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
창세기 23:10-20
사라는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하란을 지나 가나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애굽의 위기, 그랄의 위기, 불임의 고통, 하갈 사건, 긴 기다림의 세월을 함께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90세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 사라가 127세에 죽었습니다. 성경은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죽음은 평생의 동반자를 잃는 아픔이었습니다. 장구한 세월을 함께 걸어온 아내를 떠나보내는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울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라 앞에서 일어나 헷 족속에게로 갔습니다. 그녀를 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 죽은 사람을 장사하는 일은 단순히 시신을 처리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장사는 한 사람의 생애를 마무리하는 거룩하고도 엄숙한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가족의 무덤, 조상의 무덤, 자기 집안의 매장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를 아무 곳에서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묘실이나 굴에 안치하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마지막 존중이었고, 남은 가족들에게는 기억과 정체성의 자리였습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을 장사할 곳이 없다는 것은 큰 수치이고 큰 고통입니다. 반대로 죽은 자를 정중히 장사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매우 큰 호의이고 예우였습니다. 헷 족속에게도 매장지는 단순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가족과 가문이 연결되는 자리였습니다. 조상과 후손이 이어지는 자리였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보면,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사할 매장지를 요청한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입니다. 그는 아직 그 땅의 정식 소유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 아내 사라를 그 땅에 묻고자 합니다. 그 땅에 자기 가문의 흔적을 남기는 일입니다. 더 깊이 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믿음으로 붙드는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본문은 아브라함이 그 매장지를 어떻게 정식으로 구입하고, 그 땅이 어떻게 그의 소유지로 확정되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 10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에브론이 헷 족속 중에 앉아 있더니 그가 헷 족속 곧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가 듣는 데서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기에 ‘에브론’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원했던 곳은 막벨라 굴이었습니다. 그 굴은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헷 족속 사람들에게 에브론이 가진 막벨라 굴을 자신에게 팔 수 있도록 중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냥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라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헷 족속 곧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가 듣는 데서”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이 사실을 굳이 기록하고 있을까요? 왜 에브론이 말한 장소가 ‘성문’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당시 성문은 단순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출입구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성문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그 도시의 중심이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소식을 나누는 사람들이 모이고,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문은 단순한 만남의 장소만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성문은 재판이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법원과 관공서와 등기소의 역할을 함께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거래는 아브라함과 에브론,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많은 증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법적 절차였습니다. 장로들이 그 자리에 앉았고, 백성들이 그곳에서 듣고 보았습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은 그 땅을 대충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은근히 차지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남의 호의에 기대어 임시로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합법적으로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땅을 사고자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흐릿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애매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만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정직하고 분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질서를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말로 절차를 가볍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은혜로 하면 된다”는 말로 책임을 회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지만, 사람들 앞에서 정당한 절차를 밟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었지만, 인간 사회의 질서도 존중했습니다.
본문의 성문은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브론이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가 듣는 데서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이 다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어느 누구도 이 거래를 부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땅은 정말 아브라함이 산 것이다. 막벨라 굴은 정말 아브라함의 소유가 되었다.” 이렇게 공적으로 확정되는 과정이 바로 성문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고대의 부동산 거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실제 소유하게 된 땅은 넓은 초원이 아니었습니다. 큰 도시도 아니었습니다. 화려한 성읍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얻은 땅은 무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묻기 위한 매장지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얻은 땅은 삶의 터전이 아니라 죽음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절망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 무덤은 약속의 첫 열매였습니다. 사라의 죽음은 끝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 죽음의 자리에서도 약속을 이루어가고 계셨습니다.
믿음은 바로 이것을 보는 것입니다. 내 눈에는 무덤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곳에서 약속의 씨앗을 심고 계십니다. 내 삶에는 끝처럼 보이는 사건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 끝에서 새로운 씨앗을 심고 계십니다. 사라가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울었습니다. 애통해했습니다. 그러나 그 애통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실제 역사 속에 첫 번째 소유지로 확정해 가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영적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믿음은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 앞에서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 평생을 함께 걸어온 아내를 잃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도 함께 했고,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도 함께 했고, 애굽의 위기 속에서도 함께 했으며, 오랜 불임의 고통 속에서도 함께 했고, 마침내 이삭을 가슴에 품는 기쁨도 함께 누렸던 아내입니다.
