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창세기 24:1-9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가장 깊은 믿음의 시험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는 분이심을 깊이 경험했습니다. 이어지는 창세기 23장에서는 90세에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을 품에 안으며 여성으로서의 웃음과 행복을 경험했던 사라가 그 후 37년을 더 살다가 12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인 창세기 24장이 나옵니다. 창세기 24장은 성경 전체에서도 매우 독특한 장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4장은 창세기에서 가장 긴 장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한 장 전체가 거의 이삭의 아내를 찾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한 단어도 의미 없이 기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면, 여기에는 반드시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24장은 언약의 계보가 다음 세대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한 사람의 배우자를 찾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본문의 말씀 앞에서 물어야 합니다.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 가정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 아브라함은 늙었지만 다음 세대를 준비했습니다.
본문 1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창세기 25장 20절을 보면, 이삭이 결혼할 때의 나이가 40살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나이는 100살 차이가 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140살입니다. 아브라함이 137살에 사라가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라가 죽고 혼자 살기 시작한 지 3년째 되는 해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기에서 우리말로 ‘나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날들이 흘렀다는 것을 우리말로는 ‘나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많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의 원형은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다”는 이야기를 원문에 있는 그대로 번역하면, “아브라함이 많은 날들 속으로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나이가 드는 것을 말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세월이 흘렀다.” “벌써 이렇게 나이가 들었다.” 그런데 이런 표현 속에는 어딘가 피동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이 “많은 날들 속으로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 주실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극심한 기근이 있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연약함도 있었습니다. 조카 롯과의 갈등도 있었고, 전쟁도 있었습니다. 아내 사라의 불임이라는 깊은 아픔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00세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수많은 날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냥 덧없이 흘러가 버린 인생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자세이어야 합니다. 매일 매순간을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믿음으로 붙잡고 순종하며, 인생의 시간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나이가 많아 늙었고.” 아브라함은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섰습니다. 그는 더 이상 젊은 시절의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의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이제 그는 늙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 웃고 울며 걸어온 동반자를 먼저 보내고, 홀로 남았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워오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라함의 노년을 초라하게 묘사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이 말은 아브라함의 인생이 편안하기만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기쁨의 날에도 들어갔고, 슬픔의 날에도 들어갔습니다. 기다림의 날에도 들어갔고, 시험의 날에도 들어갔습니다. 승리의 날에도 들어갔고, 실패의 날에도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날들 속에서 아브라함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실패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회복되었고, 그의 기다림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의미를 얻었으며, 그의 눈물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헛되지 않았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복된 인생은 아무 일도 없는 인생이 아닙니다. 복된 인생은 하나님 없이 편하게 산 인생이 아닙니다. 복된 인생은 수많은 날들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그 날들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인생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은 자신이 받은 복을 자기 혼자 누리며 인생을 마무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음 세대를 생각합니다. 이삭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자기에게서 끝나지 않고 이삭에게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자기 집의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을 부릅니다.
