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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골 ♣ 정보방

파주 지역 마을 이름의 유래

작성자朴 玉姬|작성시간08.04.17|조회수732 목록 댓글 2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 금촌

 

 금촌(金村)이라는 지명에는 두 가지 유래가 전해진다. 우선 1910년대 경의선 철도가 부설 될 당시

 새말에 30~40여 호의 가구가 모여 살고 있었는데, 일본인이 역 이름을 정하려고 새말을 가리키며

 무슨 마을이냐고 묻자 한 촌로가 말하길 '새말'이라 대답했다고 한다. 일본인이 이것을 '쇠말'로 잘

 못 알아들어 쇠(金) 마을(村), 즉 '금촌'으로 한자 표기했다 한다.

 또 다른 유래는 경의선이 가설 되면서 새로 조성 된 마을이라 하여 새말, 신촌이라 했는데 새말이

 세말,쇠말 등으로 변하면서 이것을 그대로 한자화하여 금촌이 되었다는 것이다.

 두 유래를 종합할 때 금촌은 경의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새로운 마을이 조성된 데서 유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2. 검산동(檢山洞)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의 부친 신장(申檣)의 묘소를 찾기 위해 월롱산 남맥의

오장봉 일대 산을 모두 검색한 후 묘소를 발견했다 하여 유래되었다 한다.

 

*찬우물* 냉정동(冷井洞): 검산 3리. 월롱산 자락 아래에 우물이 있는데 이가 시릴 정도

 로 차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가뭄에도 물이 줄지 않았다고 한다.

 

*조음발. 조음발이. 조음발동(助音鉢洞):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심숙주의 부친 신장

 묘소를 찾아 나섰을 때 승려의 시주 밥그릇 소리에 도움을 받아 묘소를 찾았다고 전한다.

 

3. 금능동(金陵洞)

 

조선시대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으로 상선이 오르내릴 때 이 마을이 금화로

 

둘러싸였다 하여 금성리(金城里)로 불렸으나 1914년부터는 금능리라 했다.

숙종 때 이곳에 능 자리를 잡은 후 금능리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1731년 인

조의 능인 장릉이 갈현리로 오면서 그곳의 교하군 관아를 이곳으로 이전하고

당초의 금(金)자와 릉(陵)자를 따서 금능리로 개칭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대창골, 대챙이, 대창이, 대창동(大倉洞) : 금능2리. 곡릉천이 이마을 앞으로

흘러 금성천으로 흘러들며 상선이 드나든 지역으로 곡식 및 상품을 보관하던 큰

창고가 있었다 한다.

 

 서원말, 서원동(書院洞) : 금능1리. 조선시대 인조 때 윤선거 선생이 세운 신곡

 서원(新谷書院)이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향교말, 향교동(鄕校洞) : 금능1리. 옛 교하현 관아 소재지이며 조선시대 관학

 교육기관인 교하향교가 있어 붙여졌다.

 

4. 법흥리(法興里)

 

본래 교하군 현내면 지역으로 큰 절이 있어 법회를 자주 열고 불법을 흥왕하게

 했으므로 붙은 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현내면 법흥리 전부와 성동

 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법흥리라 하였다.

 

5. 법원읍 동문리

 

자운서원이 위치한 법원읍 동문리의 마을 이름 몇 가지만 올립니다.

 

서원말, 서원동: 1리에 있던 마을. 자운서원 아래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원래는 율곡 교

                       원연수원 자리에 있었는데 1969년 자운서원을 복원할 때 못말 근처로

                       이주하여 정착하고 이를 그대로 서원말이라고 부른다.

 

꽃밭굴: 율곡의 묘지 뒤에 있는 골짜기. 진달래꽃이 많았다.

 

댕톳고개. 서원말고개. 대경텃고개: 서원말에서 법원리의 대경터로 넘어가는 고개.

 

불기동(佛基洞). 문평리(文坪里). 북덕. 적지리: 1리에 있는 마을. 옛날 이곳에 불당이

                   있던 곳이라 하여 佛基라고 하며, 땅빛이 붉어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문평리의 옛이름이 적지리일 것으로 추정한다.

 

6. 파평면 율곡리

 

화석정이 있는 파평면 율곡리의 마을지명을 살펴보기로 한다.

 본래 파평면 지역으로 밤나무가 많았으므로 붙은 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신곡리 전부와 신사리 일부, 칠정면의 이천리 일부, 신속면 임진리 일부 지역을 병합

 하여 율곡리라 하였다. 밤실. 밤실골. 방굴. 밤골이라고도 한다.