그 사라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라를 약속의 땅에 묻고자 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행동입니다. “하나님, 아직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저는 믿습니다. 이 땅을 우리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그래서 사라를 이 땅에 묻겠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둘째, 믿음은 사람들 앞에서도 정직하고 분명한 절차를 따르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에게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에게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본문을 그대로 보면, 에브론이 아주 관대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밭을 드리겠습니다. 그 속의 굴도 드리겠습니다. 내 동족 앞에서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십시오.” 겉으로 보면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대단한 선심을 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 고대 근동의 거래 관습을 생각하면, 이것은 단순히 무상증여를 의미한다기보다 일종의 정중한 흥정의 언어일 수 있습니다. “그냥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거래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다시 몸을 굽히고 말합니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품격을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아내를 잃은 사람입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상대방을 존중합니다. 몸을 굽히고, 예의를 갖춥니다. 억지를 부리지 않습니다. 감정으로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약속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사람들 앞에서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사람이었지만, 사회적 질서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라고 믿었지만, 남의 소유를 불법으로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당한 값을 치르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품격입니다. 믿음은 결코 무례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남의 것을 함부로 취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내 편이시다”라는 이유로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사람 앞에서도 정직합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은 교회의 말을 듣기 전에 교회의 삶을 봅니다. 성도들의 신앙고백을 듣기 전에 성도들의 태도를 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해도, 세상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면 복음의 향기가 사라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은혜로 삽니다”라고 말해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계산을 흐리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전쟁에서 승리한 경험도 있었습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두려워해서 화친조약을 맺자고 했던 사람입니다. 많은 종들과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힘으로 땅을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적당히 넘어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성문에서 모든 증인들 앞에서 정당한 값을 치르고자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 속에서 더 정직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불분명하게 살면 안 됩니다. 은혜를 말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 세상 법과 질서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조상이 성문에서 모든 사람이 듣는 가운데 정당한 절차를 밟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도전입니다. 교회가 세상 앞에서 신뢰를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말과 행동의 일치를 잃어버리면 복음의 문도 닫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당 안에서만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돈 문제에서도, 약속 문제에서도, 관계 문제에서도 정직하고 분명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증인들 앞에서 약속을 확정해 가시는 분이십니다.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가 다 들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은밀한 감정이나 개인적인 확신에만 머물지 않고, 역사 속에서 공적으로 확정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허공에 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실제 삶 속으로 내려옵니다. 땅의 문제 속으로 들어옵니다. 죽음의 문제 속으로 들어옵니다. 장례의 자리 속으로 들어옵니다. 법적 절차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에도 이런 성문의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공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선택이 증명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슬픔 속에서 무엇을 붙드는지, 손해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중요한 결정 앞에서 어떤 절차를 따르는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은 성문에서 믿음의 사람답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슬픔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약속을 붙들면서도 정직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책임 있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성문에서 모든 증인들 앞에 섰던 것처럼, 우리도 이 시대의 성문 앞에 서 있습니다. 가정이 우리의 성문입니다. 직장이 우리의 성문입니다. 교회가 우리의 성문입니다. 지역 사회가 우리의 성문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듣고, 우리의 행동을 보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다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정직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책임 있게 산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은 오늘의 자리에서도 바르게 선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 믿음으로 살아가십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이 교회 안에서만 고백되는 믿음이 아니라, 삶의 성문에서 증명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도 정직해야 합니다. 손해가 있어도 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슬픔이 있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편법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믿기에 조급하게 빼앗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기에 믿음으로 기다리며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주인이심을 밝히 드려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 14절과 15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마침내 에브론이 가격을 말합니다.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입니다.” 당시 은 사백 세겔이 어느 정도의 값이었는지 정확하게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하기는 어렵습니다. 1세겔이 대략 11.5g 정도의 무게인데, 은 400세겔은 약 4,600g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에브론이 요구한 금액은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었습니다. 굴 하나에 은 400세겔이나 받는 동네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전 세계를 다 뒤져도 굴 하나에 은 400세겔을 받는 곳은 없습니다. 40세겔을 달라고 해도 바가지라고 사람들이 펄펄 뛸 것입니다. 이런 굴은 4세겔만 줘도 됩니다. 에브론은 아브라함에게 여러 가지 호의를 베푸는 척하면서, 아내의 매장지를 얻기 위해 ‘굴’을 요구하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밭까지 떠넘기고는 이렇게 비싼 값을 요구한 것입니다.