본문 2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이 종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가장 신뢰받는 종이었습니다.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오랜 세월을 아브라함과 함께 살아온 사람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하란을 지나고, 가나안 땅에서 장막 생활을 하고, 이삭이 태어나고, 사라가 죽고, 막벨라 굴을 사는 모든 과정을 보았을 가능성이 큰 사람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늙은 종이 50여년 전에 아브라함에 의해 상속자로 생각되기도 했던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 종에게 아주 특이한 행동을 요구합니다.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오늘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표현이지만, 고대 히브리 문화 속에서는 매우 엄중한 맹세의 행동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말로 ‘허벅지’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기본적으로 ‘넓적다리’, ‘사타구니’를 뜻합니다. 이것은 생명과 후손의 자리, 곧 남자의 생식과 연결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고대 근동에서 가장 강력하고 엄숙한 맹세를 할 때 취하는 자세로서 엄숙한 맹세인 만큼 불복종시 저주를 받게 되리라는 경고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약속을 너무 쉽게 합니다. 말은 쉽게 하지만, 지키지 못해도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도 빠져나갈 길부터 찾는 시대입니다. 말의 무게가 너무 가벼워졌습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약속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성경의 세계에서 맹세는 생명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브라함은 이토록 엄중한 맹세를 요구했을까요? 그 이유는, 이 일이 단순히 아들의 결혼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결혼은 한 가정의 혼사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 그 약속은 이삭을 통해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누구와 결혼하느냐는 단순히 개인의 취향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언약의 계승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일이 다 중요해 보이지만, 정말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선택이 다 의미 있지만, 어떤 선택은 한 사람의 인생만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믿음을 좌우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의 결혼은 그런 문제였습니다. 이삭은 단순히 늦게 얻은 귀한 아들이 아닙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을 품은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아내를 선택하는 일은 아브라함의 가문을 이어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일을 가볍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걸고 맹세하게 했습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결혼을 언약의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본문 3절과 4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아브라함은 늙은 종에게 이삭의 아내를 찾아오라고 일생일대의 가장 큰 맹세를 시키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렇게 부릅니다.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땅의 하나님이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별들을 붙드시고, 해와 달을 운행하시고,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제국의 흥망성쇠를 다스리시고, 민족의 장래를 붙드시고, 인류의 미래를 주관하시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단지 멀리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땅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하나님이십니다. 내 가정의 하나님이시고, 내 자녀의 하나님이십니다. 내 눈물의 하나님이시며, 내 일상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신음까지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머리로만 알지 않았습니다. 그는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기근을 만났고, 두려움도 겪었고, 실수도 했었고, 기다림도 겪었습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긴 순례였습니다. 그 순례의 끝에 아브라함이 얻은 결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이시며, 땅의 하나님이시다!”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내 삶의 가장 구체적인 자리까지 간섭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내 자녀의 결혼 문제에도 관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내 가정의 믿음의 계승에도 관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종에게 말합니다. “너는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라!”
그렇다면 그 맹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종에게 맡긴 일은 이삭의 아내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분명했습니다.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택하지 말라.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라. 거기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사람들을 인간적으로 미워해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민족주의적 우월감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근본이고, 언약의 방향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오래 살았습니다. 그 땅의 문화와 종교와 삶의 방식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땅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땅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필요에 의해 만든 신들 앞에서 욕망을 정당화하며 사는 문화였습니다. 그런데 우상을 섬기면 결국 인간도 무너집니다. 살아 계신 인격적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인간의 도덕도 흔들립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잃어버리면 결혼도 욕망의 도구가 되고, 가정도 자기 만족의 수단이 되어 버립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라!” 이 말은 단지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가나안 문화와 우상숭배에 섞이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이삭의 가정이 믿음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문제는 장소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과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치관에 지배당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문화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없는 문화에 우리의 영혼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서 장막을 치고 살았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약속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그는 가나안 사람들과 거래도 했고, 대화도 했고, 사회적 관계도 맺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핵심에서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기준이 분명했습니다. 그는 이삭의 아내를 아무나 선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의 가정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 가야 할 가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의 결혼을 언약의 기준으로 준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혼은 단순히 남녀 두 사람이 좋아서 함께 사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결혼을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 주실 때, 그 둘을 더 이상 둘로 보지 않으시고 한 몸으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단순한 동거가 아닙니다. 결혼은 인생의 결합입니다. 결혼은 몸의 결합이고, 가치관의 결합입니다. 결혼은 예배의 방향이 결합되는 일입니다. 결혼은 다음 세대의 영적 방향을 결정하는 일입니다.
누구와 한 몸이 되느냐에 따라 그 몸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몸이 될 수도 있고, 세상을 향한 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언약의 가정이 될 수도 있고, 믿음이 점점 희미해지는 가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의 결혼을 가볍게 보지 않았습니다. 늙은 종에게 자신의 사타구니에 손을 넣게 하고 생명을 걸고 맹세하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이삭의 결혼이 이삭 한 사람의 행복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시대는 결혼을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합니다. 조건이 맞으면 좋은 결혼이라고 생각합니다. 외모가 괜찮고, 직장이 괜찮고, 집안이 괜찮고, 경제력이 괜찮으면 됐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인격도 보아야 하고, 성품도 보아야 합니다. 책임감도 보아야 하고, 삶의 성실함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가? 이 사람과 함께 예배할 수 있는가? 이 사람과 함께 믿음의 가정을 세울 수 있는가? 이 사람과 한 몸이 되었을 때, 내 영혼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것인가?”
