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행(印度紀行)
2010년 12월 30일부터 2011년 1월 7일까지 9일 일정으로 우리 일행 9명은 북인도 지역을 여행하였다.
1.
부산에서 인천국제공항으로 가기 위해 원래는 항공편을 예약해 두었으나 전국에 대설특보가 내리는 바람에 결항을 우려하여 계획을 바꾸어 KTX로 상경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선행열차가 고장이 나서 우리 열차는 55분이나 연착을 하였다. 인도행 비행기를 놓칠까 염려했으나 다행히도 하루전에 서울역과 인천국제공항간에 고속철도가 개통되어 43분만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인천에서 인도의 수도 델리의 인디라 간디 공항까지 8시간 반이 걸렸다. 처음 밟아 보는 인도땅은 밤안개가 자욱하고 공기는 매케한 냄새가 났다. 인도 냄새다.
공항 근처의 호텔식당에서 처음으로 인도음식을 맛보았는데 밥알이 날아 갈 듯이 푸석푸석하였으나 카레와 토마토스프, 야채등은 입에 맞았고 특히 ‘난’이라고 하는 빵은 맛이 있어서 나는 인도 여행중 난을 가장 많이 먹었다. 난은 질이 좋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숙성시킨 후에 화덕에서 구운 둥글 넓적한 빵으로서 인도를 대표하는 음식이라 할 수 있는데 난보다 한단계 낮은 ‘짜파티’는 값이 싸서 서민들이 즐겨 먹는다. 인도에서 먹을 수 있는 고기 종류로는 닭고기 뿐이다. 쇠고기는 힌두교에서, 돼지고기는 이슬람교에서 금식 대상이다. 그런데 그 이유는 정반대다. 소는 신성한 동물이고, 돼지는 더러운 동물이기 때문이란다. 동물을 신성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누는 인간의 편견이 놀랍다. 내일 일찍 국내선 비행기를 타야하기 때문에 공항 가까운 호텔에 여장을 풀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2.
새벽 5시에 기상하여 호텔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럭나우행 비행기에 올랐다. 럭나우는 Lucknow(행운은 지금)이라는 뜻으로 다분히 인도적인 이름의 도시다. 내 좌석 좌우로 인도사람이 앉았는데 특히 오른쪽에 앉은 여인은 명품가방에 온몸을 보석으로 치장한 것으로 보아 상류층 여인 같은데 말을 한번 걸어보고 싶어도 비행기안이 너무 조용하고 아무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없어 엄두를 낼 수가 없다. 명상의 나라에 오니 비행기도 명상을 하는가?
인도는 3백여년간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그래서 영어가 통하고 생활매너에 젠틀한 일면이 있다. 인도에 서양 여행객이 많은 이유다.
럭나우는 단순 경유지일 뿐이고 여기서 버스로 4시간을 달려 스라바스티로 가야한다. 여기서부터 힘든 여행이 시작된다. 도로가 엉망이다. 포장도로라고 하는데 곳곳이 파여 있고 땜질식 보수를 했기 때문에 버스가 심하게 요동하고 몇차례의 공중부양(?)까지 감수해야 한다. 도중에 화장실이 없어 길가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에서 용변을 본다. 이런 이야기는 인도에 오기전에 여러번 들었지만 지금도 여전하고 앞으로도 개선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다. 이후의 여정에서 수없이 이런 일을 겪게 되는데 나중에는 자연화장실이 인공화장실 보다 훨씬 편하게 느껴지게 된다.
오후 3시경 스라바스티의 로터스 니코호텔에 도착하여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꿀맛 같았다.
