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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164강 – 2 – b

작성자釋대원성|작성시간24.09.23|조회수69 목록 댓글 8

 

 

              화엄경산림 대법회 164강 – 2 – b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其中하면,

만약에 모든 보살이 그 가운데 안주하면

則得如來無上大善巧神通하야,

곧바로 그 자리에서 여래의 위없이 크게 교묘한 신통을 얻고,

 

爲一切衆生하야 種種示現하야 令其修學이니라

일체중생을 위하여 가지가지로 示現 = 나타내어서

令其 = 그들로 하여금, 修學 = 바라밀 행을 닦게한다.

 

   그 다음 넘어가겠습니다. 善 現 行!

과목 한 번 보십시오.

 

과목을 세 단락으로 크게 나눠놨다고 그랬지요?

선현행까지가 두 단락인데 선현행은,

       “10종 부사의 아래에 아홉 문은 定慧(정혜).

        선정과 지혜업의 작용의 행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선현행까지가 선정과 지혜에 대해서 다루고,

제 일곱 번째는 園林(원림). 마음의 집착이 떨어져버린 사람을

동산 園자ㆍ수풀 林자. 園林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아만이 점 쏙 들어가서 빠진 사람이라야 도량이 있다. 도량이 넓다.”

할 수 있겠지요. 제 7번요.

 

   제가 늘 자주 강의할 때 합니다만.

서장 같은 데는 대혜 종고스님은 어땠습니까?

화엄경 제 37권에 나오는가 그렇지요?

        “7지 보살이 무생법인을 얻는다고 하는 대목에서

         사람을 아홉 명이나 살상을 했던 앙굴리마라가

         발우를 들고가서 産母(산모)를 구했다고 하는 화두가 타파됐다.”

대혜 종고스님의 당신 행장에 ↑저렇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虎丘寺에서 閱華嚴(호구사열화엄)이라가.

       화엄경을 보시다가, 화엄경 10지품을 보시다가,

       10지품 중에서 제 7 원행지. 그 부분을 보다가

        7지보살이 무생법인을 얻는다는 대목에서

         豁然大悟(활연대오)했다.”

그래서 마지막 깨달음의 종착역을 화엄경으로 매듭을 지어놨지요.

대혜 서장에 보면요.

 

   자~~ 그래서 지금 하는 대목은 선현행까지가 뭡니까?

선정과 지혜! 신통지혜! 이와 같은 마음작용을 다루고, 그 뒤에 넘어

가서는 물결치는 대로ㆍ바람부는 대로, 힘이없으면 노를 놓고 바람부는

방향을 따라가는 것이지요.

 

   善現行이라.

화~~~~ㄴ하게, 반야바라밀행을 “선현행이라.” 그러지요.

그것 한 번 보세요. 善現行은 교재에는 두 단락으로 나눠놨습니다.

“보살의 열 가지 화~~~ㄴ하게 밝은 것.” 또 “10종 해탈”

조금 전에는 열 가지 해탈문이 있었지요.

 

  해탈문하고 해탈은 어떻게 다릅니까?

제가 ↑이러니까 “말하지 말고 넘어갑시다. 골치아프게...” 이렇게 하겠

지요? 분명히 다르니까 해탈문이라고 했고, 다르니까 해탈이라고도 했겠

지요. 그렇지요?

門(문)이라고 하는 것은 “방법”입니다. 방법요!  “~~하는 방법!!!!!!”

 

방법이 완전히 체득이 되어 내거화된 것은 해탈이지요. 해탈요!

해탈문은 방편이고 방법입니다. 법입니다. 법요!

그 해탈법 문이 가장 많이 나오는 데가 화엄경 입법계품 53선지식 찾아

가면서 “나는 나는 무슨 해탈법문을 얻었다.” ←이렇게 나옵니다.

 

   과판3  ↓

       “十種明下二門. 열 가지 명 아래에 두 가지 문은

         明 = 밝힌다. 善現位中行이라.

       선현행. 제 여섯 번째, 10행의 제 여섯 번째 선현행위 중의 행으로

       써, 此門 = 이 문은 正顯行體라. 행의 근본 바탕을 바로 밝히니.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똑바로 행동하려면,

반야바라밀을 의지해라. ‘봤냐? 못봤냐?’ 잘 본다고ㆍ환하게 본다고 明

아닙니까? 即是般若이니

       “故曰智明이라. 그러므로 가로대 지혜의 밝음이라.

