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5saIC_7qPtQ?si=J1FXJBWQoIqU5Tkj
인생과 수행
종범스님
오늘의 법문 주제는 “인생과 수행” 이라는 제목입니다.
우리나라에 중요한 경전은 화엄경, 법화경, 금강경 3가지 경전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수행을 말한 부분에서는 화엄경에 십지품, 입법계품이 있다. 그 부분이 수행을 이야기 한 중요한 경전이다.
입법계품에는 화엄경 80권으로 보면 60권부터 80권까지 입법계품이 21권이나 된다.
21권을 40권으로 번역한 40화엄이 따로 있다. 그래서 80권으로 보면 21권인데 40화엄으로 보면 입법계품 1품이 40권으로 해서 독립된 화엄경으로 있습니다.
40화엄경 제일 마지막 품이 보현 행원품이다. 40화엄경 중 제12권에 이런 계송이 있다.
人命… 如電光 하니… 강력~ 屆朞死 로다…. 나무아미타불
사람의 목숨이 하도 무상하고 허망하고 빨리 생겼다 없어지는지 마치 번개불과 같다. 다 죽음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중생심이라는 것은 삶에 대한 집착이다. 삶에 대한 집착을 떠나서는 중생심이 없다. 이렇게 삶에 대해서 집착 하는데 죽음이 금방 돌아온다. 그러니까 중생심의 결과는 슬픔이요, 통곡이다. 그러기에 중생심을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다.
중생심의 결과가 다 좋고 기쁘면 바꿀 필요가 없다. 중생심은 이렇게 번개불과 같은 것을 영원 하리라고 집착하니 그게 바로 모래성이고 그게 바로 통곡이다.. 중생의 마지막은 통곡이다….
이런 것을 잘 살펴 본 사람만이 수행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인생무상만 알면 “道”는 저절로 깨닫는다. 왜냐하면 저녁에 꿈꾸는 사람이 그게 꿈 인줄 알고 저절로 깨어난다 한다.
“道”에 대한 마음도 그와 똑같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렇게 인명이 무상하고 생명의 순간이라는 것을 자주 말한다.
왜 생명이 허망, 허무 하다는 것을 가르칠려 하는게 아니라 거기서 “道”를 깨닫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 道를 깨닫는 가장 큰 장애가 허망, 생명, 영원 하리라 하는 집착하는 망상입니다. 망상 때문에 道를 깨닫지 못하는 것 쉽게 말하면 집착 때문에 못 깨닫지 집착만 없으면 道는 저절로 이루워 진다. 그게 妙法이다.
그래서 인명이 무상한걸, 경전에서 많이 설명을 했다. 그 대표적인게 법화경 비유품(譬喩品) 중 화택(火宅)비유가 있다. 이 중생세계가 불타는 집이다. 火宅은 욕계, 색계, 무색계 중생세계를 3계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큰집이 하나 있다. 그 집주인이 밖에 나와보니 그 큰집이 밖에서부터 불이 타고 있다. 그런데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불타는지 모르고 놀이에만 바쁘다.
그래서 주인이 집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그런 비유가 三界火宅 인데, 불타는 집에 있으면서 집이 불타고 있는 줄 모르고 또 하나는 그 안에서 온갖 재미에 정신이 팔려 있다. 이것을 火宅樂着이라 한다.
火宅 속에서 즐거움에 집착 되어있다. 이것이 비유인데, 火宅은 우리 생명이 무상 해가지고 무상지화(無上之火)가 소재지간(逍灰지간) 덧없는 불이 모든세간을 다 태운다, 생기면 없어지고 무상의 불이 세간을 태우는 것이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재미뿐 어떻하면 재물, 명예, 사랑, 즐거운 삶을 구할 것 인가 생명이 경각에 달렸는데 생명에 대한 자각은 전혀 없고 오로지 권리, 명예, 재산만 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화택낙착(火宅樂着)이다.
또 강원에 들어가면 가장 처음에 배우는게 치문(緇門) 중 인용된 말씀 중 많이 듣는 법문이 있다. 안수정등(岸樹井藤)이다.
