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산림 대법회 167강 – 2 – a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五十五
離世間品 第三十八之三
四. 普賢菩薩의 二千答
4. 二十九門의 十廻向答(三권 p, 363)
(1) 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
가. 菩薩의 十種如寶住
나. 菩薩의 十種如金剛大乘誓願心
자~~ 그 다음에 보겠습니다.
以 一切法種種義 ←여기 種種이라는 뜻은 “인연을 따라간다.”는 말이고,
한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생”이라는 말씀입니다.
“인연이 없다.”이런 말이지요.
자~~
일체 법의 갖가지 뜻이, 필경에는 한가지 뜻인 연고니,
“1상도 무상이라.” 是爲 第四如 寶住요.
이것이 제 네 번째 보배와 같이 머무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從體起用 攝用歸體(종체기용섭용귀체)라.
안이비설신의가 있다. 종종에 갖가지의 뜻이 있다.
그러나 안이비설신의가 일심에 귀결될 수밖에 없다.”
‘손오공이 온갖 재주를 부리고 1000변ㆍ10000변.
1000가지ㆍ10000가지 재주를 부리고 날아가 봤는데,
부처님 손바닥 안을 벗어날 수 없다. 한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더라.
일심자리에서 놀고 있더라.’ ←이런 것을 뭐라고 합니까?
“攝用歸體” 이렇게 얘기하지요.
신심명에도 그 대목을 자세하게 설명을 해놨지요?
다섯 번째로 넘어갑니다.
5. 知厭離煩惱(지염리번뇌)하며, 번뇌를 싫어하여 떠날 줄 알고,
知止息煩惱(지지식번뇌)하며, 번뇌를 쉴 줄도 알고,
知防護煩惱(지방호번뇌)하며, 번뇌를 막아 보호할 줄도 알고,
知除斷煩惱(지제단번뇌)하며, 번뇌를 끊을 줄도 알고,
여기서 염식ㆍ방호ㆍ제단 ←이런 것들은 전래적으로 순서가 그냥 막
써놓은 것이 아닙니다.
싫어하다 보면 떨어지게 되고,
떨어지다 보면, 싫어하다 보면 쉬게 됩니다.
순서가 쉬는 것이 먼저 아니고, 어떤 것부터요?
자~~ 어떤 사람이 ‘담배를 끊고 싶다.’ 담배를 끊으려면 담배를 좋아하는
생각을 내야 되겠습니까? ‘계속 담배 피우면 암덩어리가 생긴다.’고 자꾸
싫어 하는 생각을 계속 자기가 하다 보면 어떻습니까?
점점 끊어지고, 끊어지다 보면 나중에 담배는 없어지잖아요.
‘술 끊어야지.’하면서 맨날 한 모금 씩 마시면서,
‘내일 끊어야지ㆍ내일 끊어야지.’ 언제 끊어요? 못 끊는다 이 겁니다.
뭐든지 사람이든지ㆍ번뇌든지, 일단은 뭐한다고요?
‘싫어한다.’ 싫어하면 그 다음에 떨어진다 = 離!!!
떨어지고 나면 나중에 無!!!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5번)도 그렇게 해놨
습니다.
그러면 “염식하고 난 뒤에 방호는 뭐냐?”
실컷 쉬었는데도 조심 안하면 언젠가는 다시 쳐들어올 개연성이 있기
때문에 다시 “방호한다.”고 하잖아요. 그렇지요?
염식은 “정진”이라고 그러고,
除斷이라고 하는 것은 “불방일”이라고 그럽니다. 不放逸!!!!!!
그러니까 “정진은 뭐냐?” 착한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쉬는 것을
얘기하고요.
“불방일”이란 악한 것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덧나지 않토록 약을 먹으면
서 덧나지 않토록 상처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해놨습니다.
“염식”이라고 하는 것은 10회향정도 유식으로 보면,
“資糧位(자량위)다.”그럽니다.
여기서 “방호 = 번뇌를 막는다.”고 하는 것은 횡격막쯤 되어서,
10회향 보살이 10지 보살로 올라가기 전에, 하복부와 상복부 사이에
횡격막이 있는 것처럼 횡격막을 “방호”라고 그러지요. 그리고
“제단이라.”고 하면 5온개공을 뜻하는 것인데요.
“번뇌를 끊을 줄 안다.”는 이런 것은 굉장히 道를 아는 見道의 입장에서
정심지!!! 마음이 지극히 맑아졌을 때, 끊을 줄 아는 것이지요.
아무나 보고 마약 끊으라면 마약 끊어질 리가 없는 겁니다.
