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文殊菩薩의 偈頌
爾時에 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 各於佛所에 同時發聲하사 說此頌言하사대
그때 온갖 곳에 있는 문수사리보살이 각각 부처님 계신 곳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어 이 게송을 말하였다.
*
문수보살(文殊菩薩)의 게송(偈頌) : 문수사리보살이 게송을 설하다
*
이시(爾時)에
일체처문수사리보살(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 :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이 ‘일체처문수사리보살’이라는 말이다.
문수사리가 오대산에만 거주하는 보살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처처마다 문수보살이 있다는 것이다.
일체처문수보살이라고 하는 이 말이 대단한 내용이다. 옛날 조사스님들은 이에 대한 설명을 몇 장씩이나 하고 있다. 이 말에서 깨달은 사람들도 많다.
일체처라는 말에는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법도 다 포함이 된다. 일체처가 문수사리보살이라면 그 문수사리는 과연 누구일까, 이런 것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각어불소(各於佛所)에 : 각각 부처님 처소에서
동시발성(同時發聲)하사 : 동시에 발성하여
설차송언(說此頌言)하사대: 이 게송을 설했다.
백억 부처님 앞에서 백억 문수보살이 동시에 발성해서 같이 합창한다는 말이다.
천 명짜리 합창단 만 개가 합쳐있다 해도 천만 명 밖에 안된다. 그런데 우리는 천만 명 합창단이 있다는 소리를 못들었다. 여기는 일체처 문수보살이 합창단이 되어서 부처님 처소에서 동시에 전부 발성해서 다같이 합창으로써 노래를 부른다. 그동안 화엄경을 많이 공부해 왔지만 보면 볼수록 점입가경이다.
이러한 대목은 얼른보면 극본 같다. 그러나 가공한 내용이 아니라,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이 순간 우리의 삶이 그대로 이렇게 보이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이 보이는 대로 기억했을 뿐이다.
우리는 지혜의 눈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보이지 않는다. 우리도 열심히 공부를 해서 이러한 것도 눈에 들어올 날이 있을 것이다.
(1) 非正理
若有見正覺이 解脫離諸漏하고
不著一切世하면 彼非正道眼이니라
만약 어떤 이가 정각(正覺)을 보되
해탈하여 모든 번뇌를 떠나고
온갖 세간에 집착하지 않는 줄로 보면
그는 도안(道眼)을 증득한 것이 아니니라
*
비정리(非正理): 이치를 어긴 손실을 나타내다
*
약유견정각(若有見正覺)이 : 만약 어떤 이가 바른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해탈이제루(解脫離諸漏)하고: 해탈이다 또는 모든 번뇌를 떠났다고 하고
불착일체세(不著一切世)하면 : 일체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본다면
피비정도안(彼非正道眼)이니라: 그는 도안을 증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이치가 아니다’ 라고 제목을 달았다. 이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성문 연각의 경지다.
물론 일체 세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상당한 수준이다. 속가에서는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화엄경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아주 소승적인 견해이고 좁은 안목이다. 모든 번뇌를 떠난다고 하는 해탈은 일반 불교에서는 대우를 많이 받는 경지지만 화엄경에서는 그렇지 않다. 화엄경과 일반 불교와는 그렇게 차이가 있다.
(2) 正理
若有知如來가 體相無所有하야
修習得明了하면 此人疾作佛이로다
만일 여래가
체상(體相)이 없는 줄 알아서
닦고 익혀 명료(明了)함을 얻으면
이 사람은 빨리 부처를 지으리라
*
정리(正理) :이치를 보는 이익을 나타내다
*
약유지지래(若有知如來)가 : 만약에 어떤 이가
체상무소유(體相無所有)하야: 고정된 체도 없고, 고정된 형상도 없어서
수습득명료(修習得明了)하면 : 체와 상이 무상한 그 경지를 수습해서 명료해지면
차인질작불(此人疾作佛)이로다: 이 사람은 그 순간 바로 부처를 지을 것이다. 여래는 실체가 없고, 어떤 실상도 없다. 그러한 내용을 환히 꿰뚫는다면 바로 부처다.
(3) 世界와 佛의 平等
能見此世界호대 其心不搖動하고
於佛身亦然하면 當成勝智者로다
능히 이 세계를 보되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하고
부처님 몸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면
마땅히 훌륭한 지혜 있는 이가 되리라
*
세계(世界)와 불(佛)의 평등(平等) : 세계와 부처님을 평등하게 보다
*
능견차세계(能見此世界)호대 : 능히 이 세계를 보대
기심불요동(其心不搖動)하고: 그 마음은 동요치 않고
어불신역연(於佛身亦然)하면 : 부처님 몸에 대해서도 또한 동요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당성승지자(當成勝智者)로다 : 마땅히 수승한 지혜를 이룬 사람이다. 바로 부처님이다. 승지는 수승한 지혜를 말한다.
