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잔 차 스님(1918~1992)
「아잔 차의 마음」 중에서
1. 더러운 몸에 더러운 옷을 걸치고 있으면 당연히 마음도 불편하고 울적해진다. 그러나 몸을 깨끗이 하고 깨끗한 옷을 입으면 마음도 가볍고 밝아진다.
마찬가지로 계율을 지니지 않으면 언행도 더러워지고 마음은 불행과 비탄에 빠져 무거워진다. 올바른 수행에서 멀어지고 붓다의 가르침을 통찰할 수도 없다.
마음이 언행을 통제하기 때문에 모든 언행은 바르게 훈련된 마음에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을 훈련함으로써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
2.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동요하고 불안정하며, 통제하거나 다스리기 어렵다. 그러한 마음은 이쪽저쪽으로 출렁이며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걷잡을 수 없이 감각적 쾌락을 따른다.
3. 지혜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고 지나치게 기뻐하지도 않는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거나 사라져도 비탄에 빠지거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음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질병을 포함한 어떤 고통을 겪더라도 마음이 잘 훈련되었다면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훈련된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귀의처이다.
4. 구멍이 하나 있는데 그 속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구멍에 손을 넣었는데 바닥에 닿지 못한 사람은 그저 구멍이 깊다고만 한다.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 구멍 속에 손을 넣어 볼 것이고 한결같이 구멍이 너무 깊다고 말한다 자기 팔이 짧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덕을 쌓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먼저 그릇된 행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 사람들은 선을 행하고자 하면서도 악행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팔이 짧으면서 구멍이 너무 깊다고 말하는 격이다.
5. 사원에서 내 오두막이든 다른 사람의 오두막이든 더러우면 청소했다.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수행을 위한 일이었다. 오두막 청소는 마음의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6.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업에 따라 태어난다. 혹시 남의 물건을 훔친 적이 있는가? …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해도 자신은 보았을 것이다. … 자신 안의 염라대왕이 모두 보고 있어 결코 숨길 수 없다.
7.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조차 해골을 보면 두려워한다. 왜들 난리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과 전혀 교류하지 않고 자신을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는 증거일 뿐이다. … 해골과 함께 옷을 입고 식사를 하고 모든 것을 함께하면서 그것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그토록 자기 자신과 멀어져 있다니 얼마나 딱한 노릇인가!
사람들은 항상 바깥을 바라본다. 나무를 보고, 다른 사람들의 겉모습을 보면서 “이건 커”, “이건 작아”, “이건 짧아”, “이건 길어”라고 말한다. 다른 것을 보는 데 정신이 팔려 자신을 보지 못한다. 그런 사람을 보면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에겐 귀의처가 없다.
8. 붓다께선 마음에서 귀의처를 찾으라고 하셨다. “너 자신이 스스로의 귀의처가 되게 하라.”고 하셨다. 진정한 귀의처는 바로 마음이다. 다른 것에 마음을 의지하려 할 수도 있지만 모두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9. 계를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수행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좋아함과 싫어함을 모두 초월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만큼의 확신이 필요하다.
대체로 사람들은 싫어함에 대해서는 불만을 느낀다. 그러나 좋아함이 있다는 것도 아직 놓아버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싫어함뿐만 아니라 좋아함도 초월해야 한다. 고통과 행복 모두 초월해야 한다.
10. 행복이 있을 땐 세상이 온통 행복뿐인 것 같다. 고통이 있을 땐 온통 고통뿐인 것 같다.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으면 큰 것이 있음을 모른다. …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고 당신은 양면을 다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행복할 때도 길을 잃지 않고 불행할 때도 길을 잃지 않는다.
행복의 감정이 일어도 고통의 감정을 잊지 않는다. 두 감정은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이다. … 어떤 것의 이로움을 보았을 때는 반드시 그 해로움도 보아야 한다. 미움과 혐오감을 느낄 때는 사랑과 이해를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균형을 이룰 수 있고 마음도 안정된다.
