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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물

사디즘의 어원이 된 인물 - 사드 후작

작성자겨울의 꿈|작성시간12.02.06|조회수1,098 목록 댓글 0

 

“무려 150년 동안 헐뜯음을 당해 오며 내내 금기 시 됐지만, 또 그만큼 많이 읽혀지기도 한 사드. 그는 20세기를 맞아 전격적인 복권 (적어도 재평가)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 문학의 하늘, 하지만 어두운 하늘에 당당한 자리 하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한테 작품이 잘 읽히지 않은 작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이다 (…) 그를 향한 시각의 변천과정을 연구한다는 것은 곧 20세기 사상사를 기술하는 행위나 마찬가지가 된 것이다. 정신병리학, 정신분석학, 철학, 정치학, 그리고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후작을 자기들 제단에 모시려고 난리였다. 주장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제반 인문과학들은 마치 이불 한 귀퉁이를 차지하듯 각자 자기 몫의 사드를 차지하는 것이다.”

-장 폴 블리겔리

 

 

귀족 방탕아로 살아간 전반생

흔히 “사드 후작(마르키 드 사드)”이라고 지칭되는 인물의 본명은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이다(이 글에서는 편의상 ‘사드’라고 지칭한다.) 이 가문의 이름을 졸지에 가학적 변태성욕과 동의어로 만들어 버린 악명 높은 주인공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드 가문은 여러 세기 동안 프로방스 지방에서 제법 명성을 누리던 어엿한 귀족 가문이었다. 1740년 6월 2일에 파리에서 태어난 사드는 훗날 대를 이어갈 유일한 상속자로 온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다.

 

사드는 10세에 루이 르 그랑 중등학교에 입학해서 4년간 공부했고, 이후 기병대에 입대하여 7년 전쟁을 경험하고 가문의 입김으로 대위까지 승진한다. 파리로 돌아온 사드는 10대 후반부터 일찌감치 노름꾼 겸 난봉꾼으로 악명을 날리다가, 1763년에 중매로 르네 펠라지 드 몽트뢰이와 결혼한다. 사드의 장인은 당시 파리의 조세재판소에서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남편 덕분에 ‘여소장’으로 통하던 사드의 장모는 상당한 정치적 수완가였기 때문에, 이후 사위의 앞날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1767년 초에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작위를 물려받아 ‘사드 후작’이 되었고, 가문의 재산에 대한 처분권을 장악하자마자 유흥비로 거액을 탕진했다. 가정을 꾸민 다음에도 사드의 방탕한 행각은 그칠 줄을 몰랐다. 종종 홍등가를 방문해 매춘부와 어울렸으며, 이른바 ‘사디즘’의 트레이드마크로 여겨지는 채찍질을 비롯해서 쾌락을 위한 갖가지 실험에 몰두했다. 그 와중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사법 당국에 체포되고 수배되었지만, 번번이 귀족 가문이라는 배경을 이용해 국왕의 사면을 얻었다.

 

하지만 단순한 풍기문란이나 신성모독 혐의를 넘어서서, 그에게 심각한 신체적 위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 피해자들이 등장하며 파문이 일었다. 급기야 1768년에 프랑스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부활절 사건’이 터진다. 자신과 관계한 어느 매춘부에게 채찍질을 한 것은 물론이고, 몸에 칼로 상처를 내고 뜨거운 밀랍을 붓는 등의 끔찍한 폭행을 가했다는 이야기였다. 사드는 서둘러 피해자와 합의를 했지만 결국 감옥신세를 졌고, 이 사건이 널리 회자되며 대중에게 확실히 악명을 각인시켰다.