(4) 佛과 法의 平等
若於佛及法에 其心了平等하야
二念不現前하면 當踐難思位로다
만약 부처님과 법에
그 마음이 평등함을 요달하여
두 가지 생각이 나타나지 않으면
마땅히 생각하기 어려운 지위에 오르리라
*
불(佛)과 법(法)의 평등(平等) : 부처님과 법을 평등하게 보다
*
약어불급법(若於佛及法)에 : 만약 부처님과 법에
기심료평등(其心了平等)하야: 그 마음이 평등함을 요달해서, 평등하게 관하면
이념불현전(二念不現前)하면 : 부처다 법이다 하는 것은 현전하지 않는다. 굳이 이것이 부처다 법이다 할 것이 없다.
당천난사위(當踐難思位)로다: 생각하기 어려운 지위로다. 부처님을 난사라고 표현했다.
(5) 佛과 衆生의 平等
若見佛及身이 平等而安住하야
無住無所入하면 當成難遇者로다
만약 부처님과 몸이
평등하게 안주하여
머무름도 없고 들어감도 없음을 보면
마땅히 만나기 어려운 이를 이루리라
*
불(佛)과 중생(衆生)의 평등(平等): 부처님과 중생을 평등하게 보다
*
약견불급신(若見佛及身)이 : 만약에 부처님과 몸이, 여기 신(身)하는 것은 중생을 뜻한다. 만약 부처님과 중생이
평등이안주(平等而安住)하야: 평등하게 안주해서
무주무소입(無住無所入)하면 : 머묾도 없고 들어감도 없음을 볼 것 같으면
당성난우자(當成難遇者)로다: 마땅히 만나기 어려운 사람을 이룰지이다. 난우자라고 하는 것도 부처님을 뜻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부처님을 만나기 어렵다.
3천 년 전의 역사적인 부처님도 만나기 어렵지만, 보통명사로서 우리 모두가 부처님이라고 하는 확신이 서기도 어렵다.
그래서 결국은 부처님은 난우자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다.
부처님을 부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6) 五蘊平等
色受無有數며 想行識亦然하니
若能如是知하면 當作大牟尼로다
색(色)과 수(受)가 수(數)가 없으며
상(想)과 행(行)과 식(識)도 또한 그러하니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알면
마땅히 대모니(大牟尼)가 되리라
*
오온평등(五蘊平等):오온을 평등하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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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수무유수(色受無有數)며 :색이니 수니 하는 것은 실체가 없다. 숫자는 실체라는 뜻으로 보면 된다.
상행식역연(想行識亦然)하니: . 상행식 역시 실체가 없다.
약능여시지(若能如是知)하면 :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안다면
당작대모니(當作大牟尼)로다 : 역시 부처님이다.
(7) 世間과 出世間의 超越
世及出世間에 一切皆超越하야
而能善知法이면 當成大光耀로다
세간과 출세간에서
모든 것을 다 초월하여
능히 법을 잘 알면
마땅히 큰 빛을 이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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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초월(超越) : 세간과 출세간을 초월하다
*
세급출세간(世及出世間)에 : 세상과 출세간에
일체개초월(一切皆超越)하야: 일체를 다 초월해서
이능선지법(而能善知法)이면 : 능히 법을 잘 알것 같으면
당성대광요(當成大光耀)로다: 마땅히 대광요를 이룰지어다. 대광요는 크게 빛난다는 뜻으로 역시 부처님을 말한다.
(8) 心無所生
若於一切智에 發生廻向心호대
見心無所生하면 當獲大名稱이로다
만약 온갖 지혜에
회향하는 마음을 내되
마음이 나는 바가 없음을 보면
마땅히 큰 명칭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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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무소생(心無所生) : 마음을 내되 내는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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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어일체지(若於一切智)에 : 만약 일체 지혜에
발생회향심(發生廻向心)호대: 회향심을 발생하대.
앞에서 초발심이라고 하는 것이 자미득도선도타 라고 하였다. 소위 발심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회향하는 것이다. 자미득도선도타가 그대로 회향심인 것이다.
