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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런의 시를 향해 세상은 열렬하게 경의를 표했다. 바이런의 급류 같은 시는 당대인들로부터 완전히 정당한, 아니, 아마 그 이상의 인정을 받았다. 그의 시는 ‘그 온갖 불완전함을 보란 듯이 내세우고서,’ 소홀함에도 불구하고, 산만함에도 불구하고, 반복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로 그것이 가진 어떤 결점에도 불구하고, 찬양과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그의 이름은 여전히 위대하고 찬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밀 듯한 인기를 누리던 시절도 이제 지나가 버렸다. 바이런에게조차 그런 시절은 지나가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매슈 아놀드) | |
과격한 청년 바이런 경, 인기 절정의 시인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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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은 1788년 1월 22일에 태어났다. 바이런 가문은 대대로 귀족이었지만, 그중에는 유달리 과격하고 충동적인 기질의 소유자가 많았다. 가령 시인의 아버지인 육군 대위는 “미친놈 잭”이라는 별명으로 통했으며, 할아버지인 해군 제독은 “악천후 잭”으로 통했고, 큰할아버지인 제5대 남작은 “악당 바이런”으로 통했으며 실제로도 살인 전과가 있었다. 시인 바이런의 아버지 “미친놈 잭”은 방탕한 생활로 악명이 높았으며, 첫 결혼도 어느 부유한 유부녀와 눈이 맞아 달아나는 것으로 시작했다.
몇 년 뒤에 상처한 그는 1785년에 캐서린 고든(Catherine Gordon)과 재혼했는데, 진실한 애정보다는 그녀가 물려받을 재산에 대한 탐욕에서 이루어진 결합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귀족 출신인 캐서린도 남편 못지않게 격렬하고도 변덕스러운 성격이어서, 남편은 물론이고 외아들에게도 종종 잔인한 욕설을 퍼부을 정도였다. 고든 가문에도 바이런 가문 못지않게 과격하고 충동적인 기질의 소유자가 많았기 때문에, 시인 바이런의 생애와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순적인 성품 역시 친가와 외가 양쪽의 유전적 영향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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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에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자살하자, 바이런과 어머니는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에서 곤궁하게 살아갔다. 1798년에 큰할아버지가 사망하자 직계 상속자가 없는 관계로 10세의 바이런이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아 “바이런 경”이 되었다. 그는 1801년에 해로 스쿨에 들어갔고, 1805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갔다. 재학 중에 첫 시집 [한가한 시간](1807)을 펴냈지만 <에든버러 리뷰>에서 혹평을 받자, 분격한 바이런은 [잉글랜드 시인과 스코틀랜드 비평가](1809)라는 풍자시를 써서 응수했다.
1807년에 대학을 졸업한 바이런은 유럽 여행을 떠나 포르투갈, 에스파냐, 그리스 등지를 돌아보았다. 그 2년간의 여행 경험을 토대로 쓴 이국적인 장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1812) 1부와 2부가 간행되자, 그는 이전의 혹평이 무색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찬사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때 바이런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소감을 표현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I awoke one morning and found myself famous). 이로써 바이런은 단숨에 낭만주의자의 선두주자로 등극하며 명성을 얻었다.
문학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그는 숱한 여성과 염문을 뿌리게 되었다. 비록 과격하고도 변덕스러운 성격이기는 했지만, 바이런은 조각상 같은 외모를 지닌 미남으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그의 신체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한쪽 발에 선천적인 장애가 있었기 때문인데, 일설에는 한쪽 다리가 약간 짧았다고도 한다. 다만 바이런 본인도 그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한 까닭에, 과연 왼쪽과 오른쪽 가운데 정확히 어느 쪽이 정확히 얼마나 짧은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체적 결함을 상쇄하려는 듯 바이런은 체력 단련에 몰두했으며 승마, 수영, 권투, 펜싱, 사격 등에서 상당한 실력을 뽐내게 되었다. 특히 수영을 좋아한 그는 고대의 전설을 모방해 다르다넬스 해협(가장 좁은 곳의 폭이 1.2킬로미터인)을 헤엄쳐 건너가 여자를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한쪽 다리를 전다는 사실에 대한 열등감은 평생 지속되었다. 심지어 그의 첫사랑도 그 문제로 깨지고 말았는데, 평소 흠모하던 여성이 그를 가리켜 “절름발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우연히 엿듣고 상처를 받은 까닭이었다.
