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다불교학술원 박은정 원장]
티벳트는 송첸캄포왕의 왕비 문성공주가 당나라에서 석가모니불상을 가져오면서부터
불교를 수용하기 시작하였지만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였고
8세기 티송데첸왕 때 비로소 정착되고 국가의 종교로 인정됨.
티송데첸왕이 불교를 본격수용하기까지 두 번의 대논쟁 - 티벳트 최초의 사찰 삼예사에서 있었던 삼예논쟁
1. 토착종교 뵌교(Bon)와 불교의 논쟁
티벳트의 기존 토착종교였던 샤머니즘 성격의 뵌교는 불교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문성공주가 모셔온 석가모니 불상을 끌어내려 땅에 묻고 그 위에 도축장을 만들고 불교를 탄압
그러나 티송데첸은 불교를 선호하여 뵌교세력의 대신들과 갈등
뵌교의 사제 겔풍의 저주로 왕이 큰 병을 얻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뵌교의 의식과 제사를 지냄
그래서 왕의 병이 낫자 다시 뵌교가 활개를 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선대 왕들의 숙원이었던 불교수용을 포기하지 않았던 왕은
인도의 고승 산트락시타를 초청하고 삼예사 건축을 시작하였는데
낮에 공사를 해 놓으면 밤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아침에 나가 보면 무너져 있어
뵌교 사제들은 "거 봐라, 신들이 노하셨다. 불교가 들어오면 안된다."
나라에 기근이 들고 역병이 돌아 민심이 굉장히 흉흉해졌다
그래서 다시 뵌교가 득세하였지만 티송데첸은 불교를 포기하지 않고
인도로 떠났던 산트락시타를 다시 모셔오는데 이때 파드마삼바바가 등장함
그런데 왕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에 뵌교와 불교 모두 참여하였는데
뵌교 의식에서 심한 살생이 행하여지는 것을 보고 인도에서 온 고승들이 크게 충격을 받고
"선업과 악업을 함께 행할 수는 없다. 한 나라에 두 종교가 함께 할 수 없다."
강력 반발하면서 "왕이 뵌교의 그런 행태를 허용하면 우리는 떠나겠다."
그래서 티송데첸 왕은 불교와 뵌교, 어느 것이 정법인지 가리는 논쟁을 제안
뵌교의 주술사들과 파드마삼바바의 신통력 경합도 포함, 모든 논쟁에서 불교가 승리
이에 왕은 불교를 정법으로 인정하여 국가적 종교로 공인하고 뵌교는 금지
(불교로 개종하든지 나라를 떠나든지 할 것을 명령)
-- 최초의 불교승려 배출, 불교식 이름 사용 시작, 전후 맹세를 삼보를 걸고 하기 시작
2. 중국불교 선종과 인도불교의 논쟁
중국 선종의 스님들(하샹,和尙)이 티벳트로 들어와 점차 활동범위를 넓혀 가면서 선(禪) 유행
* 윤회는 무념무상의 돈오적 깨달음으로 단박에 해탈 가능 (차제 교학 부정)
* 십바라밀은 인연없는 중생을 위한 것이고 둔근기를 위한 것 (선업 부정)
흰구름 먹구름 모두 태양을 가리듯 선업 악업 모두 불지를 장애 (모든 분별을 부정)
차제적으로 공부하는 것은 하열한 근기를 위한 것이며 선업도 필요 없고
마음의 성품을 보면 단박에 성불할 수 있다 (그들은 이것을 '만병통치약'이라고 함)
(먹기만 하면 모든 자잘한 병들은 다 없어지고 완쾌될 수 있는 명약처럼 그런 것)
- 티벳트인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져 선사들을 추앙하고 선공부 성행
- 그러나 선업과 교학의 부정은 불교 안에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불자들이 삼예사원에 참배도 잘 안 하고 보시도 별로 안 하려고 하면서 큰 혼란
왕은 "그러면 안된다. 인도스님들 가르침을 따르라" 선종 금지령을 내렸더니
선사들의 과격한 저항 (자신의 팔을 자르거나 자살하는 하샹도 있었다)
뵌교보다 더 과격한 반발에 직면한 왕은 고민을 하다가
어떤 것이 정견이고 사견인지 가리는 논쟁을 하게 함
선종의 부동선원(不動) 300명 하샹들은 문 닫고 4개월간 두문불출 논쟁을 준비
인도의 아사리 스님들은 고승 까말라쉴라를 초청하여 논쟁에 임함
인도의 전통적인 논쟁은 교조를 걸고 하는 방식 (지면 모두 개종)
왕의 제안 "패자가 승자에게 꽃다발을 주면 패배로 인정하는 걸로 한다"
논쟁의 결과는 인도 아사리 스님들의 승리로 끝나고
왕은 칙령을 내려 선종의 '만병통치약' 가르침을 금지하였다.
왕은 선종 스님들을 쫓아내지 않고 법당을 세워주었으나 스스로들 떠남
그러나 금지령을 수용하지 못하는 돈문파 제자들은 자객을 보내 까말라쉴라를 살해
큰 혼란이 있었지만 삼예논쟁으로 인도불교를 티벳트 정통불교로 인정하는 방향이 정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