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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화경 수행

[스크랩] 선요의 중심사상

작성자진여혜|작성시간06.01.06|조회수176 목록 댓글 6

 

 

 

 

선요의 중심사상

 

 

 


 선요는禪의 요령』을 간추려 설명한 책이다.

저자 고봉스님은 혜능문하 23 대며 임제문하 17 대 손으로

석성은 서씨 이고 이름은 原妙, 호가 고봉이다.

 

『선요(禪要)』의 구조와 각 편의 중심사상

 

 이 책은 모두 29편의 본문과 서문, 발문을 합하여 31편으로 되어 있다 .

개당보설(開當普說)이 맨 앞에 놓여 있고 실중삼관(室中三關)이 맨 뒤에 실려 있다.

그리고 중간에는 인연에 따라서, 목은 시제(時除)에 따라서 법문한

시중(示衆)이 있고,

 

 뒤에 가서 두 편의 편지글이 들어 있다.

결제 때에 한 법문 (示衆)이 세 편이요, 해제 때에 한 법문이 두 편이다.

평상시에 한 법문이 12편이고 제야에 법문한 것이 두 편이다.


 개당보설이란 주지로 부임하면서 하는 부임법문을 말한 것이요,

실중삼관이란 참선의 요지를 간략하게 세운 좌우명과 같은 것이다.

방장실의 실훈(室訓)이다, 거사에게 보인 법문이 두 편이요.

수좌에게 보인 법문이 한 편이다.


 편지 글은 모두 두 편인데 거사에게 보낸 것이 그 하나요,

스님에게 보낸 편지가 그것이다. 이 두 편의 편지는 물음에 답한 것으로 답장이다.

한계를 그려 놓고 대중에게 법문한 입한시중(入限示衆)이 있고

 단오절(瑞障)에 법문 한 단양시중이 있다.


 저녁 때에 대중을 모아놓고 법문 한 만참(晩參)이 있다.

시중(示衆)이란 글자 그대로 대중들에게 법문의 요지를 드러내 보임이다.

개인에게 드러내 보임은 시중이 되지 못한다.

이 글은 대부분이 시중이며 연결되는 법문이 아니다.


 어느 대목을 찾아 읽더라도 모두가 선의 요결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전체적인 중심사상은 이미 위에서 결명한 바와 같다.

나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그에 대하여 수행의 요결을 말했으니

신심과 분심과 의심을 고루 갖출 일이다.


 이 책은 '개당보설' 만 제대로 읽어도

고봉화상이 무엇을 얘기하고자 했는가를 당장에 알 수가 있다.

각 편마다 나타내고 있는 사상이 대동소이하다. 특별한 것이 없다.

같은 내용의 반복이다, 어느 대목을 읽더라고 거기서 거기다.

제1편에서도 열심히 정진하라는 내용이요.

제28편에서도 역시 눈코를 쥐어뜯어가며 열심히 정진하여

생사문제를 해결하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 이는 이 비슷한 내용 중에서

뭔가 다른 점을 발견해야 한다.


 이 책은 사람의 모습과 같다. 동양사람이나 서양사람이나 구조가 똑같다,

일본사람이나 중국사람이나 한국사람이나 거기서 거기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다 같은 주조 혹에서도 다른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비슷한 피부를 갖고 있는 동양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는 뭔가 다른 점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뭘까 바로 정신적 문화다.

 

 같은 한국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르다, 언어가 같고 피부가 같고

생활풍속이 같다,

그러나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의 얼굴이 다르다,

목소리가 다르고 제스추어가 다르다.

손짓발짓에서부터 온갖 동작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똑같지는 않다.

그것은 바로 느낌으로 온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각 편 내용이 비슷비슷하면서도

우리들은 거기서 다른 맛을 느끼게 된다.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각기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언어의 마술이다. 똑같은 내용을 같은 말로 되풀이 했더라도

시간에 따라 달리 느껴지게 마련이다.

읽는 이들이 어느 대목에서건 자기와 맞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로 서 족하다,

구태여 29편의 시중을 다 소화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노동 독서에 지나지 않는다.

각자 근기에 따르고 인연에 따라 자기 것으로 소화한다면 족하다.

그러므로 지정화상(持正和尙)이 스승의 말씀을 기록할 때도,

직옹거사(直翁居士)가 기록들을 편집할 때도 아마 그러한 마음에서 했을 것이다.

 

 이제 각 편의 담긴 내용들을 한 번 살펴본다

'개당보설(開當普說)'은 주지로 부임하면서 하는 부임법회다.

'개당'이란 말이 바로 그것이다.

'보설'이란 상·중·하의 모든 근기들을 위해

널리 이익을 입히는 법설(法說)이란 뜻이다.

개당보설은 이 어록 전체의 총체적 내용이다.

이 개당보설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인공으로 고봉화상과 한 수좌가 등장한다.

수좌는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을 들어 묻는다,

방거사의 게송은 다름과 같다.


시방이 함께 모여 와서(十方洞()會)
낱낱이 무위를 배우나니(箇箇學無爲)
이것이 곧 선불장이라(此是選佛場)

 

수좌의 물음에 고봉사상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위의 게송 낱낱구절에 대한 대답이다.

용과 뱀이 섞이고 범부, 성현이 교참하여
부처와 조사를 삼키고 건곤을 향해 부라린다.
등소가 십만리요, 남북이 팔천리로
적정에 떨어지지 않고 본분을 드날림이로다.

 

 참으로 멋진 대답이다. 수좌가

"어떤 것이 시방이 함께 모인 도리입니까."하고 물었는데

고봉은 용과 뱀이 섞이고 범부와 성현이 교참(敎參) 한다고 하였다.