어떤 남자가 광야를 가다가 사나운 코끼리에 쫓겨 우물속으로 피하게 되었는데 우물 안으로 드리운 나무뿌리에 매달려 밑을 보니 4마리의 독사가 입을 벌리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고, 위에는 흰 쥐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그 남자가 매달린 칡넝굴을 쏠고 있는데, 위에서는 덩굴의 벌집에서 꿀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그남자는 생명이 위험한 상황을 잊고 꿀의 맛을 즐기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에 비유하여 무상 및 무지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이야기다.
보통경에 있는 말이 아니고 빈두루 존자가 우타연왕 에게 한 법문이 빈두로돌라사위우타연왕설법경(賓頭盧突羅爲優陀延王說法經)이라 한다.
우타연왕이 빈두루 존자에게 질문한다.
세상에서 좋은일이 많은데 왜 출가 해서 道를 닦습니까… 인생이 무상이 무어냐… 질문하니, 그것을 비유하여 "대왕이여, 옛날 어떤 사람이 광야(廣野)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 때] 크고 사나운 코끼리를 만나 쫒기게 되었습니다. 미친 듯이 달렸으나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때마침] 언덕 위에 있는 우물을 발견한 [그는] 곧 [우물속으로 드리워진] 나무 뿌리를 잡고 우물속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또, 이 우물 밑에는 큰 독룡(毒龍)이 있습니다.[그런데 그가 매달려 있는] 나무 뿌리를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이빨로 갉고 있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코끼리는 무상(無常)한 세월을 나무 뿌리는 사람의 생명 독룡은 죽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이빨로 갉고 있는 것은 밤, 낮이 바뀌면서 생명이 차츰차츰 없어져가는 것 그런데 희한한 것은 벌 몇 마리가 와서 꿀을 한방울씩 떨어 트린다 받아 먹어보니 재미가 있다, 이것이 미밀(味蜜) 정수미밀(井樹味蜜) 우물 속 나무뿌리에 매달려서 꿀맛을 보고 있다.
그 꿀이 무엇인가, 세상의 재미, 명예,부귀, 권력, 사랑, 편안함 이것이 꿀이다. 꿀 한 방울 떨어 질 때는 모든 것은 다 잊어 먹는다. 위에 코끼리 밑에 독사 흰,검은 쥐들이 갉구는 것 다 잃어 버린다. 이게 인생이다.
나무뿌리에 매달려 있는 우물 속 사람이 정수현인(井樹賢人)사람은 어떻게 하면 살아 나올 수 있겠는가…. 이것이 화두이다.
道를 깨달으면 여기에 답이 있다. 그게 道다. 정수현인(井樹賢人)이 여아득생고 어떻게 하면 삶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전에 우리나라의 많은 도인 스님들 한테 이것을 어느 분이 질문 했다. 그 중 이런 답들이 있는데 그중 작야 몽중상(昨夜 夢中想) 어제 밤 꿈속에 일이다.
또 어떤 분은 표화가 천이출하야 와재 마전상이라(瓢花가 穿籬瘳 하야 臥在 麻田上) 이 법문은 불가사의 평상학 법문이라 한다.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와서 삼밭에 누워 있구나,” 이런 말을 들어노면 내생이나 금생에라도 공부 많이 하면 맞춰 볼 때가 있다.
또 어떤 스님은 불 불능 갱작불이라 (佛 不能 更作佛) 부처가 다시 부처가 될 수 없다. 이렇게 전부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경지에서 설법한 우리나라 도인 스님들의 법문이며, 불법이다.
이것은 그냥 전해지는 것이 아닌 불교 그런데 인생이 이렇게 허망하고 무상한 것인데 중생들은 그것을 모르고 무상한 것을 무상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으니 결과는 뻔하고, 그래서 구하면 구할수록 점점 슬픔과 고통에 빠져서 윤회에서 윤회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까 道를 구해야 한다. 道를 구하는 것이 수행이다. 그 道를 어떻게 구하느냐 그것을 허망 한데서 집착하는 고통 어리석은 고통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道이다.