1815년 1월에 바이런은 귀족 출신의 애나벨라 밀뱅크(Annabella Milbanke)와 결혼하고, 그해 12월에는 딸 오거스타 에이다(Augusta Ada)를 낳았다. 하지만 순진무구했던 밀뱅크는 방탕한 남편의 성격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1년 만에 일방적으로 별거를 선언하며 딸을 데리고 그의 곁을 떠난다. “그이는 정신적으로는 정상적인지 몰라도 도덕적으로는 병들었어요.” 이때부터 바이런이 배다른 누이 오거스타 리(Augusta Leigh)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것이 파경의 원인이라는 소문이 끈질기게 나돌기 시작한다.
바이런을 둘러싼 여러 가지 소문 (동성애, 가학 및 피학 성향 등)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이 근친상간 혐의인데, 지금까지도 사실 여부는 논란의 대상이다. 지금도 물론이지만 당시의 사회 통념으로는 결코 묵인할 수 없는 일이다 보니, 머지않아 갖가지 악담이 쏟아졌다. “나에 대한 세평이 옳다면 내가 영국에 맞지 않는 인간이고, 틀리다면 영국이 나에 맞지 않는 나라였다.” 견디다 못한 바이런은 이 말을 남기고 1816년 4월 25일에 영국을 떠난다. 크나큰 명성과 오명을 모두 얻은 이때, 그의 나이는 28세에 불과했다. | |
그녀는 예쁘게 걸어요, 구름 한 점 없이
별 총총한 밤하늘처럼.
어둠과 빛의 그중 나은 것들이
그네 얼굴 그네 눈에서 만나
부드러운 빛으로 무르익어요,
난(亂)한 낮에는 보이지 않는.
어둠 한 겹 많거나 빛 한 줄기 모자랐다면
새까만 머리타래마다 물결 치는
혹은 얼굴 부드럽게 밝혀주는
저 숨막히는 우아함 반이나 지워졌을 거예요.
밝고 즐거운 생각들이 그 얼굴에서
그곳이 얼마나 순결하고 사랑스러운가 알려줘요.
그처럼 상냥하고 조용하고 풍부한
뺨과 이마 위에서
사람의 마음 잡는 미소, 환한 얼굴빛은
말해 줘요, 선량히 보낸 날들을,
지상의 모든 것과 통하는 마음을,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피를.
([그녀는 예쁘게 걸어요] 중에서, 황동규 번역)
유럽을 방랑하고 그리스에서 불멸의 생을 마치다

바이런은 얼굴이 워낙 아름다워서, 그를 보자마자 기절한 여성도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가지 신체적 약점이 있었다. 첫째는 다리를 저는 것이었고, 둘째는 쉽게 살찌는 것이었다. 체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이런은 식사를 적게 했으며, 종종 설사약을 복용하는 과격한 방법으로 몸을 관리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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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떠난 바이런은 스위스의 제네바에 한동안 머물렀다. 머지않아 영국 출신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와 그의 부인 메리 고드윈(Mary Godwin), 그리고 메리의 이복자매인 클레어 클레어먼트(Claire Clairmont)가 찾아왔다. 바이런과 마찬가지로 귀족 출신이었던 셸리는 평소에 흠모하던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을 찾아갔다가, 그의 딸인 메리와 사랑에 빠졌다. 메리의 어머니는 [여성의 권리](1792)의 저자로 유명한 선구적인 여성운동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였다.
