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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중표 교수의 [불교의 이해와 실천] 비판

작성자후박나무|작성시간08.09.15|조회수106 목록 댓글 0

이중표 교수의 [불교의 이해와 실천] 비판

후박나무

차례

1.들어가는 말

2. 붓다의 언어

3. 용어의 정의

1). 존재(bhava)라는 단어

2). 입처(āyatana)라는 단어

3). 根(indriya)이라는 단어

4). 입처(āyatana)와 根(indriya)의 비교

(1). 차이점

(2). 공통점

4. 아함과 니까야의 비교

1).6입처에 관한 경전

2).오온에 관한 경전

3).‘버려라’ ‘소멸시켜라’에 대한 이해

4). 12연기에 대하여

5). 반야심경에 대하여

5. 나가는 말

 

 

1.들어가는 말

 

요즈음 누군가 불교를 공부하려 할 때 아함경 먼저 읽고 나서 대승경전과 선어록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아함경은 소승경전이라고 폄하되어 왔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최근에 빠알리어에서 직접 번역된 니까야는 불교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확고한 기준이 되고 있다. 한문경전의 난해함과 한문에서 번역된 한글 아함경의 모호함은 니까야와 니까야의 주석서에 의해서 차차 그 의미가 분명해지고 있다. 아함경은 니까야와의 비교연구를 통하여 수정되고 보완되어 질것이다. 이 글은 아함경과 니까야와의 비교를 통해서 아함경을 새롭게 해석해 보고자 하는 작은 시도이다. 이 작업을 위하여 나는 이중표 교수의 [불교의 이해와 실천]을 교재로 삼았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아함경을 연구한 교리서들 중에서도 치열한 교리이해를 시도하고 있고, 1995년에 이 책이 출판된 이래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아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이해와 실천]은 1991년도에 나온 [아함의 중도체계]라는 논문을 바탕으로 이중표 교수가 불교방송에서 강의한 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본인도 [아함의 중도체계]를 강원시절에 만나서 불교를 이해하는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 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인터넷 상에서 이중표 교수의 책을 가지고 공부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기본 교리를 무리하게 해석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던 차에 최근에 [불교의 이해와 실천]이라는 책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이 글은 [불교의 이해와 실천]에 인용된 아함경을 니까야와 비교하고 니까야를 기준으로 이중표교수가 이해하고 있는 기본적인 법수들, 이를 테면 5온, 6근, 12처,6계,18계, 12연기등에 비교를 시도할 것이다.

 

 

2. 붓다의 언어

모든 사상이 마찬가지지만 불교도 가르침이 설해진 시대상황과 그 당시의 언어의 쓰임새와 말하는 자의 의도를 알지 못하면 엉뚱한 해석을 낳을 수가 있다. 우리나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불멸후 약 1000년이 지난 다음인 3~4세기 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을 통하여 불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나 중국에 와있던 인도스님들이 번역한 한문경전을 가지고 불교를 이해해야만 했다. 그 당시에 인도에는 이미 대승경전이 많이 제작되어 유포되는 시기였으므로 우리나라는 대승경전과 아함경을 함께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대승불교도의 시각에서 아함경은 하열한 근기를 위한 낮은 수준의 가르침이란 주장도 그대로 받아 들였다. 이러한 역사의 배경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는 니까야와 아함을 공부하면서 곧잘 대승불교의 시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갖게 된다. 시중에 나온 대부분의 불교 교리서들은 아함의 언어를 대승의 언어로서 치환시켜서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중표교수의 [불교의 이해와 실천]에서도 몇 가지 불교용어를 원어의 뜻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 책이 불교를 이해하려는 사람을 미로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이유가 있다면 경전에서 나타나는 용어를 원래의 뜻과는 다른 의미로 정의하고 해석하는데 그 이유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붓다가 사용한 언어의 특징과 용어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불교이해의 기본이라 할 것이다. 붓다는 상윳따니까야의 [아라한 경]에서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천신]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마지막 몸을 가진 아라한인 비구가'나는 말한다'라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 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세존]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마지막 몸을 가진 아라한인 비구가 '나는 말한다'라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 라고 하여도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말하는 것이다"

[천신]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마지막 몸을 가진 아라한인 비구가 참으로 아만에 사로잡혀 '나는 말한다'라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세존] "아만(māna)을 버린 자에게는 속박이 없으니 아만의 모든 속박은 부서졌다. 착각(思量,maññana)을 넘어선 현자는 '나는 말한다'라거나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라고 하여도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말하는 것이다." (SN.Ⅰ.14)

 

我想(māna)을 부순 아라한이 ‘나는’ ‘나의’ ‘나의 것’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느냐는 천신의 질문에 붓다는 아라한은 我想을 분명하게 버렸지만 세상의 관례에 따르는 일반적인 용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이 붓다가 사용하는 언어는 깨달은 자 만의 특별한 언어가 아니라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과 관례에 따르는 일반적인 언어이다. 이와 같은 붓다의 언어 사용을 잡아함 37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我不與世間諍。世間與我諍。所以者何。比丘。若如法語者。不與世間諍。世間智者言有。我亦言有。云何爲世間智者言有。我亦言有。比丘。色無常․苦․變易法。世間智者言有。我亦言有。如

是受․想․行․識。無常․苦․變易法。世間智者言有。我亦言有。世間智者言無。我亦言無。謂色是常․恒․不變易․正住者。世間智者言無。我亦言無。受․想․行․識。常․恒․不變易․正住者。世間智者言無。我亦言無。是名世間智者言無。我亦言無

“나는 세간과 다투지 않는다. 세간이 나와 다툴 뿐이다. 세간의 지혜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나도 ‘있다’고 말한다. 색수상행식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해가는 법으로 ‘있다’고 세간의 지혜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나도 그렇게 말한다. 세간의 지혜 있는 사람들이 ‘없다’고 하는 것은 나도 ‘없다’고 말한다. 색수상행식은 항상 존재하며, 변함없이 머무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혜 있는 사람은 그러한 오온은 ‘없다’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말한다.”

 

이 경전에 상응하는 상윳따니까야는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비구들이여, 법을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세상에서 현자들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나도 그것을 '없다'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세상에서 현자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나도 그것을 '있다'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을 세상에서 현자들이 '없다'고 말하고, 나도 그것을 '없다'고 말하는가? 비구들이여,이 세상에서 현자들은 물질(수상행식)에 대하여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물질은 '없다'고 말하는데, 나도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을 세상에서 현자들이 '있다'고 말하고, 나도 그런 것은 '있다'고 말하는가? 비구들이여, 이 세상에서 현자들은 물질(수상행식)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물질은 '있다'고 말하는데, 나도 그런 것은 '있다'고 말한다.(SN.Ⅲ.139)

 

이렇게 붓다는 세상의 현자들과 같이 ‘있다’ ‘없다’는 단어를 세상의 관례에 따라서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의 ‘있다’ ‘없다’는 常見과 短見이라는 두 극단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온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常見과 短見이 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오온이 어떻게 있느냐, 어떻게 없느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즉, 오온은 변화하면서 ‘있다’. 그리고 변화하지 않고 있는 오온은 ‘없다’. 이것이 ‘있다’ ‘없다’라는 언어는 세상의 언어이면서 사실을 표현하는 언어인 것이다. 예를 들어 열반을 탐진치가 없음이라고 표현할 때 ‘탐진치’와 ‘없음’이라는 일반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열반이라는 궁극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붓다가 사용한 언의의 특징이다.