11. 거미줄에 파리가 닿는 순간 거미는 잽싸게 파리를 실로 휘감는다. 파리를 저장해 둔 다음 다시 거미줄 한복판으로 돌아와 침착하고 조용하게 기다린다. … 우리의 마음도 똑같다. 중심을 지킨다는 것은 분명한 깨달음으로 항상 깨어 있고, 항상 삼가고, 허술함이 없는 것이다.
12. 법을 모르는 사람일수록 감흥을 따른다. 행복을 느끼면 행복에 빠져들고 고통을 느끼면 고통에 빠져든다. 끝없는 혼란의 연속이다. 결국 사람들은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왜일까? 무지해서이다.
기분만 따르다 보니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른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마음은 돌봐 줄 부모가 없는 어린아이와 같다.
고아들은 마음을 기댈 곳이 없어 정서적으로 불안하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마음, 바른 견해로 훈련하고 개발하지 않는 마음은 엄청난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
13. 붓다가 가르쳐 준 길은 우리의 습성과 맞지 않다. 우리는 금욕이나 절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옳다. 옳지만 어렵다. 가르침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번뇌 때문에 어렵다.
14.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고기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그물을 모아 천천히 끌어 올려야 한다.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수행의 길을 천천히 더듬으면서 조심스럽게 한 곳으로 모아야 한다.
가끔 보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도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 계속 더듬으며 찾아야 한다. 그것이 수행이다.
수행하고 싶을 때 수행하고, 수행하기 싫을 때도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오직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 열정적으로 수행에 몰입하면 믿음이 우리가 하는 일에 에너지를 준다. 그러나 그 단계에서는 아직 지혜가 없다. 열정적으로 수행에 정진해도 많은 것을 얻지는 못한다.
수행을 계속해도 길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평화와 평정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수행에 필요한 자질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수행의 길 자체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결국 포기하고 만다. 그 단계에서는 우리는 무척 조심하며 끈기와 인내를 발휘해야 한다.
커다란 물고기를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길을 더듬어 가고 조심스럽게 끌어 당겨야 한다. 몸부림치는 물고기를 다루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멈추지 않고 천천히 끌어 올리면 된다. 물고기가 지쳐 더 이상 펄떡이지 않으면 쉽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바로 그것이다. 수행은 천천히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이다.
15. 우리는 모든 것이 욕망대로 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에 따라 움직여 주어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권위나 능력이 없으므로 세상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 그렇게 되기를 원해도 이 세상은 본래의 모습 그대로일 뿐이다. 이런 식의 원함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다.
16. 복을 받은 자는 속세의 것들을 통해 이 세상을 관찰한다. 세상만물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세상을 완전히 이해한 자가 된다.
17. 붓다께서 말씀하신 대로 마음은 실체도 없고 그 무엇도 아니다. 마음은 누구의 소유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인간의 소유물처럼 소멸하지 않는다.
사실 마음은 자유롭고 찬란하게 빛나며 그 어떤 문제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마음에서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마음이 조건 지어진 것들과 자아라는 개념에 현혹되었기 때문이다.
18. 마음은 이미 조건 지어져 있다. 마음은 순수한 깨어 있음의 상태에서 빠져 나오도록 길들어 있다.
19. 팔정도의 요소들이 나약하고 소극적일 때는 번뇌가 마음을 점령한다. 그러나 팔정도의 요소가 강하고 용맹스러우면 그것들이 번뇌를 정복하고 몰아낸다.
20. 앎이 우리가 경험하는 형태나 느낌, 인지, 사고만큼 기민하지 않으면, 번뇌는 우리를 점령하여 황폐하게 한다. 이렇듯 길과 번뇌는 함께 간다. 마음속에서 수행을 개발하다 보면 우리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이 두 가지가 힘을 겨룬다. 마치 두 사람이 마음속에서 논쟁을 벌이는 것과 같다. 법의 길과 번뇌가 서로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길은 우리의 사유를 안내하고 독려한다. 바르게 사유하는 능력이 있는 한 번뇌는 설 자리를 잃는다. 그러나 번뇌가 힘을 회복할 때마다 동요한다면 길은 방향을 잃고 번뇌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승부가 나고 상황이 평정될 때까지 그 둘은 싸움을 계속한다. … 길이 끝날 때까지 이 두가지가 힘을 겨루는 과정이 바로 수행이다.
