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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알 수 없어요

작성자智雲|작성시간26.06.18|조회수16 목록 댓글 0

한용운스님의 알 수 없어요.는 선(禪)의 진리인 ‘불이(不二) 법문’의 시적 표현이다

한용운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불이(不二)’란 선과 악, 삶과 죽음, 현상과 본질, 나와 타자 등 세상의 모든 대립하는 것들이 있다.
외면적으로는 둘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둘이 아니요 하나라는 깨달음이다.

만해 한용운은 삼라만상의 현상과 우주의 근원적 진리가 불이(不二)의 관계로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가 어떻게 선(禪)의 불이 법문을 구현하고 있는지 세 가지 차원에서 분석할 수 있다.

​현상(事)과 본질(理)의 불이 (이사무애, 理事無礙)

​선가(禪家)에서는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물질)과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마음)를 분리해서 보지 않는다.

시인은 자연의 유한한 현상들 속에서 곧바로 무한한 ‘존재를 직관한다.

​오동잎이 떨어지는 현상은 곧 ‘님의 발자취이다.

​푸른 하늘이 열리는 현상은 번뇌의 구름이 걷히고 본성품이 드러나는 시적 표현이다.

돌뿌리를 울리고 흐르는 시냇물은​ 모든것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붓다의 지혜이다.

오동잎과 하늘, 시냇물은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이고 님은 우주의 본질이자 진여(眞如)이다.

시인은 이 둘을 따로 떼어놓지 않고, 현상이 곧 본질이요 본질이 곧 현상(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불이선不二禪의 시어詩語를 던진다.

알 수 없음(不知)’과 ‘앎(知)’의 불이 不二

알 수 없어요

​선종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불이 법문 중 하나가 바로 달마대사와 양무제의 대화에 나온다.

확 트여 성스러울 것도 없으니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즉 불식不識, 알지 못함이다.

​인간의 얄팍한 지식과 언어로 "이것은 신이다", "이것은 부처다"라고 규정하는 순간, 진짜 진리로부터 멀어진다.

시인이 매 연마다 "누구의 ~입니까"라고 묻고 "알 수 없어요.단지 모를뿐이라고 답하는 것은, 대상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신비로 표현한다

즉, ‘알 수 없음’의 극치에서 오히려 진리를 온몸으로 ‘알게 되는’ 불이의 경지이다.

재(灰)와 기름(油), 번뇌와 보리의 불이

​이 시가 ‘불이 법문’의 완성이 되는 결정적인 자리는 마지막 구절의 거대한 역설이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재는 ​모든 물질과 감정이 다 타버린 소멸, 허무, 죽음의 상태이다.
​기름은 다시 불을 지필 수 있는 에너지.보리심의 상태이다.

​세속의 논리로는 재와 기름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대립물이다.

하지만 선(禪)의 자리에서는 ‘타고 남은 재.번뇌가 있어야만 비로소 ‘새로운 기름이 생겨난다.

번뇌를 다 태워버린 그 자리가 곧 깨달음의 자리가 된다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의
불이법문을 시적으로 완벽하게 표현한것이다.

​알 수 없어요는 단순히 자연을 예찬하거나 님을 그리워하는 시가 아니다.
​삼라만상이라는 거대한 스크린에 펼쳐진 현상들을 통해 세계와 나는 둘이 아니다.

언어를 끊어버린 ‘알 수 없는 자리’에서 비로소 만물과 내가 하나로 통한다.는 사실을 시로 읊은, 만해 선사의 깊고 푸른 선(禪)의 세계이다.
-석현장 스님-

사진은 생전의 만해선사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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