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의 그래도] 구원은 확정된 약속… 믿음으로 지금부터 하나님과 동행을
<22> 구원의 확신이 없을 때
이명희2026. 5. 6. 03:10
게티이미지뱅크
살다 보면 ‘나는 정말 괜찮은가’라는 근원적인 불안이 밀려올 때가 있다.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기도도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내가 정말 구원 받았을까’라는 의구심이 안개처럼 피어나곤 한다. ‘천국이 있다면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감정의 파도에 휩싸일 때면 구원이나 천국에 대한 확신은 신기루처럼 희미해지기도 한다. 내가 만들어낸 환상, 힘든 세상을 헤쳐가기 위한 위안은 아닐까 하는 의심에 빠지기도 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언약
설교의 황태자로 불리는 찰스 스펄전 목사는 저서 ‘구원의 은혜’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구원 받을 자격이 없고 구원에 대해 아무 준비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 임한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사죄의 은총은 죄인을 위한 것이다. 그는 우리의 시선을 나의 상태가 아닌 하나님의 성품으로 돌리라고 권면한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조차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붙드는 손의 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붙들고 계신 그분의 손의 힘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내 믿음의 뜨거움을 확인하려 든다. 하지만 스펄전 목사의 말처럼 구원의 근거는 내 감정의 온도가 아니라 그분이 맺으신 변치 않는 언약에 있다. 내가 그분을 놓치는 것 같아 불안할 때도, 그분은 결코 나를 놓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바로 은혜의 시작이다.
존 오트버그 목사는 저서 ‘내가 구원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통해, 구원은 세상의 소망이며 인간 삶의 회복이라고 규정한다. “기독교의 목표는 단순히 당신을 지옥에서 꺼내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서 지옥(이기심 분노 탐욕)을 꺼내는 것이다.” “영생이란 죽은 후에 시작되는 끝없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하나님과 연결돼 누리는 삶의 질을 의미한다.”
오트버그 목사는 구원의 핵심은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우리에게로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평범한 일상에서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고 그분의 임재를 느끼며 동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과 온 인류를 그분의 눈으로 보며 그분의 사랑과 보호 안에 거하는 것, 한 번에 한 순간씩 예수의 삶이 우리 삶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 ‘결과’가 아닌 ‘동행’의 과정임을 강조한다. “구원의 확신은 어떤 마법 같은 공식이나 완벽한 교리적 이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의 궤적 안에서 서서히 자라나는 신뢰의 열매이다.” 그는 우리가 완벽하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기에 구원이 유효하다고 말한다. 확신이 생기지 않아 괴로워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분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구원은 하나님께 주권을 이양하는 것
존 비비어 목사의 구원관은 오트버그 목사와 결이 비슷하면서도 훨씬 더 강력한 경고와 거룩함에 대한 촉구가 담겨 있다. 그는 현대 교회가 구원을 너무 값싸게 가르치고 있다고 비판하며 구원의 확신보다 구원의 실제를 강조한다. 구원은 천국행 티켓이 아닌 주권의 이양이라고 말한다. 그는 예수를 구세주로 모시지 않는 신앙은 가짜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조현삼 서울 광염교회 목사의 설명도 비슷하다. 그는 ‘구원 설명서’에서 복잡하게 꼬인 우리의 생각에 명쾌한 길을 제시한다. 구원은 결코 모호한 신비주의 속에 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선물은 주는 이의 마음을 확인하고 감사히 받으면 내 것이 된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고 선언한다. 내 느낌을 믿지 말고 기록된 말씀을 믿으시오.” 조 목사는 감정에 속지 말라고 당부한다. 구원은 내가 느끼는 기분이 아니라 성경이라는 약속 어음에 적힌 확정된 사실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에는 밭에 뿌려진 알곡과 가라지 비유가 등장한다. 조 목사는 이 비유를 들며 “알곡은 구원 받을 사람을 일컫는 말이고 가라지는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며 “이 비유의 핵심은 세상에는 구원 받을 사람과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이 공존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밭은 세상이다. 교회가 아니다”면서 “예수님이 우리의 메시아이심과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알곡”이라고 규정한다. 알곡인 그리스도인도 교회 안팎에서 잘못할 수 있고 탕자처럼 집을 나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고 알곡이라는 것이다.
구원 받았다고 기뻐하다가도 심판대에 선다는 것을 생각하면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조 목사는 심판은 분명히 있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은 다음에 심판을 면제 받는다고 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는 말씀은 예수 믿고 이 땅에서도 항상 구원 받은 자로 천국을 미리 경험하며 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구원의 결과인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면 구원이 헷갈린다고 했다.
사람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뀔 정도로 간사하다. 어떤 날은 천국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쁘고 즐겁다가도 어느 날은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불안하고 우울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이유는 구원이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그분의 ‘어떠하심’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결국 구원의 확신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선물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주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가에 집중하는 것이다.
구원 받은 자의 특징
구원 받은 사람은 세상적인 사람들과 구별된다. 내 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 보시기에 어떨까 생각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의 증거다. 물질이나 세상적인 권력, 다른 사람의 인정, 평가에 무게 중심을 두지 않고 하나님 기준에 따라 사는 삶의 변화가 구원의 증거다.
조정민 베이직교회 목사는 구원은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관계의 축이 이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트버그 목사는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는 없지만 거부할 수는 있다고 말한다.
달라스 윌라드는 간발의 차이로 천국을 놓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피하고 그분에게서 도망치려는 지속적인 노력으로 지옥에 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은혜는 죄를 지어도 덮어주는 면죄부는 아니다. 영원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은혜는 죄를 지어도 괜찮게 만드는 면죄부가 아니다.
조현삼 목사는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심판주는 문 밖에 서 계신다”며 “날마다 우리를 심판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날마다 죄에서 돌아서고, 이 땅과 저 천국에서 누릴 상을 쌓고 있다”고 말한다.
조정민 목사는 ‘왜 구원인가’에서 “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사건”이며 “우리는 흔히 구원을 ‘문제 해결’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존재의 변화’”라고 정의한다.
성경 속 구원
구원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약속이다. 성경 곳곳에는 죄 많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의 구절이 많이 나온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핵심 메시지는 세 가지다. 우선 은혜다. 구원은 자격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다음은 믿음이다. 구원은 나의 고행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완성된다.
스펄전 목사는 “믿음이란 단번에 하늘 문을 여는 열쇠와 같다”고 했다. 마지막은 완성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구원을 위해 더 보탤 것이 남아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명희 논설위원·종교전문기자 mheel@kmib.co.kr
기사원문 : https://v.daum.net/v/202605060310135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