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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보다 뛰어나서, 매일 강무(講武)할 때에는 나의
곁에 두고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
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결코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15년 9월 16일) | |
귀화인 아버지를 둔 동래현의 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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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시대 최고의 과학자로 기억되는 장영실(蔣英實). 역대 과학자 가운데 장영실만큼 이름이 회자되는 인물도 없지 않을까
싶다. 장영실은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水標)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하였으며, 자동으
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 자격루를 한국 최초로 만든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번 등장할 정도로 유명인이었지만,
정작 그의 삶은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장영실이 어떻게 출생하여 성장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까닭은 그의 출생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종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官奴), 즉 노비였다. [세종실록]
에는 장영실의 부친은 원(元)나라 사람으로 소주(蘇州)·항주(杭州) 출신이고, 모친은 기녀였다고 전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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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의 소주·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세종실록] 세종 15년 9월 16일)
실상 부친이 관노가 아니었음에도 장영실이 관노가 된 것은 모친의 신분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시대 관기(官妓)들은 신분상 천민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엄격한 신분제도에 따라 관기가 딸을 낳으면 어머니를 따라 관기가 되었고, 아들은 관노가 되었다.
신분제도라는 굴레 탓에 천인에 속하는 어머니 신분을 따라야 했지만, 부친이 원나라 출신의 귀화인이었다는 점은 다른 관노와는 다른 점이다. 태조에서 세종대까지 조선 정부는 귀화인들의 정착을 위해 조선 여자와의 혼인을 주선하였고 귀화인들과 혼인한 여성들은 대체로 관노 출신들이 많았다. 그러나 한족(漢族) 혹은 족장과 같은 출신 배경이 좋은 귀화인들은 대체로 양인 여성과 혼인하였다. 따라서 장영실의 모친은 정실부인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장영실이 태종과 세종대에 살았던 인물인 것만큼은 틀림없지만, 양반이 아닌 까닭에 정확한 생몰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애매한 실록 기록과 달리 [아산장씨세보]에는 장영실은 항주 출신인 장서(蔣壻)의 9세손이고, 부친은 장성휘(蔣成暉)라고 되어 있다. 장영실의 부친은 고려 때 송나라에서 망명한 이후 줄곧 한반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귀화인인 셈이다. 아산장씨 족보에는 장영실이 관노의 신분으로까지 추락한 것에 대한 설명은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이에 대해 부친인 장성휘가 조선왕조에 들어와 역적으로 몰려 어머니가 관노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어떤 것이 사실에 가까운지 현재로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점은 장영실은 오늘날로 치면 다문화 가정 출신이었고, 과학적 재능이 비상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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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아산역에 있는 장영실의 동상. <출처 : Himasaram at ko.wikipedia.com> |
출신은 비천했으나, 뛰어난 재주로 승승장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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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은 이미 태종 때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아 궁중기술자로 종사하였다. 제련(製鍊)·축성(築城)·농기구·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났으며 1421년(세종 3년)에 윤사웅∙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여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고 이후 세종의 총
애를 받아 정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가 되면서 관노의 신분을 벗었고 궁정기술자로 활약하게 된다.
장영실이 상의원 별좌 자리에 오르게 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장영실에게 상의원 별좌라는 관직을 주려 했던 세종
은 이 문제를 이조판서였던 허조(許稠)와 병조판서였던 조말생(趙末生)과 의논했다. 이 논의에서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
원에 임용할 수 없다.”며 반대했고, 조말생은 “가능하다.”라고 했다. 두 대신 간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자 세종은 재차 다른 대
신들을 불러 이 문제를 상의했는데, 대신 중에 유정현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라고 하자 곧바로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
로 임명했다. 상의원(尙衣院)은 왕의 의복과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는데, 별좌는 종5품의 문반직이었지
만, 월급은 없는 무록관(無祿官)이었다.
이후에도 장영실이 자격루 제작에 성공하자 세종은 공로를 치하하고자 정4품 벼슬인 호군(護軍)의 관직을 내려주려 했는데 이
때도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황희가 “김인이라는 자가 평양의 관노였으나 날래고 용맹하여 태종께서 호군을 특별히 제수하신
적이 있으니, 유독 장영실만 안 된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자 세종은 장영실에게 호군이라는 관직을 내렸다. | |
저절로 움직이는 물시계, 자격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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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시계가 없었던 옛날에는 태양광선이 던져주는 해 그림자를 통해 하루의 시간을 알았고, 밤에는 하늘에 반짝이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통해 시간을 재었다. 그러나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그러한 방법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물시계이다. 물을 넣은 항아리 한 귀에 작은 구멍을 뚫어 물방울이 하나씩 떨어지는 것을 다른 항아리에 받아서 그 부피를 재보
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부피는 일정하게 늘어나는 데 하루에 흘러들어간 물의 깊이를 자로 재서 12등분 하면 한 시간의 길이
가 나오게 된다.
