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辰 새해에 내리는 瑞雪을 찍느라고(그것도 스미트폰)
숟가락 제처 놓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올해는 풍년이 들라나봅니다.
유회당 할아버지께서는일찍 부모님을 여위어서
혼정신성(昏定晨省) 즉 저녁엔 잠자리로 보살피고 아침이면 문안드리는 일을
다하지 못해 이곳 무수동으로 두 분을 이장하고서
이 유회당을 짓기 시작했답니다.
이 곳 무수동은 유회당의 백부가 사시던 곳인데
백부 대간공(大諫公) 기 댁에 드나들다가 이곳에 부모님을 이장했던 것이다.
묘소에 서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종내에는 돌샘에 닦으며 몸을 추스리네
(松楸永寄孤窮漏 泉石終收漫浪身)라는 범성대의 시에서 빌어서
收漫軒이라하여 雅號와 시묘소를 일컬었고
丙舍(현 齋室)를 寄窮齋라고 했답니다.
백부 大諫公 기께서는1665년 헌종때 과거급제하였는데
과거에 오른지 30년 동안에 조정벼슬살이는 2年餘 縣領은 4년 정도였답니다.
당쟁이 심한 때여서 멀리 떠나 무수동에 은둔생활을 하시며
아호도 '무수동에 사는 근심 없는 늙으니'라는 뜻으로무수옹 이라했답니다.
녹봉으로 봉양해야할 부모가 없는 유회당에게
백부 대간공은 유회당을 과거에 응시토록 권유했었답니다.
녹봉으로 봉양해야 할 부모가 없고 선조의 7대 손인 황산 처가에서
무수옹은 유유자적한 조카 이진에게
유회당을 과거에 응시토록 권유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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