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수행-바로 알고 하자
우리는 지금까지 ‘깨달음을 열반에 이르는 수단’으로 파악하고 ‘열반을 위해 바른 수행을 해야 한다’는 점을 말해왔다. 이를 인정할 때 우려되는 것은 수행의 중요성 문제다. 혹시 깨달음의 중요도가 반감됐으니 수행의 중요도도 반감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도 수행의 중요성은 전혀 반감되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하던 수행을, 열반의 성취를 위해 하는 것으로 대상만 바꾸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행의 필요성은 더 높아진다.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이상한 환상을 불러오는 반면, 열반을 위한 수행은 인격적 변화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다.
사실 지금까지 말해온 논의구조에서는 ‘깨달음을 위한 수행’이라는 방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수행 방법이기보다는 자주 설법을 듣고 가치관 또는 인식의 전환만으로 가능한 일인 까닭이다. 설법을 열심히 듣고 책도 많이 읽고 생각을 바꾸었으니 그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를 수행이라고 말할 것은 없다. 굳이 말한다면 수행의 예비단계, 또는 종교적 회심(回心)의 단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교진여를 비롯한 다섯 비구나 그 밖의 제자들은 부처님의 설법만 듣고도 불교의 진리를 이해했다. 그들은 수행을 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진지한 설법과 토론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그들도 열반을 얻기 위해서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 또는 가치관의 전환만으로는 부족하다. 부처님이 가르친 여러 가지 수행법, 즉 삼학이나 사념처, 팔정도 같은 구체적 덕목의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이런 수행은 결과적으로 인격을 바꾸어주며 삼독심을 제거해서 열반으로 이끌어 준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진리를 바르게 알면 알수록 더욱 진지하게 열심히 수행했던 것이다. 깨달음을 위한 수행과 열반을 위한 수행은 이렇게 목적과 방법, 결과에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것을 오해했다. 열반을 위한 수행이 아니라, 깨달음을 위한 수행에 몰두함으로써 그 치열하고 진지한 내공(內功)을 무위로 돌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 가지 더 정리하고 넘어갈 일은 우리가 불교를 하는 이유 또는 목적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지식의 축적 또는 철학적 탐구를 위해 불교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불교 수행을 하는 것은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다. 또한 중생적(衆生的)인 인격을 불타적(佛陀的) 인격으로 상승시키고자 불교를 한다. 따라서 불교 수행을 오래 하면 할수록 인격에서 향기가 나야 한다.
이는 불교가 철학이 아니라 종교라는 점에서 더욱 명백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한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적 수행을 소홀히 하는 데서 생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깨달음에 대한 환상이 도덕적이고 구체적인 수행덕목을 소홀하게 여기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선수행을 한 사람이 많은 불교종단에서 비도덕이고 목불인견의 사건이 자주 생기는 것은 수행자들이 무엇을 위해 어떤 수행을 했느냐를 말해주는 증거라고 해도 좋다.
불교적 수행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팔정도의 실천이다. 그것만 실천하면 인격의 변화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 당시의 얘기를 기록한 경전을 살펴보면 이를 뒷받침할 실증적 사례는 얼마든지 많다. 부처님은 한 경(잡아함 4권 1136경 《月喩經》)에서 수행자의 변화된 인격이 어떻게 얼굴에 나타나야 하는가를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음식을 얻기 위해 재가자의 집에 가고자 하거든 마땅히 달과 같은 얼굴을 하고 가라. 마치 처음 출가한 신참자처럼 수줍고 부드러우며 겸손하게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가라. 또한 훌륭한 장정이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고 높은 산을 오를 때처럼 마음을 단속하고 행동을 진중하게 하라.
마하카사파는 달처럼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처음 출가한 신참자처럼 수줍고 겸손하고 부드러우며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얼굴로 재가를 찾아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얼굴을 가질 수 있는가. 팔정도를 하나하나 닦아나가다 보면 수행자의 인격은 자연스럽게 성자의 얼굴을 닮아가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이 팔정도의 수행은 열반을 가능하게 한다. 때문에 잡아함 18권 490경 《염부차경(閻浮車經)》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부처님이 장로제자 사리풋타(舍利弗)와 함께 마가다국의 나알라라는 마을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사리풋타의 옛친구 잠부카다카(閻浮車)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잠부카다카는 외도를 따르는 수행자였는데 부처님의 명성을 듣고 그의 제자로 있는 사리풋타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가 사리풋타를 찾아온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궁금증을 물어보고자 해서였다. 그는 무려 40여 가지의 중요한 주제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포함돼 있다.
“친구여,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네. 당신의 스승은 자주 열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도대체 열반이라는 것은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인가.”
“친구여, 열반이란 것은 탐욕이 영원히 다하고, 분노가 영원히 다하고, 어리석음이 영원히 다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네(貪慾永盡 瞋쨌永盡 愚癡永盡 是名涅槃).”
“그러면 한 가지만 더 묻겠네. 우리가 그 열반에 이르려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열반을 얻게 되는가.”
“열반으로 가는 길을 물었는가. 그 길은 여덟 가지가 있네. 이를 팔정도라 하네. 팔정도란 바른 소견(正見), 바른 사색(正思),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직업(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생각(正念), 바른 명상(正定)이네. 어떤 사람이든 이 여덟 가지 길을 걷게 되면 열반에 이를 수 있네.”
사리풋타의 간명한 대답을 들은 잠부카다카는 기쁜 얼굴로 돌아갔다.
이 경에서 주목할 점은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온 깨달음과 열반의 논리구조다. 여기서 깨달음이란 열반에 대한 바른 이해를 말한다. 그리고 수행이란 거기에 이르기 위한 팔정도의 실천을 말한다.
(홍사성님 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