스라바스티는 사위성(舍衛城)을 말하는데 붓다의 45년 교화기간중 24년을 이곳에서 머물며 금강경을 비롯해서 많은 설법을 하신 기원정사(祇園精舍)가 여기에 있다. 기원정사에 도착하기전 까지는 뜻밖에도 비가 내렸는데(이곳은 겨울에는 비가 오지 않는 곳이다) 도착하니까 말끔히 개어서 산뜻한 기분으로 기원정사에 들어갔다. 넓은 터에 건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붉은 벽돌로 쌓은 집터만 남아 있어 순례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곳곳에 승려들이 좌선을 하거나 독경을 하고 있는데 참배객은 많지는 않으나 간간히 들어와서 붓다가 설법했을 법한 장소에 꽃을 뿌리고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원숭이들이 뛰어 노는 모습이 평화스럽다. 붓다가 이곳에서 설한 금강경(金剛經)은 불교의 공(空)사상을 설한 대표경전이다. 오늘 폐허로 변한 이곳에 서니 공의 의미가 절실하게 느껴진다.
기원정사 부근에 있는 한국사찰 천축선원을 방문하여 주지 대인(大忍)스님으로부터 따뜻한 차 대접을 받았다.
저녁에 호텔에 돌아와서 방을 배정 받았는데 나는 독방을 쓰게 되었다. 방에 들어가보니 조그마한 공간인데 몹시 썰렁하다. 이름이 호텔이지 난방시설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TV도 없고 전화는 먹통이다. 있는 것이라고는 작은 침대 2개와 수도꼭지에서 더운물이 나오는 것과 정전에 대비하여 비치해둔 양초와 성냥 뿐이다. 추위를 잘 타는 나는 잠잘 일이 난감하였다. 한쪽 침대의 담요를 벗겨와서 두겹으로 덮고 누워 봐도 잠이 오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내복 입고 양말까지 신고 토끼잠을 잤다.
3.
밤중에 잠이 깼다. 방은 춥고 모기까지 덤벼든다. 불을 켜보니 새벽 3시다. 방 한쪽 구석에 조그만 전기 히타가 있어서 켜보니 열 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 할 수 없이 잠을 포기하고 침대위에 앉았다. 그 순간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本來無一物)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더니 눈물이 흘러 내렸다. 잠시 후 일어나 합장을 하고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금강경 사구게를 암송하였다.
만약 형상으로써 나를 구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는 삿된 길을 가는 것이니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일체의 지은법(有爲法)은
꿈 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 같고, 번개와 같나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그러자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면서 나는 오열하였다. 스라바스티 로터스 니코호텔 128호실. 나의 기원정사가 그곳에 있었다.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붓다의 탄생지인 룸비니로 향하였다. 룸비니는 인도땅에 있지 않고 네팔에 있기 때문에 국경을 넘어야 한다. 스라바스티에서 룸비니로 가는 5시간 동안의 여정에서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목격하였다. 인도는 빈부의 격차가 심해서 천당과 지옥이 같이 있는 나라라는 말이 있고 지금까지 그런 광경을 수차 보았지만 이곳에서 목격한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저런 환경에서 사람이 살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을 어찌해야 좋을까? 나그네의 마음을 몹시 상심하게 한다. 이런 광경을 보면 싯달태자가 출가한 이유를 말 아니해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놀라운 것은 그들의 천진스러운 모습이다. 아무 문제가 없다는 표정으로 느릿느릿 움직인다. 어디 바삐 갈 일도 없고, 체면 차리느라 꾸밀 필요도 없이 그저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족한 듯 하다. 정말 인도는 문제가 너무 많아서 문제가 없는 나라이다. 문제가 너무 많으면 해결 할 수가 없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인도인이 입버릇처럼 항상 하는 말은 ‘노 플로블럼’이다.
네팔 국경에 당도해 보니 길에 장대를 가로 질러 놓고 국경이라고 한다. 아무튼 사람과 차들이 붐비고 활기가 있다. 정(靜)적인 곳에서 동(動)적인 곳으로 왔다는 느낌이 든다.