 

 

다음은 부근의 마을명이다.

 

*뒷굴: 화석정 서쪽 뒤에 있는 마을

 

*화석동: 3리에 있는 마을. 응달말과 양지말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 뒷산 중턱 임진

 강이 바라다 보이는 암벽 위에 화석정이 있다.

 

갓골: 화석정 남서쪽에 있는 산. 감투처럼 생겨 붙은 이름이다.

 

달미우물. 옻우물: 화석정 서쪽 용구산의 남쪽에 있는 우물. 옻 오른 데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성줏골: 화석정 동쪽에 있는 골짜기

 

임진 고개. 임진현: 화석정에서 문산읍, 임진리로 넘어가는 고개

 

7. 탄현면 금승리 황희묘 주변마을

 

***금승리(金蠅里)

 

 

*비가동(碑街洞), 비석거리: 이 마을 어귀 도로변 장수산하에 방촌선생의 손자 장계 부원군

 황정록의 순결비각이 세워진 이후 이름지은 마을.

 

*어봉골(御峯洞): 방촌 황희정승이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예장으로 모실 때 문종께서는

 군신지의에 정례로 직접 이곳에 내려와 조문한 자리에서 묘 앞에 산봉을 가

 리켜 정표로 어봉으로 부르도록 중신과 유림들에게 하명하여 이름한 산하 이름.

 

 

 

****문지리(文智里)

 

*진골(珍谷洞): 이 마을은 어봉동 바로 건너 있어 문종이 방촌선생 예장 당시 文. 德, 智를 넓힐

 것을 간곡한 교시에 힘입어 문과지를 보배같이 여겨 실천하고자 하여 이름한 마을.

 

8. 광탄면  영장리(靈場里)

 

 

이 지역 보광사 주위 일대에 거쳐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가 이끌었던 승병

 수백 명이 목숨을 잃어 영혼들이 원한에 사무쳐 헤매고 있는 곳이라 하여 유

 래되었으며 그후 영조 대왕의 사친인 숙빈 최씨가 이곳에 안장과 동시 이 절

 (보광사)에 봉안 후 고령산으로 호칭했음.

 

 

능말:  이 마을 뒤골짜기 영조대왕 사친 숙빈최씨 묘 소령원과, 진종대왕 사친

 정빈이씨 묘, 수길원 또한 七宮을 모신 지역 아래에 있어 이름한 곳

 

 송정말: 이 마을은 기산리와 대고령에서 흐르는 개울물이 합류되어 지역 달밤

 마을 주위로 흐르는 냇물이 아름답고 환하게 거울 같이 비친다 하여 이름한 곳.

 

 

보광골: 광활하고 아름다운 경관으로 이 지역 절은 신라 진성여왕 8년에 도선

 국사가 창건 당시 전국 6대 사찰로서 국난 중 어려운 역경 속에 이어온 유명한

 사찰 보광사 아래에 있어 이름한 곳 

 

9. 문산읍 선유리(仙:游里)

 

이 마을에는 배내와 서작개울이 합쳐져 흐르는 문산포구가 있어

예전에는 마을 앞 까지 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마을 건너편에 흐르는 옥돌내와 장포에는 철따라 날아오는 철새와 갈매기 떼가

주변의 풍경과 마치 그림처럼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에 반한 신선이 산봉우리마다 내려와

놀고 갔다는 데서 유래

 

10. 교하면에 있는 마을 이름

 

다율리(多栗里)

 

1914년 행정지역 통폐합의 일원으로 실시된 지명 통일화의 산물이다.

당초 다율리는 한배미, 한뵈미, 한바미 불리우던 동네가 주를 이루던 마을이었습니다.

그 중 한바미를 한밤이로 인식하여 "밤이 많은 곳(마을)"이라고 오인하여 이를 한자로 옮기어 많을 다(多)자와 밤 율(栗)자를 넣어 현재의 <多栗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배미(한뵈미, 한바미)는 원래  <배미>가 주어이며 <한>은 수식어의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배미>는 논의 단위를 뜻하는 명사이며 국어 사전에는 "(논)두렁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구획"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배미>를 풀어 보면 "바깥의 무엇과 섞임을 막으려고 돋아 올린 것(두렁)의 안쪽"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리고 <한>은 우리 고유의 말인 "큰", "넓은", "많은", "밝은", "환한", "훤한" 등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한배미>"큰(많은) 무엇(물)을 막으려고 쌓은 두렁(둑)의 안쪽의 마을"이라는 뜻의 말의 줄임 말입니다

즉, "한배미와 다락골 사이에 흐르는 개울의 넘침을 막으려고 쌓은 둑의 안쪽의 큰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다락골>

파주시의 지명유래에 보면 "옛날에 동네 뒤에 선비들이 모여 공부를 하던 누각이 있어서(樓洞) <다락골>이라고 불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락골은 주위 다른 동네보다 지형이 좀 높은 곳에 위치합니다.

