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화큰스님 - 부처님 공부
반야를 모르는 사람들은
남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한 번 미운 사람은 밉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번뇌가 멸해서 실상을 바로 보게 되면,
모두가 비할 바 없이 청정한 부처님의 광명으로 빛납니다.
그런데 우리 무명의 눈으로는 바로 못 보기 때문에
미운 사람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따라서 죄는 밉게 보는 ‘나’에게 있습니다.
왜 남을 용서 못합니까?
우리가 늘 하는 말이 동체대비(同體大悲) 아닙니까?
동체대비란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만 가지 모습으로 다르게 보일지라도 본질에서는,
본성품에서는 모두가 다 한 몸인 부처란 뜻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대비(大悲), 큰 자비라고 합니다.
그냥 약삭빠른 인정이 아닙니다.
팔정도의 정견은
우주의 두두물물(頭頭物物)을
자타시비(自他是非) 없이
일여평등한 진여불성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진여불성 아닌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정견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사유입니다.
이런 견해로 남이 듣기 싫은 말을 하겠습니까?
“누구한테나 베풀라.”,
“말을 바르게 해라.”,
“남을 용서해라.”는 등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견만 굳건히 갖는다면
그렇게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 만약 그대가 자기 마음의 본체를 깨닫는다면
만 가지 덕이 다 갖추어 온다.’
고 하여
“약명요심(若明了心) 만행구비(萬行具備)”라 하는 것입니다.
마치 고기 잡는 그물의 코가 천 코 만 코 있다고 하더라도
양쪽 걸이를 쭉 잡아당기면 모든 코가 따라 오듯이,
‘우주는 모두가 다 청정무비한 마음뿐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화두를 들거나 염불을 하고, 또는 주문을 해야
참다운 염불이고, 참다운 화두입니다.
간혹 화두를 의심하는 것만이 참선이고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나 달마스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없습니다.
화두를 들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는 소리는
중국 북송 때에 임제 일파에서 한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조 오백년 동안
중국에서 청신(淸新)한 불교 기풍이
못 들어 올 때에 나온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화두를 의심하면 참선이고,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는 것은 전도몽상입니다.
그야말로 법집(法執)인 것입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법문은 주문으로 가는 문이나,
염불로 가는 문이나,
경(經)을 보는 문이나 다 문입니다.
심지어 복숭아꽃을 보고도 깨닫고,
길을 가다가 맑은 물을 보고 깨닫기도 합니다.
그런데 염불이나 경론(經論)이 참선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우리 마음이 상대 유한적인 상에 걸리지 않고,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정견을 갖는다면
어떠한 공부나 다 참선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나 알라신을 부르나 다 참선입니다.
출처: 청화큰스님 가장 행복한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