룸비니는 붓다의 탄생지이다. 카필라국의 왕비 마야부인은 출산을 위하여 친정으로 가던 도중 이곳 룸비니 동산에서 잠시 쉬다가 태자를 낳았다. 지금 이곳에는 마야부인당과 태자를 목욕시켰다는 연못이 있고 아쇼카 대왕이 세운 석주만 남아 있을 뿐인데 소박하면서도 아늑한 동산이 마음에 든다. 우리는 이곳에서 새해를 맞이 하였다.
룸비니에서 붓다의 열반지인 쿠시나가르로 가는 길은 5시간의 긴 여정이다. 가는 도중에 인구가 3백만이나 된다는 도시를 통과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희한한 광경을 목격하였다. 도로라고 하는 것이 차 2대가 겨우 교행할 수 있는 정도의 폭에 불과한데 신호등이나 교통순경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도로변은 잡상인들이 차지하고 있고,수많은 인파와 화물차, 버스, 오토바이, 릭샤, 자전거에다가 소, 개에 이르기까지 온갖 잡동사니가 무질서하게 제갈길을 가고 있다. 도대체 이런 혼잡 속에서 어떻게 사고 없이 제갈길을 가는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은 리허설 없이 펼치는 지상최대의 쇼이다. 이런 쇼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니!
인도의 자동차나 릭샤(자전거로 움직이는 인력거)중에는 백미러가 없는 것이 많다. 그 대신 뒷 꽁무니에 ‘Horn Please'라고 써붙이고 다닌다. 뒤에 오는 차가 경적을 울려주면 그 소리를 듣고 진행방향을 가늠하는 것이다. 인도여행중에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바로 빵빵거리는 자동차의 경적소리다. 이 경적소리야 말로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잡아주는 신의 소리다.
저녁 늦게 쿠시나가르의 로얄 레지던시호텔에 도착하였다. 30분에 6달러짜리 마사지를 받고 숙면하였다.
4.
쿠시나가르는 아주 작은 마을인데 이곳에서 붓다가 열반하였다. 아침 일찍 열반당을 찾았다. 넓은 잔디밭에 온통 종이 쓰레기가 널려 있어 매우 실망스러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곳은 힌두교도가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참배객들이 보시하는 돈만 챙기고 관리는 소홀히 하는 것 같다. 열반당 안에 길이 6미터가 넘는 거대한 열반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많은 참배객들이 지극정성으로 참배하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나도 붓다의 발바닥에 이마를 대고 경배하였다.
열반당 뒤쪽에 붓다의 다비를 치른 열반탑이 있다. 우리는 다비장에 헌화하고 반야심경을 봉독하였다.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자기를 등불로 삼아라
붓다가 남긴 최후의 말씀이다.
쿠시나가르에서 바이샬리까지 5시간 걸린다. 인도 여행에서는 다음 행선지로 가는 시간이 보통 4~5시간 걸린다. 그것은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열악한 도로사정 때문에 버스가 제대로 달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자동차 전용도로라는 개념이 거의 없는 것 같고 일체 생물 공용도로라고 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사람, 소, 개, 코끼리가 어슬렁거리며 다닌다. 특히 소는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코뚜레를 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혼자서 제멋대로 다니다가 도로상에서 배설도 하는데 특히 쇠똥은 연료로 쓰이기 때문에 소중하게 취급된다. 쇠똥을 담벼락에 붙여 말려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한다.
바이샬리로 가는 도중에 점심시간이 되어서 길가의 모텔(이름은 모텔이지만 기사들의 휴식장소 같은 곳이다)에서 점심을 해 먹었다. 인도여행에서는 음식타령이 심한 한국사람을 위해서 인도인 요리사가 한명 배치되어 한국음식을 해주는 경우가 많다. 우리 요리사는 배불뚝이 인도 청년인데 버스 운행중에는 내내 맨뒷좌석에 드러누워 코를 골면서 잠만 자다가 밥때가 되면 드디어 솜씨 발휘할 때가 왔다는 듯이 폼을 재며 주방에 들어가 한국쌀로 밥을 짓고 김치 썰고 미역국 끓이고 수제비도 끓여 주는데 맛이 먹을만 했다.
