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당신의 가르침을 처음 접했지만, 제가 지금까지 당신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당신은 책으로부터 얻은 지식은 정보에 불과하며 그런 지식은 쓸모없는 무용지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내적인 앎이며, 지식보다는 느낌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왜 책을 출간하고 계신 겁니까?
내가 그대들에게 강의하는 이유는 그대들을 침묵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다. 나는 말을 사용한다. 그래야만 그대를 설득해서 말이 없는 존재계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은 그대가 책에 집착하지 않고 뛰어넘도록 이끈다. 책은 기껏해야 다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대가 다리 위에 집을 짓는다면, 그대는 바보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다리를 건너가라!
지금 당장, 그대는 침묵을 이해하지 못하고 언어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말을 이용해서 그대에게 침묵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 것이다. 단어와 단어 사이, 행과 행 사이에서 그대가 나의 뜻을 충분히 읽어낸다면, 언젠가 그대는 침묵을 듣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그땐 책이 필요가 없다. 그 모든 책을 다른 경전, 성경, 베다와 함께 모두 불태워버려라. 내 책 역시 모두 불태워져야 한다.
모든 걸 뒤로 하고 떠나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대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대가 준비가 되면, 어떠한 책도 필요가 없다.
그런 책들은 ‘이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출판된 게 아니다. 그것들은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은 있지만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출간되었다. 그들의 열망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들은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대를 도우려면, 내가 그대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그대가 나에게 다가오기 전에 내가 그대에게 다가가야만 한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내가 있는 곳까지 그대를 데려오기 전에 그대가 있는 곳까지 내가 내려와야 한다.
그 책들은 꼭 필요한 게 아니다. 그대 때문에 그 책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대가 그것들을 뛰어넘고 지나쳐 갈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대가 여기에 없었다면 그대는 그것들을 지나쳐갈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내 말을 듣기 위해 여기에 있다. 그대는 내 말을 들음으로써 뭔가를 얻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그대가 말을 듣는 것으로 뭔가를 얻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가 내 말을 들음으로써 말로 전해지지 않는 것을 들어볼 수는 있을 거라고 본다. 그걸 통해서 그대는 뭔가를 얻게 될 것이다. 책을 통해서는 그 누구도 뭔가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책은 그대가 뛰어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모든 경전들은 그와 같은 말을 한다.
우파니샤드에는 이렇게 나온다.
나야마트마 프라바차넨 라바요
nayamatma pravachanen labhyo
이 영혼은 설교를 듣는 것으로 성취할 수 없습니다.
나 메드야 나 바후나 슈루텐
na medhya na bahuna shruten
혹은 지식으로, 혹은 많이 읽는 것으로...
우파니샤드의 다른 문구엔 이렇게 나온다.
목표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가 목표인가?
언어를 뛰어넘어라. 비로소 그럴 때 그대는 알게 되리라.
말이 되돌아오고 더 이상 뛰어넘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에 진리를 향한 문이 있다. 성경과 코란 같은 경전들은 그대가 언어를 뛰어넘도록 도와주기 위해 존재한다. 그대가 그것들을 머리에 짊어지고 살아왔다면, 그대는 어리석은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그대는 그것들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거기엔 이렇게 나오기 때문이다.
‘언어에 집착하지 마라. 이론, 개념, 철학에 매달리지 마라. 그 모든 건 잡동사니에 불과하다!’
내 책들은 초월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 구도의 길에서 그것들을 읽으며 즐기되 부디 그것들에 집착하진 말라. 그 모든 걸 뛰어넘을 준비를 하라.
- 오쇼의 <나는 누구인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