마약 안 끊으면 일단은 가둬서 구속시켜버립니다.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ㅎㅎㅎㅎㅎㅎㅎㅎ아무튼 그렇게 해놓고 나서... 순서가 그렇게 되어있습
니다. 그 다음에는 뭐냐?
修菩薩行하야, 번뇌를 끊을 줄 알고서, 보살행을 닦되,
不證實際(부증실제)라. 보살행을 닦지만,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의상스님의 제자 표훈스님의 서원문에 보면 ↑저것이 있습니다.
“나는 절대 열반에 들지 않겠다.
不入於涅槃(불입어열반)이다.
나는 열반에 안 들어간다.”
표훈스님은 금강산에 “표훈사” 절도 짓고, 범어사 주지도 하셨고,
불국사 주지도 하셨고, 의상스님의 ??상좌로써 신라 왕자출신 아닙니까?
그렇게 똑똑하신 분이 “나는...”
화엄경의 주제는 그 겁니다. “절대 열반에 들지 않겠다.”
그럼 어디 가노? “오탁악세에 들어간다.”
그것도 맹세코 “誓入濁惡世(서입탁악세)라. 맹세컨대 나는 오탁악세의
중생들이 있는 제 자리에...”
지장보살은 “극락 안 가고 나는 지옥 간다.” 지옥 중생들 때문에요.
관세음보살은,
“내 혼자 극락 안 간다. 저~ 중생들이 성불할 때 까지 나는 사바에
같이 머무른다. 내 성불을 미룬다.”
수미산 꼭대기에서 외쳤다잖아요. 수미산 꼭대기에서요.
혼자서 “내 안 간다.”한 것이 아니라, 수미산 꼭대기에서 관세음보살은
그렇게 외쳤다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좋아하고요.
修菩薩行 不證實際 ←바로 화엄경의 이 구절입니다.
“보살행을 닦지만, 절대 부증실제라.”
“窮坐實際中道床(궁좌실제중도상)”
“實際”라고 하는 것은, 과거심 불가득ㆍ현재심 불가득ㆍ미래심 불가득.
시간과 공간이 다 끊어진 시공이 없으면 인연이 침탈하지 못하는 니르바
나의 열반의 세계입니다. 깨달음의 세계요.
“實際”라고 하는 것은 아뇩다라3먁3보리지요.
“無名無相絶一切(무명무상절일체)
念到念窮無念處(염도염궁무념처)”가 바로 實際아닙니까?
실제의 공간ㆍ실제의 시간.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究竟到於實際彼岸(구경도어실제피안)이라.
진실한 경계를 증득하면 필경에 실제인 저 언덕에
이른다 = 究竟到於”
‘얍쌉한 깨달음 정도를 가지고 깨쳤다고 하지 않는다.’ 이 겁니다.
方便善巧로, 교묘한 아주 훌륭한 방편 선교로써,
善學所學하고, 배울 것을 잘 배우고, 배울 바를 배우고,
令 往昔願行으로, 옛적의 원행으로, 원과 행으로
皆得成滿호대, 모두 다 만족하게 하되,
身不疲倦(신불피권)이, 몸이 고달프지 않나니
是爲 第五如 寶住요. 이것이 제 다섯 번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니라.
6. 知一切衆生의 心所分別이,
또 무엇을 아느냐? 일체중생의 마음에 분별하는 바가
皆無處所라. 마음에 분별하는 것이 모두 유식인줄 안다.
오직 뇌피셜. 유식일 뿐이지. 자신의 생각일 뿐이지.
전부 꿈과 같은 것일 뿐이지. 실제로 꿈속에서는 큰 것도 작은 것도
없다. 이 겁니다. 모두 처소가 없는 줄 알면서도, 꿈속에서 무슨 장소가
있겠습니까? 꿈속에서 무슨 시간이 있겠습니까?
마음에 분별하는 것이 본래 허망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알지만,
而亦說有種種方處하며,
而 = 그러나 또한 갖가지 처소를 말한다.
雖無分別하고, 비록 분별이 없고
無所造作이나, 짓는 일이 없지만,
爲欲 調伏一切衆生이라.
일체중생을 조복시키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주먹질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간절하게도 하고 애절하게도 하고, 부드럽게도 하고 잡스럽게도 하고, ←이
것이 수행이라고 하지요.
그것을 다른 말로는 “悲智雙行(비지쌍행)이라.” 자비와 지혜를 겸비해서
지혜롭게ㆍ자비롭게. 잡된 사람한테는 잡스럽게 제도해야 됩니다.
같이 도박도 하고, 그것은 안 되는가 모르겠네요.