바이샬리로 가는 길에는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지면서 인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할 수 있다. 인도에서는 며칠째 차를 달려가도 산은 하나도 볼 수 없고 끝없이 펼쳐지는 대평원과 드문드문 숲과 나무가 허공에 희미한 실루엣을 그리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여백의 미라 할까, 텅빈 충만이라 할까, 자연도 명상을 한다.
바이샬리는 비야리성이라고도 하는데 곧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인 유마거사의 고향이다. 땅이 기름져서 곡식과 과일이 풍성하고 경치도 아름다워서 인도여행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고장이다.
옛날 바이샬리에 미모가 빼어난 암나팔리라는 여인이 살았는데 너무나 미인이라서 한 남자와 가정을 이루고 살 수가 없어서 기생이 되어 재력과 위세가 대단한 위치에 있었는데 어느날 붓다의 설법을 듣고는 출가하여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자 붓다의 제자들이 깨끗치 못한 여자라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붓다는 ‘아름다운 연꽃은 진흙 구덩이에서 피어 난다’고 하시면서 제자로 받아 들였다고 한다. 바이샬리에 대림정사(大 林精舍)와 사리탑 유적지가 있는데 깨끗하게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바이샬리에서 라즈기르로 가는 중에 다리길이가 무려 7키로미터가 넘는 마하트마 간디 대교를 건넌다. 다리 입구에서 사먹은 미니 바나나(몽키 바나나 라고 한다)가 매우 맛이 있었다.
5.
라즈기르는 왕사성(王舍城)이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불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있고 붓다가 법화경을 설하신 영취산(靈鷲山.영축산이라고도 한다)이 있다.
영취산 가기 전에 먼저 나란다 대학 유적지를 찾았다. 서기 5세기경에 설립된 나란다 대학은 건물의 일부 유적만 발굴된 상태라고 하는데 그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부지면적이 가로 11키로, 세로 5키로나 되고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 학생수가 1만명에 달하는 세계최대의 대학이었다. 당나라 스님 현장(玄奘)이 이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 의정(義淨)스님이 유학하였으며,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스님도 다녀가셨다. 강의실, 도서관, 기숙사등의 터만 남아 있는데 원형보존이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인도의 불교유적은 이슬람 세력이 인도에 침입하였을 때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를 절감하게 된다.
영취산으로 오르는 길은 매우 깔끔하게 닦여 있다. 옛날 빔비사라왕이 붓다의 설법을 듣기 위하여 영취산을 오르고자 길을 닦았다고 해서 ‘빔비사라의 길’이라고 부른다. 영취산은 산마루가 독수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 산마루에는 조그만 절터가 남아 있다. 우리가 도착해보니 수십명의 티벳승려가 독경하며 예불을 올리고 있었는데 그모습이 매우 감동적이다. 산마루에 서서 옛 왕사성 터를 둘러보고 붓다가 법화경을 설하시는 장면을 상상해 보니 감회가 깊었다.
영취산을 내려 오는데 길 한쪽편으로 거지들이 한줄로 쭉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다. 인도여행에서 가장 많이 부딪치는 사람이 거지들인데, 가이드는 절대로 돈을 주지 말라고 당부하지만 전혀 외면할 수도 없다. 그냥 지나치고 나면 뒷맛이 개운치 않는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 잔돈을 좀 넉넉히 준비해서 주변상황을 봐 가면서 적절히 보시하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영취산 거지에게 10루피(300원)를 주면 1루피만 갖고 9루피를 거슬러 준다. 내 생각이지만 인도의 거지는 일종의 직업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손 내밀어 한푼 얻으면 한끼의 식사가 해결되고, 얻지 못해도 본전 손해 볼 일이 없으니 얼마나 안전한 사업인가!