 

1772년 여름에 사드는 마르세유의 홍등가에서 또다시 여러 명의 매춘부와 어울렸다. 그런데 매춘부 가운데 한 명에게 먹인 최음제가 부작용을 일으키면서, 사드는 졸지에 독살 미수 혐의로 수배를 받게 된다. 깜짝 놀란 그는 부랴부랴 외국으로 도피에 나서면서, 아내 대신 평소 자신의 불륜 상대였던 한 여성을 동반한다. 그런데 문제의 여성이란 다름 아닌 그의 처제였기 때문에 더욱 큰 스캔들이 벌어졌고, 이에 분격한 장모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위를 손봐주려고 벼르게 된다.

 

사드는 1774년부터 본인 영지의 라코스트 성에서 부인과 함께 칩거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일하던 미성년자 시종들이 사드 부부가 벌인 음란 행위에 동원되었다고 폭로함으로써 또다시 스캔들이 터진다. 사드는 한동안 이탈리아로 도피를 떠났다가 돌아오지만, 1776년 말에 이르러 또다시 매춘부와 스캔들을 일으킨다. 급기야 1777년 2월 13일, 루이 16세의 봉인장을 소지한 경찰이 출동하여 사드를 체포하여 뱅상 감옥에 수감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 생애의 딱 절반을 지난 다음이었다.

 

 

연이은 투옥으로 점철된 후반생

국왕의 봉인장이란 특정 피의자를 왕명으로 무기한 구금할 수 있는 효력을 발휘했다. 그럴 경우에는 피의자에 대한 처분을 사법 기관이 아니라 국왕이 직접 결정했기 때문에(이미 사드가 여러 차례 악용한 것처럼), 봉인장은 사실 정식 재판을 피하고 단기간의 근신을 거쳐서 손쉽게 사면을 얻어내기 위해 귀족들이 악용하는 책략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위를 미워하던 장모가 국왕에게 호소하여 사면 없는 무기한 구금 명령을 받아냄으로써, 사드는 이때부터 무려 13년 동안이나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의 엽기적인 방탕에 관해서는 이미 소문이 자자했기에, 대중은 물론이고 친지조차도 그의 수감 소식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사드는 감옥에서도 다양한 음식을 반입해 먹을 정도로 비교적 편안하게 지냈지만, 운동 부족 때문인지 점차 몸이 비대해지고 쇠약해졌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희곡 및 소설 창작과 서한 작성에 바쳤고, 1784년 초에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으로 이감되어서도 같은 생활을 지속했다. 그러다가 1789년 7월 14일, 군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의 막이 오른다.

 

이때 사드는 바스티유 감옥이 아니라 샤랑통 정신병원에 있었다. 7월 초에 그는 “바스티유에서 죄수들을 무차별 학살한다”고 주장하며 감옥 밖의 군중을 선동했고, 이에 놀란 간수들은 그를 정신병원으로 이송 조치했던 것이다.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자 봉인장도 효력을 상실하여, 사드는 1790년 4월 2일에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잃은 다음이었다. 부인에게 이혼 소송을 당해 지참금을 돌려주어야 했지만, 재산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서 당장 머물 집조차도 없는 상황이었다.

 

사드는 연극계를 기웃거렸지만 창작 희곡을 무대에 올리지는 못했고, 소설 [쥐스틴](1791)을 익명으로 간행하지만 악평만 얻었다. 귀족 신분이라는 약점 때문에 위협을 느낀 그는 민주주의자로 자처하고 잠시 공무를 담당하는 등, 혁명 세력에게 잘 보이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드는 1793년 말에 반혁명분자로 지목되어 체포된다. 이듬해에 공포정치가 종식되면서 석방된 사드는 생계를 위해 집필에 전념하여 주요 대표작을 실명, 또는 익명으로 펴낸다.

 

사드의 대표작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운](1791)의 초판본 속표지.