견심무소생(見心無所生)하면 : 마음에 생하는 바가 없는 사실을 본다. 우리들 마음에 하나도 일어나는 바가 없다. 마음에 생하는 바가 없음을 볼 것 같으면.
그야말로 하루종일 자비심을 일으키고 하루종일 회향심을 일으키고 하루종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일으키더라도 그 자취를 보지 않고, 그 자취가 없다면
당획대명칭(當獲大名稱)이로다 : 마땅히 대명칭을 얻는다. 대명칭도 역시 부처님이다.
(9) 衆生의 無生無滅
衆生無有生이며 亦復無有壞니
若得如是智하면 當成無上道로다
중생은 생김도 없으며
또한, 다시 무너짐도 없으니
만약 이와 같은 지혜를 얻으면
마땅히 위없는 도를 이루리라
*
중생(衆生)의 무생무멸(無生無滅) : 중생은 본래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다
*
중생무유생(衆生無有生)이며 : 중생 중생하지만 생함도 없고
역부무유괴(亦復無有壞)니: 또한 다시 무너짐도 없나니 무너질 괴(壞)자는 멸이라는 뜻과 같다. 멸도 없나니
약득여시지(若得如是智)하면 : 만약 이와같은 지혜를 얻을 것 같으면, 그야말로 생멸을 초월한 지혜를 말한다. 아무리 생해도 생한 것이 아니고 멸해도 멸한 것이 아닌 본래의 이치, 본자리를 얻을 것 같으면.
우리가 흔히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고 한다. 이 말은 중생무유생(衆生無有生)이며 역부무유괴(亦復無有壞)라고 하는 말과 같은 내용이다.
일체 만법의 본성은 두 가지 상이 없는 무이상이다.
두 가지 모양이란 생상과 멸상인데 이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혜를 얻으면
당성무상도(當成無上道)로다 : 마땅히 무상도를 이룰지어다. 최상의 도를 이룸이다.
(10) 一과 無量
一中解無量하고 無量中解一하야
了彼互生起하면 當成無所畏로다
하나 가운데서 한량없음을 알고
한량없는 가운데서 하나를 알아
그것이 서로 함께 일어남을 알면
마땅히 두려울 바 없음을 이루리라
*
일(一)과 무량(無量): 하나와 무량(無量)이 둘이 아니다
*
일중해무량(一中解無量)하고: 하나 가운데 한량없음을 이해하고
무량중해일(無量中解一)하야: 한량없는 가운데 하나를 이해한다.
우리가 십현문(十玄門)을 공부할 때, 하나와 많은 것이 서로 다 용납하지만 같지 않다고 하는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이라는 구절을 공부 했는데 같은 뜻이다.
모두 하나가 되면서 또 따로인 것이다. 따로이면서 또 하나다.
여기에 우리가 지금 백여 명이 있다. 우리는 다 개개인이지만 화엄경을 공부하는 화엄행자로서는 하나다.
왕복서에는 ‘일다무애(一多無碍)는 등허실지천등(等虛室之千燈)’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一)와 다(多)가 걸림이 없는 것은 마치 텅빈 방에 천개의 등불을 밝힌 것과 같다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개개인과 여기 모인 백여 명의 전체가 이렇게 있어도 서로 아무 걸림이 없다.
이 공간에도 등불이 여러 수십 개가 있다.
A라고 하는 등불을 하나 켜도 이 방안에 가득 찬다. 그것은 그대로 켜져 있고, 거기에 B라고 하는 등불을 하나 더 켜도 그것은 그것대로 또 가득 찬다.
열 개, 스무 개, 백 개, 천 개를 이 방 안에 다 켜도 역시 아무 충돌이나 갈등없이 방안에 가득 찬다.
사실 모든 존재는 그렇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런 이치를 모른다. 모르다 보니 서로 갈등하고 내것 네것을 나눈다. 나누다 보니 평등하지 않게 보이고 평등하지 않게 보이니 서로 빼앗으려고 한다.
화엄의 사상은 ‘일중해무량(一中解無量)하고 무량중해일(無量中解一)’한 사상이다. 하나와 다(多)가 서로를 용납하는 ‘일다상용(一多相容)’의 사상이다.이것이 무애의 사상이고 사사무애의 사상이다.
이러한 화엄경의 사상을 통해서 만민이 공히 잘 살면서도 서로 침해하지 않고 서로서로 평등하게 잘 사는 삶의 지표를 세울 수가 있다. 이것을 융화사상이라고 하고 화쟁사상이라고 한다.
융화니 화쟁이니 하는 것도 바로 이런 데서 나온 것이다.