영취산을 내려와서 다음 행선지인 보드가야로 향하였다. 보드가야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성도(成道)의 땅이다. 그래서 그런지 수많은 참배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마하보디 대사원(大菩提寺)의 대탑(大塔)은 기원전 3세기에 아쇼카왕이 붓다의 성도지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인데 높이 52미터로 위용이 당당하고 정교한 조각이 새겨져 매우 아름답다. 이 탑이 이렇게 잘 보존 된 것은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 세력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을 순례하기 위해서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나는 아예 맨발로 걸어 보았는데 마음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수많은 순례객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티벳사람들이다. 그들의 오체투지(五體投地) 하면서 예불하는 모습을 보면 앞으로 세계불교는 티벳불교가 이끌고 나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탑 뒤편에 보리수 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붓다가 이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며 지금의 보리수는 2천5백년전 보리수의 손자뻘이 된다고 한다. 보리수 나무 아래에 그당시 붓다가 앉았던 자리를 기념하여 장방형 대리석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금강보좌(金剛寶座)가 놓여 있다. 이 주변에는 조그만 빈터만 있으면 순례객들이 자리를 펴고 앉아 명상을 하고 있다. 우리 일행도 자리를 펴고 앉아 한동안 선정에 드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6.
바라나시는 3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도(古都)로서 힌두의 성지로 알려져 있는데 인근에 붓다가 성도후에 최초로 법을 설한 녹야원(鹿野苑.사르나트)이 있기 때문에 불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도의 모든 이미지를 모두 안고 있어서 관광객이 매우 많아 혼잡을 이루는 도시이다. 바라나시에 오면 새벽에 갠지스강에서 일출을 보는 것이 공식행사처럼 되어 있다. 갠지스강을 인도사람들은 ‘강가’라고 부르고 불교경전에서는 항하(恒河)라고 한다. 새벽에 갠지스강에서 배를 타고 나간다. 일출을 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강변에서 벌어지는 진풍경을 보기 위해서다. 강물은 시궁창 물처럼 더럽다. 하지만 힌두교도에게는 강가는 성스러운 강이며 이 강에서 목욕하면 모든 죄업이 소멸되고, 이곳에서 죽어 화장한 재가 강물에 뿌려지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난다고 믿는다. 여행객의 눈에는 강물이 너무 더러워 손을 담그보기도 꺼림직한데 힌두교도들은 이곳에서 목욕하며 기도한다. 조금만 하류로 내려가면 시체 태우는 연기가 치솟고 있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하여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와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나는 이 광경을 보면서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을 시원하게 마셨다는 고사를 떠올려 보았다. 성속(聖俗)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마음이 있을 뿐!
바라나시에서 머지않은 곳에 녹야원이 있다. 녹야원은 붓다가 성도후 최초로 법을 설한 곳이다. 건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터만 남아 있어 순례객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 오직 빈터에 홀로 우뚝 솟아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다메크 대탑(大法眼塔)이다. 상단부는 허물어졌다고 하지만 현재의 높이가 43미터나 되는 둥근 모양의 대탑인데 어찌 이 탑은 이슬람의 침입 속에서도 이렇게 살아 남았는지 신기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전 신라스님 혜초(慧超)가 인도등지를 여행하고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지었는데 그 중에 녹야원에서 지은 오언시(五言詩)가 있다.
깨달음이 멀다고 근심하지 않는데
어찌 녹야원을 멀다 하리요
단지 두려운건 낭떠러지 험한길이지만
거센바람 불어와도 두렵지 않네
붓다의 여덟탑을 다 보기란 실로 어려운 일
이리저리 헐리고 소실되었으니
그 소원 성취한 자 몇이나 될까
오늘 아침 이곳에서 내눈으로 보았노라
不慮菩提遠 焉將鹿苑遙
只愁懸路險 非意業風飄
八塔誠難見 參差經劫燒
何其人願滿 目覩在今朝
이로써 불교 4대성지를 모두 참배하였다. 4대성지란 붓다의 탄생지인 룸비니, 성도지인 부다가야, 초전법륜지인 녹야원 그리고 열반지인 쿠시나가르를 말한다.
