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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깨달음과 무정설법

작성자智雲|작성시간26.06.11|조회수17 목록 댓글 0

□불교에서 깨달음은 무엇인가(363)

○깨달음과 무정설법(無情說法)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

"어찌 무정설법은 듣지 못하고, 유정설법만 들으려 하느냐?"

콧대 높은 소동파가 상충스님께 법을 청하니, 스님은 이처럼 꾸짖었다.

사람의 말(有情說法)만을 법이라 여기지 말고, 말없는 자연(無情說法)의 설법을 들으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던 소동파도 어느 날, 계곡 물소리를 듣다 문득 깨닫는다.

溪聲便是長廣舌, 山色豈非淸淨身

계곡의 소리는 곧 부처님의 긴 혀요, 산의 모습은 어찌 청정한 법신이 아니랴.

소동파는 드디어 자연의 모든 소리와 형상이 법을 설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말하지 않는 모든 존재가 곧 법을 설하고 있으며, 그것은 말보다 더 깊은 진리를 전해준다.

무정설법이란, 자연 만물의 있음 그대로의 모습이 곧 진리를 드러낸다는 가르침이다.

유정설법이 인위적이고 인지적인 차원이라면, 무정설법은 자연과 우주 그 자체가 드러내는 무심의 설법이다.

이는 선사들이 즐겨 말하던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의 이치이기도 하다.

아무도 가꾸지 않은 밀림 속 생명들은 스스로 피고 지며 생주이멸(生住異滅)하고, 성주괴공(成住壞空)하며 살아간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아도, 우주는 스스로 인연을 따라 굴러간다.

이 모습은 그대로 부처님의 움직임이며 설법이다.

잘되고 못된 것도 없고, 옳고 그름도 없다. 단지 인과(因果)가 연기(緣起)로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모든 것을 '좋고 나쁘다', '맞고 틀리다'로 가른다.

이것이 분별이며, 분별로 인해 고락(苦樂)이 생긴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도 어떤 이는 괴로워하고, 어떤 이는 아무렇지 않다.

보는 이의 업식(業識)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에 억울한 일은 없다. 단지 내가 내 업을 모르기 때문에 억울할 뿐이다.

물결이 일렁이는 건 바다의 본성이다.

밀물과 썰물이 오가는 건 그저 인과의 리듬일 뿐이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파도를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무정설법을 듣는다는 것은, 분별심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거기에 법이 있고, 거기에 부처가 있으며, 거기에 해탈이 있다.

그래도 쉽지 않다면?
그래서 부처님은 기도하라 하셨고, 참선하라 하셨고, 보시하라 하셨고, 정진하라 하셨다.

결국 마음의 평안이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분별을 내려놓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고락을 따라 춤추지 않고, 연기의 흐름 속에 고요히 머무는 자리에 법이 있고 깨달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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