21. 우리는 오직 멈추지 않고 노력할 뿐이다. 수행의 속도는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다. … 고추를 심을 때 우리가 할 일은 땅을 파서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해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때부터는 믿음이 필요하다.
나뭇가지를 잡아 당겨 더 빨리 자라게 할 수 없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가 아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물과 거름을 주는 것뿐이다. 수행할 때도 마찬가지로 마음을 편히 가져야 한다. 이번 생에 깨달음을 얻는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다음 생까지 기다려야 한다 해도 상관없다.
우리에겐 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다. 그 과정이 빠르거나 느리게 진행되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능력, 정신적 성향, 지금까지 쌓아 온 공덕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으로 수행을 하면 마음을 평화롭게 할 수 있다. 말이 끄는 수레를 탈 때 수레를 말 앞에 세워서는 안 된다.
22. 깨닫기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하다. 자신을 극한까지 몰고 가야 한다. 훈련하고, 명상하고,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실제로 행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마음을 훈련하라.
… 훈련을 통해 변화되지 않은 마음은 온갖 번뇌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 원래 마음은 번뇌의 노예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 아예 번뇌 자체가 되어 버린다.
23. 법 수행에 정진하기 위해 가능하면 모든 기회를 잡으라. 마음이 평화롭든 그렇지 않든 아직은 걱정하지 말라. 가장 중요한 것은 수행의 바퀴를 돌아가게 함으로써 미래의 해탈의 원인을 만드는 것이다.
24. 감각적 인식의 대상에 의미나 해석을 부여하지 말라. 좋은 것이면 그저 좋음을 알고, 나쁜 것이면 그저 나쁨을 알라. 그 모든 것은 인습의 진리이다. 선한 것이나 악한 것이나 모두 무상하고(無常), 불만족스러우며(苦), 주체가 없다(無我).
모두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 어떤 것도 집착하거나 붙잡을 만한 가치가 없다. … 우리가 느끼고 체험하는 모든 것은 무상, 고, 무아라는 세 구덩이로 빠진다.
25. 생각할 때는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무상, 고, 무아라는 무덤으로 향한다.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 마음은 모든 현상의 화장터이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묻고 화장하라.
26. 정신적 감흥은 마음의 손님이다. 이 사람이 올 때도 있고 저 사람이 올 때도 있다. 그들은 사랑방으로 들어온다. 항상 깨어 있는 마음의 눈으로 그들을 관찰하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불청객이 찾아오면 쫓아내라.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어디에 앉겠는가?
마음에는 자리가 한 개 뿐이고 그 자리는 자신의 것이다. 하루 종일 그 자리를 지키라. … 우리를 찾아오는 불청객은 갖가지 방법으로 마음에 조건을 짓고 흔들어 놓으려고 한다. 그들이 마음을 찾아 왔을 때 마음 안에 오직 한 자리만 있고 그 자리에 당신이 앉아 있다면 앉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당신의 귀를 잡담으로 채우려고 왔지만 그들이 앉을 자리는 없다. 다음에 또 찾아와도 빈자리는 없다. 수다스러운 손님들이 아무리 여러 번을 찾아와도 항상 똑같은 사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볼 것이다. 손님들이 얼마나 오래 그런 상황을 참을 수 있을까?
27. 분명한 깨어 있음은 결코 잠들지 않는다. 깨어 있음의 에너지는 스스로 채워지고 결코 무뎌지거나 나른해지지 않는다. 이런 상태로 이틀이나 사흘 동안 잠을 자지 않을 수도 있다.
육체가 피로의 징후를 보이면 자리에 앉아서 명상을 시작한다. 곧바로 오 분에서 십 분 정도 깊은 선정에 들었다가 그 상태에서 벗어나면 하룻밤 푹 잔 것처럼 상쾌하고 기운이 난다.
28. 숲 속 승려들이 택한 방법은 극기이고 그 길에는 오직 ‘버림’만이 있을 뿐이다.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된 모든 생각을 버리라. 우리가 자아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을 버리라.