사실은 모든 존재가 본래로 그렇게 되어 있다. 마치 등불 천 개를 켜놔도 서로 상충하지 아니하고 모두 자기 등불 빛, 자기 역할을 다하는 것과 같다.
‘일다무애(一多無礙)는 등허실지천등(等虛室之千燈)이라’ 하는 글은 참 아름다운 표현이다.
모든 존재는 텅 빈 방안에 천 개의 등불을 켠 것과 같이 그렇게 존재한다. 그렇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그렇게 살자고 하는 것을 화엄경이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백 명 천 명이 살아도 다 자기 역할을 다하면서 서로 상충하지 아니하고 걸림없이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요피호생기(了彼互生起)하면 : 저것과 서로 생기함을 요달하면
당성무소외(當成無所畏)로다 : 마땅히 두려움 없는 바를 이룰 것이다. 무소외는 역시 부처님이다. 부처님을 이룰 것이다 라는 표현이다.
이와 같은 노래가 일체처 수 억만 명의 문수보살이 한 합창단원이 되어서 다 같이 부르는 노래이다. 특별히 그런 의미를 생각하며 이 글을 가만히 음미하면 더 가슴에 와닿을 것이다.
우리가 화엄경 공부를 많이 해 왔지만, 일체처 문수보살이 각각 부처님 처소에서 동시에 발성을 해서 합창으로 게송을 읊조린다고 하는 이러한 표현은 없었다.
二, 正覺의 因果
1, 光明遍照
爾時에 光明이 過此世界하야 遍照東方十佛國土하고 南西北方과 四維上下도 亦復如是하시니 彼一一世界中에 皆有百億閻浮提와 乃至百億色究竟天이라 其中所有가 悉皆明現하니라
저때 광명이 이 세계를 지나서 동방의 열 불국토를 두루 비추고 남. 서. 북방과 네 간방(間方)과 상방(上方).하방(下方)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이 하였다 그 낱낱의 세계 가운데에 모두 백억의 염부제와 내지 백억
의 색구경천(色究竟天)이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것들이 다 모두 분명하게 나타났다
*
정각(正覺)의 인과(因果) : 깨달음의 인과(因果)를 나타내다
*
광명변조(光明遍照) :광명이 동방으로 열 세계를 두루 비추다
*
이시(爾時)에 : 그 때에
광명(光明)이
과차세계(過此世界)하야 : 이 세계를 지나서
변조동방십불국토(遍照東方十佛國土)하고 : 동방으로 십불국토를 두루두루 비추고
서남북방(南西北方)과
사유상하(四維上下)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시니: 또한 다시 이와같이 비추시니
*
피일일세계중(彼一一世界中)에 : 저 낱낱 세계 가운데
개유백억염부제(皆有百億閻浮提)와
내지백억색구경천(乃至百億色究竟天)이라 : 내지 백억색구경천이 있더라.
*
기중소유(其中所有)가 : 그 가운데 있는 바가
실개명현(悉皆明現)하니라 : 모두 모두가 다 환하게 밝게 나타나더라.
지금 부처님께서 양족륜왕 발가락으로 광명을 놓았는데 그 광명이 이 세계를 지나가면서 비추고 있는 모습이다. 광명이 한 번만 슬쩍 비추고 말면 이야기가 안되는 것이다.
2, 世尊坐座
如此處에 見佛世尊이 坐蓮華藏師子之座어시든 十佛刹微塵數菩薩의 所共圍遶하야 彼一一世界中에 各有百億閻浮提의 百億如來도 亦如是坐하시니라
이곳에서 부처님 세존이 연화장 사자좌에 앉으셨는데 열 불찰미진수의 보살들이 함께 둘러싸고 계신 것을 봄과 같이 저 낱낱의 세계 가운데에도 각각 백억 염부제의 백억 여래도 또한 이와 같이 앉으셨다.
*
세존좌좌(世尊坐座) : 세존께서 자리에 앉으시다
*
여차처(如此處)에 : 이와 같은 곳에서
견불세존(見佛世尊)이: 부처님 세존께서
좌연화장사자지좌(坐蓮華藏師子之座)어시든 : 연화장 사자좌에 앉아 계시는데
십불찰미진수보살(十佛刹微塵數菩薩)의 : 십불찰미진수 보살이
소공위요(所共圍遶)하야: 다 함께 에워싸여서
*
피일일세계중(彼一一世界中)에 : 저 낱낱 세계에 가운데서
각유백억염부제(各有百億閻浮提)의 :각각 백억염부제
백억여래(百億如來)도
역여시좌(亦如是坐)하시니라: 또한 이와 같이 앉아계심을 보겠더라. 견(見)자를 여기에 새겨도 좋다. 이와 같이 앉아계신 것을 광명을 통해서 본다.
