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3년 인조반정 당시 광해군을 찾기 위해 횃불을 들고 창덕궁을 뒤지던 반정군의 실화로 화재가 발생하여 편전이었던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들이 소실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창덕궁을 1607년 선조의 명으로 중건을 시작하여 광해군 5년에 완공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이 반정군에게 화를 당하면서 창덕궁은 광해군과 운명을 함께했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일컬어지는 창경궁은 당쟁의 와중에서 많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희빈 장씨가 거처하던 곳이 창경궁 취선당이었으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숨진 곳도 창경궁 선인문 안 마당이었다.
- 출처 및 참고 : 경향신문 04년 2월 3일 -
창덕궁과 창경궁은 본래 정궁(正宮)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건립되었다. 왕이 국사를 보는 국가의 상징적 궁궐이 정궁인데 반해 이궁은 왕실이 거처하는 공간이었다.
조선의 궁궐은 일제강점기와 근대화의 과정에서 훼손이 심하였다. 일제는 조선인의 정신적 뿌리인 왕실의 위상을 실추시키고 그 정신을 끊기 위해 궁궐의 모습을 심각하게 왜곡하였다. 1917년 창경궁의 화재로 대조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들이 소실되자 복구라는 미명 아래 경복궁의 교태전 등 많은 전각을 헐어 물자를 조달하였다.
또한 창덕궁의 전통적 원형을 훼손시키며 인정전을 서양식으로 장식하고 현대식 건축물을 세웠다.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하여 궁궐로서의 원형을 훼손하고 그 명칭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근대화 시기에는 경제논리에 몰려 남아있던 상당수의 궁들이 흔적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1980년대 복원사업의 결과 조금씩 제 모습을 찾고 있다.
복원은 원형을 회복하는 일이다. 특히 왕실의 생활공간으로 지어진 동궐은 자연지형에 따라 전각이 조성되어 있어 궁궐 안 전각의 정확한 규모, 위치, 구조 등을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동궐 복원에 사용된 주요자료가 ‘동궐도형(東闕圖形)’과 ‘동궐도(東闕圖)’이다. 고려대에 소장되어 있는 동궐도가 동궐의 전경을 그린 그림인 데 비해 규장각과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동궐도형은 평면도이다. 가로 세로로 붉은 칸을 그린 방안지(方眼紙·모눈종이)에 각 전각의 규모를 실측하여 배치하고 이것을 한장으로 붙여 세로 6m, 가로 3.5m로 제작한 것이다.
순조 때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 내 전각의 위치와 모습을 알게 하지만, 그림의 특성상 건축물의 정확한 위치와 크기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동궐도형은 1900년대 초 대한제국기에 제작된 것.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린 창덕궁과 창경궁의 정확한 배치와 규모 등을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여기에는 실측을 통해 건물 내의 세부구조를 규모와 용도에 따라 구분하고 명칭을 밝혀 놓았다. 또한 인정전 기둥의 길이, 방의 크기, 성벽에 조성된 문간의 거리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동궐의 복원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조선시대 왕은 어떠한 존재였고,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까? 불과 100년 전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모습은 선명하지 못하다. 서울 안에 경복궁이며 종묘와 같은 왕실의 유적이 남아 있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 채 휴식공간쯤으로 여겨진다.
한동안 세인의 관심을 받던 청계천 복원사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복원사업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서민들의 고충과 소요비용에 따른 경제적 문제가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전통문화의 보존과 유적의 복원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바라볼 수 있는 거시적 안목이 필요하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창덕궁을 1607년 선조의 명으로 중건을 시작하여 광해군 5년에 완공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이 반정군에게 화를 당하면서 창덕궁은 광해군과 운명을 함께했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일컬어지는 창경궁은 당쟁의 와중에서 많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희빈 장씨가 거처하던 곳이 창경궁 취선당이었으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숨진 곳도 창경궁 선인문 안 마당이었다.
- 출처 및 참고 : 경향신문 04년 2월 3일 -
창덕궁과 창경궁은 본래 정궁(正宮)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건립되었다. 왕이 국사를 보는 국가의 상징적 궁궐이 정궁인데 반해 이궁은 왕실이 거처하는 공간이었다.
조선의 궁궐은 일제강점기와 근대화의 과정에서 훼손이 심하였다. 일제는 조선인의 정신적 뿌리인 왕실의 위상을 실추시키고 그 정신을 끊기 위해 궁궐의 모습을 심각하게 왜곡하였다. 1917년 창경궁의 화재로 대조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들이 소실되자 복구라는 미명 아래 경복궁의 교태전 등 많은 전각을 헐어 물자를 조달하였다.
또한 창덕궁의 전통적 원형을 훼손시키며 인정전을 서양식으로 장식하고 현대식 건축물을 세웠다.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하여 궁궐로서의 원형을 훼손하고 그 명칭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근대화 시기에는 경제논리에 몰려 남아있던 상당수의 궁들이 흔적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1980년대 복원사업의 결과 조금씩 제 모습을 찾고 있다.
복원은 원형을 회복하는 일이다. 특히 왕실의 생활공간으로 지어진 동궐은 자연지형에 따라 전각이 조성되어 있어 궁궐 안 전각의 정확한 규모, 위치, 구조 등을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동궐 복원에 사용된 주요자료가 ‘동궐도형(東闕圖形)’과 ‘동궐도(東闕圖)’이다. 고려대에 소장되어 있는 동궐도가 동궐의 전경을 그린 그림인 데 비해 규장각과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동궐도형은 평면도이다. 가로 세로로 붉은 칸을 그린 방안지(方眼紙·모눈종이)에 각 전각의 규모를 실측하여 배치하고 이것을 한장으로 붙여 세로 6m, 가로 3.5m로 제작한 것이다.
순조 때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 내 전각의 위치와 모습을 알게 하지만, 그림의 특성상 건축물의 정확한 위치와 크기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동궐도형은 1900년대 초 대한제국기에 제작된 것.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린 창덕궁과 창경궁의 정확한 배치와 규모 등을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여기에는 실측을 통해 건물 내의 세부구조를 규모와 용도에 따라 구분하고 명칭을 밝혀 놓았다. 또한 인정전 기둥의 길이, 방의 크기, 성벽에 조성된 문간의 거리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동궐의 복원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조선시대 왕은 어떠한 존재였고,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까? 불과 100년 전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모습은 선명하지 못하다. 서울 안에 경복궁이며 종묘와 같은 왕실의 유적이 남아 있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 채 휴식공간쯤으로 여겨진다.
한동안 세인의 관심을 받던 청계천 복원사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복원사업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서민들의 고충과 소요비용에 따른 경제적 문제가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전통문화의 보존과 유적의 복원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바라볼 수 있는 거시적 안목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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