본문 16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은 400세겔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너무 비싸다”라고 길게 다투지 않았습니다. 흥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에브론의 말을 따라 그대로 값을 치렀습니다. 특별히 본문은 아브라함이 단순히 은 400세겔을 주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자기 기준으로 대충 계산해서 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무게대로 은을 내놓은 것이 아닙니다. 당시 상인들이 거래할 때 사용하는 공식적인 기준과 무게에 따라 정확하게 은을 달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일은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헷 족속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성문에 모인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만약 에브론의 말을 듣고 공짜로 땅을 얻었다면, 나중에 그의 마음이 변해서 도로 가져가겠다고 해도 아무 말도 못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아브라함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도록 공개적으로 값을 지불했습니다. 혹시라도 훗날 “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거나, “정당한 거래가 아니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모든 절차를 분명하게 진행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거래에서는 더욱 정직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로 특혜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이라고 해서 공짜로 차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있는 기준에 따라 정확하게 값을 지불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말로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정직한 행동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아브라함,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고, 동시에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약속을 믿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세상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믿음은 세상 속에서 더 정직하게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믿음은 세상 속에서 더 신실하게 행동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은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사람답게 행동하는 능력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은 은밀한 곳에서도 정직해야 하지만, 공개적인 자리에서도 정직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만 신앙인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신앙인이어야 합니다. 예배당 안에서만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거래의 현장에서도 거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도할 때만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돈을 주고받을 때에도 믿음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본문 17절과 18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이 말씀을 그냥 읽으면 부동산 거래가 끝났다는 말처럼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돈을 냈고, 에브론이 땅을 넘겼고, 그래서 그 땅이 아브라함의 소유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본문은 단순히 거래가 끝났다는 말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원했던 것은 큰 땅이 아니었습니다. 넓은 밭을 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사라를 장사할 수 있는 막벨라 굴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브론은 굴만 따로 팔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밭과 그 밭에 속한 굴과 그 밭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까지 함께 넘깁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굴을 원했는데, 에브론은 밭 전체를 함께 넘긴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필요한 만큼만 요청했는데, 에브론은 그 주변에 딸린 것까지 다 포함해서 거래를 성사시킨 것입니다. 오늘 식으로 말하면,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덤터기를 씌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서 단순히 에브론의 계산 속만을 보게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더 깊은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에브론이 자기의 유익을 챙긴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필요 이상의 대가를 치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바로 그 일을 통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최초의 합법적인 소유지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지만, 실제로 아브라함의 손에 확정된 땅은 없었습니다. 그는 제단을 쌓을 수는 있었지만, 자기 이름으로 등기된 땅은 없었습니다. 그는 장막을 치고 살 수는 있었지만, 영구히 소유된 땅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라의 죽음 앞에서 아브라함은 마침내 가나안 땅에서 자기 소유지를 얻게 됩니다. 그것도 몰래 얻은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빼앗은 것도 아니고, 애매하게 받은 것도 아닙니다. 성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앞에서 법적 절차에 따라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공개적으로 확정된 소유지가 되었습니다.
본문은 그것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 왜 이렇게 자세히 기록합니다. 성경은 지금 거래 품목을 하나하나 나열하는 것입니다. “밭도 포함되었다. 굴도 포함되고, 나무도 포함되었다. 그 주변 경계 안에 있는 것까지 다 포함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증인들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장례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약속의 땅에 대한 첫 소유권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역사 속에서 아주 작지만 분명하게 현실이 되기 시작한 사건입니다.