그런데 이중표 교수는 이러한 사실의 언어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식의 문제로 변형시킨다.

 

“이 말씀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오온이 외부에 실재하고 있다.” 는 의미가 아니라 “오온은 우리에게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모습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의미이다”p.245

 

이중표교수가 위 경전을 이렇게 다른 것처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함으로서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온이 외부에 (혹은 내부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것이 무상,고,무아의 성질로 있다는 말이나 무상,고,무아의 성질로 인식된다는 말이나 무엇이 다른가? 여기서 그가 차이를 두는 것은 중생의 인식은 언제나 ‘욕탐’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렇치만 위 문장에서 ‘인식’이라는 단어는 무상,고,무아의 성질로 ‘관찰’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인식의 문제로 환원시키지 않아도 되는 표현이다. 그는 모든 표현을 인식의 문제로 바라보려 한다. 그리고 그 인식은 언제나 ‘욕탐’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세상, 영혼, 육체, 여래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생각하듯이 우리의 외부에 실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언어는 외부의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p.96

 

“우리는 책상이 나의 존재나 마음과는 상관없이 외부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책상은 우리의 욕탐(chandarāgo)에 의해 책상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p.223

 

그러나 책상이란 이름은 우리의 욕탐(chandarāgo)에 의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책상을 책상이라 부르는 것은 세상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 언어란 사물을 지시하는 언어이기도 하고,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는 언어이기도 한 것이다. 욕탐(chandarāgo)은 chanda(욕구,impulse) + rāga(탐욕,lust)라는 두 가지 단어로 이루어진 것인데 한문으로는 慾貪으로 번역 되었다. rāga라는 단어가 탐진치 삼독의 탐(rāga)에 해당되는 단어이고 chanda(욕구)가 홀로 사용될 때에는 rāga(탐욕)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AN.Ⅰ.72) 그러므로 욕탐은 생사윤회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으로 간주 되는 단어이다. 경전에서 욕탐의 용례를 살펴보자.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물질(수상행식)에 대한 욕탐(chandarāgo)을 버리라. 그러면 물질은, 끊어지고 뿌리 채 뽑히고 잘려진 종려나무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어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된다.(SN.Ⅲ.27.Chandarāga sutta)

 

"장로여, 자세히 설명하자면 홀로 사는 것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과거는 버리고 미래는 바라지 않으며 현재는 자신의 소유에 대한 욕탐(chandarāgo)을 모두 버리는 것이다. 장로여, 이것이 자세히 설명하자면 홀로 사는 것이 완성되는 것이다."(SN.Ⅲ.183)

 

위 경전들 처럼 오온에서 욕탐을 버리면, 윤회가 그치게 된다. 또한 진정으로 홀로 지낸다는 것은 욕탐을 없애고 사는 것이다. 욕탐은 이처럼 인간의 근본 번뇌를 말하는 것이지 책을 보는 탁자를 책상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을 욕탐(chandarāgo)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언어 사용의 오류이다. 해탈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욕탐(chandarāgo)은 제거해야 하지만 욕탐을 버린 아라한에게도 책상은 책을 놓고 보는 책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책상이란 이름은 그 물건이 활용되는 기능에 따라 이름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책상이라는 세상의 관례에 따르는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에게 욕탐이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욕탐(chandarāgo)에 의해 책상으로 되어 있다’는 말은 욕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뿐 아니라 사물을 지시하는 언어의 사회적인 약속을 간과한 것이다. 책상을 책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상의 관례에 따르는 표현일 뿐이다. 그는 우리의 인식이 ‘욕탐’으로 이루어지고 그것을 표현하는 우리의 언어가 ‘욕탐’의 표현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렇게 나타난 인식이나 언어는 마땅히 없애고 제거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그렇게 인식되어 진 것이 자아와 세계로 나누어져서 그러한 인식의 표현이 12처라고 말한다.

 

“ ‘보는 마음’과 ‘보이는 마음’에 의해 나와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난다.”

 

“우리는 오온과 같은 존재가 우리의 외부에 실재한다고 믿는다. 세계와 자아가 외부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외도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p.245

 

그가 인간의 인식과 언어를 보고 이렇게 바라보기 때문에 그는 항상 중생을 외도와 같이 취급한다. 그에게 이 세상은 부처와 외도라는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 외도의 ‘있다’ ‘없다’는 항상 극단이다. 그래서 이중표 교수가 바라보는 중생의 ‘있다’ ‘없다’는 항상 극단이 되어 버린다. 이 결과 세상의 관례에 따르는 ‘있다’ ‘없다’ 는 그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눈이 색을 보면 안식이 생긴다’는 이 자연스러운 법칙을 그는 매번 “안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보는 놈(안입처)이고, 밖에 있는 세계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보이는 것(색입처)이다” 라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논리로 세상의 명칭과 관례에 따르는 이름, 개념들을 모두 욕탐의 결과로 보거나 극단적인 견해로 치부해 버린다.

“5온, 12처,18계, 12연기 등이 집성제에 해당 합니다”p.53 라는 말과 같이 모든 법수들을 마음 상태로 환원 시킨다. 불교가 혼란스럽게 다가오는 첫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언어들 때문이다.

 

 

3. 용어의 정의

 

1). 존재(bhava)라는 단어

이 책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단어들에 대해서 그 진실한 의미를 구명해 보고자 한다. 이중표 교수는 존재와 법을 구분하면서 존재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존재(bhava)라는 말은 우리와는 상관없이 외부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p.246-

그러나 bhava라는 단어는 bhu라는 어근에서 나온 단어로 bhavati(to become, to be)의 명사형이다. 한문으로 有, 存在, 生存이라는 말로 번역되었지만 ‘되어감(becoming)’으로 해석해야 하는 말이다. 12연기의 설명에서 보자면 존재(bhava)는 무명이 있으므로 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의 순서로 발생 한 것이다. 무명 때문에 연기한 것이고 무명이 멸하므로 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가 소멸하는 것이다. 그는 왜 무명이 소멸하므로 행-식-명색-육입이 소멸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취착 다음에 오는 존재(bhava)의 소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가? 만약 존재(bhava)를 위와 같이 해석한다면 무명이 멸할 때 육입은 소멸하는데 존재(bhava)는 소멸하지 않는 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므로 존재(bhava)를 위와 같이 정의 내리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

 

