스 세리냥에 세워진 파브르의 동상. <출처: en.wikipedia.org>


우리에게는 곤충학자의 대명사, 나아가 과학자의 대명사로도 인식되는 파브르이지만, 오늘날 학계에서 그의 위상은 의외로 높지 않다. 가장 큰 한계는 그의 연구 방법이 무척이나 소박했다는 데 있었다. 비록 여러 편의 논문을 간행하고, 여러 번의 상을 수상했지만, 그는 평생 단독으로 연구에 몰두했으며, 제자를 배출하지도 않았다. 워낙 꼼꼼한 현장 연구로 인해 기존의 잘못된 주장을 종종 뒤집었기 때문에, 당대의 곤충학자들 사이에서는 파브르를 향한 감탄 못지않게 반감도 적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파브르의 연구 방법이 시대적 변화를 따르지 못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실 파브르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엄밀한 의미의 과학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박물학자의 마지막 세대라고 해야 어울릴 것도 같다. 파브르는 기질 상 린네보다는 오히려 소로에 가까운 인물, 즉 고독과 평화 속에서 자연을 탐구한 외로운 산책자였다. 반면 19세기에만 해도 중요한 생물학적 발견은 야외에서의 관찰보다는 오히려 실내에서의 실험을 통해서 더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곤충기>에서 파브르는 자기 연구가 과연 현명한 일인지 자문해 본다. “곤충의 행동과 본능을 아주 정밀하게 연구한다는 것은 유치한 일이 아닐까?”

 

곧이어 그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비롯해서 생물학의 갖가지 수수께끼를 열거한 다음, 이 모두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많은 지식이 필요하며, 따라서 곤충학 역시 비록 보잘것없지만 나름대로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관찰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특히 실험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신념을 끝까지 견지했다.

 

 

참고문헌: 장 앙리 파브르, <(완역판) 파브르 곤충기(전10권)>, 1999; 오쿠모토 다이사부로, <파브르 곤충기(전8권)>, 1992; 마르틴 아우어, <파브르 평전>, 2003.

 

 

 

글 박중서 / 출판번역가, 장서가
박중서 씨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시리즈인 <뉴욕 침공기, <월스트리트 공략기>를 비롯해, <해바라기>, <셰익스피어&컴퍼니>, <끝없는 탐구:칼 포퍼 자서전>등을 번역했다. 집안 가득 책을 쌓고 살며, 새 책을 기획하는 일을 한다.

 

 

 

출처:네이버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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