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거사님의 문답내용입니다.
1
되고 안 되는 것이 상관없는 이치를 깨달으면 제가 가진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너무 답답합니다. 어떻게 하면 되고 안 되는 것이 상관없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이 실제상황이라고 본다면 지금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즉, 되는 것은 되는 것이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니, 되고 되지 않는 게 한결같은 경지를 깨칠 수는 없겠지요.
만약 우리의 일상이 전적으로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꿈과 같고 허깨비 같은 것이라면, 되고 안되는 것도 역시 꿈이요, 환과 같을 것이며, 나아가서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것도 역시 꿈이요, 환일 터이니 무엇이 거리낄 것이 있겠습니까? 요컨대, 세상이 끝내는 불생불멸하는 상주 법계임을 알아서, 되고 안 되는 양변에서 영원히 벗어나야 합니다.
2
이 세상 모든 일이 인연 화합이라고 깨우치고 항상 마음가짐을 이와 같이 가지고 삶을 사는 것이 올바른 수행입니까?
- 모든 법이 인연 따라 나는 것이므로 자체로는 성품이 없다고 늘 들어왔을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거기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가 봅시다. 즉, 모든 법이 성품이 없으므로 인연이 화합할 때 화합하는 인연도 결국 성품이 없을 것이며, 따라서 '인연 화합'이 '인연 화합'이 아닌 것을 '인연화합'이라고 하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매일 매일의 생활을 통해서 "만법이 인연화합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법이 인연화합이므로 생겨나도 생겨난 것이 아니고, 따라서 모든 것이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이 있는 것이므로, 이제부터는 모든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을 몽땅 꿈으로 보십시오. '나' 까지 포함한 이 세상 전체를 모두 꿈이나 허깨비처럼 본다면 지금 이 질문을 한 사람도, 또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는 사람도, 나아가서 대답의 내용도 모두가 꿈이요, 꿈속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요컨대, 깨달아도 깨닫지 못해도, 또 세상살이가 괴로워도 즐거워도 모두가 꿈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그 마음 속에는 늘 아무런 자취도 그림자도 드리워지는 일이 없을 것이며, 그렇게만 나날을 산다면 마침내 모든 번뇌나 두려움이 나날이 엷어지고, 마침내 자취가 다해서 곧 성인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3
법용거사 앞으로 답해 주신 법문 잘 읽었습니다.
주위 모든 것이 꿈이요, 그 꿈을 꾸고 있는 '나' 또한 꿈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도, 바로 그 '잊지 않는' 나가 늘상 살아서 꿈틀거립니다.
또 때로는 꿈속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두려워 짐짓 도리질을 치고 마치 이 꿈이 내가 매달릴 모든 것 인양 고의적인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아상 없이'불경 불포 불외'할 수 있겠습니까?
- 모든 것이 꿈같고, 환(幻) 같다는 말속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근심하고' '두려워하고' 할 때 그렇게 하는 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일은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본래 '짓는 자'도 '받는 자'도 없음이 실상이니, 만약 당신이 '근심 없는 나' '두려움 없는 나' 이고 자 한다면 당신은 결코 그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요컨대, 근심하기는 하는데 '근심하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니, '근심하는 자'가 없는데 근심이 어찌 홀로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번뇌 있음'이거나 '번뇌 없음'이거나 그 모두가 꿈이나 환과 같아서 조금도 다를 것이 없음을 투철하게 관찰해서 다시는 더 어떻게 되려고 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모든 일어나는 현상을 지금 있는 그대로 다만 담담히 지켜보기만 한다면,...
그렇게만 줄곧 계속한다면 당신은 머지 않아서 자신의 본래 움직임이 없는 마음이 우뚝 드러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4
어떤 A 를 형언하면 형언한 즉시 A 의 본질과 동떨어지게 됩니다.
언어의 표현의 한계를 언어로써 극복할 수 있는지요?
- 말은 그 자체로는 성품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 그 자체나, '말'로써 표현된 내용에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즉 '말'을 다만 성품의 나툼으로만 본다면 '말'은 그 자체로 '참'입니다.
요컨대, '본체'에 즉해서 작용을 일으키면 종일토록 작용해도 작용한 일이 없는 것이니, 따라서 항상 '본체'를 등지지 않은 채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종일토록 작용해도 항상 고요합니다. 따라서 극복할 것도, 멸할 것도 없는, 걸림 없는 큰 작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바다는 종일토록 인연 따라 출렁거려도 항상 고요한 것과 같습니다.
5
이 몸을 저로 알고 살아왔던 뿌리가 너무도 깊습니다. 머리로는 다 아는 것 같아도 제가 하는 짓거리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분노가 치솟습니다.
법정님 어떻게 하면 "주재자는 없고 행함만이 있는 도리"를 사무칠 수 있겠습니까?