2). 입처(āyatana)라는 단어

이 책에서 āyatana는 가장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단어이다. 그는 이 책에서 6입을 “허망한 마음”이라는 그만의 견해를 펴고 있다. 입처에 대한 오해는 āyatana라는 단어의 오해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사상적인 혼란에 기인하기도 한다. 사상적인 이유란 첫째는 12연기에 대한 오해 때문이고 둘째는 반야심경에 대한 오해 때문이며 셋째는 ‘버린다’ ‘소멸 시킨다’ 라는 경전의 표현들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6입처 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眼, 耳, 鼻, 舌, 身, 意 라고 되어 있으니까 이 육입처를 우리가 알고 있는 눈, 코, 귀, 혀, 몸,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난 생각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해석인지 알게 됩니다. 12연기를 보면 무명이 사라지면 행이 사리지고 명색, 육입처가 사라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무명이 사라지면 눈, 코, 귀, 혀, 몸, 마음이 사라진다는 것인데, 우리가 무명을 깨우쳐 정각을 성취하면 정말로 눈, 코, 귀, 혀, 몸이 사라지는 것일까요? 부처님은 무명을 멸했지만 눈, 코, 귀, 혀, 몸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까요? 그렇치 않습니다. 불교의 교리를 우리가 멋대로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이런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육입처가 자신의 생각가운데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깨달아야 육입처가 없어진다는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p.117-

 

“12처는 욕탐이라는 번뇌에 묶여있는 우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p.62

 

“생사윤회의 중생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십이입처를 없애야 할 것입니다.”p.225

 

" 사무색정과 7식주 이처를 살펴보면 아야따나는 중생의 의식 상태를 의미하며 그것도 몸을 통해 들어오는 외부의 대상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의식 상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결국 없애야할 허망한 의식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p.210-

 

이러한 그의 설명과는 달리 아래의 경전에서는 아라한이 된 비구들은 육촉입처에서 방일함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입처(āyatana)는 아라한이 되어서도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허망한 마음도 아니란 것을 보여준다.

 

“비구들이여, 번뇌가 소멸되고 청정한 삶을 이루었고, 해야 할 일을 해 마쳤고, 무거운 짊을 내려놓았고, 자신의 이익을 성취하였고, 존재의 결박을 부수었고, 완전히 깨달아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 비구들에게 여섯접촉 영역(āyatana)에서 방일함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에게 방일함은 이미 끝났으므로 그들은 방일할 수가 없는 것이다.(SN.Ⅳ.125.Devadahasutta)

 

또한 접촉영역(觸處 phassāyatana)애서 아야따나(āyatanā)는 잘 길들이고 수호하고 보호해야 할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접촉영역 들은 잘 길들이고 수호하고 보호하고 제어해야 할 것으로 설명되는 경전이 있으므로 12처를 허망한 마음이라고 볼 수가 없다.

“비구들이여, 이들 여섯 접촉영역(phassāyatanā)들을 길들이지 않고 수호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여섯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눈은 접촉영역(phassāyatanaṃ)인데 그것을 길들이지 않고 수호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은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SN.Ⅳ.70.Chaphassāyatanasutta)

 

그리고 쌍윳따 니까야의 분별경에서 아야따나(āyatanāna)는 칸다(蘊,khandha)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이때는 감각기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비구들이여, 태어남이란 무엇인가? 낱낱의 뭇삶의 유형에 따라 낱낱의 뭇삶이 태어나고 출생하고 도래함, 생김, 무더기이 나타남(khandhānaṃ pātubhāvo), 감각기관을 획득함(āyatanānaṃ paṭilābho), 이것을 비구들이여, 태어남이라고 부른다."(SN.Ⅱ.p30)

 

 

또 셀라비구니와 마라의 대화에서는 아야따나(āyatanāna)는 칸다(蘊,khandha)와 다뚜(界,dhātu)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 환영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며 이 재난은 타인이 만든 것도 아니니  원인을 연유로 생겨났다가 원인이 멸하면 사라져버리네. 마치 어떤 씨앗이 밭에 뿌려져 흙의 자양분을 연유로 하고 습기라는 두 가지로 성장하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khandha)과 세계(dhātu)와 감각기관(āyatana)들은 원인을 연유하여 생겨났다가 원인이 소멸하면 사라져버리네.“ (SNⅠ.135)

 

또한 붓다는 여섯 감역에서 승리하는 법을 설하고 있지 여섯 감각영역을 없애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여섯 감역에서 승리하는 법은 어떠한 것인가? 비구들이여, 이 세상에 비구는 눈으로 형상을 보고 그에게 악하고 해롭고 기억과 의도가 남고 속박의 조건이 되는 상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이것은 감각영역(āyatana)에서 승리하는 법이다. 세존은 이것을 감역에서 승리하는 법이라 부른다' 라고 알아야 한다.” (SN. Ⅳ.77)

 

그리고 아야따나(āyatana)는 많은 경전에서 장소, 공간이란 의미로도 사용되고

“재가의 삶은 번잡하고 티끌이 쌓이는 장소(āyatana)입니다.“(Stn.406)

 

 

우다나에서는 열반의 세계를 표현하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계(āyatana)가 있다.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다.4무색처도 없고 이세상도 저세상도 없고 해도 달도 없다.”(Ud.80)

 

일반적으로 āyatana는 영역,장소,(sphere, region, sense-organ, position )의 뜻인데 6입처(salāyatana)에서 사용될 때에는 감각장소, 감각영역( sphere, region) 이라고 번역한다.

청정도론에서도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마음과 마음부수들이 머무는 장소이다.

2).눈등이 대상을 만나는 장소이다.

3).안식등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4).안식등의 원인이다.

 

이처럼 아야따나는 여러 곳에서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것을 단순히 마음상태라고 보고 십이입처를 없애야 할 것으로 보는 것은 큰 오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아야따나(āyatana)를 이렇게 이해된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가 아야따나(āyatana)를 ‘마음상태’로 보는 이유는 대인연경의 ‘7식주 2처’와 ‘4무색처’에서 사용되는 아야따나를 근거로 하고 있다. 즉, 4무색처에서 아야따나(āyatana)는 선정상태 이므로 6입의 āyatana도 마음상태라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무색정과 7식주 2처를 살펴보면 아야따나(āyatana)는 중생들의 의식상태를 의미하며 그것도 몸을 통해 들어오는 외부의 대상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의식 상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p.210-

"육촉을 육촉입처라 하여 ayatana 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육촉도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육근을 통한 주관과 객관의 접촉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적인 의식상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육입처를 육근으로 생각하지 않고 중생의 허망한 의식 상태로 이해하면 12연기는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됩니다.“-p.210-

 

그러나 대인연경의 ‘7식주 2처’는 각 주와 처(āyatana)에 합당한 의식을 가진 중생들이 사는 장소(region)로 설명되고 있는 경이다. 그런 각각의 세계와 장소에서도 위빠사나가 가능하며 그러한 해탈을 혜해탈이라고 설명하는 이 경전이다. 그러므로 ‘4무색처’에서 사용되는 용례를 들어 āyatana를 마음상태로 한정하여 이해하는 것은 일반적인 용어를 특수화 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3).根(indriya)이라는 단어

사전과 청정도론은 근(indriya)을 감각기능, 감각능력(faculties, strength, function) 이라고 번역하고 총 22경우에서 사용된다고 설명한.

indriya는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기능, 능력을 의미하는 말인데 5根과 6根등에서 많이 사용된다. 5根(pañcaindriyānī)은 믿음의 기능(saddhindriya), 정진의 기능(viriyindriya), 마음챙김의 기능(satindriya),삼매의 기능(samādhindriya),지혜의 기능(paññindriya)이다. 6根은 cakkhunadriya sotindriya ghānindriya jivhindriya kāyindriya. manindriya가 있다.

