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敬順王)
신라 제56대 마지막 王으로 882년 출생하여 927년 4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9년을 在位하였으나, 935년 왕권과 나라를 고려 王建에게 넘겨주고 54세에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와 결혼, 왕건의 사위가 되었다.
그 후 43년을 더 살다가 978년 97세로 天壽를 다하셨다.
후백제 甄萱이 景哀王을 죽이고 敬順王을 세웠다.
927년 정월, 태조 王建은 친히 大軍을 이끌고 후백제를 공격한다. 이에 경애왕(景哀王)은 군사를 보내어 고려군을 지원하게 하였다. 신라 -고려의 연합군은 백제의 저항을 무찌르며 근암성을 함락시켰다. 이러한 왕건의 위세에 눌려 각지에서 王建에게 귀순하였다.
왕건 그리고 견훤
이제 모든 운세는 王建에게 기울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927년 9월, 견훤(甄萱)은 대군을 이끌고 新羅의 여러 城들을 그대로 지나치고 고을부(지금의 永川)로 들이 닥쳤다. 왕경(王京)과 지척인 고을부를 습격당한 신라는 경악하였다.
景哀王은 당장 사신을 왕건에게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고, 왕건도 즉시 1만 군사를 보내어 구원하라고 명령한다.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927년 11월, 견훤(甄萱)은 금성(金城.. 경주)에 입성하였다. 이때의 상황을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
천성 2년(후당 명종의 연호) 정해 11월에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하였는데, 경애왕(景哀王)과 비빈(妃嬪) 및 종척(宗戚)이 포석정(鮑石亭)에 놀이를 가서 연회를 즐기느라 적병이 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창졸간에 어쩔줄 모르고 王과 妃는 후궁으로 도망해 들어가고 종척과 공경대부(公卿大夫)와 侍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敵에게 사로잡히자 奴婢가 될 것을 애원하였다.
포석정 .. 현재 6m만이 남아있다.
견훤(甄萱)이 군사를 풀어 公私의 모든 재물을 노략질하고 왕궁으로 들어가 거처하면서 경애왕(景哀王)을 찾도록 해서 왕과 왕비 및 빈첩(嬪妾) 여럿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붙잡혀 군중으로 끌려 나오니 왕을 핍박하여 자진(自盡 ..자결)하게 하고, 왕비를 겁탈한 후 부하들을 풀어 빈첩(嬪妾)들을 겁탈케 하였다. 그리고 왕의 족제(族弟)인 부(傅)를 새로운 王으로 세우니 그가 비운의 경순왕(敬順王)이다.
위의 기록에는 여러가지 의문이 남는다. 아무리 나라가 부패하였고, 멸망의 길을 가고 있었지만 지척인 고을부(永川)까지 적군이 공격해 왔는데 한가롭게 잔치를 벌이고 있었을까? 그만큼 어리석은 경애왕도 아니었고 또한 그것을 말릴 신하가 한명도 없었다는 말인지...
최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포석정(鮑石亭)은 향연이나 잔치에 사용하는 장소가 아니었다고 한다. 연구에 따르면 포석정은 國政을 의논할 때 사용되거나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곳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면 신라 최후의 날 景哀王은 잔치를 벌인 것이 아니라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甄萱의 공격을 방어할 방도를 의논하거나 아니면 제사를 지내며 부처에게 나라를 구원해 달라고 청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경애왕은 후궁으로 도망쳤지만 결국 붙잡혔고, 어느 기록에 의하면 견훤은 경애왕을 개 취급하였다고 전한다.
즉 바닥에 술을 흘린 뒤 혀로 ?게 하라고 명령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살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리고 견훤은 王妃를 강간하고 모든 군사를 풀어 모든 婢妾들을 강간하게 하였다. 그리고 견훤은 敬順王을 새로운 신라의 王으로 내세웠다.
위와 같이 금나라의 시조(始祖)가 고려에서 왔으며, 신라인이었다는 아골타(阿骨打) .. 그의 출생년도(1068~1123)를 고려하여 계산해 보면, 金 始祖 함보(函普)가 여진에 들어온 시기는 신라 말, 고려 초이다. 당시 신라와 고려의 왕권 교체기이었던 한반도의 사정을 고려하면 "금사"와 송막기문"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골타의 조상 함보(函普)는 과연 누구인가?
