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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 벅의 사회활동이 너무 지나친 것이었을까? <대지>이후 나온 그녀의 소설들은 여전히 대중에게 인기를 끌었지만 평단에서는 반응이 좋지 못했다. 심지어 미국의 평론가 일부는 <대지>가 어쩌다 우연히 노벨상을 타게 된 작품이라고 폄하하였다. 또한 그녀의 맹렬한 사회 인권운동은 에드거 후버 FBI 국장 및 많은 반공주의자들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거기다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 공산주의를 반대한다고 밝힘으로써 중국 및 공산권의 미움도 샀다. 펄 벅은 닉슨 대통령 때 미국과 중국 간 화해 무드가 조성 될 시기 중국방문을 열렬히 희망했지만 그녀의 반공산주의적 입장표명에 불만을 가진 중국의 거부로 방문은 끝내 무산되었다.
펄 벅에 대한 세간의 인상도 말년 행보 탓에 상당히 구겨졌다. 펄 벅은 두 번째 남편 R.J.월시를 사별하고 외로움을 겪었다. 그런 그녀의 외로움을 파고 든 것은 40여 살 연하의 댄스 선생이었던 테드 해리스였다. 테드 해리스는 70대의 펄 벅을 쥐고 흔들며 그녀의 돈을 빼내 사리사욕을 채웠다. 펄 벅 재단에 들어갈 돈의 일부를 횡령하였으며 유산을 가로챌 궁리를 하였다. 늙은 펄 벅은 젊은 애인의 요사스러운 말에 눈이 멀어 그의 부정을 알면서도 그를 옹호하였다. 이것이 펄 벅 80 평생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펄 벅은 언제나 열정적이었으며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앞장 섰다. 그녀는 미국의 인권과 여권운동, 매카시즘 시기의 마녀사냥 같은 민감한 주제들을 외면하지 않았고, 기꺼이 논쟁에 참여했으며, 신념을 위해 자신의 능력과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남성 평론가들은 펄 벅의 문학적 성공이 그녀의 주 독자층인 여성 독자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라며 펄 벅이 과대평가된 작가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세계의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가난과 차별에 고통 받던 아동들이 그녀가 만든 펄 벅 재단의 도움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펄 벅이라는 이 불세출의 작가이자 사회인권운동가의 삶을 더욱 값지게 해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