19절에 보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사라가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샀습니다. 그리고 사라를 그 안에 장사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으로서 창세기 23장은 끝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20절은 다시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
앞의 18절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0절에서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라고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왜 같은 이야기를 두 번이나 거듭 확정해서 반복합니까? 성경은 헛된 반복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의미 없는 문장이 없습니다. 성경이 두 번 반복한다는 것은 이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단순히 아브라함이 아내의 무덤 하나를 마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한 사람의 믿음의 행위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땅 한 조각을 산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미래를 산 것입니다. 그는 사라를 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그 땅에 심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다 믿었습니다. 창세기 15장 13절 이하에 보면, 아직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라.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당장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이방 땅에 내려갑니다. 거기에서 객이 됩니다. 노예로 종살이를 합니다. 고난을 당합니다. 그렇게 400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이끌어 내시고,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믿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지만, 400년 동안 자기 후손 중에 단 한 명도 가나안에서 살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400년이 지난 뒤에야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400년이 지나서 자기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에 필요한 법적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을 믿고 먼 미래를 바라보면서 수백 년 후의 후손들을 위해서 돈을 안 받겠다는 사람들에게 돈까지 주어서 이것이 아브라함의 소유지라는 것을 확정시켜 놓았습니다. 나중에 400년이 지나서, 광야 40년을 지난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때, 바로 이 헤브론은 그 유명한 갈렙의 소유가 됩니다. 그리고 그 후손인 다윗이 바로 그 헤브론에서 왕이 됩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산 것은 그 순간만 보면 작은 일처럼 보입니다. 아내의 무덤 하나를 산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보면,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갈렙에게 이어집니다. 갈렙의 헤브론은 다윗의 왕국으로 이어집니다. 다윗의 왕국은 마침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 시대 안에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 생애 안에서 다 거두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다 누리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고 오늘 씨를 심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열매를 따먹지 못해도, 다음 세대가 먹을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들어가지 못할 미래를 위해 오늘 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너무 조급합니다. 내가 기도했으면 내가 응답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헌신했으면 내가 열매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수고했으면 내가 박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심었으면 내가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훨씬 더 크고 깊습니다. 성경의 믿음은 세대를 넘어갑니다. 성경의 믿음은 내 인생의 시간표보다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표를 더 신뢰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내 눈에 다 보이지 않아도 믿는 믿음, 내 손에 다 쥐어지지 않아도 순종하는 믿음, 내 시대에 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다음 세대를 위해 값을 지불하는 믿음,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으로 오늘을 사는 믿음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사는 모습은 믿음의 사람이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 속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은 공짜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사람은 중요한 것을 공짜로 얻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은 400세겔을 달아 주고 그 땅을 샀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을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말뿐인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값을 치르는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책임을 지는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공짜로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아무런 희생도 없이, 아무런 헌신도 없이, 아무런 책임도 없이 그저 편하게만 믿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교회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누구나 와야 합니다. 지친 사람도 오고, 상처 입은 사람도 오고, 연약한 사람도 와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는 공짜로 받지만, 은혜 받은 사람의 삶은 결코 값싼 삶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신앙도 편한 쪽으로만 선택하려고 합니다. 부담 없는 곳을 찾습니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찾습니다. 섬기지 않아도 되는 교회를 찾습니다. 헌신하지 않아도 되는 신앙을 찾습니다. 주일도 시간이 남으면 지키고, 다른 약속이 생기면 얼마든지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봉사도 내 형편이 허락하면 하고, 불편해지면 내려놓습니다. 헌신도 내 기분이 좋을 때만 하고, 마음이 상하면 멈춥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약속의 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신앙은 후손에게 남길 수 없습니다. 그런 신앙은 시험이 오면 흔들립니다. 그런 신앙은 세상의 작은 유혹에도 빼앗깁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흥정하는 신앙은 결국 세상에게 끌려갑니다. 주일과 세상일을 흥정하는 신앙은 결국 예배를 잃어버립니다. 헌신과 편안함을 흥정하는 신앙은 결국 사명을 잃어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값을 치러야 합니다. 예배가 중요하다면 예배 시간을 위해 구별해야 합니다. 믿음이 중요하다면 믿음을 위해 세상의 즐거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교회가 중요하다면 교회를 위해 땀 흘려 섬겨야 합니다. 자녀의 신앙이 중요하다면 자녀에게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산 막벨라 굴은 단지 사라를 묻은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신다. 나는 아직 이 땅을 다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을 은 400세겔이라는 값으로 땅 위에 새겼습니다. 그 믿음의 자리에 사라가 묻혔고, 훗날 아브라함도 묻혔고, 이삭과 리브가도 묻혔으며, 야곱과 레아도 묻혔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의 결단이 후손들의 신앙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오늘 지키는 예배가 우리 자녀들의 믿음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오늘 드리는 헌신이 다음 세대의 신앙의 터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오늘 감당하는 수고가 우리 가정과 교회가 서는 거룩한 땅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말이 아닙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믿음은 대가입니다. 믿음은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결단하십시다. 더 이상 값싼 신앙으로 살지 마십시다. 더 이상 편안 신앙만을 찾지 마십시다. 더 이상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흥정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이 귀하다면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리십시다. 예배가 정말 생명이라면 예배를 위해 시간을 드리십시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면 교회를 위해 몸을 드리십시다. 다음 세대가 참으로 소중하다면 그들에게 물려줄 믿음을 오늘 우리의 삶으로 세우십시다. 이 결단 위에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값을 지불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