3, 菩薩大衆
悉以佛神力故로 十方各有一大菩薩이 一一各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 俱하야 來詣佛所하시니 其大菩薩은 謂文殊師利等이며 所從來國은 謂金色世界等이며 本所事佛은 謂不動智如來等이니라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고 낱낱의 보살이 각각 열 불찰미진수의 모든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니 그 큰 보살은 이르되 문수사리등이며 좇아온 바의 국토는 이르되 금색세계등이며 본래 섬기던 부처님은 이르되 부동지(不動智) 여래등이었다.
*
보살대중(菩薩大衆): 미진수 보살들과 함께하다
*
실이불신력고(悉以佛神力故)로 : 모두 부처님의 신력으로서
시방각유일대보살(十方各有一大菩薩)이: 시방에 각각 한 대보살이 있으니
일일각여십불찰미진수제보살(一一各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 낱낱이 각각 십불찰 미진수 보살로
구(俱)하야 : 역시 에워싸고 있다. 에워싼 채로
래예불소(來詣佛所)하시니: 부처님 처소에 오시니
*
기대보살(其大菩薩)은 : 그 대보살은
위문수사리등(謂文殊師利等)이며:이를테면 문수사리보살 등이다.
여기 등(等)자를 썼다. 앞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각수보살(覺首菩薩)재수보살(財首菩薩)과 보수보살(寶首菩薩) 공덕수보살(功德首菩薩) 등등 열 명의 보살들의 명단이 나왔기 때문에 여기는 ‘문수사리등이며’라고 등(等)자 하나만 쓴 것이다.
*
소종래국(所從來國)은: 좇아온 바 국토는
위금색세계등(謂金色世界等)이며 : 금색세계등이다. 세계 역시 열 세계가 있었는데 금색세계만 대표로 실었다.
*
본소사불(本所事佛)은 : 본래 섬긴 바 부처님은
위부동지여래등(謂不動智如來等)이니라 : 부동지여래등이더라. 이 역시 열 명 여래의 명호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등이더라’ 라고 하였다.
4, 文殊菩薩의 偈頌
爾時에 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 各於佛所에 同時發聲하사 說此頌言하사대
그때 온갖 곳에 있는 문수사리보살이 각각 부처님 계신 곳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어 이 게송을 말하였다.
*
문수보살(文殊菩薩)의 게송(偈頌) : 문수사리보살이 게송을 설하다
*
이시(爾時)에
일체처문수사리보살(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 : 일체처의 문수사리보살이.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있다는 것은 소승적인 견해다. 이제 이것을 뛰어 넘어야 한다. 일체처에 문수사리 보살이다.
옛날 조사스님들이 ‘일체처 문수사리보살’이라고 하는 이런 내용 하나에 그냥 껌뻑 넘어간다.
오대산에 문수사리 보살을 친견하려고 무착선사는 몇 년을 걸려서 장안에서부터 일보일배 하면서 갔다. 그 전통이 아직도 티베트에는 남아 있다.
그분이 ‘일체처문수보살’이라고 하는 이 한 마디를 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임제록에는 그 대목을 지적해서 임제스님이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없다’ 라고 하면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일보일배 하고 가는 너야말로 진짜 살아있는 문수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른말이다. 우리가 눈을 얼마나 떴느냐 하는 것만 문제일 뿐이다. 이 말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고 따질 틈이 없다. 일체처 문수보살이
각어불소(各於佛所)에 :각각 부처님 처소에서
동시발성(同時發聲)하사 : 또 합창을 한다.
설차송언(說此頌言)하사대: 이러한 게송을 말씀하사대
(1) 正覺의 因
衆生無智慧하야 愛刺所傷毒일새
爲彼求菩提하시니 諸佛法如是로다
중생이 지혜가 없어서
애착의 가시에 상한 바가 됨이라
그를 위해 보리를 구하시니
모든 부처님의 법이 이와 같도다
*
정각(正覺)의 인(因) : 깨달음의 인(因)을 나타내다
*
중생무지혜(衆生無智慧)하야 : 중생들은 지혜가 없어서
애자소상독(愛刺所傷毒)일새: 애욕의 가시에 상처 입고 독 맞은 바가 될새
위피구보리(爲彼求菩提)하시니 : 그들을 위해서 지혜와 자비를 구하시네. 보리는 지혜와 자비다.
