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산림 대법회 161강 – 1 – b
입법계품도 어떻습니까?
부처님의 10대 제자들이 입법계품 근본 법회에서 아무것도 못 보잖아요.
그때 유일하게 부처님의 장엄을 볼 수 있는 분들이 누구지요?
“보살들만 볼 수 있었다. 아라한들은 여롱여맹이었다.
눈먼 사람 같고, 귀 먼 사람처럼 보고 들을 수가 없었다.”
이런 대목들이 나옵니다.
그 대목을 자세하게, 보살정신을 설명해 놓은 것이 항순중생입니다.
항순중생을 다른 말로는 “보현행원” 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자비하신 마음으로 바탕을 삼으시기 때문이니라.”
이 자비가 1승 보살의 삼매로 가는 근본이 자비심입니다.
오늘 하는 대목도 ↑이것 같이 똑같이 나옵니다.
앞에 보현행원을 성취했으니까 뒤에 언급할 것은 뭐로 나오겠습니까?
자비심을 먼저 언급하고, 자비심이 있는 사람이 바로 발 보리심해서
가는 것을 또 언급하고, 발 보리심한 사람이 득 정각심이라.
득아뇩다라3먁3보리심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반야심경에 익히 해놨는
데요. 여기서도 똑같이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부처님께서는 자비하신 마음으로
바탕을 삼으시기 때문이니라. 중생으로 인하여
큰 자비심을 일으키고, 起大悲심이라. 生菩提心이라.”
제가 옆에 빨간 글로 해놨습니다. 한문으로요.
“生菩提心이라.”
보리심 중에서 죽어있는 보리심이 아니고, 살아있는 보리심.
生菩提心!!!!!! 보리심을 내고 = 발 보리심하고요.
“보리심으로 인하여, 因菩提心하여 成等正覺이니라.”
세주묘엄품은 ↑저런 대목을,
“자비심을 내서 보리심을 냈는데...” ←이렇게 해놨지요.
제일 앞부분은 시성정각하고, 사자좌에서는
“成最正覺이라. 최정각을 이루었다.” 成最正覺이라고 나왔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그것을 눈여겨보신 분들은,
‘아~~! 이것 세주묘엄품 하고 똑같은 구절이다.’ ←이렇게 아실 수가
있고, 이것이 저~~ 뒤에 보현행원품까지, 학교공부 하듯이 하면 그렇게
이어진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넓은 모래사장에 서 있는 큰
나무의 뿌리가 물을 만나면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모두 무성함과 같아서,
나고 죽는 생멸의 광야의 보리수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일체중생은 뿌리가 되고,”
우리는 일반적인 오류를 많이 범하지요.
‘부처님이 뿌리가 되고, 중생은 가지 줄기가 된다.’ 생각하지만,
화엄경에서는 감히 이렇게 해놨습니다.
“일체중생은 뿌리가 되고,
부처님과 보살들은 꽃과 열매가 되어 자비의 물로
중생들을 이롭게 하면, 부처님과 보살들의 지혜의
꽃과 열매를 이루느니라.”
결과 =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 열매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이지요.
그러니까 중생을 향한 믿음이라든지 이런 것은 공덕이겠지요.
‘중생을 향해서 뿌리, 공덕을 지으면 깨달음의 열매를,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보살들이 자비의 물로 중생을 이롭게 하면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기 때문이니라.”
한문으로도 써놨습니다. 최상의 깨달음.
“則能成就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라.” 세주묘엄품에는 정확하게
“成最正覺”이라고 써놨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보리는 오직 중생에게 달려있다.
중생이 없으면 모든 보살이 마침내 가장 훌륭한
정각을, 無上正覺을 이루지 못하느니라.”
“선남자여, 그대는 이 이치를 이렇게 알아라.
‘중생들에게 마음을 평등하게 함으로써 원만한 자비를 성취하고,’
말씀은 계속 반복이 됩니다.
“자비심으로써 중생들을 수순함으로써 부처님께
공양함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은 이와 같이 중생들을 수순하나니,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나의 수순함은 다함이 없나니라.
염념이 계속하여 잠깐도 쉬지 않건만,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은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나니라.”
오늘 할 부분도 신구의 3업에 대해서 반복하고ㆍ반복하고 하면서 계속
뜻을 짚어나가는 대목입니다.
