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가 죽으매
창세기 23:1-9
우리는 지금까지 창세기를 통해 아브라함의 인생을 계속 따라왔습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까지의 세월을 생각해 보면, 거의 40년이 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모든 길에 아브라함 혼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험난한 길에 사라도 함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날 때, 사라도 함께 떠났습니다. 낯선 땅 가나안에 들어올 때도 사라가 함께 있었습니다.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내려갈 때도 사라가 함께 있었습니다. 남편의 연약함 때문에 위험한 순간을 걸을 때에도 사라는 함께 걸었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아픔과 수치 속에서도 사라는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품에 안을 때에도 사라는 그 은혜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은 단지 아브라함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곁에는 사라의 눈물도 있었습니다. 사라의 기다림도 있었습니다. 사라의 상처도 있었습니다. 사라의 웃음도 있었습니다. 사라의 믿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빚어 가실 때, 동시에 사라도 빚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삶을 여호와 이레의 은혜로 인도하실 때, 사라의 삶도 그 은혜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23장에 들어오면, 성경은 아주 짧고도 무거운 한 문장으로 우리를 멈추게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던 여인, 오랜 불임의 고통을 지나 마침내 이삭을 낳았던 여인, 아브라함과 함께 가나안 땅을 걸었던 여인, 그 사라가 이제 생을 마감합니다.
본문 1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성경은 단순히 “사라가 죽었다”라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냥 “오래 살다가 죽었다”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자들 가운데 죽은 나이가 기록된 여인은 사라가 유일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라를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라는 아브라함과 함께 갈대아 우르에서의 안정된 삶을 뒤로하고 장막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 하나 붙들고 길을 떠났습니다. 광야를 지나야 했습니다. 기근도 견뎌야 했습니다. 타국에서 두려움도 경험했습니다. 남편의 연약함 때문에 상처받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현실 속에서 수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특별히 사라에게 가장 큰 고통은 ‘불임’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녀가 없다는 것은 단순한 아쉬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여인으로서의 존재 가치 자체가 흔들리는 일이었습니다. 사라는 그 고통을 평생 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게 이루어질 때 그녀는 흔들렸습니다.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들여보내는 인간적인 방법도 사용했습니다. 자기 손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기다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방법보다 내 방법을 앞세울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시간보다 내 조급함이 먼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사라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사라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실패했다고 끊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연약하다고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기다려 주셨습니다.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라를 변화시키셨습니다.
소위 ‘믿음장’으로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은 사라를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합니다. 처음에는 흔들렸지만, 끝내는 믿음으로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라의 인생은 한마디로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완벽해서 쓰임 받은 인생이 아닙니다. 연약했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인생입니다.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다시 세워진 인생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실패를 했어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을 붙드십니다. 눈물 가운데서도 약속을 놓지 않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라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그녀의 인생 전체를 존귀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성경이 사라의 죽음을 자세히 기록하는 이유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간 한 믿음의 인생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나아가 장차 우리가 맞이하게 될 인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여기서 ‘누린 햇수’라는 표현을 보십시오. 사라는 자기 마음대로 127년을 산 것이 아닙니다. 사라가 자기 의지로 생명의 길이를 결정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간만큼 살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몇 년을 살 것인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건강이 결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능력이 결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욥기 14장 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는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인생이 살아갈 날 수는 미리 정해져 있고, 그 달 수도 주님께서는 다 헤아리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길이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라도 하나님께서 호흡을 주셨기에 태어났고, 하나님께서 호흡을 거두시자 인생이 끝났습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햇수 동안만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밤일 수도 있습니다. 내년일 수도 있습니다. 