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정스님 - 왕위를 사양하는 형제
옛날에 십사라는 왕이 네 사람의 왕비를 거느리고 살았다.
첫째 부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라마라 했는데,
라마는 뛰어난 용기를 지닌 데다 힘이 장사여서
아무도 당해 낼 이가 없었다.
둘째 부인도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을 라만이라 했다.
셋째 부인한테도 아들이 하나 있어
이름을 바라타라 불렀고,
넷째 부인의 아들은 멸원악(滅怨惡)이라 했다.
왕은 네 부인 가운데
셋째부인을 가장 사랑하고 귀여워했다.
왕은 어느 날 셋째 부인에게 속삭였다.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에게 다 줄지라도 아깝지 않겠소.
그러니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지 내게 말하시오.”
“저는 지금 아무 것도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이다음 소원이 있으면 그때 말씀드리겠어요.”
왕은 그 소원을 들어주겠노라고 언약했다.
그 뒤 왕은 중병에 걸려 매우 위독해졌다.
그래서 첫째 부인이 낳은 태자 라마를
자기 대신 왕으로 삼고,
머리에 천관(天冠)을 씌워
위엄과 법도를 왕의 법과 같이 했다.
셋째 부인은 왕을 간호하다가
병이 조금 나아지는 걸 보고
자신의 지극정성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라마 태자의 왕위 계승을 보고
시기심이 생겨 왕에게 전날의 소원을 말했다.
“이제 제 소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컨대, 라마를 폐하고
우리 아들 바라타를 왕위에 오르게 하소서.”
왕은 이 말을 듣자 마치 목구멍에 무엇이 걸려
그것을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다.
이제 와서 큰아들을 폐하자니
이미 왕으로 세운 터요,
그대로 두자니 전날의 언약을 저버려야 할 지경이었다.
십사왕은 젊었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일이 없었다.
또 왕의 법에는 두말이 있을 수 없고,
먼저 한 말을 먼저 지키는 것이 그 도리였다.
왕은 사랑하는 셋째 부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라마를 왕위에서 폐하고, 그 의복과 천관을 벗겼다.
그때 둘째 아들 라만은 분개해 폐위된 형에게 말했다.
“형님은 뛰어난 용기와 힘이 있으면서
왜 이런 치욕을 당하십니까?”
형은 대답했다.
“부왕의 뜻을 어기면 불효가 된다.
그리고 셋째 어머니가 우리를 낳지는 않았지만
부왕이 그분을 사랑하고 좋아하시니
우리 어머니나 다름이 없다.
동생 바라타는 성품이 온화하고 유순해
조금도 다른 생각이 없는데,
지금 내가 폭력으로써
부모와 동생에게 해를 끼칠 수 있겠느냐.”
라만은 이와 같은 형의 말을 듣고서야 잠자코 있었다.
이때 십사왕은 첫째와 둘째 왕자를 나라 밖에 있는
깊은 산속으로 보내면서 열두 해가 지난 뒤에야
본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한다고 일렀다.
라마 형제는 부왕의 명을 받들어 조금의 원한도 없이
부모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고는
멀리 떨어져 있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바라타 왕자는 그동안 다른 나라에 가 있었는데,
곧 돌아오게 한 후 왕위에 오르도록 했다.
바라타는 예전부터 두 형들과 화목하게 지내며
공경하던 사이였는데,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부왕이 세상을 떠나 버린 뒤였다.
그는 이런 일이 모두 자기를 낳은 어머니가
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생모를 꾸짖었다.
“어머님은 어째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해
우리 집안을 망치려 합니까?”
그리고 큰 어머니를 그전보다 훨씬 더 공경했다.
바라타는 곧 군사를 이끌고 두
형이 머물고 있는 산속으로 달려갔다.
멀리 형들이 보이자 군사들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혼자서 형들 앞으로 걸어갔다.
바라타가 오는 것을 보고 라만이 형에게 말했다.
“형님은 전에 항상 우리 동생 바라타는
의리가 있고 겸손하고 공손하다고 칭찬하셨는데,
지금 군사를 거느리고 온 것을 보니
우리 형제를 죽이려는 모양입니다.”
형이 바라타에게 말했다.
“동생은 왜 군사를 거느리고 왔는가?”
그러자 바라타가 형에게 말했다.
“길에서 혹시 도적 떼를 만날까 두려워
군사를 데리고 왔을 뿐이며,
다른 뜻은 조금도 없습니다.
형님은 어서 본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맡아 다스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형이 대답했다.
“우리는 일찍이 부왕의 명을 받들어 이곳으로 왔는데,
지금 어떻게 돌아가겠느냐.
만일 우리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자식 된 도리가 아닐뿐더러
부모님에게 불효가 될 것이다.”
바라타는 몇 번이고 간청했지만
형의 뜻은 갈수록 굳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바라타는 형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형이 신던 가죽신을 얻어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새로 왕위에 오른 바라타는,
그 가죽신을 왕좌에 올려놓고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기를 마치 형을 대하듯 했다.
그리고 자주 그 산으로 사신을 보내어
형들이 돌아오기를 간청했지만,
그때마다 형들은 부왕의 뜻을 어길 수 없다면서
그 청을 거절했다.
그 뒤에도 바라타는 한결같이 자주 사신을 보내어
형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청했다.
마침내 형은 바라타 왕이 신발 공경하기를
형 대하듯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동생의 지극한 정에 마음이 움직여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바라타 왕은 왕위를 사양해 형에게 돌렸다.
그러나 형도 사양했다.
“부왕께서 동생에게 주셨으니, 나는 받을 수 없다.”
동생도 사양했다.
“형님은 맏아들입니다.
부왕의 위업을 이어받을 사람은
바로 형님이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서로 사양하다가 할 수 없이
형이 다시 왕위를 올랐다.
그들은 형제끼리 우의가 돈독하고 화목했으므로
그 덕이 나라 안에 널리 떨쳐져,
백성들끼리도 서로 받들어 섬기면서 효도하고 화목했다.
인심이 좋고 두터우니 비바람도 순조로워 나라 안은
가는 데마다 오곡이 풍성하고
질병이 없어 태평성세를 노래했다. <잡보장경> 제1권
꿈같은 이야기다.
정치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온갖 음모와 투쟁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행 되고 있는
오늘의 이 지구상에서 이런 이야기는 정말 동화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런 일이 결코 허무맹랑한 허구만은 아니다.
부귀영화를 마다한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의 고사를
들출 것 없이 우리 왕조사에도
드물긴 했지만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다.
오늘날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테지만,
정치권력이라는 게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가는
정치를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익히 알고 있다.
앞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라마’와 ‘바라타’ 같은 사람들이
정치를 한다면 세상은 근원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그들은 물질적인 부의 축적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에 가장 관심을 쏟을 것이다.
그들이 나라를 다스린다면
그전에 세웠던 감옥은 텅텅 비어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소득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답게 사는 것이 제일 과제일 것이므로
온갖 범죄와 재난, 공해가 발붙일 곳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나라에서라면
군대와 경찰을 막을 것도 감시할 일도 없을 테니
낮잠 자는 일로 따분해질 것이다.
그들은 그런 권태에서 탈출해 돌아가
발목이 시도록 논밭을 가꿀 것이다.
아,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그들의 왕국에서 부는 꽃바람이
오늘 우리들의 뜰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들의 속뜰에 머물게 하소서.
출처: 법정 스님 '인연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