하지만 당시 셸리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한 상태였다. 메리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셸리는 부득이하게 해외 도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 메리의 이복자매인 클레어도 두 사람을 따라왔다. 열정적인 성품의 바이런과 침착한 성품의 셸리는 여러 모로 대조적이었지만, 자유와 예술을 향한 포부와 열망을 지닌 까닭에 금세 의기투합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원고를 바꿔 읽으며 논평을 해주고, 밤새도록 문학 토론을 벌이면서 피차 깊은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바이런은 여행 중에도 숱한 여성과 염문을 뿌렸는데, 베네치아에 머무는 동안에는 무려 2백 명을 넘게 사귀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1817년 1월에 클레어가 바이런의 딸 알레그라(Clara Allegra Byron)를 낳았다. 바이런은 이 아이를 딸로 인정해서 양육비를 지원했지만, 클레어에 대해서는 직접 만나기도 거부할 정도로 냉담하게 대했다. 이 시기에 바이런이 발표한 주요 작품으로는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3부(1816)와 4부(1817), 그리고 훗날 슈만의 음악으로 더 유명해진 시극 [맨프리드(만프레드)](1817) 등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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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년에 바이런은 숱한 여성 편력 가운데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다. 상대는 19세의 테레사 귀치올리 백작부인(Countess Guiccioli)이었다. 바이런은 그녀를 따라 라벤나로 거처를 옮겼고, 끝내 미완성으로 남게 될 장시 [돈 후안](1819~1824)을 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바이런은 문학이나 쾌락에 대한 관심보다도 오히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더 컸던 것으로 전한다. 특히 그가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반대하는 이탈리아인의 비밀결사인 카르보나리에 가담한 것은 십중팔구 귀치올리 백작부인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1821년에 무장 봉기가 실패하고 귀치올리 백작부인의 친정 식구들이 줄줄이 라벤나에서 추방되자, 바이런도 애인을 따라 피사로 거처를 옮겼다. 1822년에는 연이어 비극이 벌어진다. 4월에는 클레어가 낳은 딸 알레그라가 사망했고, 7월 8일에는 셸리가 라스페치아 만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돌풍을 만나 익사한다. 바이런을 비롯한 친구들은 바닷가로 떠밀려 온 셸리의 시신을 수습하여 화장했는데, 불이 꺼진 뒤에도 셸리의 심장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1823년 12월 30일, 바이런은 이탈리아의 제노바를 떠나 그리스의 메솔롱기온으로 간다. 15세기부터 계속되던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그리스 독립 운동에 적극 동조한 까닭이었다. 비록 군대 경험은 없었지만 바이런은 그리스 반군과 힘을 합쳐 코린트만의 적 요새를 급습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1824년 2월 초에 그는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의사들이 사혈(혈관을 절개해 피를 빼내는 치료법)을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그의 명을 재촉했다고 추정된다.
1824년 4월 19일, 조지 고든 바이런은 영국을 떠난 지 8년 만에 그리스의 메솔롱기온에서 36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가 되어 영국으로 옮겨졌지만, 일설에는 심장만을 따로 떼어내 현지에 묻었다고도 한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에서는 바이런의 좋지 않은 평판을 의식한 듯 매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시신은 그해 7월 16일에 가문의 영지인 뉴스테드의 한 교회에 묻혔고, 한 세기가 더 지난 196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의 시인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바이런이 남긴 미간행 원고 중에는 회고록도 있었다. 자기가 겪은 여러 사건에 대한 솔직한 기록이라고 했는데, 항상 주색에 탐닉했던 바이런의 성향으로 볼 때 십중팔구 스캔들을 일으킬 내용으로 짐작되었다. 그의 사후에 원고를 보관하던 출판인 존 머레이(John Murray)는 바이런의 유족과 지인들, 그리고 변호사와 상의한 끝에 이 원고를 여러 증인 앞에서 벽난로에 집어넣어 불태워 버렸다. “별 내용 없었다.” 그 원고를 읽은 메리 셸리의 단언에도 불구하고, 바이런의 불타버린 원고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 |
이렇게 밤 이슥토록
우리 다시는 방황하지 않으리
마음 아직 사랑에 불타고
달빛 아직 밝게 빛나고 있지만.