불교가 인도에서 탄생하였는데 오늘날 왜 인도에 불교가 없는가? 평소에 의문으로 생각하던 이 문제가 4대성지를 참배하고 나서 내 나름대로 정리가 되었다. 내 생각은 이렇다.
첫째, 인도인의 약 83%가 힌두교도이고, 10% 정도가 이슬람교도이며 불교도의 수는 극히 미미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힌두교라는 것이 참 묘하다. 힌두란 어원상 인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인도인은 곧 힌두인인 것이다. 힌두교에는 창시자나 교단이라는 것이 없고 많은 신을 섬기는 다신교(多神敎)로서 특히 비쉬누와 쉬바신이 유명하다. 힌두는 인도와 함께 탄생하여 인도인의 생활 그 자체가 되어 있다. 힌두교도들은 석가모니도 힌두신 중의 한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스라바스티의 호텔 로비에서 인도사람으로부터 직접 들은 바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비쉬누의 형제라고 하였다. 결국 인도사람은 불교를 힌두교와 다르다고 생각지 않는 것이다.
둘째, 힌두교 다음으로 인도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이 이슬람(회교)이다. 이슬람은 한때 인도를 침략하여 지배하였는데 유일신 알라를 믿는 배타적인 성격 때문에 힌두교와 종교분쟁을 일으켜서 파키스탄을 인도에서 독립시키는가 하면 수많은 불교유적을 파괴하고 승려를 학살하였다. 인도의 이슬람교도의 수가 10% 정도이지만 이들은 아직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셋째, 인도에는 뿌리깊은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가 있는데,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야(무사), 바이샤(상인), 수드라(노예)로 사람의 신분을 나눈다. 원래 카스트 제도는 기원전 1500년경 인도 북방의 아리아족이 인도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을 침략하여 지배하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신분을 나눈데서 비롯하였다고 하는데 힌두교는 이 신분제도를 근간으로 하고 있음에 반하여 불교는 이를 반대한다. 인도를 움직이고 있는 권력층이나 부호들은 모두 상위신분 출신이고, 힌두교도이거나 이슬람교도이다. 이들은 정치적 목적으로 겉으로는 카스트에 반대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이 제도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로서 최대 수혜자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노예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신분을 숙명처럼 안고 감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데 있다. 간혹 하층민 중에서 입신출세를 원하는 사람만이 불교로 개종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인도에는 불교가 없다고 생각된다.
아! 이 세상에 어찌 진리가 여럿 있을 수 있겠는가? 여럿 있다면 그것들은 진리가 아니다. 성현들은 모두 하나의 진리를 말하였을 뿐이다. 지역적인 특성과 문화적인 환경 및 역사적인 배경에 따라 표현만 다르게 되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다르게 표현된 말만 보고 서로 다르다고 다투고 있으니 애석한 일이다. 일찌기 중국의 사상가 순자(荀子)가 말하기를, ‘천하에 두가지 진리가 없고, 성인은 두가지 마음이 없다’ (天下無二道 聖人無兩心)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진실로 옳다. 종교의 나라 인도에서 순자의 말을 새겨 보았다.