이 질문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여러분은 자녀의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브라함처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을 여러 조건들 중 하나로 보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가장 근본적인 기준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은 단순히 조건의 결합이 아니라, 방향의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단순히 생활의 동반자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동반자를 얻는 것입니다. 결혼은 단순히 집을 꾸리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한 몸을 이루는 일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하여 살아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분들에게는 이 말씀이 정죄의 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묶어 두시는 분이 아니라, 오늘의 자리에서 은혜를 시작하시는 분입니다. 바울도 믿지 않는 배우자와 헤어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더욱 따뜻하게 사랑하십시오. 말보다 삶으로 복음을 보여주십시오.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이시며, 땅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눈물도 보시고, 여러분의 오랜 기도도 기억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선택의 자리에 있는 성도라면, 그리고 자녀의 결혼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라면, 이 말씀을 결코 가볍게 듣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선택의 자리에 있을 때 믿음의 기준을 분명히 세웠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엄중한 교훈입니다.
아브라함이 종에게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라”고 한 것은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이삭의 가정을 세우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근본을 따라 가정을 세우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가까운 길보다 하나님의 바른 길을 택하라는 말입니다. 사실, 가나안 땅에는 딸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찾기도 쉬웠을 것입니다. 조건을 맞추기도 쉬웠을 것입니다. 말도 통하고, 생활도 가까웠을 것입니다. 반면에 하란은 멀고, 길은 위험합니다. 시간도 걸립니다. 결과도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택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는 프로그램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다음 세대가 줄어들어서만도 아닙니다. 더 깊은 위기는 가정에서 믿음의 기준이 무너지는데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보다 성공을 더 강하게 가르치는데 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실제 선택에서는 세상의 조건을 더 두려는데 있습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결혼과 직업과 재물과 자녀 문제에서는 하나님을 밀어내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인생의 마지막 중요한 순간에 믿음의 기준을 분명히 세웠습니다. “가나안의 딸이 아니라, 언약의 근본 안에서 아내를 택하라.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앞에서 맹세하라!”
이것이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영적 분별력입니다. 이것이 다음 세대를 세우는 부모의 책임입니다. 이것이 언약 백성의 거룩한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이 세상의 기준에 끌려가지 않게 하십시다. 우리의 자녀들이 조건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십시다. 아브라함이 65년의 가나안 순례 끝에 깨달은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지키시고, 자녀를 붙드시고, 우리의 결혼과 다음 세대를 거룩하게 인도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은 결혼을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5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아브라함이 자기 친족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라고 했더니, 종이 매우 현실적인 질문을 합니다. “만약 그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제가 이삭을 데리고 주인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이 종의 질문은 아주 상식적입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세일즈맨이 물건 하나를 팔러 가도 빈손으로 가지 않습니다. 샘플이나 카탈로그를 들고 갑니다. 사진을 보여줍니다. 요즘 같으면 영상을 보여주고, 후기까지 보여줍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종은 무엇을 가지고 갑니까? 실물인 이삭은 가나안 땅에 있습니다. 하란과 가나안은 대략 700km나 떨어져 있습니다. 그 옛날 교통수단도 변변치 않은 시대에 700km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생명을 걸고 가야 하는 먼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가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처음 보는 집안에 들어가서, 처음 보는 여자에게 말해야 합니다. “당신은 가나안 땅에 있는 이삭이라는 사람의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 나와 함께 지금 떠납시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그때 사진이 있었습니까? 이삭의 외모를 보여줄 수 있는 무슨 증거가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이삭이 어떤 사람인지, 키가 큰지 작은지, 성품이 어떤지,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입 하나만 가지고 가서 설득해야 합니다.