그리고 감각기능의 단속(indriyasaṃvarā), 생명기능(Jīvitindriya), 여성의 기능(itthindriya), 남성의 기능(purisndriya) , 감각기능의 성취(indriyasampanno), 다섯가지 느낌의 기능(pañca vedanā): 몸의 줄거움의 기능(sukhindriya),몸의 괴로움의 기능(dukkhindriya), 정신의 즐거움의 기능(somanassindriya) 정신 고통의 기능(domanassindriya), 평정의 기능(upekkhindriya), 신통의 기능(annindriya)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다음과 같은 경전에서는 indriya는 감각기능으로 사용되고 있다.

 

비구들이여, 늙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낱낱의 뭇삶의 유형에 따라 낱낱의 뭇삶이 늙고 노쇠하고 쇠약해지고 백발이 되고 주름살이 지고 목숨이 줄어들고 감각기능이 노화되는 것을 비구들이여, 늙음이라고 부른다. (SN.Ⅱ.3)

 

 

다음과 같은 경전에서는 indriya는 생명기능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비구들이여, 죽음이란 무엇인가? 낱낱의 뭇삶의 유형에 따라 낱낱의 뭇삶이 죽고 멸망하고 파괴되고 사멸하고 목숨을 다하고 모든 존재의 다발이 파괴되고 몸(시체)이 내던져지고 생명기능(jīvitindriya)이 파괴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부른다. (SN.Ⅱ.3)

 

다음과 같은 경전에서는 indriya는 감각능력의 성취(indriyasampanno)라는 것으로 설명되고 감각능력의 성취는 해탈의 성취와 같은 의미로 말해지고 있다.

"감각능력을 성취한 자, 감각능력을 성취한 자라고 하는데 세존이시여, 어떻게 감각능력을 성취한 자가 됩니까?󰡓

[세존] 󰡒비구들이여, 만약에 시각능력의 생성과 소멸을 관찰하면 시각능력을 싫어하여 떠나고(厭離)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離慾) 사라져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 는 지혜가 생겨나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라고 그는 분명히 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감각능력을 성취한 자가 된다.(SN.Ⅳ.140)

 

다음과 같은 경전에서 indriya를 수호하는 것과 음식을 절제하는 것과 깨어있음에 전념하는 것이 수행의 요체라고 말하고 있다.

[세존] 󰡒비구들이여, 비구는 감각능력의 문을 어떻게 수호하는가? 비구들이여, 이 세상에서 비구는 시각으로 형상을 보고 그 특징(nimitata)을 취하지 않고 그 세세한 인상(ānubyañjana)을 취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시각능력(cakkhundriyaṃ)을 수호하지 않아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을 내고 우울하고 악하고 건전하지 못한 법이 그를 공격하면 그는 그러한 수호를 실천하여 시각능력을 보호해야(cakkhundriyaṃ saṃvaraṃ)한다.(S.N.Ⅳ.175)

 

 

4). 입처(āyatana)와 根(indriya)의 비교

 

“육근과 육경은 우리의 감각기관과 외부에 존재하는 감각기관의 대상을 의미하지만 십이처는 세계와 자아가 마음에서 연기한 것이라고 할 때, 이렇게 연기하는 세계와 자아의 근본이 되는 중생의 마음입니다.”p.202

 

`

"육입이 육근이라면 부처님이 무명을 멸하지 못했거나 부처님이 거짓말을 하신 것이 됩니다."p.202

 

(1). 차이점

1.āyatana는 일반적으로 장소, 영역이라고 사용되는데 6입에 사용될 경우에는 단순한 물질적 장소가 아니고 감각이 일어나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감각장소, 감각영역 이라고 번역된다.

indriya는 인간이나 사물 그자체가 가진 고유한 능력을 가르키는 말이다. 그래서 감각기관이 가진 고유의 기능이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요구되는데 완전한 감각능력의 회복은 해탈이라고 말해진다.

 

2.āyatana는 6내입처(內 ajjhattāyatana), 6외입처(外bahirayātana)로 모두 12개로 나누어 설명되는데 이것을 12입처라고 한다. 이 12입처는 식이 발생하는 과정을 설명할 때 근,경,식으로 설명되는데 여기에서의 근경은 내입처와 외입처이고 한문으로는 六根, 六境으로 설명된다.

indriya는 āyatana처럼 내입과 외입으로 나누어 지지 않는다. 식이 발생하는 과정을 설명할 때 根, 境, 識의 根은 indriya가 아니다. indriya는 대상에는 붙지 않고 감각기관에만 홀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3.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에 āyatana는 삼매상태로 설명된다. 색계사선에 āyatana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고 사무색계 삼매에서만 āyatana가 사용되는 것은 무색계정은 명상주제의 변화에 따라 얻어지는 삼매이기 때문이다.(청정도론 정품에서 40가지 명상주제를 설멸할 때에 무색계 4처가 하나하나의 명상주제로 언급된다). āyatana와 같이 내입(주관) 객관(외입)에 모두 붙는 단어는 界(dhātu)가 있다. indriya는 중도적 수행방법으로 설명되는데 5根(pañcaindriyānī)은 믿음의 기능(saddhindriya), 정진의 기능(viriyindriya), 마음챙김의 기능(satindriya),삼매의 기능(samādhindriya),지혜의 기능(paññindriya)이다.

 

4.사념처 수행에서 법념처의 육입(āyatana)은 오온과 마찬가지로 명상의 대상으로 주어진다. 육입의 관찰은 단지 감각영역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감각영역에서 어떻게 탐진치가 발생하고 소멸하는가를 관찰하는 것이다.

사념처 수행을 통해서 indriya는 청정해지고 본래의 기능을 성취한다.

 

 

(2). 공통점

āyatanā와 indriya는 모두 잘 길들이고 수호하고 보호해야 할 것으로 설명된다. 눈이 식이 일어나는 장소, 영역으로 설명될 때는 āyatanā가 사용되고 눈의 보는 고유한 기능을 설명할 때는 indriya가 사용된다. 안근과 안입처는 같은 것을 다른 관점에서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4. 아함과 니까야의 비교

 

1).6입처에 관한 경전

12처를 허망한 마음상태로 보는 사상적인 이유는 12연기와 반야심경에 대한 오해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경전의 해석에서도 유래한다. 여기서는 일단 경전에서 사용되는 āyatana의 일반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12연기와 반여심경은 뒤에 다루도록 하겠다.

이중표 교수는 다음과 같은 잡아함경(二三九, 二四○)를 인용하여 6입이 번뇌에 묶여 있는 허망한 마음 이라고 설명한다.