- '주재자'가 없는데 누가 행하는 자이겠습니까? 지금 현재 열심히 행하고 있는 동안에도 사실은 행하는 자가 없는 것이며, 행하는 자가 없는데 어찌 행함이 혼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철저히 회심(廻心)해서, 본래 작용함이 없는 '근본지혜'를 분명히 밝혀서, 종일토록 동작하고 말하고 생각해도 아무런 자취가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 자신이 하는 꼴을 보고 화가 나거든, 그와 같은 의식의 흐름을 그저 담담히 비추어보기만 하십시오. 거기에 그렇게 화를 내는 자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주재자'가 없는 자리를 증득해야 하겠다는 생각도 놓고, 그와 같은 생각을 놓았다는 생각도 또한 놓아서, 그저 시절과 인연을 따라 흐르는 의식의 흐름을 담담히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내내 그렇게 하다보면 '주재자'가 없는, 즉 '나'가 없는 .... 오직 '불성(佛性)'의 응현(應現)만이 있는 놀라운 경지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우뚝 드러날 것입니다.
6
하고자 하는 일을 못해 답답하고 회의마저 들어 사직할 결정에 이르게 되었는데 주위상황과 시기를 고려하여 다시 생각해 보라는 주위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다시 생각을 해보는 데 도무지 답이 나질 않습니다. 이런 경우 마음의 움직임을 보며 마음이 흐르는 쪽(인연)으로 결정함이 옳은 지요?
- 이렇게 하는 게 좋을까요? 이렇게 하지 않는 게 좋을까요? 하는 따위의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깨달음이란 '진리'에 합하는 것인데, '진리'의 세계에는 본래 좋고 싫은 일도, 이롭고 해로운 일도 없습니다. 결국 수행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이 세상과 사물을 보는 눈이 열려서 만사를 평등하게 볼 수 있는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모든 사물이 다 허깨비처럼 존재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좋다고 하고, 무엇을 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름지기 모든 존재의 실상을 깨쳐서 만물에 대한 평등한 안목을 얻는 일이 급선무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좋고 싫은 모든 일은 망상의 소산이므로 그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7
자신을 관 한다는 것조차도 그저 '앎'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치 길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지내고 있습니다.
추신: 혼자서 공부해 나간다는 것이 정말 힘들다고 여겨집니다. 특이나 요즘은 너무 힘듭니다.
- 이 세상에서 「관 한다」고 하는 것은 「본다」는 뜻이며, 곧 이것은 인식작용 이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알다시피 인식작용은 '관찰자'와 '관찰대상' 사이의 상호작용인데, 이 '능'(能) '소'(所)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은 새삼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보는 자가 있어서 봄(見)이 이루어진다」는 이 전혀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는 일이야말로 모든 수행자가 공통적으로 넘어야 할 준령임에 틀림없습니다. 모든 인연은 다만 성품이 비추어내는 것일 뿐, 여기에 '보는 자'도 '보지 않는 자'도 없다는 사실이 이해된다면, 지금의 이와 같은 문답도 역시 '묻는 자'와 '대답하는 자'가 실제로 있어서, 이 양자 사이에서 문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여여부동한 '진여법성'이 인연에 감응하여 나투는, 마치 환(幻)과 같은 현상일 뿐인 것입니다.
요컨대, 「자신을 관한다」는 것은 거기 능․소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래는 능․소가 있었는데 지금에 없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아무런 기대감이나 추구하는 바가 있을 수 없으며, 다만 그저 봄(見)이 있을 뿐이며, 마치 거울이 무심히 사물을 <지금 있는 그대로> 비추되 늘 청정하여 자취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결코 거기에 "깨달아야 되겠다" "무아의 경지를 증득해야 되겠다"는 등의 의도하는 바가 개재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다 놓고, 다만 그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있는 그대로의 자세로> 비추되, 자신을 비난하거나 합리화하거나 하지말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내내 그렇게 촘촘히 계속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나도 모르게 그 <본래 여여부동한 참 나>가 우뚝 드러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내가 찾는 게 아니라, 내가 무심(無心)을 얻었을 때, 그 때 저 쪽에서 스스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적조(寂照)의 힘>이며, 이 길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외길입니다. 더욱더 용맹정진(勇猛精進) 하십시오.
8
의식을 갖지 않고 사회생활(삶)을 할 수 있습니까? 당장 내 목에 칼을 들이대고 가족을 해친다 했을 때, 보다 나은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울 때, 계산을 할 때, 시험공부를 할 때 등 긴박한 상황에서도 관할 수 있을 까요? 그럼, 무아를 여실히 깨닫지 못해서 그렇습니까?
- 의식이 있건 없건, 본래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삶이 아니라'고 말하면 곧 '죽음'을 생각하겠지요?