본디 불법문중에는 초기(初機)와 구참(久參)을 묻지 않는다,

미와 추, 선과 악, 미움(惡)과 사랑(好), 깨끗함과 더러움,

성인과 범부, 번뇌와 보리를 모두 초월함으로써 무위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삼켜 버리고 조사를 향해 질타하며 하늘과 땅을 호통치고

눈을 부라리는 것이다.

무위를 배우는 수좌가 범부, 성현에 걸리고 부처와 조사에 걸리고

하늘과 땅에 걸리고 좋고 싫은 것에 걸린다면

어떻게 하나(一)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누구든 가리지 않는다.

만학(晩學)이든 초기든 다 모여와서 무제약을 배운다,

무제약이란 작위함이 없음 그대로다,

부처를 뽑는 선불장이다.

 

 수좌의 두 번째 물음에 입으로는 불조를 삼키고

눈으로는 건곤을 향해 부라린다는 대답도 좋으려니와

세 번째로 어떤 것이 선불장이냐는 물음에

"동서가 십만리요 남북이 팔천리.”라고 대답한

고봉선사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십만 팔천리'란 말은 무한대의 넓이를 말한다. 그

렇다면 삼천대천세계가 그대로 부처를 뽑는 과거장이라 해도 좋다 .

온 세상이 다 과거장인데 '모임'이란 말이 무슨 소용이며

'급제하여 돌아간다'는 말이 뭐 필요하겠는가.

고봉화상은 온 세계가 다 선불장이라 말한다.


 온 세계 모든 생명들, 사람 뿐만이 아니고 납자뿐만 아니라

용과 뱀에 이르기까지, 범부와 성현들 모두가 다 무위를 배워 부처가 되려 한다.

무위(無爲)란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고 어떤 작위도 없음이다.

그런데 부처와 조사를 마구 꾸짖고 하늘과 땅을 향해 눈을 흡 뜨고 부라린다.

이것이 무위냐? 고봉화상은 무위에도 떨어지는 것을 용서치 않는다,

무위에 떨어진다면 무위는 공적이다, 텅 비고 고요함이다.

공적에 떨어진다면 그것은 부처도 조사도 아니다, 차라리 범부만도 못하다.


 그는 네 번째 물음인

"어떤 것이 마음을 비워 급제하여 돌아감입니까?"하는 데 대하여 대답한다.

"적정에 떨어지지 않고 본분을 드날림이다."

온갖 동작 하나하나가 다 진공(眞空)과 묘유를 갖추고 있다.

진공하고자 하나 모유가 없다면 초기(梢機)에 떨어진다.

움직이는 동작마다 본래면목이 그대로 살아서 꿈틀댄다. 무엇을 비운단 말인가.

번뇌인가, 보리인가, 성현인가, 범부인가, 아니다.

이들 모두가 비움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초월이 있을 따름이다.


 개당보설은 이어진다.

수좌의 성불에 관한 문제가 대두된다.

고봉화상은 자신이 여는 개당보설에 대하여 자신만만하다.

산과 강, 온갖 대지와 삼라만상 온갖 사물과 생명이

있는 것(有情)과 생명 없는 것(無情)까지도 모두 성불하는 법회라 한다.

수좌는 묻는다. "그렇다면 저는 왜 성불하지 못합니까." 날카로운 질문이다.

고봉화상의 답변은 걸작이다.

"네가 만일 성불했다면 산과 강, 온갖 대지로 하여금 어떻게 성불하도록 하겠느냐,"

 

수좌는 의심을 품는다. 자존심도 상한다.

"제가 무슨 허물이 있습니까?" 말만 따라가는 자는 결코 본질을 잊어버린다.

똑똑한 사람은 현상에 얽매이지 않는다.

 

 옛날 춘추전국시대에 한(韓)씨 라는 이가 영리한 개 한 마리를 길렀는데,

이 개가 보는 데서 흙덩이를 던지면

아무리 영특한 개라 하더라도 결국 흙덩이를 좇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자는 좀 모자라는 듯하더라도 반드시 흙덩이 던진 사람을 달려들어 문다.

영리한 수좌라면 고봉화상의 언어에 얽매이지 않는다.

천하의 노화상(老和尙)의 말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고봉화상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바로 알아야 한다.

이 개당보설에서 분명히 알아차린다면

구태여 그 많은 시중(示衆)을 읽지 않아도 된다.

개당보설은 말의 낙처(落處)를 향하여 앞뒤와 좌우를 돌아보지 말고

바로 달려들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화두에 대하여 설명한다.

고봉화상 자신의 경험으로 보아 어떠한 화두 보다도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가 가장 의심이 잘 들린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신이 상경사에 주석하면서 경험한 일들을 얘기한다.


 화두가 순일하게만 들린다면 깨치지 못할 것이 없음을 강조한다.

문제는 화두의 순일이다. 의심에 만일 사이가 있다면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셈 치고 파 들어 가야 한다.

그리하여 출가한 본뜻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부모가 자식을 출가 시킬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는가를 실감하고

그 은혜에 보답코자 정진함이 출가인의 본분이다.


 만약 너와 나, 인(人)과 법(法)을 함께 잊은 곳에 다다른다면

삼승보살과 십지보살을 비롯하여 방거사가 무슨 대수로울 게 있겠는가.

그러나 백 척이나 되는 찰간대 위에서 한 걸음 더 내 디뎌야만

비로소 장부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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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보명 | 작성시간 06.01.06 온 세계가 다 선불장이다..... _()()()_
  • 작성자무사한 | 작성시간 06.01.06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라. 좋은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_()_
  • 작성자無位子(이경란) | 작성시간 06.01.06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_()()()_
  • 작성자대원성 | 작성시간 06.01.07 _()_()_()_
  • 작성자선우 | 작성시간 24.12.03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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