제불법여시(諸佛法如是)로다: 모든 부처님 법이 이와 같더라.
애자(愛刺)는 사랑의 가시, 애착의 가시다. 사랑의 가시에 찔리는 것은 무조건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지혜가 없어서 사랑의 가시에 찔렸다. 애(愛)라고 하는 글자는 사랑이라고 하는 한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불교 용어로 쓰이면 애착, 애욕 같은 말에 붙어서, 아함경 같은데서 이 애자를 잘 쓴다. 특히 근본불교를 공부한 사람들은 목마를 갈자를 써서 ‘갈애(渴愛)’라는 용어를 쓰기 좋아한다. 우리는 그냥 애착이라고 하면 다 통한다.
(2) 正覺의 果用
普見於諸法하고 二邊皆捨離일새
道成永不退하사 轉此無等輪이로다
不可思議劫에 精進修諸行은
爲度諸衆生이시니 此是大仙力이로다
導師降衆魔가 勇健無能勝이라
光中演妙義하시니 慈悲故如是로다
以彼智慧心으로 破諸煩惱障일새
一念見一切하시니 此是佛神力이로다
擊于正法鼓하사 覺悟十方刹하야
咸令向菩提케하시니 自在力能爾로다
모든 법을 널리 보고
이변(異邊)을 다 버리며
도를 이루어 길이 물러서지 않으사
짝이 없는 법륜을 굴리시도다
불가사의한 겁 동안
정진하여 온갖 행을 닦음은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함이시니
이것은 대선(大仙)의 힘이로다
도사께서 마군들을 항복받음이여
그 용맹이 능히 이길 수 없어
광명 가운데서 묘한 뜻 설하시니
자비하신 연고로 이러하도다
저 지혜의 마음으로
모든 번뇌를 깨뜨릴 새
한 생각에 일체를 다 보시니
이것은 부처님의 위신력 이로다
정법(正法)의 북을 두드리사
시방세계를 깨닫게 하여
다 보리에 나아가게 하시니
자재하신 힘이 능히 이러하도다
*
정각(正覺)의 과용(果用) :깨달음의 과용(果用)을 나타내다
*
보견어제법(普見於諸法)하고 : 널리 모든 법을 보고, 모든 법을 본다고 하는 것은 유형 무형 유상 무상의 모든 존재와 상황들을 다 만나고 보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지금 앉아서 책을 보고 연필을 보고 말소리를 듣고 사람을 보고 하는 이러한 사실에
이변개사리(二邊皆捨離)일새: 이변을 다 버리고 떠난다. 성철스님 법문에 이변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변(邊)자는 갓 변(邊)자로 치우쳤다는 뜻이다. 있다, 없다고 하는 두 가지 치우친 안목, 치우친 견해를 이변이라고 한다.
있는 것을 꼭 있다고만 생각하면 잘못 본 것이다. 사람의 감정이 그렇고 우리 육신이 그렇고 세상만사가 다 그대로 있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없다고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없는 가운데 있다. 또 있는 가운데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있다 없다를 다 떠나야 된다. 떠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까지 해야 된다.떠나면서 수용하고 수용하면서 떠나는 것이다.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끄달리지 않는다’는 표현을 불교에서 잘 쓰는데 그것이 사리(捨離)고 중도(中道)다.
중도라고 하는 것은 뚜렷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사고가 중도적 사고고, 그러한 삶이 중도적 삶이다.
어디 치우치지 않고 다 떠나면서 다 수용하는 삶을 중도적 삶이라고 하는 것이지 중도가 불성처럼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도를 보면’ 하는 말은 맞지 않고, ‘중도로 보면’ 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모든 것을 중도로 보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있음과 없음을 동시에 수용하면 그것이 성불의 경지고, 해탈의 경지다.
도성영불퇴(道成永不退)하사 : 도를 이룸에 영원히 물러서지 아니해서
전차무등륜(轉此無等輪)이로다: 같은 이가 없는 최고의 법륜을 굴린다. 전차무등륜이란 평등함이 없는, 견줄 데가 없는 법륜을 굴린다는 뜻이다. 이것은 보통 노래가 아니다. 수억만 문수보살이 합창하는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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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겁(不可思議劫)에: 불가사의한 겁에
정진수제행(精進修諸行)은: 정진해서 온갖 것을 닦은 것은
위도제중생(爲度諸衆生)이시니: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함이니. 아무리 오랜 세월을 수행했다 해도 중생 제도하기 위한 수행이어야 한다. 불교는 본래 그렇다. 중생 제도를 하기 위한 수행이지 자기 해탈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점이 불교가 어렵다고 하는 점이다.