而有修行하고 而有所作이, 그렇게 수행하고 짓는 바도 있나니,
是爲 第 六如 寶住요. 이것이 제 여섯 번째 보배와 같이 머무르는 것이다.
7. 知一切法이 皆同一性이라. 모든 법이 동일한 성품임을 아나니,
‘성품과 모양이 무애자재한 것을 이제 제대로 안다.’ 이 말씀이지요?
所謂無性이며 無種種性이며, 여러 가지의 성품도 없고 無性인 줄도 알고,
無無量性이며, 한량없는 성품도 없으며, ‘본래 없다.’ 이 말씀이지요?
無可算數性(무가산수성)이며, 셀만한 성품이 없으며,
無可稱量性(무가칭량성)이며, 헤아릴 만한 성품도 없고,
無色無相이라. 빛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若一若多를, 하나다 여럿이다 하는 것을
皆不可得이라. = 以無所得故라. = 불가득이라.
과거심 불가득ㆍ현재심 불가득ㆍ미래심 불가득이요.
동서남북이 전부 불가득이지만, 얻을 수는 없지만,
而決定了知, 그래도 결정적으로 확실히 분명하게 안다.
此是諸佛法이며, 이것이 불법이고,
此是菩薩法이며, 이것이 보살법이고,
此是獨覺法이며, 이것이 독각법이고,
此是聲聞法이며, 이것이 성문법이고,
此是凡夫法이며, 이것이 범부의 법이며,
此是善法이며, 이것이 착한 법이며,
此是不善法이며, 이것이 악법이다. 착하지 않은 법이며,
此是世間法이며, 이것이 세간법이며,
此是出世間法이며, 이것이 출세간 법이며,
此是過失法이며, 이것은 과실이, 허물이 있는 잘못된 법이고,
此是無過失法이라. 이것은 잘못되지 않은 법이며,
此是有漏法이며, 이것이 새는 법이고,
此是無漏法이며, 이것이 새지 않는 법이며,
乃至는 此是有爲法이며,
여기서는 아만이 빠졌을 때ㆍ집착이 없을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자세하게 얘기했네요.
이것이 아만이 더러 빠지기 시작할 때, 縱橫(종횡)이 흔들흔들해서 빠지
려고 할 때, 이런 생각이 나오겠지요.
아니면 아집이 있으면 유루법에 딱 붙어서 이것 고집하고,
무루법에 딱 붙어서 고집하고 할 텐데요.
세간법이나ㆍ출세간 법에 “니 옳다. 내 옳다.” 이럴 텐데요.
아집이 빠져 버렸기 때문에 “양변을 다 여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此是無爲法이. 이것이 유위법이다. 무위법인줄 분명히 아나니,
결정적으로 확실하게 의심없이 아나니,
是爲 第七如 寶住요. 이것이 일곱 번째 보배와 같이 머무름이다.
여덟 번째,
菩薩摩訶薩이 求 佛不에 可得이며,
보살마하살이 부처를 구하여 얻을 수도 없고,
금강경에는 어떻게 나오나요?
“無得無說分(무득무설분)” 이라고 나오지요.
“부처님께서 얻으신 바 법이 있느냐? 유소득법부아?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이 있느냐?
有所說法耶(유소설법야)?” ←이렇게 나오지요.
금강경 말씀입니다. 금강경에 견주어 보면 금방 이해됩니다.
“無得之得(무득지득)이다. 얻을 바 없는 것을 얻는다.”
원효스님께서는 無得之得을
“無理之가 至理(무리지지리)다.
이치 없는 지극한 이치요,
不然之가 大然(불연지대연)이다.
그러하지 아니한 것이 정말 그러하다.”
원효스님께서는 ↑저렇게 해놓으셨습니다.
기신론별기 서문부터, 기신론소의 서문에, 또 금강경삼매경론에 이르기까지 원효스님의 주제는 “無理之가 至理다.”
피카소 같은 사람들을 응용하면서 이렇게 해놨습니다.
“무 기교가 기교다.”
바둑 두는 사람들은 그러지요.
수학이라든지, 정석ㆍ공식을 다 알고나면 그 다음에,
변화ㆍ통일ㆍ균형. ←이것을 그림 그리듯이 하잖아요. 그렇지요?
완전히 자기가 익숙해진 사람은 그 다음부터는 자기 솜씨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 ←이 대목이 그런 대목입니다.
“부처를 구하되 가히 얻을 수 없고,”
求菩薩不可得이며, 보살을 구하되 가히 얻을 수 없고,
求法不可得이요. 법을 구하되 가히 얻을 수 없고,
求衆生不可得이나, 중생을 구해도 가히 얻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