그래서 옛 날(얼마전, 지금도)에는 모련대에서 다락골로 가는 것을 올라간다고 하고 다락골에서 모련대(연다산리)를 가면 내려간다고 하였습니다.

우선은 왜 <다락골>인가 하는 의문은 풀릴 것입니다. 즉, "<다락>과 같이 높이 올라붙은 곳"이 다락골입니다.

그래서 <다락>은  "돋아 올라붙은 것(곳)" 의 줄임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락골>"들판 끝자락에 돋아 올라붙은 곳"이 줄어서 생긴 말입니다

선비들이 공부하던 누각이 있어서 "樓洞" 즉 다락골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송촌리<松村里>

송촌리도  1914년에 확정된 지명입니다.

송촌리는 옛날에 "소라지"라는 마을이 있었으며 이 곳을 중심으로 주변 마을을 합하여 송촌리가 된 것입니다. 즉 <松村里> "소라지"를 한자화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소라지"를 "솔아지"라고도 부르니 "솔"에서 소나무(松)이 나왔을 것입니다.

파주시 지명유래에는 [강가에 물 웅덩이가 많아서 "沼羅地"라고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물 웅덩이가 많으면 많다는 뜻의 "多"자가 들어가 "沼多地"가 되고 왜 꿰매다라는 뜻의 "羅"자가 들어간<沼羅地>가 되었을까요?  

그래서 <소라지>는 위의 뜻들이 아니고 그 곳의 지형 생김새를 나타내는 말일 것이라고 추측이 됩니다. 즉, <소라지>는 그 곳의 지형인 "세 물[한강, 임진강, 교하강(곡릉천)]의 가장자리에 솟아 오른 데(곳)"가 줄어서 생긴 말입니다  이 말이 줄여서"솟아 오른 데"로 되고 그 후에 "솟아 오른(올라)"이 줄어 "소라"가 되었고, "데(곳)"이 변하여 "디"(어데, 어디)가 되고 다시 "디"가 지금의 구개음화 현상으로 "지"가 되어 <소라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연다산리>


연다산리는 .당초 "연다매(메)"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일제시대에 전국지명표기통일화 정책으로 마을 이름을 한자화하면서 정착된 이름입니다.

"연다매(메)"를 <연기가 많은 산>으로 오인하여 연기 煙자에 많을 多자 그리고 뫼 山자로 한역을 하였으나, 그런 것이 아니고 "연다매(메)"는 순 우리말의 줄인 말로서" <어느 곳보다 또는 어느 곳의 안에서 올라 돋은 곳(메)>라는 뜻입니다.

<메>는 우리 말 중 "어느 메" "어디 메" 또는 산을 뜻하는 "뫼"에서 나온 말로써 "장소", "곳" "산"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주변의 지세를 보면 "곡릉천(교하강)의 안쪽에 돋아 오른 곳이 연다매(메)입니다

그러므로 "연다매(메)는 물 안쪽 - 고지도를 보면 곡릉천이 과거에는 탄현쪽으로 활시위처럼 더 휘어져 흘렀음 - 에 올라 돋은 곳(마을)"이고 이보다 더 안쪽에 있으며 남향으로 물(마다리 개울)이 또 흐르는(앞 뒤로 물이 흐름) 동네는 "모련대" 또는 "모란대", "머른대"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즉 "慕蓮(煙)臺", 慕蘭臺", "머른대"는 한자와는 관계없이 "물안데" - "물 안에 돋은 데"가 변화하여 생긴 이름일 것입니다


11.조리읍

 

2002년 4월 1일 조리면에서 읍으로 승격, 공릉산 정상에서 사면으로 뻗은 가지

모양의 산줄기를 따라 골짜기마다 마을들이 형성되었다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능안리는 본래 교하군 상지석리였다가 1989년 1월 1일 조리면에 편입된 지역이다. 능안리는 공순영릉 3기의 능 중 순릉이 마주 건너다보이는 곳이어서 능안말, 안능안 등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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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이현석 | 작성시간 08.04.18 자료수집하느라 수고 많았소......! 듣고보니 그렇네요...^^ 감사합니다요 ~~~!!!
  • 작성자이정의 | 작성시간 08.04.18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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