조선 仁祖시절의 문인 김세렴(金世濂)이 지은 동명해사록(東溟海사錄)에 의하면.. 함보(함보)의 9대손 아골타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김부(金傅 .. 경순왕)이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이 합병하였으나, 김부(金傅)의 外孫 "완안아골타"는 곧 권행(權行)의 후예로서 능히 중국을 갈라 다스려 백년동안 대를 이었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세렴은 여진족의 아골타를 경순왕의 외손이며 조선 최고가문의 후예라고 하고있다. 그런데 권행(權行)의 본래 姓은 김(金)씨이었다.
당시 족내혼(族內婚)을 하였던 신라왕실의 관습을 고려하면 그의 성이 김(덧말 김)이며 신라의 후예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동명해사록의 金始祖와 "금사"의 함보(函普)는 과연 동일 인물인가?
아골타는 마의태자의 아들 ?
그런데 여기서 김행(金行)이라는 인물은 마의태자의 아들이라는 설이다. 부안김씨족보에 따르면 금나라의 시조 김행(金行)이 麻衣太子의 아들이고, 김행은 여진으로 갔으나, 마의태자의 나머지 두 아들은 고려에 남아 부안김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阿骨打의 시조가 마의태자와 연관이 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은 아골타의 출생년도(1068~1123)를 고려했을 때 그 시기가 신라 말,고려 초이다. 나라를 잃은 신라의 流民들이 북쪽을 향했을 것이라는 추정.. 그럴 듯하다
함보(函普)를 시조로 한 금 황실(金 皇室)은 발해인을 왕비로 맞는다. 금나라의 성군이었던 세종의 어머니, 4대 황제 해릉왕의 어머니는 모두 발해인(渤海人)이었다.
또한 아골타는 발해인을 신뢰하여 발해 유민 장호(張浩)를 새로운 수도 北京의 건설 책임자로 등용한다. 발해는 대제국을 경영해 본 경험이 있었다.
金나라는 이러한 발해의 경험을 이용하여 국가체제를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고려사의 기록들
고려 예종 10년(1115)의 기록에 의하면
생여진(生女眞) 아골타가 황제라 일컫고 금나라를 세웠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에 우리 평주(平州)에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으로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에 거주하였으며, 이가 金의 始祖라 하였고, 또는 평주 승 김행의 아들 극기가 여진 아지고촌에 들어가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고을(古乙)이고 태사가 되었다.
고을(古乙)이 낳은 아들 활라(活羅)도 태사를 이었다. 활라(活羅)는 많은 아들을 두어 장자가 핵발리이고 계자(季子)를 영가라 하였는데 영가가 웅걸이어서 중심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장자 오야속이 위를 이었고 그가 죽자 아우 阿骨打가 섰다.
또 금나를 세우기 전 고려 예종 4년(1109)에 여진에서 사신이 왔다. 사신은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정이 대방(大邦 .. 고려)에서 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 상 귀부함이 마땅하다며 지금 태사 오야속도 역시 대방(大邦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라고 하였다.
물론 위 기록들은 고려의 입장에서 쓴 기록들이므로 아골타의 조상이 고려와 신라 사이에 다소 혼란은 있으나 그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금나라 조상들이 옛 우리 고조선, 한반도인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에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 사실이 밝혀진다면 중국이나 우리의 역사는 다시 써야 할 것이다.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고려 예종에게 보낸 국서에 보면
형인 대여진(大女眞) 금국 황제는 아우 고려 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契丹)을 대국으로 섬기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
다소 무례한 國書이나 당시 중국을 굴복시킨 金나라의 위세로 보아 이해는 할 수 있다. 위의 글을 고려의 입장에서 쓴 것이라 해도 金 太祖 아골타는 자신 家門의 기원이 한반도에 있음을 굳이 밝히고 있다. 그는 여진과 발해를 한 집안이라고 말한다.
淸나라도 ....