바라나시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아그라로 가기 위해서 야간침대열차를 타러 바라나시역으로 갔다. 1등석을 예약하라고 했는데 자리가 없어서 2등석을 예약했다고 한다. 고생 좀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어두컴컴한 역사 안에 들어가니 땅바닥에 담요를 둘러쓴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있어 분위기가 자못 으스스하였다.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는데 안개가 자욱하고 날씨는 추웠다. 나는 가방에서 쉐타와 잠바를 꺼집어내어 입고 단단히 중무장을 하였다. 인도의 기차는 연착하는 것이 정상이고 정시에 들어오는 것이 비정상이라고 하는데 우리 열차는 거의 비정상으로 도착하였다. 객차에 올라보니 낡은 화물열차 수준으로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게다가 나는 일행과 떨어져서 다른 칸에 타게 되었다. 침대칸의 조명은 희미하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나의 침대는 출입문 바로 옆의 2층인데 마치 짐 얹는 선반 같았다, 아래층에는 병자인 듯한 할머니가 누워있다. 나는 짐을 1층 침대 밑의 공간에 밀어넣고 힘들게 2층으로 올라 갔다. 침대가 작아서 발을 뻗기도 어렵고 머리 위쪽에는 환기통이 붙어 있어서 머리를 제대로 들 수도 없다. 객차안의 나쁜 공기가 모두 내쪽으로 몰려오는 느낌이고 벽에서는 벌래가 기어 나올 듯한 기분이다. 좀 있으니 승무원이 와서 담요 한장과 시트 2매를 주고 간다. 시트를 깔고 덮고 그 위에 담요를 덮어라는 뜻인 모양이다. 담요를 보니 별로 덮고 싶은 마음이 없다. 8시간 정도를 타고 가야 한다니 기가 막힌다. 또 한번 인내심을 시험해야 할 것 같다. 입은 옷 그대로에 마스크까지 쓰고 드러누웠으나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여행의 피로가 있었던지 어느새 깜박 잠이 들었다가 소변이 마려워서 깨어보니 새벽 1시다. 나는 이런 경우를 예상하고 휴대용 소변기(실은 프라스틱제 우유통이다)를 준비하였기 때문에 편하게 일을 보고나서 우연히 출입문쪽을 보니 붉은 영문글씨로 경고문이 붙어 있다. 가로되, ‘짐에 대한 분실 책임은 전적으로 여행객에게 있다.’ 나는 아차 싶어서 1층 침대밑에 집어 넣어둔 가방이 있는지 살펴 보았더니 그대로 있다. 가방이 커서 가방머리가 침대 밖으로 나와 있었기 때문에 2층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가방은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들고 가기가 쉽다. 가방 잃어버리면 여행의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되자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다. 꾸벅 졸다가 가방 확인하기를 반복하다가 새벽 6시경에 아그라에 도착하였다. 인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고 거지가 많지만 남의 물건을 훔쳐가는 도둑놈은 거의 없다고 한다. 원래 아무 일도 없는 것인데 공연한 걱정으로 잠을 설친다.
아그라의 제이피 호텔에 들어서니 너무 근사해서 마치 궁궐에 들어온 듯 하다. 그동안의 여정에서 겪은 온갖 고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느낌이다.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오전에는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호텔방에 들어가니 넓고 깨끗하고 따뜻하여 야!하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온몸이 근질근질한 느낌이 드는 옷부터 얼른 벗어던지고 더운물로 샤워를 한 후 푹신푹신한 침대에 누우니 그 행복감을 무어라고 표현할 길이 없다. 2시간정도 숙면을 취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 하다. 고진감래(苦盡甘來)란 이런 것이다.
오후에 타즈마할과 아그라성을 관광하였다.
아그라는 바로 이 타즈마할 때문에 인도 최대의 관광도시가 되었다. 타즈마할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인도의 대표적인 이슬람 건축물로서 흰 대리석으로 지은 아름다운 건물인데 지금으로부터 약350년전에 건축된 것이다. 무굴제국의 5대 황제 샤자한이 열네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왕비 뭄타즈마할을 추모하기 위하여 22년에 걸쳐 매일 2만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대리석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이 건물을 짓느라고 국고가 바닥이 날 지경인데 샤자한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야무나강 건너편에 검은 대리석으로 똑같은 건물을 지으려고 하자 그의 아들이 보다못해 아버지를 폐위시켜 아그라성에 유폐시키는 바람에 샤자한은 8년동안 감금된 상태에서 타즈마할을 쳐다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타즈마할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계각처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하지만 타즈마할의 건축용도는 왕비의 무덤이다. 샤자한 자신도 죽어서 그옆에 나란히 묻혔다. 1층에 있는 대리석관은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만든 가짜 무덤이고 진짜는 지하에 있다. 무덤이란 죽은자의 영혼이 편히 쉬는 곳인데, 이렇게 무덤을 화려한 볼거리로 만들어 놓았으니 매일같이 몰려드는 구경꾼 등살에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을 것 같다. 뿐만아니라 구경꾼들은 샤자한 내외를 추모할 생각은 전혀 없고 건물구경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아! 아름다운 타지마할이여! 한 인간의 허망한 꿈이여!