29. (좌선을 시작하면서) “오늘은 한 시 전에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리라” … 극적인 맹세는 필요치 않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마음을 훈련하라. 명상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육체의 고통과 불편은 모두 사라진다. 발목과 무릎의 통증도 저절로 멈춘다.
30.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라. 생각해야 한다면 깨어 있음으로 하고 … 깨어 있음이 생각의 자리를 채우고 깨어있음이 곧 지혜가 된다. 평범한 사고는 지혜가 아니다.
31. 나눔을 실천하려면 본성을 거역해야 한다. 작은 사과를 주고 싶어도 큰 것을 주도록 스스로를 강요해야 한다. …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결국 자신의 희생양이 되고 이기적인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제 번뇌를 잘라내야 한다.
… 이렇게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자신은 박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나눔은 욕망과 번뇌를 박대하는 것이다.
32. (붓다께선) 수행이 힘들고 짜증스러우면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 번뇌를 떨쳐버리고 욕망과 싸우는 것은 당연히 고통스럽다. … 번뇌와 맞설 때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것은 번뇌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화가 나고 짜증이 난다고 생각한다.
33. 속세를 떠난 승려로서 우리는 해로움과 불화를 일으키는 모든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을 정복해야 한다. 전쟁을 하되 번뇌와 싸워야 한다.
탐욕이 있다면 탐욕과 싸우라. 분노가 있다면 분노와 싸우라. 어리석음이 있다면 어리석음과 싸우라. 이것이 바로 법의 전쟁이다. 마음에서 치러지는 이 전쟁은 참으로 힘겹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힘겨운 전쟁이다.
34. 좌선을 할 때면 똑바로 앉으라. … 붓다의 모습처럼 항상 바른 자세로 균형을 유지하라. 그렇게 하면 마음도 환하고 투명해진다. 최대한 오랫동안 같은 자세를 유지하다가 자세를 바꾸라. 아프면 아픈 대로 내버려 두고 서둘러 자세를 바꾸면 안 된다.
‘이건 너무해. 아무래도 좀 쉬어야겠어.’라고 중얼거리지 마라. 고통이 극에 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기에서 조금 더 참으라 ‘아프다 아파! 정말 아프다!’ 붓도가 아닌 고통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다. 계속 고통에 집중한다. 움직이지 말라. 고통이 극에 달하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라. 저절로 없어지게 내버려 두라.
절대 포기하지 말라. 땀이 쏟아질 수도 있다. 옥수수 알처럼 굵은 땀방울이 가슴으로 흘러내린다. 그러나 고통을 이겨내고 나면 고통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 계속 그렇게 하라. 지나치게 밀어붙여서는 안 되겠지만 꾸준히 수행을 계속하라.
35. 하고 싶을 때만 수행을 해도 괜찮을까? 그것이 법과 일치하고 가르침에 부합할까? 의욕이 있을 때나 의욕이 없을 때나 수행해야 한다. 붓다께서 그렇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수행을 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린다. 하고 싶지 않을 때는 굳이 하려 들지 않는다. 이것은 수행이 아니라 재앙이다. 참다운 수행이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쉬울 때나 어려울 때나, 더울 때나 추울 때나 수행하는 것이다.
36. 죽음이 가까이 있을 때 수행하지 않는다면 언제 수행을 하겠는가? 건강해지면 수행을 할 것 같은가? 아니다. 행복 속에서 길을 잃을 것이다. 고통스러울 때도 고통 속에서 길을 잃기 때문에 수행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언제 수행을 한단 말인가?
사람들은 오직 자신이 아프고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 열병으로 죽을 뻔했다는 사실만을 기억한다. 자신이 힘든 일을 겪고 있다는 것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 수행이 있다.
37. 어떤 사람들은 명상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결국 포기한다. 그리고 수행할 만큼 덕을 쌓지 못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늘 그런 식으로 번뇌의 편에 선다.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이 길을 이탈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 내면을 들여다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최고의 수행은 책을 많이 읽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책을 모두 가져다가 벽장에 넣고 잠가 버리라.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읽으라. … 마음속에서 감흥이 일면 좋아함이든 싫어함이든 선함이든 악함이든 “이건 확실하지 않아”라고 하면서 잘라내라.