金나라가 멸망한 후 1606년 女眞은 다시 중원을 장악하였다. 후금(後金)을 세워 청(淸)나라 太祖가 된 누르하치는 누구인가?
중원을 정복한 그는 皇室의 성(姓)을 애신각라(愛新覺羅)라 칭하고 그 역시도 자신들이 조상을 新羅人이라고 했다. 누르하치는 아골타의 16대손이다.
애신각라(愛新覺羅 .. 아이신 줘러) .. 아이신(愛新)은 금(金), 줘러(覺羅)는 부족을 의미한다. 결국 金部族, 김씨들이라는 뜻이다. 신라왕족인 경주김씨 그의 후예인 金 皇室, 淸 皇室까지 그들은 모두 금을 뜻하는 김(金)씨들이었던 것이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금나라, 청나라로 이어지는 만주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한쪽의 영토, 중원을 만주대륙에 합병하여 오늘의 중국을 완성한 여진족.. 그들의 선조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에 조목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우월감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반역사적인 동북공정(東北工程) 논리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우리 역사를 지켜내어 향후 동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에 평화의 논리적 근거를 재확인하자는 것이다.
大王神으로 환생한 敬順王
두 번이나 세상에서 잊혀진 경순왕은 그러나 한반도 무속신앙 속에서 대왕신(大王神)으로 다시 환생하였다.
그가 다시 대왕신으로 還生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時運이 다한 나라를 전란에 휩쓸리게 하지 않고 백성들을 구했다는 점에서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기 때문이다.
경순왕이 죽은 후 그와 관련된 여러 곳에서 경순왕의 사당(祠堂)이 생겨났고, 그와 관련된 전설이 만들어졌다.
그를 모신 사당에서는 경순왕을 신령으로 모시고 김부대왕(金傅大王)이라는 시호를 올려 무속신앙의 대상으로 여겼다.
강원도 인제에 있는 김부대왕각
경순왕의 주된 숭배지역은 신라지역이었던 경상북도이었다. 그러나 그를 신령화하는 지역은 단순히 경상도를 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특히 그의 아들 麻衣太子가 지나간 지역에서는 경순왕과 혼돈되어 김부대왕(金傅大王)으로 모셔졌는데, 강원도와 충청북도가 대표적이다. 이 지역들 이 외에도 경기도의 안산과 시흥에도 김부대왕은 神으로 환생 하였다.
전국적인 숭배 형태
慶州에서 浦港에 이르는 지역의 주민들은 敬順王을 인근 형산 옥련사에 神으로 모시고 기원을 드린다.
전설에 의하면 형산과 강 건너의 제산은 원래 연결되어 있어 비(雨)만 오면 물이 빠지지 않아 주변 안강지역이 큰 水害를 입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敬順王神이 龍으로 변해서 물이 빠져나가도록 그 꼬리로 山을 둘로 쪼개 인근 주민들이 수해의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경상북도 영풍군 영주면 영주리에는 목조기와로 된 자인전이 있어 경순왕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충청북도 청풍의 덕주사 뒷편에도 김부대왕의 사당이 있다.
그리고 충주와 제천 등지에서도 김부대왕이 유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경기도와 서울의 전설은 구체적으로 나타나 최근까지 경순왕을 모시는 제(祭)를 지내고 있다. 서울 시흥동이 성황제는 고려 초기부터 내려온 것으로 전해지는데, 전설에 따르면 경순왕이 신라 천년사직을 다하고 경주를 떠나 충북 제천을 거쳐 강원도 원성군 고자암에 미륵불을 조성했다.
경순왕이 죽자 안씨부인이 마을 뒤산인 군자봉에 올라가서 매일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얼마 후 내의시랑 서희가 송나라로 사행길을 더나고, 서희의 사행길을 안씨부인이 나타나서 도아주어 서희가 돌아온 이후 군자봉에서 제가 끝나면 마을로 내려와 마을을 돌고 안산과 수원, 시흥일대를 巡行하고 군자봉으로 올라갔다고 하여 경순왕의 神靈이 순행하는 지역에서도 경순왕을 모시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麻衣太子에 대한 전설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후 皆骨山에 들어가 풀뿌리를 ?어 먹으며 삼베옷을 입다 일생을 마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원도의 전설은 다르다. 마의태자 김일(金鎰)은 신라멸망 이후 다수의 군사를 이끌고 강원도 麟蹄지역으로 숨어들어 한계산(寒溪山) 주위에 성을 쌓고 군사를 길러 신라의 부활을 꿈꾸었다고 한다.