‘봤냐? 환하게 봤다.’ = 智明.

 

   뒤에는, (2)번 째는 “해탈”이라고 해놨는데요.

      後門은 明離智障이라. 지혜가 장애되는 것을 벗어나는

      것을 밝히는데 故稱解脫. 그러므로 지혜가 어떤 장애든지

      구애받지 않고 벗어나기 때문에 그 이름을 해탈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놨습니다.

 

   자~~ 그럼 본문에 들어갑니다.

      (6) 善賢行(p, 345)

         가. 菩薩의 十種明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明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知一切衆生業報善巧智明과

知一切衆生境界가 寂滅淸淨하야 無諸戱論하는 善巧智明과

知一切衆生의 種種所緣이 唯是一相이라

悉不可得이며 一切諸法이 皆如金剛하는 善巧智明과

能以無量微妙音聲으로 普聞十方一切世界하는 善巧智明과

普壞一切心所染着하는 善巧智明과

能以方便으로 示現受生하고 或不受生하는 善巧智明과

捨離一切想受境界하는 善巧知明과

知一切法이 非相非無相이며 一性無性이라

無所分別이나 而能了知種種諸法하야 於無量劫에

分別演說하며

住於法界하야 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는 善巧智明과

 

菩薩摩訶薩이 知一切衆生生이 本無有生하야

了達受生不可得故나 而知因知緣하며 知事知境界하며

知行知生하며 知滅知言說하며 知迷惑知離迷惑하며

知顚倒知離顚倒하며 知雜染知淸淨하며 知生死知涅槃하며

知可得知不可得하며 知執着知無執着하며 知住知動하며

知去知還하며 知起知不起하며 知失壞하며 知出離하며

知成熟하며 知諸根하며

知調伏하야 隨其所應하야 種種敎化호대

未曾忘失菩薩所行하나니 何以故오

菩薩이 但爲利益衆生故로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요

無餘所爲ㄹ새

是故로 菩薩이 常化衆生호대 身無疲倦하야

不違一切世間所作이니 是名緣起의 善巧智明과

 

菩薩摩訶薩이 於佛에 無着하야 不起着心하며

於法에 無着하야 不起着心하며

於刹에 無着하야 不起着心하며

於衆生에 無着하야 不起着心하며 不見有衆生하고

而行敎化調伏說法이나 然亦不捨菩薩諸行의 大悲大願하고

見佛聞法하야 隨順修行하며

依於如來하야 種諸善根하며

恭敬供養하야 無有休息하며 能以神力으로

震動十方無量世界하나니 其心廣大하야 等法界故로

知種種說法하며 知衆生數하며 知衆生差別하며 知苦生하며 知苦滅하며

知一切行이 皆如影像하야 行菩薩行하며

永斷一切受生根本하고 但爲救護一切衆生하야

行菩薩行호대 而無所行하며

隨順一切諸佛種性하야 發如大山王心하며

知一切虛妄顚倒하야 入一切種智門하며

智慧廣大하야 不可傾動하야 當成正覺하고

於生死海에 平等濟度一切衆生하는 善巧智明이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其中하면 則得如來無上大善巧智明이니라

 

   (6) 善賢行(선현행)

         菩薩의 十種明(보살10종명)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明하니, 열 가지의 밝음이 있다.

智明이지요. 지혜의 밝음이 있다. 달마스님께서는 뭐가 제일 밝음이라

고 했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心明! “마음이 제일 밝다.”

       이 세상의 광명중에서는 “智光이 제일 밝다.”

       이 세상의 보배중에서는 “최고의 보배가 법보다.”

그랬습니다. 달마스님 출가하시기 전에, 반야다라존자를 만나서

感(감)이, 굉장히 큰 보배를 눈앞에 두고도...

 

자기 형들 두 분을 능가하는 대답을 반야다라존자 한테 하니까

반야다라존자가 ‘아, 얘는 머리깎여 중 만들어야 되겠다.’ 생각했었지요?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밝음이 있으니,

何等이 爲十고? 무엇이 열 가지냐?