무엇이든 잘라 버리라. … 지속적인 것, 믿을 만한 것이 어디 있던가? 모든 것을 불확실한 것으로 인식하면 그것들의 그릇된 가치도 사라진다. 모든 것이 하찮아진다. 아무 가치도 없는 것에 왜 매달리겠는가?
38.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고 애쓰면 마음은 고요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고요에 대한 욕망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이미 방해받고 있는 마음은 고요하게 만들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다시 방해를 받는다. 욕망이 원인이다.
우리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자 하는 원함이 바로 탄하(욕망)임을 깨닫지 못한다. 고요해지기를 원할수록 마음은 더 어지러워지고 결국 우리 자신과 씨름하다가 포기하고 만다.
마음은 본성에 따라 움직일 뿐이고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왔다 가는 것임을 안다면, 마음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 우리가 마음을 붙잡고 집착하지 않으면 해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 마음을 붙잡는 것이야말로 온갖 문제의 원인이다.
39. 꾸준히 수행하고 기분에 귀 기울이지 말라. 기분이 좋든 나쁘든 무슨 상관인가? 붓다께선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셨다. 붓다께선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두루 경험하셨다. 그것이 붓다의 수행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취하고 싫어하는 것을 버리는 것은 수행이 아니라 재앙이다.
40. 요즘 사람들이 소위 수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수행이라고 할 수 없다. 제대로 수행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대로 수행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본성을 거스를 용기가 없기 때문에 감정을 거스르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번뇌에 저항하고 번뇌를 파고들어 뿌리 뽑으려 하지 않는다. 수행할 때 기분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마음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으며 이미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생을 미혹에 빠져 살았다. 그러나 마음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마음은 한낱 사기꾼에 불과하며 우리를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으로 이끈다. 도둑질과 약탈, 욕정, 증오로 이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 마음은 정말 사기꾼이다. … 그렇다. 마음을 따르지 말라. 마음을 따르는 자는 자신이 좋아하고 욕망하는 것을 따르는 자이며, 아직 수행하지 않는 자이다. 사람들이 수행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 수행이 아니고 재앙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41. 몸이 말할 수 있다면, 하루 종일 우리에게 “너는 내 주인이 아니야”라고 말할 것이다. … 눈, 귀, 코, 혀, 몸과 같은 감각기관들은 끊임없이 변하면서도 한 번도 우리의 허락을 구하지 않는다.
머리가 아프거나 배가 아플 때 몸은 결코 우리의 허락을 받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본성을 따른다. 이것이야말로 몸이 그 누구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붓다께선 우리의 육체를 ‘실체가 없는 대상’으로 표현하셨다.
42.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의 욕망대로 움직여 주지 않고 그저 그들의 본성을 따를 뿐이다. 당신이 고속도로 한 가운데 앉아 있다고 생각해보라. 자동차와 트럭들이 질주해 온다고 화를 내며 차들을 향해 “이 쪽으로 오지 마!”라고 소리칠 수 있겠는가?
당신이 앉아 있는 곳은 고속도로이므로 그렇게 소리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속도로에서 나와야 한다. 고속도로는 차가 달리는 곳이다. 그곳에 차가 없기를 바란다면 고통을 겪는다.
43. 좌선을 하다가 소리가 들려오면 우리는 행(行)이 방해한다고 말한다. ‘저 소리, 정말 거슬리는군!’하고 생각한다. 그 소리가 우리를 방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사실은 우리가 그 소리를 방해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소리는 그저 소리일 뿐이다. 그것을 이해하고 소리 안에 아무것도 없음을 인식한다면 소리를 내버려 두고 그 소리와 우리는 별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소리가 우리를 괴롭힌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한다. 정말 그렇다. 자기 자신을 알면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소리는 그저 소리일 뿐이다. 왜 그것을 붙잡는가? 쫓아가서 소리를 괴롭힌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44. 소리를 소리로만 인식한다면 소리는 결코 우리를 화나게 하지 않는다. 소리는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것일 뿐이며, 존재도 개인도 주체도 아니고, 우리도 그들도 아니다. 오직 소리일 뿐이다. 그렇게 마음을 놓아버려야 한다. … ‘저 소리 듣기 싫어. 귀에 거슬리니까.’라는 생각으로 소리를 방해하지 않으면 그 소리 역시 우리를 방해하지 않는다.