요컨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모든 일어나는 일은 모두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므로, 있기는 있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일어나기는 일어나는데 일어나는 것이 아닌, 마치 꿈 같고 허깨비 같은 것임을 분명히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지금 억겁을 두고 꾸어오던 꿈을 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괴롭고 두렵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다가 문득 꿈에서 깨고 나면 본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금 이 세상이 바로 꿈과 같고 허깨비 같은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서 얼른 그 오랜 꿈에서 활짝 깨어서 본래 청정한 세상을 활개치면서 자유롭게 사십시오
9
제 마음이 출렁거릴 때 더 마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시작은 그 출렁거림에서 벗어나고자 바라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조금 고요해지면 마음을 보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마음공부 하는 것 인지요?
또, 마음을 보는 것도 인연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까?
- 마음이 곧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를 보고자 하면 곧 마음을 밝혀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을 밝혀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무엇이 '마음'입니까? 하고 묻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이렇게 묻고, 또 때에 따라 출렁거리고 하는 것이 당신의 마음이고, 또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나의 마음입니다. "법명이여!" 하고 부르면 "예!"하고 대답하는 것이 당신의 마음입니다. 바로 이 마음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찾으면 아무데도 없는데, 다만 인연만 닿으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출렁거리기도 하고 잠잠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는 조금도 움직이는 일이 없습니다. 당신이 괴로울 때에도 이 마음은 괴로움이 아니며, 당신이 기쁠 때에도 이 마음은 기쁨이 아닙니다.
마치 거울이 스스로는 작용이 없으면서 무심히 온갖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듯이, 이 마음도 그러하여, 종일토록 온갖 것을 보고 듣고 하는 가운데 혹은 울고, 혹은 웃고 하되, 그 자체는 조금도 움직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출렁거릴 때나, 잠잠할 때나, 그것을 다른 바람직한 어떤 것으로 바꾸려고 하지말고, 다만 그냥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이 모든 것이 다만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것이어서 전혀 실다운 존재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서, 당신의 마음 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든 그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담담히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좋건 싫건, 이롭건 해롭건 상관하지 말고 그렇게 촘촘히 지켜보다 보면 마침내 당신은 그 여여부동한 본래의 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노력하거나 애쓰거나 하지 말고, 또한 어떤 결과를 기대하지도 말고, 그렇게 고요히 비추기만 하는 것, 이것이 곧 정혜(定慧)를 쌍으로 닦는 것입니다.
당신의 의식의 흐름을 그냥 따라가되, 결코 조작하거나 대처하려고 하지말고, 그냥 비추기만 하는 것, 이것이 곧 <걸림 없는 부처의 지혜>입니다.
10
근년 들어 한 해에 한 사람씩, 세 사람의 선배 후배가 세상을 등졌습니다. 삶이라는 굴레를 스스로 벗어 던지고 저편으로 떠나간 사람들 때문에 문득 마음이 막막해질 때가 있습니다.
마음 공부를 한답시고 생사문제를 참구한다 하면서도, 그러지 않을 때와 별다름 없이 그들이 가버린 것이 허전하고 슬프고 남아 있는 저 자신이 섬뜩하게 느껴지며, 가도 간 것이 아니며 저편이 아니라고 되뇌어도 이러한 마음은 좀체 가시지를 않습니다.
가깝게 지낼 적에 후배가 부르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이 노래가 그 입에서 나올 때, 또 지금 제 입에서 나올 때 그 당처가 어디인가 생각해보지만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빛깔도 소리도 없는 소소영령한 그 자리를 도무지 접할 길이 없습니다. 그저 속세에 이렇게 집착하며 살고 있는가 싶습니다. 가르쳐주십시오.
- 이 세상은 지금 있는 이대로 인 채로 '적멸' 바로 그 자체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매일 같이 되풀이되는 생성과 소멸, 흔히 불가에서 말하는 이른바 '윤회'라는 것이 실은 허공 꽃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허깨비 놀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의 텅 빈 허공성> 바로 그것인데, 그 허공에다가 우리들 미(微)한 중생들이 삶이니, 죽음이니, 괴로움이니, 즐거움이니 하면서 수없이 많은 획(劃)을 그어놓고는, 그와 같은 온갖 차별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 줄 알고 집착하면서 살다가 어느 날 '불법'의 인연을 만나고 보니, 이것들이 모두 허깨비처럼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군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열심히 이 차별법들의 한계성을 지워버리려고 애씁니다. 마치 손바닥으로 허공을 닦아서 깨끗하게 하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허공은 본래 어떤 '획'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허공에는 본래 생멸도 없고, 오고 가는 일도 없는데, 다만 이렇게 제가 스스로 그어놓은 '획'에 속아서, 사사건건 걸리다가 이것을 다시 지워 없애려고 하니, 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입니까?
요컨대, 생사가 있건, 생사가 없건 간에 그 바탕인 '허공'에는 아무런 변화도 증감도 없습니다. 그러니 더는 목전(目前)에서 일어나는 (일어나는 듯이 보이는) 온갖 '현상법'에 현혹되지 말고, 그들 허망한 구름장 너머의 항상 여여 불변하는 '푸른 하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