십년 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반드시 끝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과 2절은 그 마지막 날이 도적같이 온다고 했습니다. 도적은 예고하고 오지 않습니다. “오늘 새벽 2시에 방문하겠습니다”라고 미리 연락하고 오는 도적은 없습니다. 갑자기 찾아옵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5장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깨어 있다는 것이 잠을 안 자고 버틴다는 말이 아닙니다. 늘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밤 주님이 부르셔도 후회가 없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할 것을 미루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미워한 채로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거창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결코 거창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손목시계에서 흘러가는 1초 1초가 인생입니다. 그 1초가 모여서 하루가 되고, 그 하루가 모여서 한 달이 되고, 그 한 달이 모여서 일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느냐 입니다. 이 1초 1초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 이 1초 1초를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위해 사용하는 것, 이 1초 1초를 믿음으로 엮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깨어 있는 삶입니다. 사라는 127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순히 오래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살았습니다. 믿음의 길 위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믿음의 어머니로 영원히 기억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언젠가는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인생의 햇수가 여기까지다”라고 말씀하시는 그 날이 반드시 옵니다. 그 날, 후회하면서 가슴을 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주님이 주신 시간 속에서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쳤습니다”라는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깨어 사십시다. 오늘 하루를 마지막 하루처럼 사십시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사십시다. 말씀 안에서 사십시다. 기도 가운데 사십시다. 맡겨주신 사명을 붙들고 사십시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마지막 날은 두려움의 날이 아니라 영광의 날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허망한 죽음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영원한 생명의 문이 열리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라의 127년의 인생처럼,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믿음의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라의 127년 인생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사라가 제일 먼저 성경에 등장하던, 창세기 11장 30절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이것이 사라의 첫 소개입니다. 그러니까 사라라고 하는 한 여인이 성경에 등장하는데, “이 여자는 아이를 못 낳는 여자야.” 이렇게 딱 단정하고 등장을 합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과 사라가 살던 시대에 자식은 곧 재산이었습니다. 자식은 가문의 미래였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아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여인으로서의 존재 가치까지 흔들리는 시대였습니다. 사회적으로 정말 박복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그 옛날 자식이 재산이었던 시대에 나이가 들기까지 자식을 낳지 못할 때에 그 사라의 아픈 심정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사라가 얼마나 울었겠습니까? 밤마다 얼마나 하나님 앞에 무너졌겠습니까? 남들은 아이를 안고 웃는데, 자기는 빈 가슴을 안고 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라가 65살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75살입니다. 남편과 10살 터울입니다. 남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아직까지 자기와 남편 사이에 아이 한 명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줄게”라고 하십니다. 그 말이 사라에게 얼마나 희망이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남편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등지고 미지의 세계로 갈 때 사라가 두 말 하지 않고 따라갑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땅, 언약의 땅에 가면, 그때는 내가 엄마가 될 수 있을 거야.”
그 희망 하나를 붙들고 따라 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습니다. 70세가 되어도 안 생깁니다. 75세가 되어도, 80세가 되어도 안 생깁니다.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얼마나 절망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자기 몸종 하갈을 남편에게 씨받이로 들여보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너무 쉽게 읽습니다. 그러나 사라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당시의 사회가 아무리 일부다처제라고 할지라도 인간은 인간의 심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자식을 낳지 못해서, 그것도 내 종을 내 남편의 침실에 들여보내야 하는 그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겉으로는 웃었을지 몰라도 속에서는 피눈물이 났을 것입니다. 그때 사라의 그 미묘한 감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 남편에게 자식이 있어야 되니까, 여종이라도 넣어서 아들을 낳게 해주겠다고 씨받이로 넣어주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쟤도 아이를 못 낳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좀 위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갈이 들어가서 덜커덕 임신을 했습니다. 임신하고 나니까 하갈의 표정이 바뀌었습니다. 주인을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애도 못 낳는 주제에 왜 안방에 앉아 있느냐고 말입니다. 여종이 하루아침에 안방마님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사라가 느꼈을 그 괴로움과 고통을 누가 상상하겠습니까? 내가 남편에게 들여보내준 여종입니다. 그런데 그 여종이 나를 멸시합니다. 사라는 그때 철저하게 무너졌습니다. 오죽했으면 사라가 자기가 넣어주었던 그 씨받이를 학대했겠습니까?