 

我今當說結所繫法及結法。云何結所繫法。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是名結所繫法。云何結法。謂欲貪。是名結法。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번뇌에 묶여 있는 것과, 묶고 있는 것을 이야기 하리라. 어떤 것이 번뇌에 묶여 있는 것인가? 眼色,耳聲, 鼻香, 舌味, 身觸, 意法 이것이 번뇌에 묶여 있는 것이라 부른다. 어떤 것이 묶고 있는 것인가? 욕탐, 이것을 묶고 있는 것이라고 부른다.”-p.222-

 

世尊告諸比丘。我今當說所取法及取法。云何所取法。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是名所取法。云何取法。謂欲貪。是名取法。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이르시되 “내가이제 취해지는 법과 취하는 법을 이야기하리라. 어떤 것이 취해지는 법인가? 眼色,耳聲, 鼻香, 舌味, 身觸, 意法 이것을 취해지는 법이라 부른다. 어떤 것이 취하는 법인가? 욕탐, 이것이 취하는 법이다.”-p.224-

 

 

위 경전에 상응하는 상윳따 니까야의 [속박경]과 [취착경]을 소개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속박되는 것(saññojaniyā dhammā)과 속박하는 것(saññojanaṃ)에 대하여 설하겠다. 잘 들어라.

비구들이여, 물질(수상행식)은 속박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이 그것을 속박하는 것이다."(SN.Ⅲ.167)

 

"비구들이여, 나는 취착되는 것(upādāniyā dhamma)과 취착하는 것(upādānaṃ)에 대하여 설하겠다. 잘 들어라.

비구들이여, 물질(수상행식)은 취착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이 그것을 취착하는 것이다."(SN.Ⅲ.167)

 

위와 같은 경전을 니까야에 비교해 보니 속박되는 것, 속박하는 것은 수동과 능동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잡아함의 ‘묶여 있는 것’(結所繫法), ‘묶고 있는 것’(結法)은 수동과 능동을 살려서 ‘묶이는 것’과 ‘묶는 것’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러한 경전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12처는 욕탐이라는 번뇌에 묶여있는 우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라는 해석은 터무니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 경전을 더욱 자세히 설명하는 상윳따니까야의 [꼿티까 경]을 보면 6입이 어떠한 의미이고 상태인지 자세히 알 수가 있다.

 

[꼿티까] 벗이여, 싸리뿟따여,

눈이 형상들에게 묶인 것인가, 형상들이 눈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귀가 소리들에 묶인 것입니까? 소리들이 귀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코가 냄새들에 묶인 것입니까? 냄새들이 코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혀가 맛들에 묶인 것입니까? 맛들이 혀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몸이 감촉들에 묶인 것입니까? 감촉들이 몸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마노가 법들에 묶인 것입니까? 법들이 마노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싸리뿟따] 벗이여 꼿티까여, 눈이 형상들에 묶인 것도 아니고 형상들이 눈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chandarāgo)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귀가 소리들에 묶인 것도 소리들이 귀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코가 냄새들에 묶인 것도 냄새들이 코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혀가 맛들에 묶인 것도 맛들이 혀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몸이 감촉들에 묶인 것도 감촉들이 몸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마노가 법에 묶인 것도 법이 마노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싸리뿟따] 󰡒벗이여, 예를 들어 검은 소와 흰 소가 하나의 밧줄이나 멍에줄에 묶여 있다고 합시다. 누군가 검은 소가 흰 소에 묶여 있다던가 흰 소가 검은 소에 묶여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옳게 말하는 것입니까?󰡓

[꼿티따] 󰡒벗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검은 소가 흰 소에 묶여 있지 않고 흰 소가 검은 소에 묶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의 밧줄이나 멍에줄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싸리뿟따] 󰡒벗이여 이와 같이 눈이 형상들에게 묶인 것도 아니고 형상들이 눈에게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중략

[싸리뿟따] 벗이여, 눈이 형상들에 묶이고 형상들이 눈에 묶여 있다면, 올바로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한 청정한 삶을 시설할 수 없습니다.

벗이여, 눈이 형상들에 묶이지 않고 형상들이 눈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 탐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로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한 청정한 삶을 시설할 수 있습니다.

..............중략

벗이여, 세존께서도 눈이 있습니다. 세존은 그 눈으로 형상을 봅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욕탐이 없으므로 세존의 마음은 잘 해탈되어 있습니다. (SN.Ⅳ.163. Koṭṭhitasutta)

 

 

위에서 본 것처럼 묶여 있는 것(結所繫法)과, 취해지는 법(所取法)이란 내입처와 외입처로 나누어진 12처를 말한다. 내입처와 외입처의 양자를 조건으로 생겨난 욕탐이 묶는 법(結法), 취하는 법(取法)이다. 이중표 교수는 12처를 ‘묶이는 법’으로 보지 않고 ‘번뇌에 묶여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바람에 12처를 “허망한 마음”으로 오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니까야의 설명은 분명하다. “눈과 형상이 서로 묶여 있다는 말은 맞지 않다, 검은 소가 흰 소에 묶여있는 것이 아니고 흰 소가 검은 소에 묶여있는 것도 아니라 이 두 마리 소는 모두 밧줄에 묶여있는 것이다. 그 밧줄이란 욕탐(chandarāgo)이다. 만일 눈이 형상들에 묶이고 형상들이 눈에 묶여 있다면,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신의 눈을 없애거나 파내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경전은 ‘눈이 형상들에 묶이지 않고 형상들이 눈에 묶여 있다면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한 수행(범행)은 불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눈이 형상들에 묶이지 않고 형상들이 눈에 묶여 있지 않다. 다만 그 양자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욕탐에 묶여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살아서 이 몸을 가지고 괴로움의 소멸이 가능하고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한 수행(범행)이 가능한 것이다.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 생겨난 욕탐(chandarāgo)의 밧줄을 끊으면 되기 때문이다. 세존도 눈이 있어 그 눈으로 형상을 보지만 세존은 욕탐(chandarāgo)의 밧줄을 끊었기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명확하고 합리적인 불교수행의 원리이다. 그런데 12처를 ‘번뇌에 묶여 있는 것’으로 해석하여 “12처는 우리의 허망한 마음에서 연기한 것이다.”라거나 “생사윤회의 중생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십이입처를 없애야 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르지 않은 주장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음으로 잡아함경 335번의 [제일의 공경]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자. 안타깝게도 이경전은 니까야와 상응하는 경전이 없다.

 

諸比丘。眼生時無 有來處。滅時無有去處。如是眼不實而生。生已盡滅。有業報而無作者。

“비구들이여, ‘보는 것’은 생길 때 온 곳이 없고, 사라질 때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은 부실하게 생겨서 생기면 곧 남김없이 사라지나니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p.215

 

이 경전에서 이중표교수는 眼을 안입처라고 보고 안입처를 ‘보는 것’ ‘보는 놈’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그가 정의하는 안입처는 "이렇게 보는 것을 안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안입처라고 하고, 보이는 것을 밖에 있는 세계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색입처라고 합니다.“p.214라고 말한다.

이중표 교수처럼 眼을 이해하고 위 경전을 다시 읽어보면

 

‘‘비구들이여, ‘안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생길 때 온 곳이 없고, 사라질 때 가는 곳이 없다. ‘안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부실하게 생겨서 생기면 곧 남김없이 사라지나니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라는 말이 된다.

이것은 ‘안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부실하게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말이 된다. 그는 안입처는 없애야 할 허망한 마음 이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이 경전은 무명이나 욕탐을 없애지 않고도 안입처가 생기고 사라진다. 무명이 생기거나 소멸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버려야 할 허망한 마음이라는 안입처가 수시로 생기고 사라진다는 말인가? 이 경전에서 眼은 대상이 나타나면 보는 작용이 나타나고 대상이 사라지면 보는 작용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눈과 대상이 만나는 장소, 눈이 대상과 만날 때 안식이 일어나는 장소로 봐야 한다.