나부터라도 나를 위해서 공부하고, 나를 위해서 수행하고, 나를 위해서 복을 짓는다. 순수하게 남을 위해서 수행하고 남을 위해서 공부하고 남을 위해서 수행한다는 것은 참 어렵다.
여기는 불가사의 겁인 무수한 세월동안에 온갖 수행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중생을 위한 수행이라는 것이다.
‘자미득도선도타’와 같은 말이다. 자기는 제도받지 아니했어도 남을 위해서 제도한다. 거기에는 이미 오로지 부처의 정신만이 있다. 그 말은 부처만이 할 수 있는 소리다.
차시대선력(此是大仙力)이로다: 이것은 큰 신선의 힘이로다. 부처님을 신선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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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항중마(導師降衆魔)가: 부처님이, 온갖 마구니를 항복 받은 것이
용건무능승(勇健無能勝)이라: 아주 용맹스럽고 용건해서 능히
이길 이가 없더라.
광중연묘의(光中演妙義)하시니 : 광명 가운데서 미묘한 뜻을 펴시니, 광명 그 자체가 묘의다.
자비고여시(慈悲故如是)로다: 자비한 까닭에 이와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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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지혜심(以彼智慧心)으로 : 저 지혜의 마음으로
파제번뇌장(破諸煩惱障)일새: 온갖 번뇌의 장애를 다 깨뜨려 주실새
일념견일체(一念見一切)하시니 : 한 순간에 일체를 보게 되니
차시불신력(此是佛神力)이로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신통력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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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우정법고(擊于正法鼓)하사: 좋은 말이다. 정법의 북을 둥- 하고 울리는 것이다. 정법의 북을 쳐서
각오시방찰(覺悟十方刹)하야: 시방 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한다. 북을 치든지 운판을 치든지 하는 것은 걸어다니는 동물들을 건지기 위해서고 허공에 다니는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다. 물에 있는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 목어를 치고, 현세 중생이나 지옥 중생을 위해 종을 친다. 정법의 북을 쳐서
함령향보시(咸令向菩提)케하시니 : 그들을 모두 보리로 향하게 한다. 자비와 지혜로 향하게 하시니
자재력능이(自在力能爾)로다: 자재한 힘을 가지신 부처님이 능히 그러하더라.
(3) 爲度衆生
不壞無邊境하고 而遊諸億刹호대
於有無所着이면 彼自在如佛이로다
諸佛如虛空하사 究竟常淸淨하시니
億念生歡喜하면 彼諸願具足이로다
一一地獄中에 經於無量劫하시니
爲度衆生故로 而能忍是苦로다
不惜於身命하고 常護諸佛法하시니
無我心調柔하야 能得如來道로다
끝없는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모든 억만 세계에 노닐되
유(有)에 집착이 없으면
그의 자재함이 부처님과 같도다
모든 부처님은 허공과 같으사
끝까지 항상 청정하시니
생각하고 기뻐하면
저 모든 원(願)을 구족 하도다
낱낱 지옥 가운데서
한량없는 겁을 지내시니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연고로
능히 이 고통을 견디도다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항상 모든 불법을 옹호하시니
아(我)가 없어 마음 편안하여
능히 여래의 도를 얻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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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중생(爲度衆生): 중생들에게 부처님과 같아지기를 생각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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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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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괴무변경(不壞無邊境)하고 : 가없는 경계를 무너뜨리지 아니하고 그대로 두고,
이유제억찰(而遊諸億刹)호대: 온갖 억이나 되는 많고 많은 세계를 노닌다, 중생제도 하러 다닌다. 경전에서 유(遊)자는 ‘법문하러 다닌다’는 뜻이다. 선가(禪家)용어로 유행(遊行)이라고 하는 말 역시 제도하러 다니는 것을 말한다.
해제를 하면 스님들이 전부 유행을 한다. 사실 유행은 중생을 제도하러 다니는 것이지 바람 쏘이고 여행하러 다니는 것이 아니다. 한 철 동안 공부를 많이 했는데, 그 공부한 것을 그대로 두면 썩거나 굳어져서 크게 쓸모가 없어진다. 그 공부를 회향을 해야 더 빛이 나고 향기를 발한다. 그래서 안거 후에는 유행을 한다. 부처님도 안거 후에는 으레 유행하는 걸로 되어 있다.