그러면 火宅 불타는 집이 무어냐 또 뒤에서 따라오는 코끼리는 우물 속에 매달려 있는 젓 무엇인가 마지막에 독사에 물릴 지경에 이르는 게 무엇인가 이게 전부가 깨닫지 못한 고통이다. 이것을 사견(邪見)이라 한다.
火宅 도 邪見에 위해서 나타나는 것이고 집착(執着)도 邪見에 위해서 나타나는 것이고 코끼리도 邪見코끼리요 그 넓은 들판도 사견 광야(邪見廣野)요 나무뿌리도 사견(邪見)뿌리요 죽음도 사견(邪見)나무뿌리 사견(邪見)을 무명(無明)이라 한다. 이것도 미혹했다 한다. 전부 허물이 미혹한데 있는 것 미혹 한데서 벗어나면 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종종 보면 수행을 어떤 형식에 두고 생각 할 수 있다. 그것은 아니다. 수행은 형식이 아니다. 깨달음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지역별로 수행방법이 다르다. 왜냐하면 본질이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식에 매달리는 수행을 비유 한 것이 “각주구검(刻舟求劍) 수주대토(守株待)라 본질은 어디에게 가고 형식에만 쫓아서 하는 어리석음이다.
수행이란 무엇인가 과학, 철학, 종교도 아니다. 그렇다고 전부 아닌 게 아니다. 그게 수행이다. 과학은 인류생활에 과학문명이 많이 이바지 한다. 과학이란, 사물 에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기에 이 원리를 응용해서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응용 과학 이다. 그래서 과학을 할여면 “왜” 얼음이 어느냐, “왜” 바람이 부느냐 원리 이것이 과학이다. 그래서 과학은 “왜냐” 이다.
철학은 목적과 본질을 찾는다. 죽는게 뭐냐, 권력은 뭐냐, 명예는 무엇을 하기 위해서 하는 거냐 “뭐냐”가 철학이다. 이 목적을 자꾸 묻는다, 본질을 묻는다 그게 철학이다.
종교란 일반적인 종교는 “주세요”[예] 성공하게, 합격하게,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이것이 기본적인 종교다. “주세요” 빼놓고 종교가 없다. 그러나 수행은 이게 아니다. 수행은 종교도, 철학도 과학도 아니다. 종교이상의 종교 철학이상의 철학이요 과학이상의 과학이 수행이다.
그래서 불교가 종교 이상의 종교 라는 것, 주세요가 있다. 불교도 축원 할 때도 참선 할 때 이게 불교가 종교가 아닌 게 아니다. 이런 종교부분에 있어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수행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수행은 무엇인가, 수행 이라는 것은 내가 나를 찾는 것이다. 아주 쉬운 중에 쉬운 게 수행이다. 깨닫는 것, 무엇을 깨닫는 건가 자기가 자기를 깨닫는 거 자기가 자기를 깨달으면 어떻게 되느냐, 자기가 자기를 찾는 것 이렇게 쉬울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어렵다. 왜 자기가 자기를 자꾸 외면해서 그렇다.
그래서 수행을 道라 이른다. 마음을 찾는 마음 이라고 하고 성불 즉 부처가 된다라고 이야기 하고, 본성을 본다, 견성한다. 그러나 전부 같은 이야기이다. 도, 마음, 성품, 부처가 하나 이게 전부 자기가 자기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이다.
자기집에서 자기집을 잃어 버렸는데, 자기집에 자기집을 찾는 게 수행이다. 외양간에서 소를 잃어 버렸는데 외양간에서 소를 찾는 게 수행이다. 깜박 잠이 들어 꿈을 꾸니 소를 잃어 버리면 꿈에서 깨어나면 소는 그대로 있고 내가 나를 깜박 잃어 버리면 깨어나면. 이게 도를 닦는다고 한다.
어떤 도인스님에게 물었다. “여하 시 도냐 어떤 것이 도 입니까”
그러니까 스님이 하늘을 쳐다보시고 땅을 쳐다보셨다 왜 하늘과 땅만 쳐다 보십니까, 하니 “운재청천(雲在靑天) 하고 수재병(水在甁)이다. 구름은 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다라는 말을 듣고 깨달았다.