 

청정도론은 눈과 형상이 만날 때 “우리가 만날 때 안식이 일어나기를” 이라고 생각하거나 바라지 않는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서로에게 ‘호기심도 없고 관심도 없는’ 안입처와 색입처를 “안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보는 놈(안입처)이고, 밖에 있는 세계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보이는 것(색입처)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음을 알수 있다.

 

 

다음으로 대구치라경의 해석을 보자. 특이한 것은 중아함 211경인 大拘絺羅經은 사리뿟따가 꼬띠까에게 물음을 전지는 경인데 이경에 상응하는 빠알리 Mahāvedalla sutta(MN.43)는 꼬띠까가 사리뿟따에게 질문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眼根。耳․鼻․舌․身根。此五根異行․異境界。各各受自境界。誰爲彼盡受境界。誰爲彼依耶。尊者大拘絺羅答曰。五根異行․異境界。各各自受境界。眼根。耳․鼻․舌․身根。此五根異行․異境界。各各受自境界。意爲彼盡受境界。意爲彼依。

“이렇게 오근은 각기 다른 경계를 상대로 활동하여 안근과 이비설신근은 각기 자신의 경계만을 인식하는데, 오근이 개별적으로 인식한 것은 어떤 것이며 그 경계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구치라가 대답했다. 오근이 개별적으로 인식한 내용은 모두 다 경계로 인식하는 것도 意며, 그 경계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意이다.” P.248

 

그는 意爲彼盡受境界。意爲彼依를 해석하면서 “그렇다면 의근이 인식한 사과는 우리의 몸밖에 있습니까? 그치라는 그렇치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구치라 존자는 의근이 대상이 되는 경계는 의근에 의지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p.251이와 같이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모든 사물은 그것이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p.252 라고 설명한다.

여기서도 마음이 만든다는 해석으로 이끌어 가는데 여기에 상응하는 마지마니까야 43번경은 설명은 그렇치 않다.

 

“벗이여, 오근은 각각 그들의 경계와 대상을 가지고 서로서로 경계와 대상을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입니다. 벗이여, 오근은 각각 그들의 경계와 대상을 가지지만, 서로가 서로의 경계와 대상을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이것들에게 마노는 의지처(paṭisaraṇaṃ)이고 마노가 그들의 경계와 대상을 경험합니다(paccanubhotī).” (MN.Ⅰ.296)

 

意爲彼盡受境界(mano ca nesaṃ gocaravisayaṃ paccanubhotīti)는 마노가 그들(오근)의 경계와 대상을 경험한다는 의미이고, 意爲彼依(Imesaṃ mano paṭisaraṇaṃ) 이것들(오근)에게 마노는 의지처라는 의미다. 오근들에게 마노는 의지처라는 말을 ‘인식한 사과는 우리의 몸 밖 있지 않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모든 사물은 그것이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라고 까지 확대 해석하고 있다. 그는 모든 걸 마음 안의 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허망한 마음이고 욕탐으로 된 것이니 없애라고 말한다.

 

 

2).오온에 관한 경전

12입처와 마찬가지로 그는 오온을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오온은 우리 마음에서 연기했다.”p.314

 

"오온은 촉에 따라 무상하게 생멸하는 현상이다. "p.321

 

그는 色蘊을 설명하면서 잡아함 46경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若可閡可分。是名色受陰。指所閡。若手․若石․若杖․若刀․若冷․若暖․若渴․若飢․若蚊․虻․諸毒虫․風․雨觸。是名觸閡。是故閡是色受陰。

"비구들이여, 그들은 무엇을 색이라 하는가? 비구들이여, 꺼리낀다. 그러면 거기에 색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무엇이 꺼리끼는가? 차가움이 꺼리끼고 뜨거움이 꺼리끼고 ....촉감이 꺼리낀다. 이와 같이 꺼리끼면 거기에 색이라는 말이 사용된다."p.358

 

이 경에 상응하는 니까야는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왜 물질이라고 하는가? 비구들이여, 파괴된다(rūppatīti)는 것 때문에 물질이라고 한다. 무엇으로 파괴되는가? 추위로서 파괴 되고 열기로서 파괴되고 굶주림으로 파괴되고 등에, 모기, 바람, 더위, 뱀과 접촉에 의해서 파괴된다. 비구들이여, 파괴된다(rūppatīti)는 것 때문에 물질이라고 한다.(SN.Ⅲ.86)

 

rūppati(rup+ya)는 파괴된다. 부수어진다. 변화된다.는 의미이다. (대림스님은 청정도론에서 변화된다는 의미로 번역했다) 是故閡是色受陰이라는 문장은 “파괴된다(rūppatīti)는 것 때문에 물질이라고 한다.”(Ruppatīti kho bhikkhave, tasmā rūpanti vuccati.)라는 문장의 번역일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이와 같이 꺼리끼면 거기에 색이라는 말이 사용된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엉뚱한 것이다. rūppati(파괴된다. 부수어진다.변화된다)라는 단어를 육근이 육경에 접촉하고 느낀다는 의미에서 ‘꺼리낀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을 뿐더러 是故閡是色受陰이라는 문장을 “이와 같이 꺼리끼면 거기에 색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해가 안가는 해석이다. 한문경전에서 rūppati는 閡로 번역되었다. 그는 이 단어를 ‘꺼리낀다’라고 해석하고 ‘꺼리낀다’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 경에서 ‘꺼리낀다’고 하는 것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눈과 빛은 볼 때 사용되는 '말'이고, 귀와 소리는 들을 때 사용되는 '말'이고 코와 냄새는 냄새 맡을 때 사용되는 '언어'일 따름이지, 실재 하는 물질은 아니다.”p.359

 

그는 이렇게 해석해 놓고는 ‘물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눈과 빛은 볼 때 사용되는 '말'일 뿐이고 오온의 색은 실재 하는 물질은 아니다’라고 色을 정의 내리는 것은 전혀 경전의 뜻과 맞지 않는 해석이다. 오온의 색이 실재 하는 물질이 아니라면 어떻게 “추위와 열기와 굶주림으로 파괴되고 등에, 모기, 바람, 더위, 뱀과 접촉에 의해서 파괴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모기들도 마음속의 모기들인가? 이 경전의 번역과 해설은 문제가 많아 보인다. 그는 이러한 이해와 해석을 바탕으로 “우리가 허망한 생각으로 나라고 집착하고 있는 다섯가지 망상을 부처님께서는 오온이라고 부른 것입니다.”p.17라며 오온을 의식 상태로 이해한다. 뿐만 아니라 “5온, 12처,18계, 12연기등이 집성제에 해당합니다”p.53라고 말하고 있듯이 모든 것을 의식상태로 바라본다.

 

다음으로 잡아함 61경의 해석을 보자.