 

   “반야가 卽明(즉명)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은 이렇게 恒昌(항창)하지요.

아까 장애가 없는 것을 “해탈”이라고 했잖아요. 그렇지요?

장애가 없는 것이 해탈을 반야심경은 어떻게 나옵니까?

       “心無罣碍 無罣碍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이로다.”

 

‘아~~ 심무가애 무가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장애되는 것을 다 벗어난 지혜기 때문에 구경열반.’

반야심경하고 화엄경하고 똑같이 나옵니다.

어떤 마음의, 심행의 바탕을 밝히고, 또 소지장의 해탈을 밝히는 것이
지요.

 

   자~~ 먼저 바로 우리가 행동을 하는데, 제가 두 팔을 내렸든지 올렸

든지 하는 것은, 몸이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도 있지만,

안에서 “올려라. 내려라.”하는 理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몸이 좌우로 움직이는 것은 事지요. 행주좌와는 事입니다.

행주좌와에 항상 존재하는 것은 理잖아요.

*

       “理事冥然無分別(이사명연무분별)이라.”

       “理隨事變이요 事得理融(이수사변사득이융)이라.”

아까는 뭐라했습니까?

“理深事廣(이심사광)이라. 理가 깊어질수록 事가 넓어진다. 광대해
진다.” ←이렇게 해놨습니다.

솜씨가, 안에 이해가 잘 되는 사람일수록 모든 수학 문제든지 영어 문제

든지 다 풀 수 있습니다. 돌때가리는 한 문제도 못 풀지요.

 

   1. 所謂知一切衆生業報善巧智明과

일체중생의 업과 과보. 원인과 결과를 정확하게 아는 교묘한 지혜의

밝음과, 善巧! 왜 “선교”라고 해놨지요?

“교묘” 우리 불교에서는 교묘를 많이 쓰지만,

바깥에서는 “교묘하다.”는 것을 별로 좋게는 안 쓰지요.

그런데 교묘의 정 반대말은 교활입니다. 교활.

 

아주 교활한 사람들은,

교활한 사람들의 특징이 “아첨을 잘 한다.”고 나옵니다.

유가사전을 이렇게 보면, “아첨을 잘 하는 사람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

느냐?” 특이한 행동을 반드시 한다는 겁니다.

 

(간드러진 목소리로, 억지 웃음으로)

“하이고 안녕하세요?” ←이러면(영상 보시기를...) 분명히 얄궂은 물건

한 개 딱 들고 와서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얼굴이 달라지고, 몸이 달라

지고, 납작 엎드려 절하고, 희한한 것을 다...

‘와 이라노?’ 싶으면, ‘아, 이 분은 아첨 존자구나.’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ㅎㅎㅎㅎ 금방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물과 같습니다.

흐물흐물합니다. 흐물흐물...

 

그렇지 않고 아만이 되게 높은 사람들은 쇳덩어리 같습니다.

고집이 따~~ㄱ. 땅 덩어리 같습니다. 땅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경전을 보면 희한하게 점 보듯이 알아맞힐 수 있습니다.

 

1. 교묘한 지혜의...

“교묘하다.”고 해서 ‘나쁜 것이 아니다.’이 말씀입니다.

無緣善巧捉如意(무연선교착여의). 교활한 것하고는 다르지요.

 

   2. 知一切衆生境界가 寂滅淸淨하야 無諸戱論하는 善巧智明과,

일체중생의 경계가 적멸하고 청정하여, 부질없는 말이 없음을 아는

교묘한 지혜의 밝음과,

 

   우리 어른 스님이 좋아하시는 구절이 있습니다.

“雖入世間(수입세간)이나 = 일체중생의 경계에 비록 들어가지만,

心恒寂靜(심항적정)이라 = 마음은 항상 寂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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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여연행 | 작성시간 24.09.24 理深事廣...고맙습니다 _()()()_
  • 작성자대등행 | 작성시간 24.09.24 고맙습니다 _()()()_
  • 작성자眞如華 | 작성시간 24.09.25 _()()()_
  • 작성자묘덕 | 작성시간 24.09.25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 작성자묘심행 | 작성시간 24.10.10 선현행;
    환하게 밝히는행
    바라밀행
    _()()()_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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