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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허수아비

작성자달섬|작성시간26.06.06|조회수32 목록 댓글 2

허수아비

 

김예태

 

산 첩첩 물 골골 충청도 두메에서 불리던 나의 별명은 서울아이였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4년여에 걸친 시골 생활은 날마다 잔칫날이었다. 시골살이 웬만한 체험에 빠진 적이 없고, 다양한 시골살이에 끼어드느라 밥 먹을 새가 없었다. 먹다가 달려 나갔고 먹으려다가 숟가락을 놓았다. 할머니는 주먹밥을 쥐어줄 망정 밖으로 돌아치는 나를 막지 않으셨다.

이런 흥분은 산골로 이사하던 첫날부터 시작되었다. 신작로를 달리던 트럭이 다리를 지나 우회전을 할 때, 오른쪽으로 펼쳐진 툭 터진 자갈밭. 자갈밭 가운데로 얕은 냇물이 흐르고 건너편 뚝방에는 미루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트럭이 도착하자 자갈밭에 흩어졌던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와 이삿짐을 하나씩 받아주었다. 지세에 지고 머리에 이고 내를 건너, 마을로 가는 그들은 모두 흰옷을 입었다. 앞에 가는 사람을 따라 냇물 건너, 반대편 자갈밭 지나 밭두렁, 논두 다 지나 마을 길로 들어설 때까지 뒤를 따르는 사람이 모두 흰옷을 입고 있어서, 마치 하얀 줄(線)이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나는 이 시골의 첫인상을 평생토록 떠올리며 살았다. 흰개미의 행렬 같은 이삿날의 정경, 그 이후에 체험하는 시골 생활 모두를 세상에서 나만 만날 수 없는 아름다운 선물로 받아들였다. 누군가 내 가슴에 특별한 문신을 새겨놓았다는 충만감에 사로잡혀 살았던 것 같다.

나는 마을에서 자갈밭으로 이어지는 등하굣길을 유난히 좋아하여 날마다 그곳에서 놀았다. 게다가 동학년 친구가 다섯이나 되었으므로 우린 어느 하루도 쓸쓸한 적이 없었다. 줍고 깨고 다듬은 공깃돌을 미루나무 밑에 쏟아놓고 한 줌씩 나눌 때는 즐겁기보다 흐믓하였다. 그 흐믓함은 묵직해서 가볍게 나를 떠나지 않았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마을. 신선들이 살았다는 선(仙)골이 얼마나 작은 마을이었으면 뒷산 너머 반대편 신작로를 사용하는 마을에서도 같은 지명을 썼다. 넘어선(仙)골!.

농토가 많지 않은 마을에도 여름이 깊어지고 알곡이 들기 시작하면 허수아비를 세웠다. 허수아비의 십자가 골격에 저머더 헐렁한 넝마를 입고 논바닥에서 살았다. 넓은 논마지기에는 허수아비의 식구들이 많아 여럿이 함께 춤을 추곤 했는데 그럴 때면 우리의 흥도 대단했다. 무논이 튼실치 못해 혹여 춤추던 허수아비가 넘어질세라 논둑에 기둥을 박고 이리저리 새끼줄로 엮어주는 것은 허수아비네 문중의 풍습이다. 새끼줄 틈새에 깃발을 꽂고, 짤랑거리는 깡통까지 매달아 주면 방심하던 새 떼는 번번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누구든 먼저 달려간 아이가 허수아비의 줄을 당기면 뒤따르던 아이들도 서로서로 차례를 기다려 줄을 당기고는 하늘의 새들과 더불어 깔깔거리며 숨바꼭질을 했다. 그래서 들판은 날마다 운동회날, 바람 많은 날이면 논바닥 가운데서 더풀 더풀 더풀춤을 추는 허수아비들과 나부끼는 깃발과 따갈따갈 신명 나는 깡통으로 초가을 들판엔 누렇게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풀이 무성해지는 여름이면 학교에서 퇴비를 가져오라는 숙제를 냈다. 삽작(사립문의 충청방언)을 나서서 골목을 마주한 싸리문을 열고 “아저씨” 하고 부르면 아저씨는 먼저 알아듣는다. “낫은 위험해서 안 돼. 아저씨가 수한이 것하고 같이 학교로 져다 줄게”. 나는 마다하고 그예 낫을 얻어 앞산을 오른다. 아니나 다를까. 첫 낫질에 스윽 애기지의 살점이 달아난다. 그래도 친구가 가져온 된장을 바르고 옷고름으로 묶어주면 돌아다닐 만했다. 친구네 밭에서 이삭을 줍는다고 이 고랑 저 고랑을 뛰어다니는 나를 바라보던 친구의 눈빛과, 기막혀하던 웃음을 떠올리면 참으로 어이없는 날을 살았다는 생각도 든다.