자~~~ 오늘 할 대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다. 菩薩의 十種觀衆生(p, 325)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十種觀衆生하야
而起大悲하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觀察衆生이 無依無怙하야 而起大悲하며
觀察衆生이 性不調順하야 而起大悲하며
觀察衆生이 貧無善根하야 而起大悲하며
觀察衆生이 長夜睡眠하야 而起大悲하며
觀察衆生이 行不善法하야 而起大悲하며
觀察衆生이 欲縛所縛하야 而起大悲하며
觀察衆生이 沒生死海하야 而起大悲하며
觀察衆生이 長嬰疾苦하야 而起大悲하며
觀察衆生이 無善法欲하야 而起大悲하며
觀察衆生이 失諸佛法하야 而起大悲가 是爲十이니
菩薩이 恒以此心으로 觀察衆生이니라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十種觀衆生하야
而起大悲하나니 何等이 爲十가?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十種觀衆生하야
而起大悲하나니 何等이 爲十가?
불자야,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로 중생을 관찰하고 큰 자비심을 일으
키나니, -“항순중생 한다.” 이것이 무엇이냐?
所謂觀察衆生이 無依無怙(무의무호)하야 而起大悲하며,
所謂觀察衆生이 無依無怙하야,
이른바 중생이 의지할 데도 없고 믿을 데도 없음을 관찰하고는,
5온이 공한 것을 관찰하고는,
而起大悲하며,
‘자비심을 일으켜서 중생을 그냥 잘 챙겨준다.’ 이 겁니다.
잘난 사람은 자비심이 그냥 일어나지요.
觀察衆生이 性不調順하야 而起大悲하며
觀察衆生이 貧無善根(빈무선근)하야 而起大悲하며
觀察衆生이 性不調順하야,
중생의 성품이 조순하지 못하다.
중생이 뭐 거칠기 짝이 없지요. 깬자갈처럼 막 울퉁불퉁하고 그렇지요.
침처럼 뾰족뾰족하고 그렇잖아요.
절에서 우리는 흔히 “머트롭다.” ←이러잖아요.
잘하는 사람한테 잘하는 것은, 매끄러운 사람한테는 얼마든지 할 수는
있지만, 머트롭고 껄끄러운 사람한테는 잘하는 것이 좀 만만치 않지요.
그래 계속 앵겨붙어 싸워야 됩니다.
반칙의 왕도라고 끊임없이 싸워야 됩니다.
중생의 성품이 고르지 못함을 관찰하고
而起大悲하며, 큰 자비심을 일으키며, 또
觀察衆生이 貧無善根하야, 중생이 가난해서,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자기 것을 못 베풀어 줘서
가난한 것이지요. 가난하여 무선근이라. 善根. 공덕을 짓는 착한 뿌리가
없음을 관찰하고는, ‘아이고 저 박복한 중생이라.’ 면서
而起大悲하며, 자비심을 일으킨다.
여기서 다섯 가지는 중생들이 욕심에 떨어져서ㆍ욕심에 눈이 매어서
눈앞의 말초신경에 헐떡거리는 사람들의 다섯 곳에서 찍어놓습니다.
觀察衆生이 長夜睡眠(장야수면)하야 而起大悲하며
觀察衆生이 行不善法하야 而起大悲하며
觀察衆生이 欲縛所縛(욕박소박)하야 而起大悲하며
여기까지가 다섯 가지 욕심에 허덕거리는 중생들을...
말초신경에 끄달려서, 중추신경이, 도덕적인 신경이 무너져버린 사람들.
觀察衆生이 長夜睡眠이라. 而起大悲하며,
캄캄한 무명번뇌에 사리분별없이 미혹해서 막 이리저리 그냥,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낱낱이 잘 챙겨서
갖추어준다. 거기에 대해서, ‘아이구 저 사람, 지 갈 길도 모르는구나.
그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어준다.’ 이 말씀이지요? 또
觀察衆生이, 중생을 잘 관찰하는데,
行不善法이라. 하는 일마다 불선법. 악법만, 아주 표독하게 못된 짓만
자꾸 하기 때문에, 착하지 못한 법을 하는것을 보고, 아주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이런 하는 것보고, ‘저 사람 어떻게 잘 챙겨줘야 되겠다.’
싶어서 그래서 而起大悲하며, 대비심을 일으킨다. 이겁니다.
자비심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을 향해서는, 자비심 없어도 괜찮지요.
자비심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아주 못난 사람들을 위해서 내야
되는 마음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그런데 못난 사람이나,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비심 내기가 만만치 않지요.
그러니까 제법무아나 제법무상을 느꼈을 때, 삼매를 얻은 사람한테나
가능한 일이지요.
觀察衆生이 欲縛所縛하야,
중생이 욕심에 얽매인 바를 잘 관찰해서 그 중생들을
而起大悲하며, 구제해준다. 눈앞에 이익이 있으면 우리가 눈이 멀어버
리잖아요? 그 다음에 중생이 하는 일을 또 자세히 관찰합니다.
