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 연민의 정이 많은 보살이 있었다. 그런데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었을 때, 그들은 그가 남성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남성이 그렇게 연민이 많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그의 불상을 여성으로 표현했다. 그런 불상들을 관음보살이라고 부르며, 여전히 그렇게 숭배되고 있다. 그 이야기는 아름답다.
중국에 부처의 메시지를 전하는 불교 승려들이 설명하려고 했다.
“당신들은 어리석다. 이것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그러나 조각가들이 말했다.
“그럴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연민이 남성이 아니라 오직 여성에게서만 가능하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불상들을 여성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붓다는 얼굴과 자태에 있어서 남성보다 여성에 더 가깝게 보인다. 여섯 번째 센터에서 복종을 한 것이다. 논리가 사랑에 복종하고, 논쟁이 느낌에 복종하고, 공격성이 수용성에 복종한 것이다. 갈등이 협력으로 전환되었다. 이제 일부분과 전체 사이에 싸움은 없다. 부분은 전체와 함께 흘러가고, 모든 긴장을 던져버렸다. 전체가 부분을 끌어안은 것이다.
신이 남성을 먼저 창조하고, 남성으로부터 여성을 창조했다는 기독교의 비유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여성성에 대한 대단한 존경심을 뜻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높은 존재이고,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나왔고,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꽃 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7일째가 되는 날 신은 휴식했다. 집에 돌아간 뒤에 다른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사하스라르는 완전한 휴식의 센터이다. 그대는 집에 도착했다. 이제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
가장 낮은 차크라인 물라다르는 ‘불안’의 센터이며, 가장 높은 센터는 ‘휴식’의 센터이다. 이 둘 사이에 일곱 개의 구분이 존재한다. 그것들을 일곱 개의 색채로 부를 수 있다. 그렇다. 인간은 무지개이다. 또는 음악의 7음계로 부를 수도 있다. 동양의 음악은 사sa, 레re, 가ga, 마ma, 파pa, 다dha, 니ni의 7음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기본 7음계이다. 그리고 이 기본 7음계로부터 모든 음악이 탄생한다. 모든 협주곡, 선율, 노래, 춤이 그것들로부터 나온다.
7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명심하라.
- 오쇼의 <기적의 차크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