하지만 여전히 경제 사정이 나아지지 않자 생계를 위해 극장에서 프롬프터 일을 하는가 하면, 한동안은 극빈자 구호소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치하인 1801년 초, 사드는 결국 음란물 유포죄로 다시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1804년 초에 감옥을 떠나 샤랑통 정신병원으로 옮겨간다. 벌써부터 ‘사드’라는 이름에 달라붙은 크나큰 오명을 지긋지긋해 하던 자녀들이 아예 부친을 정신병자로 몰아세워 이곳에 가둬버린 것이었다. 이 당시에 사드의 원고 가운데 일부가 경찰에 압수되어 잿더미로 변하기도 했다.

 

사드는 샤랑통에서 환자들을 데리고 아마추어 극단을 조직해서 공연을 가졌으며, 이는 훗날 페터 바이스의 희곡 [마라와 사드](1963)의 소재가 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1814년 12월 2일, 사드는 결국 샤랑통에서 눈을 감는다. 유언장에서 그는 자기 무덤 위에 여러 가지 과실수를 심어서 무덤의 흔적조차 없애달라고 당부했다. “사람들의 뇌리로부터 나에 대한 기억이 깨끗이 사라지는 게 더없이 기쁠 따름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점점 더한 악명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드의 악명 높은 대표작들

사드가 쾌락의 추구 못지않게 평생 몰두했던 또 한 가지 관심사는 바로 연극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연극계를 기웃거렸고, 실제로 몇 번인가는 창작 희곡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좋은 평가는 얻지 못했다. 훗날 샤랑통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에게 연극을 지도한 것(현대의 ‘사이코드라마’의 원형이라 할 만한 부분이 있다)도 그런 관심 추구의 연장이었다. 하지만 사드의 저서 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유명한 (또는 악명 높은) 것은 특유의 가학성이 드러나 논란을 일으킨 외설 작품들이다.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운](초판 1791; 신판 1801)과 [쥘리에트, 또는 악덕의 번영](1801)은 선과 악을 상징하는 두 명의 처녀가 겪는 고난을 통해서 유물론과 무신론의 입장이 전면에 부각된 작품이다. [규방 철학](1795)은 순진한 처녀가 방탕한 남녀의 지도하에서 점차 쾌락에 눈뜨게 되는 과정을 그린 대화체 소설이며, 중도에 프랑스 혁명에 관한 견해를 피력한 소책자의 내용이 삽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사드는 익명으로 간행된 이 소설들의 저자가 자기라는 소문을 끝까지 부인했다.

 

사드의 가장 악명 높은 저서 [소돔 120일]은 사실 미완성 작이며, 저자의 생전에만 해도 유실된 것으로 여겨졌다. “1785년 10월 22일에 시작해 37일 만에 완성”한 이 작품의 친필 원고는 종이를 줄줄이 이어 붙여서 만든 커다란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다. 사드는 이 원고를 바스티유의 감방에 은닉해 두었는데, 혁명 당시에 폭도가 감옥을 약탈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 세기 뒤인 1904년에야 다시 발굴되어 간행된 이 원고는 제1부의 완성 부분과 2-4부의 줄거리 요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미완성으로 남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돔 120일]에는 지금 봐도 섬뜩할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묘사가 수시로 등장한다. 루이 14세 치하를 배경으로 4명의 방탕한 권력자가 젊은 남녀 노예 수십 명을 이끌고 120일 동안 벌이는 변태적인 향락의 기록이 그 줄거리이다. 이 소설은 훗날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이탈리아를 무대로 해서 각색한 영화 [살로, 소돔 120일](1975)로 더더욱 악명을 떨친 바 있다.

 

문학 평론가 콜린 윌슨은 한 가지 일화를 전한다. 외설물 애호가인 한 친구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소돔 120일]을 빌려가더니, 결국 몇 페이지 읽다 말고 돌려주더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드의 외설 문학은 워낙 충격적이기 때문에 독자를 흥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질겁하게 만들곤 한다. 사드를 풍문으로만 아는 사람은 그를 단순히 외설 작가로 여기는 반면, 사드를 직접 읽은 사람은 이렇게 뻔뻔하고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지닌 인물과 그의 사상에 오히려 호기심을 느끼게 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기욤 아폴리네르가 편집한 사드 작품집(1912년)에 수록된 초상화.

