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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도 게으르지 않은 것이 최대의 게으름이 되다
 이 황제의 위업 앞에서 그에게 존경을 바치는 사람은 많았다. 특히 토지를 얻고 세금은 덜 내게 된 농민과 복지혜택을 얻은 병사들의 존경은 특별했다. 하지만 존경을 넘어 따스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경우까지는 드물었던 것 같다.
“그의 어머니를 제외하고 그를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누구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누구의 사랑을 받지도 못했다. 사랑은커녕 그를 좋아한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절친한 친구도 없었던 듯하다. 비잔티움의 역대 황제들 중 그처럼 고독한 사람은 없었다.”
존 줄리어스 노리치가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못 박았듯, 바실리우스 2세에게는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별로 없었다. 구중궁궐에서 좀처럼 나오는 법이 없는 중국이나 이슬람의 황제들과는 달리, 당시 비잔틴의 황제들은 대중 앞에 나서는 일이 많았다. 자연히 외모와 말솜씨 등이 대중적 인기의 척도가 되었는데, 바실리우스는 키가 작고 못생긴 데다가 도무지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머리 손질도 목욕도 제대로 안 했으며, 옷도 늘 군복 차림이기를 좋아했다. 화려한 예식도 볼거리도 관심 밖이었고, 말도 어눌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경우 말고는 남들 앞에 나서지도 않았으며, 싸움터에서 말을 달리지 않으면 집무실에 틀어박혀 공무를 처리하고 군사계획을 세우며 날을 보냈다. 그는 평생 독신이었으며, 여인과의 에피소드는 전설로나마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의붓아버지이자 공동황제였던 니케포루스는 신앙심에 따른 독신선언을 하고도 테오파노 황후에 대한 열정을 이기지 못해 그녀와 결혼했으나, 바실리우스는 특별히 신앙심이 투철하지도 않았으면서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숙맥 군인”, 또는 “일 중독자”의 수십 년에 걸친 노력 덕분에, 비잔틴은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영토의 넓이 면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보다 못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정복으로 국고가 거덜 나고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던 데 비하여, 바실리우스는 백성을 두루 잘 살게 하면서도 곳간이 터져나갈 정도로 풍족한 국가재정을 남겼다. 그의 지배하에, 비잔틴은 서유럽과 이슬람이라는 세계사의 두 축에 끼여 찌부러지기는커녕 당당한 ‘대안 세력’으로 우뚝 섰다.
하지만, 노리치의 지적처럼, “결혼해서 자식을 남기지 않은 것이 그의 최대 실책”이었다. 후계자가 달리 없었기에 이름뿐이던 공동황제, 콘스탄티누스가 형의 뒤를 이어받았고, 그와 그의 두 딸(한 사람은 신성로마 황후가 될 뻔했던 조에였다), 그리고 사위들은 바실리우스의 위업을 계승하기보다 무너뜨렸다. 대표적으로, 바실리우스의 토지 개혁법은 그의 사후 몇 달 만에 폐지되었다. 그리고 11세기 후반부터는 동쪽의 셀주크투르크와 서쪽의 십자군이라는 두 개의 새로운 바람이 다시금 불어닥치며, 비잔틴의 입지를 계속하여 줄여나가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