친구와 언니들의 바구니는 앞산을 오르는 동안 채워졌지만, 내 바구니는 앞산을 내려오는 길에 친구와 언니들에 의해서 진귀한 나물로 넘쳐났다. 어찌 나물까지 이리도 잘 아느냐고 칭찬하시던 할머니도 안 계시고, 그 진귀한 나물을 넘겨주던 언니들이며 친구도 서나서나 떠나고 있으니 이젠 나물 밥상 한 상 받으면 그리움으로 마음만 저리겠다.

언제부턴가 저수지에 드럼통 두 개가 떠 있었다. 누가 갖다 놓았는지 알기도 전에 하나는 계집아이들이 갖고 놀고, 다른 하나는 사내아이들이 갖고 놀았다. 짓궂은 사내아이들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외쳤지만 소리는 하늘로만 올라갔다. 텅~. 두 개의 드럼통이 충돌하는 순간 나는 왼손을 감싸고 버둥거리면서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동네 어른들은 으깨진 손가락에 마른 지칭개꽃을 비벼 응급조치를 해 주셨고, 아버지께서 데려간 병원에서는 다시 잘 자라도록 손톱을 빼주었다. 안에서 밖에서 두 개의 손톱이 계속 올리오던 손가락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오기까지는 40년 정도가 걸렸으니 그동안 아버지께서 내 왼손을 들여다보신 횟수는 얼마나 될까. 10%쯤 왼쪽으로 돌아간 내 왼손의 중지는 지난날의 행복을 보증하는 증표로 아직도 굳건하다.

이따금 서울에서 내려오시는 엄마조차 반길 새가 없었던 그때의 분망함이라니. 많이 잊었는데도 오늘날까지 회억에 잠겨서 사는 날이 많을 만큼, 그리운 선(仙)골도 행정법상으로 고향이라고 말할 수 없어서 나는 서운하다. 그곳에서 나는 언제나 외부인이다. 참이 되지 못하는 허수아비. 어쩌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성장기가 허수아비일 수밖에 없어서 내가 그곳을 더욱 그리워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홉 번이나 퇴고를 했다. 고향으로 그리고 싶어 아홉 번이나 바꿔 써도 진객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허수아비’로 남아야 하는 나를 남겨두고 새벽에 마당으로 나갔다. 묵은 씨앗이 눈을 뜨는지, 비 온 뒤 곳곳에서 올라오는 새싹들로 뜰은 어수선했다. 새싹들을 가려내어 뽑다가 ‘아!’하는 탄식으로 이마를 쳤다. 고운 꽃임에도 때와 장소가 잘못되어 뽑혀 나가는 저 싹들처럼, 그리움이 끓어 넘쳐도 고향이라고 부를 수 없는 땅이 있구나. 결국 나의 허수아비는 내 안에 살고 있으면서 스스로 안이 되지 못했던 나에게서도 쫓겨날 뻔했구나.

화폭의 그림인지 동영상의 장면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움으로 덧칠되면서 한평생 행복하였으니 어쩌면 나는 평생을 천국에서 살아온 사람. 이만하면 족하지 않은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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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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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클라라 | 작성시간 26.06.06 어릴적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진해지니 희한하지요.
    선(仙)골은 선생님 마음의 고향이군요.
  • 작성자달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07 그곳에서 만난 선생님들까지 순수의 절정입니다. 더 써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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