이것이 오도(悟道)다. 도는 자기인데 자기를 알았다 이게 깨달음이다. 이런 깨달음을 법화경 신해품에서는 ‘궁자가 도가 해서 궁자가 경학’ 궁자가 자기집에 이르러서 집을 보고 놀래다.
어떤 사람이 나이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가, 다른 지방에 살기를 50년만에 자기집에 이르렀으나 거지생활과 너무 환경이 다르니 겁이 나서 도망간다. 집주인은 금방 자기 아들인 줄 다시 데려와서 머물게 하는데 억지로 머무는 궁자는 자기집으로 생각을 않아 30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다 자기집 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 이게 수행입니다.
금방 아들인줄 안 株인은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중생을 보니까 금방 깨달을 수 있다는 것 안다 중생은 무상한데 집착 해 가지고 윤회 하던 습관이 몸에 베어서 볼래 자기를 깨닫는 것을 꿈에도 생각 못한다. 그래서 염불하고 경을 읽는 것 이것이 업장을 녹이는 것이지 실지로 그게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궁자는 얻어먹는 습관을 버리고 점점 일하는 재미로 정을 붙친다. 그리고 집안을 속속들이 알게 된고 株인은 마지막으로 너는 나의 아들이 다라고 하고 아들은 깨닫는다. 깨닫고 나선 어떻게 하느냐, 과거에는 머슴살이 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자기 주인 노릇 한다. 그 차이다
그러니 금방 죽을 목숨인데 그 죽기 전에 기쁨을 찾고 하는 이런 것은 부질 없는 것 자기를 깨닫는 것이 정말 할 일 이게 구도(求道)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중생이다. 그런데 중생이 다 도를 닦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사람으로 만 태어났을 때 도를 닦을 수 있다.
사람 눈 가졌을 때 도를 닦는데 눈을 쓰고, 사람 귀 가졌을 때 자기를 깨닫는데 귀를 쓰고, 말을 할 수 있는 입을 가졌을 때 자기를 깨닫는데 쓰면 그게 좋은 일이다.
자기를 깨달을 여면 어떻게 깨달아야 하나 그냥 언어 대화 하면 되는 것 법문을 듣자마자 바로 깨달으면 되는데 자기를 받아들릴 수 없다. 그러니까 참회도 하고 참선도 하는 것 이것은 하근기들이 하는 것 상근기 는 언어대화로 바로 깨닫는다. 그래도 전생에부터 닦아서 도를 이야기하는 불교를 만난 것이다.
이게 궁자가 자기 집에 왔으니까 또 다시 딴 곳으로 가가서 빌어먹는 생활을 하지말고 많이 들 경을 읽으시고 열심히 기도와 참회 하시면 반드시 금생에 깨닫는다. 그럼 깨달음 다음 어떻게 되느냐 주인노릇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주인노릇 잘 할 수 있도록 점점 도를 닦는 것이다.
도인하고 깨닫지 못한 중생하고 같으냐, 다르냐 법문이 많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다르다 하면 도인이 아니다, 같다 해도 도인이 아닌 그러나 도인분상에서는 같다 해도, 아니다고 해도 도인이다. 이것이 도다.
신불부인(신불負人)이면 면무참색(面無慙色) 마음으로 다른사람에게 죄 지은 것이 없으면[명심보감에도 나옴] 면무참색(面無慙色)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없다 이것이 도인이다.
그런나 호리유차(毫釐有差) 하면 천양현격(天壤懸隔) 털끝만큼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과 땅처럼 벌어진다.
이것은 도인의 가풍을 그대로 이야기 한거다.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를 찾는 다는 게 절대로 어려운 게 아니며 결코 쉬운게 아니다.
그러니 그것을 믿고 깨닫고 사는 것하고 같이 비교 할 수가 없다 아무리 과학과 철학을 잘하고, 종교를 잘 한다고 하더라도 못 깨닫고서는 그게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닌 마치 햇빛을 보지 못하고 어두운 밤에 사는 것과 같다라고 생각하라, 사람으로 태어 났을 때 “道”를 구하기 위해서 참회도 하고, 복도 짚고, 공부하고, 열심히 좋은 인연을 닦는 것 그게 정말로 중요하고 그것이 우리 인생이 가야 할 수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