칼날은 칼집을 닳게 하고
영혼은 가슴을 해어지게 하는 것이니
마음도 숨돌리기 위해 멈춤이 있어야 하고
사랑 자체에도 휴식이 있어야 하리.
밤은 사랑을 위하여 이루어진 것
그 밤 너무 빨리 샌다 해도
우리 다시는 방황하지 않으리
달빛을 받으며.
([다시는 방황하지 않으리], 황동규 번역)
인간 바이런, 그리고 바이런적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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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기 작가였지만, 오늘날 바이런은 문학사에서나 대중의 인기에서나 동시대의 다른 시인에 비해서는 덜 주목을 받는 편이다. 당시에는 그보다 인기가 못했던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나 키츠(John Keats)나 셸리가 새로운 시도와 혁신의 공로를 인정받아 불멸의 지위에 오른 반면, 신작이 나왔다 하면 초판본 수만 부가 며칠 만에 동났던 바이런은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작가로 여겨진다. 비록 생애는 누구 못지않게 파격적이었지만, 시를 짓는 데에서는 바이런이야말로 오히려 보수적 성향이었던 까닭이다.
기교에서도 바이런은 피상적이고 섬세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종종 받는다. 언어의 압축성이나 비유의 신선함에서도 아주 돋보이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특유의 감상주의와 장광설은 당대의 독자들에게는 사뭇 호소하는 바가 컸을지 모르지만, 세월이 흐르고 시의 판단 기준이 바뀌자 오히려 외면 받는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런의 시는 그 솔직함, 정열, 위트에서 여전히 남다른 매력을 지닌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불필요한 유리구슬이 이따금씩 섞인 고급 진주 목걸이,” 그것이 바로 바이런의 시였다.
“나는 절대로 글을 고쳐 쓰지 않는다.” 바이런은 퇴고라는 말 자체를 몰랐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으면 시가 되었다고 스스로도 회고했다. 바이런의 시가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지닌 매력은 바로 그 단순성과 생생함에 있다. 선이 굵다는 것, 즉 섬세하지 못한 대신에 번역을 거쳐도 의미가 많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도 강점이다. 바이런의 시가 당대에 영국보다는 오히려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에서, 그리고 비평가보다는 오히려 대중에게서 더 인기를 얻었던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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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민속의상 차림의 바이런. 그의 출세작인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는 유럽 각지를 여행한 경험이 투영된 작품으로, 이국적인 배경에서 자유와 반항의 정서를 열정적인 언어로 서술해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대의 인기에 비해 오늘날은 통속적이라고 폄하되는 경향이 있지만, 가슴에서 우러난 솔직한 표현은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바이런만의 매력으로 여겨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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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바이런의 시보다도 더 유명한 것은 이른바 ‘바이런적 주인공’(Byronic hero)이다. 겉으로는 무모하고 난폭하지만, 속으로는 따뜻하고 열정적이며, 과거를 떠올릴 때면 알 수 없는 죄의식과 우울함에 사로잡히는 남자 주인공, 현대의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고독한 늑대 스타일의 전형적인 남자 주인공은 바이런의 창조물이다. 물론 ‘바이런적 주인공’이 실존 인물 ‘바이런’은 아니었지만, 당대의 독자들은 이 두 가지가 똑같다고 생각해서 더욱 열광해 마지않았다.
대중의 열광과는 반대로 바이런을 ‘악마’로 지칭한 비판자도 있었다. 가령 워즈워스는 그를 “괴물”이라고 불렀으며, 콜리지(Samuel Coleridge)는 “악마[사탄]적”이라고 불렀으며, 사우디(Robert Southey)는 “악마[사탄]파 시인의 우두머리”라고 일컬었다. 인습타파주의자인 바이런은 오히려 이런 악명을 즐긴 듯하다. 그의 발언이나 작품에는 실제보다 과장해서 자신을 악당으로 묘사하는 위악적인 태도가 종종 드러난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합리성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바이런을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선구자로 간주하기도 했다.
