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명상을 끌어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지나침이 무엇이고 부족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명상은 균형을 가져다준다. 균형은 아름다움이다. 균형은 음악이다. 균형은 곧 신이다.
인도에서 ‘궁극’을 지칭하는 모든 단어는 균형을 뜻하는 어원에서 나왔다. 사마디samadhi라는 단어는 sam이라는 어근에서 나왔다. sam은 균형을 의미한다. 음악을 뜻하는 상기트sangeet, 깨달음을 이르는 삼보디sambodhi라는 단어도 sam에서 나왔다. sam은 균형을 의미한다. 균형이 사마디이고 깨달음이다.
지금까지 그대는 충분함이 무엇이고 지나침이 무엇인지 알고도 남을 만큼 오래 살았다. 그러나 그대는 무엇을 알았는가? 비바르토, 그대는 다만 지금까지 살아 온 방식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구실을 찾고 있다. 그대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중용의 길은 이미 진아에 도달한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진리에 도달한 사람은 길이 필요 없다. 그는 이미 도달했다. 총명한 척 머리를 굴리지 말라. 나와 타협하려고 하지 말라. 진리에서 도망칠 길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라. 길은 이미 도달한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아무 길도 필요 없다. 길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것이다.
구도자에게는 중용이 교활함과 비겁함의 길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 중용은 의식의 길이다. 그것은 교활함과 비겁함의 길이 아니다. 비겁하다는 것은 또 하나의 극단이다. 소위 용감무쌍함과 비겁함은 둘 다 극단이다. 교활함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우둔함의 다른 극단이다.
중용은 용감무쌍함도 아니고 비겁함도 아니다. 중용은 깨어 있음이다. 중용은 교활함도 아니고 우둔함도 아니다. 중용은 항상 각성의 상태이다. 중용의 맛은 곧 각성의 맛이다.
피타고라스는 ‘특정한 인격을 길러라.’라고 말하지 않았다. 단지 ‘주의 깊게 관찰하라. 그대가 얼마나 극단과 극단 사이를 오가는지 알라.’라고 말한다.
주시하고 관찰하라. 그러면 자연히 중용을 발견할 것이다. 중용은 다른 사람들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다. 중용은 그대의 내면으로 솟아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발견이다.
오쇼의 <피타고라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