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환중大慈寰中 화상의 행설行說 공안
군자는 언행일치言行一致로 만인의 사표師表가 되고, 납승衲僧은 행해상응行解相應으로 중생의 귀의처가 된다. 이 때문에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그 언설만 있고 그 행실이 없다면, 군자는 이를 수치로 여긴다.”(有其言而無其行 君子恥之)라고 하며, 고인이 이르기를, “입으로는 불행佛行을 말하지만 행실은 마업魔業과 같다면, 어찌 납승의 수치가 아니랴.”(口談佛行 行同魔業 豈不恥哉)라고 한 것이다. 다시 이를 부연한다. “지해知解만 있고 원행願行이 없다면 사견邪見만 증장하고, 원행만 있고 지해가 없다면 무명만 증장한다. 행해解行가 쌍전雙全하면 마치 눈과 발이 서로 돕는 것과 같다.”(有解無行 增長邪見 有行無解 增長無明 解行雙全 如目足相資)
행설 공안은 대자환중스님의 시중으로 시작한다. 여기에 언설과 행실의 일용사日用事에서 본분을 휘날린 도인들이 있으니, 바로 대자환중과 동산양개스님이고, 또한 낙포원안과 운거도응스님이다.
생몰 연대갑자는 다음과 같다. 대자환중(780~862, 83세) 스님이 입적한 연대를 기준하면, 동산양개洞山良价(807~869, 63세) 스님은 57세이고, 낙포원안樂浦元安(834~898, 65세) 스님은 29세이며, 운거도응雲居道膺(845?~902, 58세) 스님은 18세이다. 이를 의거하면 네 분이 상면하지는 못한 듯하다.
법계는 육조혜능 남악회양 마조도일 백장회해 황벽희운 대자환중에 이르러 달마 11세손이고, 육조혜능 석두희천 청원행사 약산유엄 운암담성 동산양개에 이르러 역시 11세손이며, 운거도응스님은 12세손이고, 낙포원안스님은 임제의현스님의 시자였다가 협산선회夾山善會스님(804~881)의 법을 이었다. 조당집에 낙포落浦로 나오지만, 풍주澧州 낙보산樂普山에 거주하여 세칭 낙보화상樂普和尚이라 한다. 이 계보는 약산유엄 선자덕성 협산선회 낙포원안으로 이어져 12세손이 된다.
대자화상이 상당하여 말했다. “일장一丈만큼 말함은 일척一尺만큼 행함만 못하고, 일척만큼 말함은 일촌一寸만큼 행함만 못하니라. 실행해야 할 그곳을 말해 버리고, 말해야 할 그곳을 실행해 마치니라.”(師上堂云 說取一丈 不如行取一尺 說取一尺 不如行取一寸 說取那行處 行取那說處)
나의 견해: 사회의 지식인이라면 응당 언행일치나 지행합일 또는 행해상응은 불가결不可缺한 덕목이다. 일장이나 일척 일촌의 비유는 언설보다 행실의 덕목을 중시한다. “실행해야 할 그곳을 말해 버리고, 말해야 할 그곳을 실행해 마치니라.” 과거완료형이 있고, 현재진행형이 있는데, 이는 현재완료형에 상당한다. 이에 언설과 실행이 일시이다. 비유하면 줄탁동시啐啄同時이고 축착합착築著磕著이다. 찰나의 간격도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납인衲人이 동산스님에게 거량擧揚하니, 동산스님이 문득 기뻐하면서 말했다. “대자화상이 중생을 위한 마음이 절절하구나.”(有人擧似洞山 洞山便歡喜云 大慈和尚 爲物情切)
납승衲僧이 얼른 물었다. “저곳에서는 이와 같다고 거론하거니와, 이곳에도 과연 그러한 법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僧便問 彼中則如此 此間還有也無)
동산스님이 대답했다. “있느니라.”(洞山云 有)
납승이 물었다. “만일 그러하다면 바로 청문請問합니다.”(僧云 若與摩則便請)
나의 견해: “대자화상이 중생을 위한 마음이 절절하구나.” 노파심절老婆心切한 곳이 어디이냐? 일장이나 일척 일촌의 비유로 언설보다 행실의 수승함을 선양하고, 행해상응의 극칙極則을 제시한다.
“저곳에서는 이와 같다고 거론하거니와, 이곳에도 과연 그러한 법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피중彼中과 차간此間은 선문답의 상투어常套語이다. 피중의 대자화상 명구名句는 참으로 그와 같이 거룩하고 절절합니다만, 화상과 제가 마주한 지금 차간에도 과연 그러한 절실한 법문이 생동生動하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느니라.” “만일 그러하다면 바로 청문請問합니다.”
동산스님의 화답和答이다. “말할 수 없는 그 곳을 실행해 버리고, 실행할 수 없는 그 곳을 말해 버려야 하니라.”
나의 견해: 대자화상의 말씀이다. “실행해야 할 그곳을 말해 버리고, 말해야 할 그곳을 실행해 마치니라.” 이 말씀이 상도常道라면, 동산스님의 일구는 비상도非常道 곧 비도非道이다. 상도는 만인의 길이라 평탄하여 모두 지나갈 수 있다. 그러나 비도는 몰량대인沒量大人의 길이라 험난하여 극소수만 지나갈 수 있다.
이 당처는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한다. 다시 묻는다.
“누가 감히 말할 수 없는 그 곳을 실행해 버리고, 실행할 수 없는 그 곳을 말해 버릴 수 있느냐?”