바이런의 모순적인 기질은 정신의학 쪽에서도 관심의 대상이다. 조울증 전문가인 케이 재미슨은 바이런에 관한 문헌 자료를 근거로 그를 조울증 환자로 진단한다. 즉 바이런이 일종의 열광 상태에서 써내려간 걸작 시들은 ‘조증’ 상태의 발현이며, 종종 억누를 수 없이 터져 나온 분노와 기행은 ‘울증’ 상태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조울증은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질환임을 고려해 보면 일리는 있다. 물론 조울증 환자라고 해서 모두가 바이런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 |
“나는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매순간마다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어서, 어느 하나도 오래 가지 못한다. 나는 선악이 묘하게 혼합된 존재여서, 나를 묘사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바이런을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개성을 지닌 시인으로 만든 것은 단순히 정신적 혼란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또 다른 그의 발언이야말로 오늘날 ‘바이런적’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를 설명해주는 듯하다. “내가 언제나 변치 않고 간직하고 있는 감정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자유에 대한 강한 애정이고, 또 하나는 위선에 대한 혐오이다.”

바이런의 절친한 친구였던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왼쪽)와 그의 아내인 메리 고드윈(오른쪽). 이탈리아로 사랑의 도피를 떠난 두 사람은 한동안 바이런과 머물며 우정을 나누었다. 특히 셸리 부부와 바이런, 그리고 바이런의 주치의인 존 폴리도리가 한 자리에 모인 결과로 공포소설의 고전인 [프랑켄슈타인]과 [흡혈귀]가 탄생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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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흡혈귀, 그리고 바이런

바이런의 영향 가운데서도 가장 크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장 흥미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셸리 부부와 함께 스위스의 제네바에 머물던 1816년 6월 14일, 장마가 계속되자 며칠째 밖에 나가지 못한 바이런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괴기 소설을 하나씩 쓰자고 일행에게 제안한다. 셸리의 부인 메리 고드윈은 한 과학자의 실험을 통해 시체가 되살아나는 이야기를 썼고, 이때의 초고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 바로 공포소설의 고전인 [프랑켄슈타인](1818)이 되었다.
바이런은 흡혈귀에 관한 내용을 다룬 소설을 조금 쓰다가 말았는데, 마침 그곳에 함께 머물던 그의 주치의 존 윌리엄 폴리도리(John William Polidori)가 그 소재에 강한 매력을 느끼고 나름대로의 개작을 시도했다. 바이런을 연상시키는 흡혈귀 ‘루스벤 경’을 주인공으로 한 폴리도리의 소설 [흡혈귀](1819)는 훗날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1897)로 완성되는 이 장르의 시조가 되었다. 따라서 바이런은 영국 낭만주의 문학뿐만 아니라 공포소설의 가장 유명한 장르 가운데 하나를 개척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참고문헌: G. G. 바이런, [라오콘의 고통], 1991; [순례], 1997; 헨리 리 토머스 외, [위대한 시인들], 1983; M. H. 에이브럼즈, [노튼 영문학 개관 II], 1984; 매슈 아놀드, [삶의 비평], 1985; 케이 재미슨, [천재들의 광기], 1993; 앤드루 샌더즈, [옥스퍼드 영문학사], 2002; 토마스 메드윈, [바이런], 2004. | |
- 글 박중서 / 출판번역가, 장서가
- 박중서 씨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시리즈인 <뉴욕 침공기, <월스트리트 공략기>를 비롯해, <해바라기>, <셰익스피어&컴퍼니>, <끝없는 탐구:칼 포퍼 자서전>등을 번역했다. 집안 가득 책을 쌓고 살며, 새 책을 기획하는 일을 한다.
출처:네이버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