有五受陰。何等爲五。謂色受陰受․想․行․識受陰 云何色受陰。所有色。彼一切四大。及四大所造色。是名爲色受陰。復次。彼色是無常․苦․變易之法。若彼色受陰。永斷無餘。究竟捨離․滅盡․離欲․寂沒。餘色受陰更不相續․不起․不出。是名爲妙。是名寂靜。是名捨離。一切有餘愛盡․無欲․滅盡․涅槃。

“다섯 가지 수음(受陰)이 있다. 어떠한 다섯인가? 이른바 색수음(色受陰), 수수음(受受陰), 상수음(想受陰), 행수음(行受陰), 식수음(識受陰)이 그것이다.

어떤 것을 색수음(色受陰)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色으로 되어있는 것으로서, 이는 일체의 사대와 사대로 이루어진 것이니(四大所造色),이것을 색수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색 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변역하는 법이다. 만약 저 색수음을 영원히 끊어서 남음이 없게 하고 ,마지막까지 버리고 떠나 멸진하며, 그것에 대한 욕탐을 버려 마음을 고요히 하면 다른 색수음이 다시 상속하지 않고 생기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다.“p.355

 

이중표 교수는 이 경전의 若彼色受陰 永斷無餘를 해석하면서 “부처님이 끊어 없애라고 하는 색이,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사대로 된 물질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경의 말씀은 몸을 없애라는 말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열반은 곧 죽음을 의미하게 됩니다.” 라고 염려하고 있다. 그의 염려가 옳은 것인가?

이 경전에서 色受陰은 오취온(rūpaupādānakkhandha)을 말하는 것이다. 구역(舊譯)에서는 取蘊의 取와 蘊을 각각 受 와 陰으로 번역했다. 그러므로 이 경전은 오온에 대한 취착(upādāna)을 영원히 끊고 離欲하면 그것이 갈애가 다한 열반이라는 이야기이다. 色受陰을 永斷하라는 말이지 色陰을 버리고 죽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경전에서는 오취온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고 오온과 오취온은 다른 것이다. 상윳따니까야에서 설명하는 오온과 오취온의 차이점을 소개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오온과 오취온에 관해 설하겠다. 잘 들어라.

비구들이여, 오온란 어떠한 것인가? 비구들이여, 어떠한 물질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이와 같은 것을 색온이라고 부른다.

비구들이여, 오취온이란 어떠한 것인가? 비구들이여, 어떠한 물질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번뇌를 속성(sāsava)으로 하고 취착된(upādāniya) 것이면 무엇이든지 색취온이라고 부른다.(SN.Ⅱ.47)

 

그런데 그는 色受陰을 色陰으로 이해하고 이 경전에서 이야기 하는 색온을 2가지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일체의 사대와 사대로 이루어진 것”(彼一切四大 及四大所造色)인데 이것은 중생들이 생각하는 색온이고 두 번째는 “그런데 그 색 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변역하는 법”(復次 彼色是無常․苦․變易之法)인데 그 것은 부처님이 깨달은 색온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色을 “사대와 사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한다고 해서 그것을 중생들이 생각하는 색온이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오온과 명색의 色은 몇가지로 나누어서 이해되어야 한다.

a. 色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있는데, 이것은 각각 원자적인 요소로서의 기세간(우주)과 중생세간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가장 큰 의미의 色이다.

b. 삼계를 욕계,색계, 무색계로 나누어 설명할 때 색계의 色을 의미한다. 초선에서 4선을 색계 선정으로 설명한다.

c. 이차적 물질(조도색)인 중생의 여섯가지 감각영역(육근)들이다. 이 때의 色은 육체이다. 名(정신)은 감수(受) 지각(想) 의도(思) 접촉(觸) 숙고(作意)가 있다. 이것을 합해서 名色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오온이다.('云何名 謂四無色陰 受陰想陰行陰識陰') 곧 명색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名色)로 설명이 된다.

d. 사념처의 몸 관찰에서 지수화풍(地水火風)은 땅은 '견고성' 물은 '화합하는 유동성' 불은 '열성(온도)' 바람은 '운동성' 을 나타낸다.

이것은 각각 '견고성(地)'은 뼈, 살, 손톱, 치아 등의 20가지, '유동성(水)'은 침, 가래, 피등의 12가지, '열성(火)'은 소화작용, 몸의 온도등의 4가지 '운동성(風)'은 들숨, 날숨, 창자의 가스, 방귀등 6가지로 나누어 설명된다.

e. 사념처의 느낌 관찰에서도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설명되는데 이때는 '견고성(地)'은 딱딱한 느낌이며 '유동성(水)' 습한 느낌이며 '온도(火)'는 따듯하고 차가운 느낌이며 '운동성(風)'은 움직이는 느낌으로 설명된다.

 

이처럼 청정도론에서는 근본물질인 지수화풍(地水火風)과 파생물질을 24가지로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사대와 사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한다고 해서 그것을 중생들이 생각하는 색온, 즉 없애버려야 할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처음부터 오온이나 12처를 중생의 허망한 마음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이 경전도 그렇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3).‘버려라’ ‘소멸시켜라’에 대한 이해

그는 여러 경전을 인용하여 육입처가 허망한 것이고 멸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빠알리 경전을 해석하면서 까지 육입처가 허망한 것이고 멸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은 그가 상윳따니까야의 [두 번째 내부의 무상 경]을 번역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眼은 무상하다. 현재의 眼도 마찬가지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박식하고 훌륭한 성문은 과거의 眼에 기대지 않고 미래의 眼을 즐기지 않으며, 현재의 眼의 厭離와 離慾과 止滅로 나아간다.” (SN.Ⅳ.4)

다음은 위와 같은 경전을 번역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과거나 미래의 눈은 무상한 것이다. 하물며 현재의 눈은 무상하지 않겠는가?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보고 배운 고귀한 제자는 과거의 눈을 기대하지 않고 미래의 눈을 즐거워하지 않고 현재의 눈을 혐오하기 위하여(nibbidāya厭惡), 이욕하기 위하여(virāgāya離慾) 소멸하기 위하여(nirodhāya消滅) 실천한다.(SN.Ⅳ.4)

 

여기에서 혐오하기 위하여(nibbidāya厭惡), 이욕하기 위하여(virāgāya離慾) 소멸하기 위하여(nirodhāya消滅) 실천한다는 의미는 눈을 소멸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순서대로 등장하는 厭離와 離慾과 止滅은 수행의 방법으로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들로서 무상/고/무아를 알고 보아서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경전은 더욱 자세히 유혹/위험/벗어남을 알고 욕탐을 소멸하라고 말한다.

 

“눈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줄거움과 만족이 눈의 유혹(assādoa이다. 눈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여 부서지는데 그것이 눈의 위험(ādīnava)이다. 눈에 대한 욕탐(chandarāga)을 제어하고 욕탐을 버리는 것이 눈에서 벗어남(nissaraṇa)이다.”

(SN.Ⅳ.7)

 

다음은 물질을 버리라고 말하는 경전이다.

"비구들이여, 그대의 것이 아닌 것을 버려라(pajahatha). 그것을 버리는 것이 그대에게 이익과 안락이 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그대의 것이 아닌가?