“보현보살의 양족兩足이고, 묘수보살妙首菩薩의 묘언妙言이니라.”
묘언의 취지를 극대화하고자 하여 문수보살을 묘수보살로 대신한다.
어떤 납인이 운거스님에게 거량하니, 운거스님이 말했다. “실행할 때는 설로說路가 없고 말할 때는 행로行路가 없느니라. 설로가 없고 행로가 없으면, 합당히 어떤 길로 나아가느냐?”(有人擧似雲居 雲居云 行時無說路 說時無行路 不說不行 合行什摩路)
나의 견해: 원각경의 보안보살장을 인용한다. “대비하신 세존이시여, 원컨대 이 회상의 모든 보살대중을 위하고 말세의 일체중생을 위하사 보살의 수행점차修行漸次를 연설演說하여주소서.”(大悲世尊 願爲此會 諸菩薩衆 及爲末世 一切衆生 演說菩薩 修行漸次) 부처님이나 보살 또는 일체 수행승의 말은 모두 법을 떠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설법이다. 이 때문에 설로는 법로法路와 동일하고, 행로는 원행이고 행원이라 바로 보현행의 대로이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영어 선생님이 무명씨의 작품으로 분류되는 상식(Common Sense)이라는 시 한구절을 가르쳐주셨다. 혹자는 미국의 저명한 시인 샘 월터 포스(Sam Walter Foss, 1858~1911)라 추정하기도 한다.
“말은 뒷발질하는 동안에는 마차를 끌 수 없다네.
이 사실은 우리가 그저 언급하는 것뿐이라네.
그리고 말은 끄는 동안에는 뒷발질을 할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핵심 주장이라네.”
“A horse can’t pull while kicking.
This fact we merely mention.
And he can’t kick while pulling,
Which is our chief contention.”
“실행할 때는 설로說路가 없고 말할 때는 행로行路가 없느니라.” “말은 뒷발질하는 동안에는 마차를 끌 수 없다네. 그리고 말은 끄는 동안에는 뒷발질할 수 없다네.” 절묘하게 대비된다. “나의 도는 하나로 일관되었느니라.”(吾道一以貫之) “시 삼백편을 한마디로 통틀어말하면, 호사난상이 없느니라.”(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그 경계가 동일하다.
“설로가 없고 행로가 없으면, 합당히 어떤 길로 나아가느냐?” 이를 의역한다.
“설로가 끊어지고 행로가 끊어지면, 합당히 어떤 길로 나아가느냐?”
“구하지 말지니라. 오로지 인연을 따라 행할지니라.”(無所求行 隨緣行)
어떤 납인이 낙포스님에게 거량하니, 낙포스님이 말했다. “행로와 설로에 동시 이르면 본분사가 없고, 행로와 설로가 모두 이르지 못하면 본분사가 있느니라.”(有人擧似樂浦 樂浦云 行說俱到 本事無 行說俱不到 本事在)
나의 견해: “행로와 설로에 동시 이르면 본분사가 없다.” 보현행으로 나아가는 대로에 설로 곧 법로가 있으면 보현행이 원만할 수 없고, 법문을 연설하는 도중에 행로와 마주치면 수미일관首尾一貫할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하면 양변을 여의지 못한다.
질문: “설로가 없고 행로가 없으면, 합당히 어떤 길로 나아가느냐?”
화답: “행로와 설로가 모두 이르지 못하면 본분사가 있느니라.”
이는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하며, 이는 또한 동산스님의 화답과 상응한다. “말할 수 없는 그 곳을 실행해 버리고, 실행할 수 없는 그 곳을 말해 버려야 하니라.”
낙포스님이 또 말했다. “대자화상은 바로 고불이시고, 동산화상은 바로 세밀하게 기만欺瞞하시니라.”(又云 大慈和尚則古佛 洞山和尚則細㦒)
나의 견해: “대자화상은 바로 고불이시고, 동산화상은 바로 세밀하게 기만欺瞞하시니라.” 세리細㦒의 리㦒자는 벽자僻字로 설문해자說文解字 등 고서에 기만이나 다언多言의 뜻이 있고, 언제나 이혜㦒忚의 양식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를 의거하면, 동산화상은 세밀하게 기만하니라. 다시 말하면 은밀하게 속이고 다그치느라 말이 많구나.
이는 동산스님의 본지풍광일 수 있다. 그러나 이 행설 공안만 가지고 본다면, 대자화상이 오히려 중생을 위한 마음이 절절하지 않는가? 더구나 대자화상은 상도를 쓰고, 동산화상은 비도를 용사用事하고 보면, 고불의 명호는 동산화상에 더 어울리는 듯하다.
화상이 다시 이 거량을 전문傳聞하고 말했다. “작가作家로다.”(師又聞擧云 作家)
나의 견해: 이 사師자는 전체 문맥으로 보면 대자화상이 옳다. 사후라면 운거스님이 될 것이다. 작가는 낙포스님을 찬탄하는 말이다.
글을 쓰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대면하자마자 막막했지만, 시간의 흐름을 따라 인연과를 거치며 부족하지만 대충 완성했다. 하나 하나의 고불 호칭에 큰 문제는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반복하고 보면, 하나의 거대한 기류가 형성되고, 마지막에는 거역할 수 없는 대세가 된다. 우리는 그 대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를 거슬러 올라가고자 한다. 나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