觀察衆生이 沒生死海(몰생사해)하야 而起大悲하며,
觀察衆生이 沒生死海하야 而起大悲하며,
중생이 생사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잘 관찰하고는 큰 자비
심을 일으킨다.
여기서 “생사의 바다에 빠졌다.”고, 生死라고 하는 것은
앞에 “업에 빠졌다.”는 말이지요.
생멸이라고 하는 것은 ‘업으로부터 야기되잖아요?
업으로부터 야기돼서 생멸의 끝이... 결과가 生死라고 하지요. 생멸.
업상에서 일어나서, 저~~ 끝에가면 無明이 緣行하고,
무명에 그런 업상이 일어나서 행하고,
“행연식식연명색명색연육입육입연촉촉연수수연애애연취
취연유유연생” 有라는 것이 업이지 않습니까?
업을 지어서 有緣 生老病死라.
“업을 지으면 업과가 따라온다.” ←이랬습니다. 또
觀察衆生이 長嬰疾苦(장영질고)하야 而起大悲하며
중생이 병고에 영원히, 아주 뺑~~뺑 돌려서 탱탱길이 질병의 고통에
얽혀있음을 관찰하고 큰 자비심을 일으키고,
여기서는 사람이 長 = 길게. 오래오래 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면
사람이 삿되지지요. 판단력이 없으면 삿된 짓만 하는 겁니다.
觀察衆生이 無善法欲하야 而起大悲하며,
중생이 착한 법에 의욕이 없다. 善法에 대해서 욕망을 일으키고 의욕이
없다.
의욕이 있는 사람이라야 勝解(승해)라. 수승한 이해력이 돋아나고,
수승한 이해력이 돋아나야 생각이 올바르게 되고,
생각이 올바르게 된 사람이라야 고요한 본심으로 가는 전주일치하는
아주 삼매의 길이 열리게 되고, 그 삼매의 길이 열린 사람한테 주어지는
것이 지혜의 바탕이 열려서 갖가지로 조목조목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欲이라고 하는 것도, 의욕이 없는 사람은 공부를 아무리
시켜도 공부가 안 되지요.
그러니까 의욕이 있는 사람이 이해력이 확 돋아나고,
이해력이 돋아난 사람들은 기억력이 또렷해지거든요.
기억력이 또렷또렷하고, 분별력이 완전히 서진 사람들은 기초로가 단단
하게 완전히 다져진 것하고 같지요.
여기도 “의욕이 없는 사람들한테ㆍ기초가 없는 사람들한테 자비심을
일으킨다.”
觀察衆生이 失諸佛法이라.
중생이 불법을ㆍ부처님법을ㆍ정법을 잃어버림을 관찰하고는,
정법은 어떻게 해서 잃어버리느냐?
정법은 不信으로부터 잃어버리는, 믿음이 없는 것으로부터 잃어버리고,
정법은 해태 = 게으름으로, 혼침ㆍ도거ㆍ산란ㆍ실념이라고 하지요.
실제불법이라. 그래 부정지라. 제대로 알지를 못한다.
여러분이 같이 우리가 견주어서 공부할 것이 있으면,
五位百法 중에 大隨煩惱가 해당하겠습니다. 대수번뇌!
소수번뇌는 어떤 겁니까? 분심을 내고ㆍ한이 많고ㆍ남 해꼬지하고ㆍ
지것 많이 아끼고ㆍ남 골치 아프게 하고 ←이런 것들이 소수번뇌잖아
요. 쪼잔하게 사는 것, 까치뜯고 사는 것, 달달달달 콩 볶는 사람 있잖
아요. 달달달 볶는 사람들요.
제가 꼭 여기 거시기스님 이라고 얘기 하는데요.
거시기스님 완전히 후라이팬에 콩 볶듯이 달달달달달달 볶아버리잖아
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아주 좀 묵직하게...
그러니까 그것 정신줄 놔 버린 사람들입니다. 정신줄 놔 버리고 나면
불법이 뭔지도 모르고, 거기에 대해서 “아이고~~” 이렇게 사람들을...
혼침한 사람들도 방방거리고 산란스럽고 이런 중생들을 잘 이끌어 나가
는 것이 열 번째 해당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마지막에는 부정지. 제대로 알지 못해서 정신줄 놓는 것.
그 사람들보고, ‘아~~ 이 사람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래서 잘 챙겨주
는 것 같습니다.
而起大悲가
是爲十이니, 이것이 열 가지니,
菩薩이 恒以此心으로, 보살이 항상 이러한 마음으로
觀察衆生이니라. 중생을 관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