지금 전세계는 200개 나라인데 여기는 억찰이라고 하였다. 억찰이나 되는 세계로 유행하대
어유무소착(於有無所着)이면 : 모든 존재에 있어서 집착하는 바가 없을 것 같으면
피자재여불(彼自在如佛)이로다: 그가 자유자재한 것이 부처와 같다. 세계는 그대로 두고 무변한 경계를 무너뜨리지 아니하면서 억찰이나 되는 세계를 노닌다. 그러면서 모든 존재에 있어서 집착함이 없다. 그가 자유자재함이 부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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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불여래허공(諸佛如虛空)하사 : 모든 부처님은 허공과 같아서
구경상청정(究竟常淸淨)하시니: 구경에 항상 청정하시니.
여기서도 청정은 공(空)이라는 의미다. 청소하고 물 뿌리고 닦아서 깨끗한 것은 청정이라고 하지 않는다. 아무리 깨끗하다 한들 형상 있는 깨끗함은 금방 변하기 마련이다. 항상 하는 것이 못된다.
모든 부처님은 허공과 같아서 구경에 항상 청정하다고 하는 것은 항상 텅 빈 허공과 같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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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교 티비나 라디오 같은 매체를 통해 불교 설법을 참 열심히 듣는다. 요즘 젊은 법사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엊그제는 대구 불광사에서 석우스님이 법문을 했는데 앞으로 다른 설법도 할지 안할지 모르지만 내가 근래에 수십 명의 법문을 들은 중에 앞으로 활용을 많이 했으면 싶은 스님이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참 똑똑한 스님이어서 아주 좋은 법사를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스님의 법문에서 관삼륜청정(觀三輪淸淨)을 설명하면서 ‘시주를 받을 때 물건이 깨끗한 물건인가 도둑질한 물건인가를 살펴서 받아야 된다’고 설명을 하였다. 이것은 청정이라는 낱말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시주를 주고 받을 때,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과 물건이라고 하는 삼륜이 청정하다는 것을 공하다고 보지 않고, 훔친 물건인지 자기가 번 물건인지를 따졌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해석이다.
청정이라는 말을 공하다는 말로 봐야 된다. 텅비었다는 뜻이다.
삼륜이 청정한줄 관하라는 것은 삼륜이 공한 줄로 관하라는 말이다. 준 사람도 착한 사람 받는 사람도 깨끗한 사람, 물건도 정상적으로 자기가 농사지어서 가져온 무슨 쌀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서는 안된다.
준사람도 공하고 받는 나도 공하고 물건도 공하다라고 ‘청정’을 철저히 ‘공하다’라고 해석을 해야 된다.
억념생환희(億念生歡喜)하면 : 기억하는데 환희함을 낼 것 같으면
피제원구족(彼諸願具足)이로다: 저 모든 원에 구족함이 없더라.모든 원이 다 구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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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지옥중(一一地獄中)에 :낱낱 지옥 가운데
경어무량겁(經於無量劫)하시니: 한량없는 세월을 보내나니
위도중생고(爲度衆生故)로 :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까닭으로
이능인시고(而能忍是苦)로다: 능히 이러한 고통을 참는도다. 낱낱지옥 가운데서 한량없는 세월을 보낸다.
여러분들도 엊그저께 지장기도를 다 회향했을 것이다.
여름에 백중에 맞춰서 지장기도를 하면 으레 지장보살 이야기도 하는데 여기는 그 지장보살이 비교가 안된다.
낱낱 지옥 가운데서 한량없는 겁을 지나면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고로 능히 그 고통을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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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석어신명(不惜於身命)하고 : 신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상호제불법(常護諸佛法)하시니: 항상 불법을 보호하니, 상호제불법은 한마디로 말하면 호법이다. 불법을 보호하는 것이다.
광덕스님의 존경할만한 면모중에 한가지가 불법을 보호하는 호법의 자세다. 광덕스님은 정법을 보호하는 의미에서 여러 활동도 펼치고 호법부라고 하는 단체를 만들고 평생 호법법회를 열었다.
여긴 신명을 아끼지 아니하면서 불법을 보호한다고 하였다. 불법을 보호하려고 하는 자세는 아주 중요하다.
무아심조유(無我心調柔)하야: 무아로써 마음을 다스리니. ‘내’가 있으면 그렇게 신명을 아끼지 않고 하기가 쉽지 않다. 무아가 되어야 한다.
능득여래도(能得如來道)로다: 능히 여래의 도를 얻음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