45. 마음은 그저 마음일 뿐이다. 생각이나 감정은 그저 생각이고 감정일 뿐이다.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라. 형태는 형태이게 하고, 소리는 소리이게 하라. 생각은 그저 생각이게 하라. 왜 그런 것들에 집착하는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분리와 이탈이 가능하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이쪽에 있고 마음은 그 반대편에 있다. 물과 기름처럼 같은 병 속에 있어도 별개의 것이다.
46. 번뇌는 그저 번뇌일 뿐이고 마음은 그저 마음일 뿐이다. 그런 것들이 본래 모습으로 있도록 내버려 두고 거기에서 떨어지고 이탈하면 모든 것이 하나의 대상이 된다.
47. 모든 것은 본래의 모습 그대로일 뿐 그 자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다. … 가시는 그저 가시일 뿐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다. 가시는 그저 제 갈 길을 갈 뿐 그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았다. 고통은 자신의 행동 때문에 일어난다.
형태(色)와 느낌(受), 인식(想), 정신적 형성물(行), 의식(識)과 같은 것들은 그저 본래 모습대로 있을 뿐이다. 싸움을 거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때리면 그것들이 되받아 친다. 그러나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다.
48. 붓다는 고통을 초월하는 데 있어 ‘이것은 나 자신이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보다 좋은 방편은 없다고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방편이지만 우리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고통이 느껴지면 고통에서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지 않고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다. 그러나 깨닫기 위해서는 고통을 잘 관찰해야 한다.
49. 분노는 (사라지라는) 우리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속한 것이라면 우리의 말을 들어야 한다. … 속지 말라. 마음이 행복하든 슬프든, 사랑하든 미워하든, 그 감정에 속지 말라. 모두 가짜이다.
50. 행복이 사라지면 불행해진다. 슬픔이 사라지면 다시 행복해진다. 이러한 순환에 빠져들면 끊임없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야 한다.
51. 오직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마음의 작용임을 알게 된다. 무엇이든 생성되면 사라지고 다시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법의 길에서는 이러한 생성과 소멸을 생(生)과 사(死)라고 부른다. 그것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세상에 대한 초연함을 일으킨다. 갈망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실제로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 순간 느낄 수 있는 초연함이다. 오직 생성과 소멸만이 있을 뿐이며 생성이 있으면 소멸이 따른다.
이제 마음은 놓아버림의 경지에 도달해 모든 것이 본성을 따르도록 내버려 둔다. 행복이 느껴지면 그것을 알고 불행이 있어도 그것을 안다. ‘행복을 안다’는 것은 행복을 우리의 것으로 착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행복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을 때 오직 만물의 이치만 남게 된다. 그래서 온갖 정신적인 감흥이 치명적인 독을 지닌 코브라와 같다는 것이다.
건드리지 않으면 코브라는 제 갈 길을 간다. 제 아무리 무서운 독을 지녔어도 우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다가가거나 건드리지 않으면 코브라는 우리를 물지 않는다. 그저 제 본성을 따를 뿐이다. 바로 그것이다. 영리한 사람이라면 코브라를 건드리지 않는다.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내버려 두고, 나쁜 것도 제 갈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라. 코브라를 다루듯 그런 감정을 다루고 건드리지 말라. … 행복은 고통의 정제된 모습일 뿐이다. … 뱀의 머리가 불행이라면 뱀의 꼬리는 행복이다.… 불교 핵심은 평화이다. 그 평화가 행복도 불행도 아님을 알 수 있다.
52. 지혜가 있는 마음은 고르거나 선택하지 않는다. 어떤 자세를 취하든 행복과 불행의 생성과정을 완전히 꿰뚫고 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모두 놓아 버린다. 결코 집착하지 않는다. … 지혜로부터 오는 평화는 행복은 물론 불행의 진리까지 보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 대한 집착은 일어나지 않고 마음이 그 위로 올라선다. 이것이야말로 불교 수행의 진정한 목표라고 할 수 있다.