사람이 물건 하나를 사는 데도 보고 삽니다. 집을 하나 계약할 때도 등기부등본을 보고, 위치를 보고, 상태를 보고 계약합니다. 그런데 결혼은 한 인생을 걸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결혼은 한쪽이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이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이삭이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여자가 따라오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 가족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니 종의 질문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대답은 아주 단호합니다. 본문 6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아브라함이 왜 이렇게 단호합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곳에서 불러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아브라함이 떠나온 그 땅이 아니라, 지금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약속의 땅을 떠나는 일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불러내신 자리에서 다시 옛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중요한 원리를 배웁니다. 믿음은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옛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부르심의 길이 이삭에게 이어져야 합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머물러야 합니다. 옛 땅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영적 유혹이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걷다가 힘들면 옛 자리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예배의 길이 힘들면 세상의 편안함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순종의 길이 어렵게 느껴지면 타협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늦어지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내신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면 안 됩니다. 죄의 자리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옛 삶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막벨라 굴에 묻었습니다. 그것은 “나는 이 땅을 떠나지 않겠다”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삭의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다시 한 번 같은 믿음을 고백합니다.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이것은 약속을 붙드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앞서 가실 것을 믿었습니다.
본문 7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이 말씀은 오늘 본문의 절정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결론을 내립니다.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문장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종은 아직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길은 너무 멉니다. 어디서 누구를 만날지 모릅니다. 리브가라는 이름은 아직 본문에 등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보다 앞서 가실 것이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가 모든 것을 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앞서 가심을 믿고 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모든 답을 손에 쥐고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준비하고 계심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를 경험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 올라가면서도 숫양이 어디 있는지 몰랐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 숫양을 수풀에 걸어 두셨습니다. 그 믿음이 창세기 24장에서도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가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삭을 위해 리브가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종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길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 속에서도 섭리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가십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길에 하나님은 먼저 가 계십니다.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은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직 기도만 하고 있는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은 이미 움직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려움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균형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앞서 가신다”고 믿었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종을 보냅니다. 맹세시킵니다. 기준을 세웁니다. 방향을 알려줍니다. 매우 책임 있게 준비합니다. 이것이 성경적 믿음입니다. 믿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준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준 없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분명한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그러니까 만약 그 여자가 따라오려고 하지 않으면, 이 맹세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무리하게 일을 밀어붙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뜻을 강제로 꺾어서 데려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종에게 불가능한 책임을 지우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절대 양보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분별을 배웁니다. 신앙생활에는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방식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바뀌면 안 됩니다. 절차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향은 흔들리면 안 됩니다. 방법은 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포기하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여자가 오지 않으면 종의 책임을 면제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유연함입니다. 그러나 이삭을 그 땅으로 데리고 돌아가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원칙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너무 자주 양보해야 할 것과 양보하지 말아야 할 것을 거꾸로 생각합니다. 사소한 방식에는 목숨을 걸고, 정작 복음의 본질은 쉽게 양보합니다. 익숙한 전통은 절대 못 바꾼다고 하면서, 말씀의 기준은 시대가 바뀌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분별했습니다. 유연해야 할 것에서는 유연했습니다. 그러나 지켜야 할 것에서는 단호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부드럽지만 흐려지지 않는 믿음, 따뜻하지만 타협하지 않는 믿음, 현실을 이해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지 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본문 9절에서 종은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맹세합니다. 이제 그는 길을 떠날 것입니다. 먼 길입니다. 쉽지 않은 길입니다.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인의 말을 따라 순종의 길로 나아갑니다. 24장 전체를 보면, 이 종은 매우 신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뜻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주인의 명령을 마음에 새깁니다. 길을 가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그런데 이 종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이름을 남기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잇는 중요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리브가를 만나 이삭에게 데려오는 일을 통해 아브라함의 가정에, 더 나아가 구속사의 흐름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아시면 됩니다. 내가 맡은 자리에서 신실하게 순종하면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맡은 일을 신실하게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 다음 세대를 세우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의 세대는 저물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세대도 언젠가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붙든 복음은 다음 세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다음 세대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고백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리의 자녀와 손주들의 입술에서도 고백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위하여 믿음을 택하십시다. 가정을 위하여 예배를 택하십시다. 다음 세대를 위하여 말씀을 택하십시다. 교회를 위하여 복음을 택하십시다. 미래를 위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택하십시다. 이 결단과 믿음으로 오늘도 약속의 땅에 굳게 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축복하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 가는 복된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