금(金)나라
금나라는 중국 대륙에서 女眞族이 건립한 왕조이다 (1115~1234). 창건자는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구타(阿骨打)이다.
여진족은 본래 10세기 이후 거란족(契丹族)이 세운 요(遼)나라의 지배를 받았으나, 12세기 초 북만주 하얼빈(哈爾濱) 남동쪽의 안추후수이(按出虎水) 부근의 아성(阿城)에 있던 완안부(完顔部)의 세력이 커지자,
그 추장인 아골타(阿骨打)가 요(遼)를 배반하고 자립하여 제위(帝位)에 올라, 나라이름을 금(金)이라 하였다. 그 아골타가 바로 金나라 太祖이다
아골타(阿骨打)는 신라인의 후예인가 .. 마의태자의 후손?
중원에서 처음으로 한족(漢族)을 밀어낸 금태조(金太祖) .. 아골타, 그의 始祖는 놀랍게도 신라사람 함보(函寶)이었다.
이것은 야사가 아니라 금나라 정사(正史)인 금사(金史)와 金나라 건국 시 宋나라에서 씌어진 "송막기문(松漠紀文)"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금사(金史)"는 중국 금(1115~1234)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정사)이며, 전 135권으로 본기(本紀) 19권, 지(誌) 39권, 표(表) 4권, 열전(列傳) 73권으로 구성되어있다.
원대(원대)에 탈탈(脫脫) 등의 칙명을 받아 1343년부터 그 이듬해에 걸쳐 편찬되었다. 단기간에 완성되었지만 원자료가 좋았았을 뿐만 아니라, 그 전까지 4번의 편찬계획이 시도된 적이 있기 때문에 짜임새가 훌륭하고, 동아시아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송막기문"은 중국 남송(南宋) 때에 저작된 금나라의 견문록이다. 1156년에 간행되었는데, 저자 홍호(洪皓)는 1129년 금나라에 파견되어, 포로가 된 송제(宋帝) 흠종(欽宗) 등의 반환을 교섭하였을 때, 금나라의 괴뢰국(傀儡國)인 齊나라에서 일 할 것을 강요당하지만 이를 거부하여 북만주에서 10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동안의 견문을 기록한 것을 그가 죽은 뒤 아들이 校刊한 것이다.
금사와 송막기문의 기록들
금의 시조는 함보(函普)로서 고려(고려)에서 왔을 때 나이가 60여세이었다. 동생인 보활리(보활리)만 같이 와서, 시조는 복간수(僕幹水) 연안의 완안부(완안부)에 살았고, 그 동생은 야나(耶懶)에서 살았다.
발해인(발해인)에게 말하기를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가족이다. 처음 물길(勿吉)의 7부족 중에 하나이었다. 始祖가 완안부로 와서 오래 살았는데.
여진의 추장(酋長)은 신라인으로 완안씨(完顔氏)라고 불렀다. 완안추장(完顔酋長)은 漢나라 말로 王이라는 의미이다.
위와 같은 사실은 金나라가 망한 후 들어선 淸나라 시절 저술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州源流考)에도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은 아계(阿桂) 등이 청황제 건륭제의 명을 맏아 저술된 책으로 滿州의 풍속지리지이었다. 1739년에 간행되었다.
이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州源流考)에서는 금사(金史)에서 말하는 金의 始祖 함보(函普)를 합부(哈富)로 정정하였고, 금(金), 청(淸) 왕조가 신라에서 왔음을 단정하였다. "完顔金始祖自新羅來居完顔部因以爲氏 .. 金始祖가 신라에서 왔다 " ... "新羅王金姓相傳數十世則金之自新羅來無疑建國之名亦應取此 .. 금의 국호가 신라왕성에서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