53. 쌀을 먹으려면 먼저 탈곡을 해야 한다. 겉껍질을 벗겨야 그 속의 알맹이를 볼 수 있다. … 자아라는 개념은 오직 껍질일 뿐이므로 문제의 핵심, 즉 초월을 보려면 현상을 뒤집어야 한다. … 사람들은 볏단 위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것을 먹지 못한다.
54. 사실 수행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고 스스로도 미쳤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진정으로 수행할 때는 미친 상태, 뒤집힌 상태이다. 기존의 인식을 비틀어 바로잡는다. 바로잡지 않으면 지금까지와 똑같이 말썽을 일으킨다.
55. 법을 깨닫지 못하면 옳지 않은 것을 말하거나 만물의 이치에서 벗어난 것을 말할 때조차 옳은 말을 하고 있다고 믿게 된다.
56. 이곳저곳 떠도는 마음을 그대로 방치하면 마음은 하나로 통합될 수 없고 휴식을 취할 수 없다. … 아무 가치도 없고 쓸모도 없는 생각이나 감흥을 따라 방황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마음은 이내 지치고 나약해진다. 마음에 에너지가 없으면 지혜도 떠오르지 않는다. 에너지가 없는 마음은 선정이 없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멈추지 않으면 감각의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 마음은 마음이고 감각의 대상은 감각의 대상일 뿐이라는 깨달음이야말로 불교라는 나무를 번창하게 만든 뿌리이다.
57. 마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몸을 강하게 만드는 것과 다르다. 몸을 튼튼하게 하려면 운동을 하고 힘을 길러야 하지만 마음을 강하게 하려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는 고요한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58. 붓다께선 고통을 소멸시키는 방법은 우리 마음속에 법이 진리로 솟아오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법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듣기 좋은 말을 해도 그 속에 빠져들지 말라. 듣기 싫은 말을 해도 자신은 망각하지 말라. 그래야만 자유로워진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모두 속세의 법이고 우리 마음의 상태일 뿐이다. 그런 것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마음도 속세가 되고 나가는 길을 몰라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된다. 아직 그런 상태에 있다면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누르려고 하면서 실제로 자신을 누르고 있는 것이다.
59. 긴 것이 없으면 짧은 것도 없다. 옳은 것이 없으면 그른 것도 없다. … 옳은 것만 취하고자 한다면 머지않아 그른 길로 빠지게 된다. 옳음은 그름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긴 것과 짧은 것에 대해서만 탐구하고 길지도, 짧지도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칼은 칼날과 칼등, 손잡이로 이루어져 있다. 칼날만 들 수 있는가? 칼등만 들 수 있는가? 아니면 손잡이만 들 수 있는가? 손잡이와 칼등, 칼날 모두 칼의 일부이다. 칼을 집어 들면 세 부분을 모두 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것을 들면 나쁜 것도 따라온다. 행복을 들면 고통도 따라온다. 좋은 것은 붙잡고 나쁜 것은 버리는 식의 수행은 어린아이의 법, 장난감 같은 법이다.
60. 우리 몸이 바로 그렇다. 껍데기만 보고 멋지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망각하고 무상, 고통, 무아를 잊은 것이다. 안을 들여다보면 우리 몸은 참으로 역겹다.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았을 때 육체야말로 천하고 역겨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초연함이 생겨난다.
이러한 육체에 대한 무관심은 육체에 대한 혐오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비워지고 놓아버리는 것을 뜻한다. 모든 것이 실체가 없고 의존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저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우리가 원하는 무엇이든 세상의 모든 것은 저마다의 본성을 따를 뿐이다. 우리가 웃거나 울거나 모든 것은 제 모습 그대로이다. 불안정한 것은 불안정한 그대로이며, 아름답지 못한 것은 아름답지 못한 그대로이다.