사라의 나이 76세가 되었습니다. 남편의 나이는 86세입니다. 씨받이로 넣어주었던 그 하갈이 딸을 낳지 않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86세가 되어서 첫 아들을 품에 안아 본 아브라함은 너무 기뻤을 것입니다. 그 아들을 보면서 웃고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사라는 어떻습니까? 그 아이는 자기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아이입니다. 법적으로는 자기가 주인이니까 내 아들처럼 할 수 있지만,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남편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자기 자식입니다. 자기 핏줄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보면서 “이 아이가 약속의 씨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라는 그 모습을 보면서 더욱 깊은 고독 속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라의 생리가 끝났습니다. 이제 인간적으로는 완전히 끝났습니다. 여자로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생리가 끊어진 90세의 사라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그 아이보다 14년 전에 태어난 이스마엘, 씨받이에서 낳은 아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적통자가 아니라, 자기가 낳은 그 아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90세가 되었으면 가슴도 다 말랐을 것입니다. 그 마른 가슴으로 이삭에게 젖을 물립니다. 그때 사라가 이 땅에 태어나서 90년만에 최초로 여자로서의 행복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이삭입니다.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사라는 그 아이를 얻음으로써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짜 웃었습니다. 일평생 고독하고 서글프고, 외롭게 끝나버릴 사라의 인생이 정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웃음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라는 그 아들과 함께 37년을 살았습니다. 127세까지 살았으니까 마지막 37년은 웃음의 세월이었습니다.
90세부터 127세에 사라가 죽을 때까지 37년의 그 기간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라가 남모르게 울고, 고통스럽고, 고독했던 그 90년의 세월은 후반부 37년의 세월과 어떻게 비교가 되겠습니까? 이처럼 정말 고통스럽고 외로웠던 사라의 인생이 세월이 흘러갈수록 인생 라이프선이 쭉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인생 말년이 되어서 그 인생이 활짝 꽃핀 다음, 그 인생이 끝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끝이 좋아야 합니다. 성경은 지금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50년, 60년을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았어도 마지막이 무너지면 그 인생은 너무 비참합니다. 반대로 평생 눈물 가운데 살았어도 마지막이 하나님 안에서 아름답게 마무리되면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인생은 마지막 끝날 때의 인생이 어떻게 끝나는가 하는 그 마지막의 의미가 전 인생으로 소급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평생을 수치 속에 있었다고 할지라도 마지막이 아름답게 대 역전으로 끝나면 수치스러웠던 과거도 전부 다 미화됩니다. 그것도 다 아름다운 간증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지난 세월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마지막이 정말 수치스럽게 끝난다면 예전에 내가 이렇게 멋졌다고 하는 것까지도 더 망신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마지막으로 평가됩니다. 끝까지 믿음을 붙드는 사람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약속을 붙드는 사람이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라처럼 마지막에 웃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눈물의 과거가 은혜의 간증으로 바뀌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서 “참 잘 살았다”라고 말씀하시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등장할 때는 “이 여자는 석녀다” 이렇게 수치스럽게 등장했던 사라가, 그리고 수많은 밤을 울고 고통스럽게 고독 속에 살던 사라의 인생이 어떻게 말년에 가서 이처럼 웃음이 가득한 행복으로 아름답게 만개하고 끝날 수 있었는가?
본문 2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성경은 단순히 “사라가 죽었다”라고만 기록하지 않고, 사라가 죽은 장소를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왜 성경은 굳이 ‘가나안 땅’이라고 말하지 않고,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라고까지 설명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절대로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마지막 장소를 통해서 한 믿음의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앞부분을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그랄에도 살았고, 브엘세바에도 살았습니다. 특별히 이삭을 낳을 때도 브엘세바 지역에 있었고, 하나님께서 이삭을 모리아 산에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도 그들은 브엘세바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창세기 23장에 와 보니까, 다시 헤브론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다시 믿음의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 여기 기럇아르바는 옛 이름이고, 아브라함 시대에는 헤브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이름의 뜻입니다. ‘헤브론’이라는 말은 ‘교제’, ‘연합’, ‘사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라는 마지막 순간을 하나님과의 교제의 자리에서 마쳤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히브리어 원문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가나안 땅 안에”, “헤브론 안에서”라고 하면서 둘 다 영어로 ‘in’이라고 해서, 우리말로 ‘안에’라는 전치사가 반복해서 사용됩니다.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사라가 가나안 땅 안에, 헤브론 안에서 죽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가나안 땅은 단순한 지명이 아닙니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땅입니다. 그러므로 사라가 가나안 안에서 죽었다는 말은, 사라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헤브론은 교제의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사라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인생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사라의 인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라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으로 웃은 날도 있었지만, 불신앙으로 웃었던 날도 있었습니다. 하갈을 통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연약함도 있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두 번이나 거짓말의 두려움 속에 들어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라는 끝까지 언약 밖으로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 안에서 인생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그랄로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브엘세바 광야와 같은 시간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실수할 때도 있습니다.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인생을 끝내느냐 입니다. 돈 안에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세상 성공 안에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 안에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끝나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끝나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에 내가 어디 안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 있어야 합니다. 사라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인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므로 사라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완성입니다. 언약의 완성입니다. 교제의 완성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에게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언약의 하나님 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너는 어디 안에서 인생을 마치겠느냐?” 우리의 몸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우리의 직장이 어디이든지 간에,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한복판에서 살지만 언약 안에서 살다가, 교제 안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품안으로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눈물을 봅니다. 믿음의 조상도 울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가슴이 무너집니다. 아브라함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슬퍼하며 애통하였다.”