물시계는 중국에서 기원전 7세기에 발명되었다고 전하며 누각(漏刻), 또는 경루(更漏)라고 불렀다. 그러나 매일 물을 갈아주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고 항상 사람이 지켜서 시간을 재어야 했다. 이를 태만히 하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었고, 시간이 안 맞으면
큰 소동이 일어나는 게 다반사였다. 사람이 일일이 손을 대지 않아도 자동으로 움직이는 물시계를 만들고자 하는 소망은 결국
중국 송나라의 과학자 소송(蘇訟)이 일궈냈다. 1091년경에 소송은 물레바퀴로 돌아가는 거대한 자동 물시계를 발명했다. 그러나
그 장치들이 너무나 복잡하여 소송이 죽은 뒤에는 아무도 만들지 못해 사라졌고, 12~13세기 아라비아 사람들이 쇠로 만든 공이 굴
러 떨어지면서 종과 북을 쳐서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는 자동 물시계를 만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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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29호인 보루각 자격루. <출처 : http://www.flickr.com/photos/hendry/1859857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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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그러한 자동 물시계를 반드시 만들어 궁궐에 설치하
려 했으나, 자신의 구상을 실현해줄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재주를 높이 사고 면천(免賤)에, 관직까지
내려준 국왕 세종을 위해 장영실은 혼신을 다하고자 했다.
이후 장영실은 당시 세종과 정인지, 정초 등이 조사하고 수
집한 자료를 가지고 문헌에 전하는 소송의 물시계와 이슬람
물시계를 비교하면서 ‘자격루’라는 새로운 자동 물시계를 만
들어냈다.
자격루의 제작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장영실은 또 하나의 특
징적인 자동 물시계 제작에 착수했다. 시간을 알려주는 자
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渾天儀)를 결합한 천
문기구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자격루와 혼천의, 이 두 가지를
결합하면 절기에 따른 태양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고 그 절
기에 농촌에서 해야 할 일을 백성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천지
인(天地人)이 하나로 연결되는 이른바 세종이 꿈꿨던 왕도정
치(王道政治)가 이뤄지는 것이었다. 자격루가 완성된 지 4년
후, 1438년(세종 20년)에 장영실은 또 하나의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淚)를 완성하였고, 세종은 경복궁 침전 곁에 흠경각
(欽敬閣)에 지어 그 안에 설치하도록 했다. | |
최고의 과학자, 불경죄를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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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輿: 임금이 타는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1442년 3월 16일)
장영실에 관한 기록은 거의 20년간에 걸친 그의 극적인 공적 활동에만 국한되어 있다. 출신 배경도 의문이지만, 1442년에 대호군
자리에서 파면된 이후로 그의 만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1442년(세종 24년)에 장영실은 임금이 탈 가마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장영실의 임무는 제작 감독이었다. 그러나 그 가마는 세종이 타기도 전에 부서져 버렸다. 사헌부에서는 왕이 다친
것은 아니었으나 안위와 관련된 일이므로 장영실을 비롯한 참여자들은 불경죄로 관직에서 파면되는 것은 물론이고 아울러 곤장까
지 맞아야 한다고 했다.
사헌부의 탄핵이 올라오자 세종은 망설이다가 형벌을 내리기로 결정했는데, 그토록 총애하던 장영실에 대해 배려해 준 것이라고
는 곤장 100대의 형을 80대로 감해 준 것뿐이었다. 과거 그의 실수에도 과감히 눈 감아준 전력과는 차이가 있다. 그 뒤 장영실의 행
적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간 세종의 남다른 관심과 장영실의 재주 등을 고려해볼 때 장영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이에 대해 간의대 사업으로 인한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로부터 장영실을 보호하려 했다는 주장과 천문의
기 프로젝트가 끝나버려 장영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는 주장 등 여러 견해가 있지만 신빙성 있는 주장들은 아니다. | |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진 15세기 최고의 공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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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현 관노로 알려진 그가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았기에 15세기 최고의 공학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을까?. 미스테리한 그의 일생
에서의 실마리는 건국대 남문현 교수에 의해 일부 풀렸다. 세종 때 훌륭한 천문학자인 김담(金淡)이 장영실의 매형이었다는 사실
이 밝혀진 것이다. 동래현 관노였지만, 천문학에 대한 기본적인 식견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집안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다.
노비 출신이 종3품 벼슬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문신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일개 기술자가 그 높은 벼슬에 오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간 장영실이 세운 업적은 조선 최초의 천문관측대인 간의대를 비롯하여, 대간의∙소간의∙규표∙앙부일구∙일성정시의∙
천평일구∙ 정남일구∙현주일구∙갑인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 그가 더 이상 재주를 펴지 못하고 공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비단 불경죄만이었을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