61. 그저 저마다의 이치를 따르는 것뿐이다. 육체의 이치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젊은 아가씨들이 입술을 바르고 손톱을 기르는 것처럼 조금 예쁘게 꾸미거나 한 동안 매혹적이고 기분 좋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결국 한 배를 타게 된다. 이것이 육체의 길이며 다른 길은 없다. 그러나 마음만은 얼마든지 개선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62. 죽음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슬퍼하고 비탄에 빠지는지, 그리고 탄생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행복해하고 기뻐하는지 생각하면 참 재미있다. 모두 미혹이다. 삶과 죽음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꼭 울어야 한다면 차라리 세상에 태어났을 때 우는 편이 낫다. 탄생이 곧 죽음이며 죽음이 곧 탄생이기 때문이다.
…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저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다’라고 생각하라. 이것이야말로 당신이 해야 할 일이요, 의무이다. … 이것(육체)은 당신의 진짜 집이 아니고 임시거처일 뿐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63. 그런 집(육체)은 우리의 외관일 뿐 머지않아 그 집을 버려야 한다. 그곳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다.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의 몸은 탄생을 거쳐 노화와 병듦이라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친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에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 생성된 모든 것은 사라지게 마련이지만 누구나 그것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바로 그것이 어리석음이다. … 숨이 들어왔으면 반드시 나가야 하고, 나가면 또 들어와야 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64. 붓다께선 ‘육체가 내가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보다 높은 경지의 수행은 없다고 하셨다. 나 혹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은 하나의 인습일 뿐이다. … 현세에서 무상의 진리를 깨닫고 육체가 우리의 자아도, 우리의 소유도 아님을 안다면 육체가 해체될 때도 그 사실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 우리 마음속에는 항상 법이 있다. 질투하거나 원한을 품을 이유가 없다. 모두가 결국은 땅, 물, 불, 바람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65. 우리는 “컵을 깨면 안 돼!”라고 말한다. 그러나 깨어지는 것을 영원히 깨어지지 않게 만들 수 있는가? 조만간 깨어지게 되어 있다. 당신이 깨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깨고, 다른 사람이 깨지 않으면 닭이 깰 것이다.
붓다께선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진리를 간파한 그는 유리잔이 이미 깨어져 있음을 보셨다. 붓다의 깨달음은 바로 깨어지지 않은 유리잔 속에서 깨어진 유리잔을 보는 것이다.
때가 되면 결국 깨어질 테니 유리잔을 사용할 때마다 이미 깨어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컵을 사용하고 그것을 잘 간수하라. 그러다가 어느 날 손에서 미끄러져서 깨어져도 그뿐,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 왜 그럴까? 그렇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무상함이야말로 고귀한 자들의 안전장치이다. 이 안전장치만 있으면 마음은 항상 평화로울 수 있다.
66. 무상을 버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붓다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붓다는 아직도 살아계시다’는 말의 참뜻이다.
67. 속세의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일하지만 붓다께선 단지 일하기 위해 일하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원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대가를 바라고 일할 때 고통이 따른다. 한번 해보라. 마음을 평화롭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가만히 앉아서 마음을 평화롭게 하려고 노력해보라. 아마 고통스러울 것이다.
우리의 길은 보다 정제된 것이다. 어떤 일을 행하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놓아버려야 한다. 행하고 놓는 것이다. … 처음에는 누구나 욕망을 품고 수행하지만 수행을 계속해도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 그렇게 계속 수행하다 보면, 결국엔 아무 대가도 원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고 궁극에는 놓아버리기 위해 수행하게 된다.
68. 어떤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법을 실천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나는 명상수행을 하는 것은 숨을 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대답했다. … 우리에겐 항상 숨을 쉴 시간이 있다. 호흡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명상수행의 중요성을 안다면 항상 수행할 시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69. 예전에는 나도 수행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스승을 찾아 안 가본 곳이 없다. … 그러다가 방랑을 그만두고 명상을 시작했다. 이제 나는 수행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이 산 저 산 떠돌아다니던 시절, 나는 참으로 어리석었다. 올바른 수행의 장소는 바로 여기, 내 마음 속이었다.
70.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것은 고귀한 자들의 말이다. 미련하게 매달리지 말라. 모든 것을 현상으로 보고 그것을 초월하라. … 승려로서 사십여 년간 수행하면서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 하나이다.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