비구들이여, 물질이 그대의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버려라. 그것을 버리는 것이 그대에게 이익과 안락이 될 것이다.(SN.Ⅲ.34)

 

이 경전에서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色을 버리라고 말하는 것이지 오온중의 色을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니까 물질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집착’을 버리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중표 교수는 ‘소멸시키라’ 거나 ‘버려라’는 의미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색을 버리라’ ‘눈을 소멸시키라’라는 말로 이해하고 이 문제를 모순 없이 해결하기 위하여 색도 ‘허망한 마음’ 눈도 ‘허망한 마음’이라고 엉뚱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바른 방법이 아니다. 이렇게 오해할만한 표현들은 다른 경전들과 비교 검토해서 이해하여야 한다. 다른 경전들과 검토해 서 이해 한다면 ‘눈을 버리라’ 라는 말은 눈에 대한 욕탐이나 갈애를 버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 12연기에 대하여

“제가 공부하면서 제일 걸렸던 문제는 왜 무명이 멸하면 육입이 멸한다고 하는 것인가 였습니다. 반야심경을 보면서도 왜 제법이 공한 가운데는 眼, 耳, 鼻, 舌, 身, 意 ,色,聲, 香, 味, 觸, 法 이 없고 안계내지 의식계가 없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2입처가 6근과 6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세계를 분멸하는 우리의 근본 분별심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서는 12연기나 반야심경의 말씀이 머무나 당연한 이야기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p.203-

 

"우리가 무명을 깨쳐서 정각을 성취하면 정말로 눈도 사라지고, 코도 사라지는 것일 까요? 부처님은 무명을 멸했지만 눈도 그대로 있었고, 코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 까요?"

 

이러한 그의 주장은 12연기에 대한 이해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12연기는 다음과 같은 경전(DN.15, MN.38, SN.Ⅱ.3)들의 근거를 들어 삼세양중인과로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다. 상윳따니까야의 분별경(SN.Ⅱ.3)은 태어남을 구체적으로 오온이 나타남(khandhānaṃ pātubhāvo), 감각기관을 획득함(āyatanānaṃ paṭilābho)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디가니까야의 대인연경에서 12연기에서의 識이란 우선 재생연결식임을 이렇게 설명한다.

 

[세존]“識을 조건으로 名色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식을 조건으로 名色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한다. 아난다여, 만일 識이 모태에 들지 않았는데도 名色이 모태에서 발전하겠는가? [아난]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세존]識이 모태에 들어간 뒤 잘못되어 버렸는데도 名色이 그러한 상태를 생기게 하겠는가? [아난]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아난다여, 識이 동자나 동녀와 같은 어린아이일 때 잘못되어 버렸는데도 名色이 향상하고 중장하고 번창하겠는가? [아난]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名色이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識이다.”(DN.15)

 

12연기를 찰라 연기로만 보려는 시도는 6입과 名色과 生老病死를 단순히 마음상태로 간주하게 된다. 이러한 이해는 12지 연기와 6지, 8지 연기의 차이점을 구분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根, 境, 識의 根에서 시작하는 6지 연기(근,경,식,촉,수,애)에서는 근과 경(내입처와 외입처)는 결코 소멸하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느낌에서 생겨난 지금의 갈애를 소멸시키는 것만을 줄기차게 설명한다. 12연기에서 언급되는 6입의 소멸은 금생에 갈애를 소멸시키면 다음 생의 6입(몸)의 발생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二世, 一世 안에서 설명하는 6지,8지 연기에서는 6입의 소멸은 언급되지 않는다. 단지 根-境-識-접촉-감수에서 발생하는 갈애의 소멸만이 줄기차게 언급된다. 이것은 지금여기에서 고의 소멸을 천명하는 사성제의 가르침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삼세양중인과는 과거.현재,미래의 윤회를 12가지 고리로 설명하는 원리이다.

 

무명-행은 과거의 因,

식-명색-육입-접촉-감수는 현재의 果 ,

갈애-취착-존재는 현재의 因,

생-노사우비고뇌는 미래의 果

로 설명된다.

 

이처럼 시간으로 보자면 3세를 걸치고 인과로 보자면 양중인과(두 다발의 인과)로 설명되는 것이 12연기이다. 여기에서 무명과 행이 멸하여 결국 육입이 멸한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과거와 현재라는 2세의 간격을 감안하고 이해해야 한다. 현재를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현재의 어떤 사람(식-명색-육입-접촉-감수)이 통찰의 수행을 통하여 번뇌(무명-행-갈애-취착-존재)를 없애버리면 미래의 태어남(식-명색-육입-접촉-감수-생-노사우비고뇌)이 없다는 의미이다.

 

12지연기에서 무명이 멸하면 육입이 멸한다는 뜻은 과거의 번뇌(무명-행-갈애-취착-존재)가 소멸하면 현재의 태어남(식-명색-육입-접촉-감수-생-노사우비고뇌)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또 현재의 번뇌(무명-행-갈애-취착-존재)가 소멸하면 미래의 태어남(식-명색-육입-접촉-감수-생-노사우비고뇌)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12지 연기가 삼세에 걸쳐 설명되는 논리라는 것을 알면 “무명을 깨쳐서 정각을 성취하면 정말로 눈도 사라지고, 코도 사라지는” 단멸론으로 해석될 여지는 없는 것이다.

 

 

5). 반야심경에 대하여

“대부분의 불교교리 소개서에서 오온은 물질과 정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오온이 이와 같은 것이라면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모두 비어 있음을 보게 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내용이 됩니다. 온 세상이 이렇게 텅 비어 버리면 아무것도 없는 허무가 될 것입니다.”-p.16-

 

“반야심경에서 無 眼, 耳, 鼻, 舌, 身, 意 할때도 그것은 육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입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p.216-

오온개공의 산스크리트 원문은 다음과 같다.

pañca-skandhāḥ tām ca svabhāva-śūnyān paśyati

“다섯 무더기(五蘊)들이 있는데, 그것이 실체(自性)가 空함을 확실히 보신다.”

 

그러므로 五蘊皆空이란 五蘊에 自性(svabhāva)이 없다(śūnyān)는 말이지 오온이 없다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온개공을 오온이 없다고 이해해서는 안되고, 오온이 중생의 육체와 몸이라면 불교가 단멸론이 된다는 생각은 빗나간 상상이다.

반야심경은 이어서 是諸法空相으로 이어지면서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으로 이어지면서 오온,12처,18계등의 온각 법수를 부정하는 표현이 이어지는 데 이것은 초기불교에서는 볼 수없는 표현들이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五蘊에 自性(svabhāva)이 없다는 의미와 다른 것이 아니다. 단지 오온에 자성이 없다고 하니까 “그러면 오온,12처는 있구나!”라는 법상을 깨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無眼耳鼻舌身意라 하여도 눈,귀,코,혀가 없어 진다는 식으로 이해 해서는 안 된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五蘊에 自性(svabhāva)이 없다는 아함경과 니까야의 無我사상과 같은 의미이다.

결론적으로 이중표 교수가 반야심경의 眼耳鼻舌身意가 육근(인드리야)이 아니라 12처이기 때문에 당연히 無眼耳鼻舌身意가 되어야 한다는 설명은 오온개공을 오온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이것은 12처를 버려야할 허망한 마음이고 육근(인드리야)는 버려지지 않는 것으로 오해한 결과이기도 하다.

 

 

5.나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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