 

 

사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오늘날 ‘사드’의 이름은 ‘사디즘’이나 ‘사디스트’나 ‘사도마조히즘’(SM) 같은 여러 가지 파생어를 통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사디즘’이라는 신조어는 사드가 사망하고 나서 한 세대가 지나자 사전에도 등장하게 되었는데, 독일의 성의학자 크라프트에빙에 의해 “가학성 변태 성욕”이라는 의미로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하지만 ‘사디즘’으로 지칭되는 현상은 역사적 인물인 ‘사드’보다도 훨씬 더 먼저부터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드’를 마치 ‘사디즘’의 발명자로 여기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잘못이다.

 

나아가 사드가 갖고 있었던 쾌락의 개념은 사디즘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면서 쾌락을 느낀 것이 아니라, 그런 고통(또는 고통의 위협) 때문에 상대방이 드러내는 ‘공포’를 보면서 쾌락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가 채찍질과 비역질에만 그치지 않고 종종 신성모독을 쾌락과 연결시킨 것도, 금기와 인습에 대한 전복과 도전이 주위 사람들에게 주는 ‘충격과 공포’ 때문이었다. 그가 남긴 여러 편의 외설 문학이 성욕보다는 오히려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드가 헛소문의 일방적인 피해자였다는 뜻은 아니다. 대중의 상상력 때문에 모함을 받긴 했지만, 평생의 행적을 돌아보면 인간 사드는 단단히 비뚤어진 사람이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를 중심으로 사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인습 타파를 이유로 그를 ‘진정한 자유인’으로 여기는 것이 대세가 되었는데, 그건 사실 본말이 전도된 평가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사드의 인습 타파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쾌락 극대화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사드의 사상’으로 일컬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디즘’이 아니라, 본인이 창안한 용어대로 ‘고립주의’(isolisme)일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은 서로 고립된 상태로 태어나며, 각자 서로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지. 그 누구도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그와 나 사이에는 최소한의 관계조차 존재하지 않아 (…) 남들이 느끼는 가장 극심한 고통은 단연코 우리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반면,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미미한 쾌감이 우리를 감동시키지.” 적어도 그에게 허무와 쾌락은 종이 한 장의 차이였던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홀로코스트의 진상이 밝혀지자, 일각에서는 사드의 작품이 나치의 만행에 직간접적인 영감을 주었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차라리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한 가지 극단을 나치보다 한 발 앞서 사드가 증명했다고 보아야 더 정확할 것이다. 종종 광인으로 치부되고 외면당하지만, 인간이 무엇인지(또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는 마치 목에 걸린 가시처럼 그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사드가 남긴 작품의 가치는 아마 거기서 찾아야 마땅할 것이다.

 

 


참고문헌: 사드 후작, [미덕의 불운], 1988; [안방철학], 1992; [소돔 120일], 1993; [사랑의 죄악], 1993; [사드의 욕망(원제: 헨리에타 스트롤슨, 또는 절망의 효과)], 1994; [소돔 120일], 2000; [규방철학], 2005; [사랑의 범죄], 2006; 쟝-쟈끄 뽀베르, [살아 있는 사드], 1993; 조르주 바타이유, [문학과 악], 1995; 샹탈 토마, [사드, 신화와 반신화], 1996; 티모 에이락시넨, [사드의 철학가 성윤리], 1997; 모리스 르베, [사드], 1999; 장 폴 블리겔리, [사드], 2006; 존 필립스, [HOW TO READ 사드], 2008.

 

 

 

박중서 / 출판기획자, 번역가
글쓴이 박중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인 [뉴욕 침공기]와 [월스트리트 공략기] 등 수 십권의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번역가다. 1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했으며, 독서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불굴의 용기] [끝없는 탐구] 등 인물 논픽션을 번역했으며 외국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출처:네이버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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