오늘이 인도에서 마지막 밤이다. 우리는 호텔에서 만찬을 하기전에 알콜도수가 낮은 인도맥주로 “마하보디 스바하!”(큰 깨달음이여 영원하라!)라고 외치며 건배하였다.
만찬 후에 바로 잠자기가 아쉬웠는데 우리의 인도여행을 가이드 해 준 단정석 사장(그는 인도여행전문회사를 경영하고 있는데 프로기질이 넘치는 유능한 가이드였다)이 이곳 제이피 호텔의 아유르베다 마사지가 유명하니 한번 받아보라고 권해서 내가 받아보았다. ‘아유르’란 생명을 뜻하고 ‘베다’란 과학 또는 지혜를 말하는데, 고대 인도에서 질병을 치료하는 의학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먼저 알몸으로 증기탕에 들어가 잠시 몸을 푼 후에 침대에 누워서 여러가지 진기한 약초로 만든 향유로 온몸을 마사지하고 나서 다시 증기탕에 들어가 향유가 몸에 깊숙히 스며들게 한 후 몸을 씻고 나오는 것이다. 나의 담당 마사지사는 26세의 인도 총각인데 내가 한국사람이라고 하니까 자기는 한국말을 할 줄 안다고 한다. 내가 너무나 반가워서 한번 해보라고 했더니 “오빠!”라고 한마디 하였다. 또 해보라고 하니 오빠 한마디 밖에 할 줄 모른다고 한다. 어디서 배웠냐고 물으니 자기 형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데 형이 보내주는 한국 드라마와 음악을 좋아한다고 한다. 인도에도 한류(韓流)가 있을 줄이야! 내가 한국 인사말을 몇마디 가르쳐 주었더니 수첩에 적어가며 열심히 외운다. 마사지 비용은 1시간에 우리돈으로 약 8만원 정도 되는데 물론 팁이 포함된 돈이지만 별도로 10달러를 팁으로 주었더니 이 친구 정확한 발음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런 향유 마사지는 마치 보약을 먹은 것과 같은 효과가 있어서 며칠 동안 몸 컨디션이 아주 좋았다.
7.
아침 일찍 아그라를 출발하여 다시 뉴델리로 돌아왔는데 버스로 5시간정도 걸렸다. 인도의 수도는 델리이고, 델리는 올드 델리와 뉴 델리가 있다. 올드 델리는 전통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도시이고, 뉴 델리는 19세기 초에 영국에 의하여 건설된 현대도시이다. 우리는 뉴 델리에서 국립박물관, 대통령궁, 인도문(India Gate)을 둘러보고 밤 비행기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에필로그
인도는 인류의 4대문명 발상지중의 하나로서 오랜 역사가 있고, 땅은 한반도의 15배, 인구는 11억이나 되는 대국이다. 여기에 여러 인종들이 제각기의 언어와 종교를 가지고 어울려 살고 있어 다양한 색깔을 내는 나라이다. 그래서 인도를 보는 시각은 보는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인도를 어떻게 표현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인생관을 알 수 있다.
중국여행은 머리로 하고, 인도여행은 가슴으로 한다. 중국은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여행을 해야 재미가 두배가 된다. 하지만 인도는 그저 열린 마음으로 가서 보면 속앓이처럼 남는게 있다.
3백년이나 인도를 지배한 영국은 섹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섹스피어의 위대성을 왜 인도에 견주어 표현했을까? 인도가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다.
이 지구상에 인도가 있어서 고맙다.
나마스떼 인디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