이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장막을 치며 광야를 지나왔던 사람입니다. 기근 속에서도 함께 견뎌냈던 사람입니다. 자식이 없어 함께 울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함께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사람이 눈앞에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인생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도 아픕니다. 믿음의 사람도 상실 앞에서 무너집니다. 신앙이 좋다고 해서 슬픔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깊이 사랑했던 사람일수록 더 깊이 아파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 좋으면 눈물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눈물을 숨기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은 인간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인간적인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눈물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짜 신앙은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브론’이라는 지명은 ‘교제’, ‘연합’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평생 연합하며 살아온 부부가 바로 헤브론에서 마지막 이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평생 함께 믿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함께 실패했고, 함께 기다렸고, 함께 웃었고, 함께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헤브론에서 사라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부부란, 단지 한 집에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함께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함께 약속을 붙드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완벽한 부부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하갈 사건처럼 인간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함께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끝까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육신의 동행은 끝나도 하나님의 언약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3절 이하를 보면, 아브라함은 헷 족속에게로 나아갑니다. 4절의 말씀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가나안 땅 전체를 약속받았지만, 여전히 자신을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의 아브라함은 여전히 남의 땅에 사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된 땅이 없습니다. 자신이 묻힐 무덤조차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묻을 자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오래 믿었는데, 왜 아직도 내 땅 하나 없습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나그네’, ‘거류민’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믿음은 이미 다 가진 상태가 아닙니다. 믿음은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현실은 부족해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가축도 많았습니다. 종들도 많았습니다. 동방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비멜렉과 같은 왕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이름으로 된 땅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평생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의 시선이 이 땅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막은 임시 거처입니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의 집입니다. 아브라함은 장막에 살면서도 늘 고백했던 것입니다. “여기가 내 영원한 집이 아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땅에 뿌리를 내리려고 합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더 안전하게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압니다. 이 땅은 영원한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도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11장 10절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지으실 성’은 단순한 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영원히 썩지 않는 도성입니다. 눈물도 없고 죽음도 없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단순히 가나안 땅만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았습니다.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현실만을 붙잡고 살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당장의 편안함보다 영원한 약속을 더 붙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는 우리를 향해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성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 한복판에서 살았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너무나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권력도 없었습니다. 재산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이 땅에 잠시 머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핍박 속에서도, 재산을 빼앗기면서도, 감옥에 갇히면서도, 맹수의 밥이 되면서도,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음을 패배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찬송하며 순교했습니다. 기도하면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저 사람들을 저렇게 담대하게 만드는가?” 그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하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말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시민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
본문을 보십시오. 죽음처럼 보이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눈물의 자리에서 언약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묻기 위해 막벨라 굴을 사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처음으로 ‘막벨라 굴’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막벨라 굴은 단순한 동굴 하나가 아닙니다. 창세기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장소입니다. 훗날 믿음의 조상들이 잠들게 되는 믿음의 가문의 무덤이 됩니다. 사라가 묻히고, 아브라함이 묻히고, 이삭과 리브가가 묻히고, 야곱과 레아가 묻힙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무덤은 끝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에게 무덤은 끝이 아니라, 기다림의 자리입니다. 부활을 바라보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잠드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죽음 이후까지도 언약을 이어가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사라가 죽으매’의 순간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날이 있습니다. 인생이 텅 빈 것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눈물밖에 나오지 않는 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눈물 속에서도 믿음을 놓지 마십시다.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결국 역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언젠가는 끝이 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 인생은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영원히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현실만을 바라보지 말고 영원을 바라보십시다. 눈에 보이는 것만 붙들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십시다. 그리고 끝까지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가십시다. 그리하여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 “잘하였다, 충성된 종아!”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