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은 마음 사용 설명서
7월 1일 화엄법회 날, 재무스님과 올라간 화엄전 앞에서 혜일성보살님을 만났다. 문수경전연구회 시작부터 매달 자원봉사를 하시다가 지금은 1월과 7월에만 나오시기로 한 보살님을 큰스님께서 반가와하시며 가족들 근황을 물으셨다.
요즘 큰스님은, 발행하신 저서들을 전집으로 만드는 일이 착착 진행중인데, 감수를 봐달라고 보내온 책들을 일일이 다 봐줄 힘이 없다고 하셨다.
법제자이신 정각스님의 <운산행록>이라는 책을 빌려주셨다.
일산 식사동에서 큰스님과 함께 아름다운 원각사 도량을 참배했던 날이 벌써 12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도 예사롭지 않았는데, 집에 돌아와서 책을 읽기 시작하자 멈출 수가 없었다.
비매품인 책에는 직접 펼쳐놓으신 스님의 행적이 단아하고 깊어서 순수문학책과 종교서적을 동시에 읽는 것같았다. 오래고도 새로운 느낌으로 읽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나는 조금 늦었지.”
큰스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전혀 늦지 않았다고 말씀드렸는데, 큰스님께서 정리하신 <나옹스님 어록>을 읽을 때 느꼈던 그 문체 그대로 당신의 행록을 직접 쓰셨더라면 얼마나 ‘근사했을까’ 하는 마음이 새록새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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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선원의 스님방이 획기적으로 변해 있었다. 여쭤보니 그곳에 <화엄연구소> 연구실을 조성한다고 하셨다. 커다란 전자칠판과 여럿이 둘러 앉아서 마음껏 전자기기를 사용할 수 있는 시원한 테이블, 큰방에 세팅된 두 대의 컴퓨터를 용학스님이 열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신 경전을 보여주시자 감탄이 나왔다. 훌륭한 스펙의 프린터기도 컴퓨터 옆에 제자리를 찾았다.
아래층에는 24시간 운영되는 편의점도 생겼다니, 연구하는 사람들의 ‘꿈의 장소’가 만들어진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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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날 큰스님께서 <마음 사용 설명서>라는 법문을 해주셨다.
마음 사용 설명서
그동안 공부한 것, 앞으로 공부할 것, 모든 것을 총정리하면 ‘일체유심조’라고 말을 했고 또 ‘봉행불교상섭심’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받들어 행한다고 하는 것은 항상 마음 관리 잘하자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경전은 <마음 사용 설명서>입니다.
우리가 라디오를 사든지, 작은 비타민 한 병을 사더라도 사용 설명서가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모든 것은 사용 설명서가 다 있어요.
몸에 관한 설명서는 간혹 건강 서적들이 있습니다. 제가 한때 자연식물식에 관한 책을 열심히 추천하기도 했습니다만, 마음이 근본인데 ‘마음 설명서’는 없더라고요.
근데 보니까 부처님 말씀, 성인의 말씀, 현인들의 말씀, 철인들의 말씀이 전부 <마음 사용 설명서>입니다. 마음 사용 설명서가 그렇게 많이 있었어요.
팔만대장경이 전부 마음 사용 설명서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전부 마음이 들어서 하는데, 마음을 설명하는 설명서가 무지하게 많으니 우리는 얼마나 복이 많습니까?
기존의 지식을 다 내려놓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몸뚱이가 중요하긴 한데 주인공은 마음이야. 마음이라고 하는 게 들어서서 ‘가자’ 하면 가고. ‘오자’ 하면 오고, ‘자자’ 하면 자고, 몸은 마음이 하자는 대로 따라다닙니다.
우리가 ‘불자다 아니다’ 다 내려놓고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한다 칩시다.
새로 시작하면 나는 뭐다? 몸뚱이가 있어. 근데 몸뚱이가 제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야.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해. ‘오늘 무비스님 화엄경 공부하는 시간이니까. 8시 통근길에 공부하는 시간이니까, 거기 가서 화엄경 한 구절 들어보자’
그 선택을 누가 합니까?
마음이라고 하는 내가, 나의 마음이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나를 운전하면 거기 가서 화엄경 공부도 하고 ‘나는 친구 만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럼 친구를 만나러 가는 거예요.
전부 마음이라고 하는 물건이 하나 있어서, 만고의 도인들, 온갖 선지식들이 전부, 이 마음이 들어서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문제를 가지고, 이리 다루고 저리 다루고, 이리 설명하고 저리 설명합니다.
마음을 내가 어떻게 운전할 것인가?
부처님은 일찍히 그러한 것을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마음에 대한 이치를 깨달아서, ‘제대로 인생을 운전해 가도록 하자’ 이리 설명하고 저리 설명하느라, 팔만대장경을 설했습니다.
’팔만대장경이 다른 것이 아니라 마음 사용 설명서다‘ 그걸 누가 해인사에 갖다 붙이면 근사할 것 같아요.
씨앗과 같은 보리심으로부터 선근, 원력이 나옵니다.
원력이 있지만 선근이라고 하는 선행이 없으면 딴 데로 가서 엉뚱한 일을 하는 수가 있어요. 선행이 있어야 돼요. 또 선행만 있고 원력이 없다면 제대로 움직이질 않습니다. 잘 안 움직여요.선근과 서원 이 두 가닥이 보리심에서부터 척 나와서 거기서 보시 애어 이행 동사 사섭법으로 펼쳐집니다.
경전이라고 하는 <마음 사용 설명서>를 우리가 공부해서 잘 운전하고, 사용할 줄 알면, 마음을 잘 사용할 줄 알면, 성공한 인생이에요.
실수 없고 큰 문제 없는 인생을 살 수가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無比스님, 2024년 7월 3일 유튜브 염화실TV 중에서-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五十三
[托法進修成行分 第三]
[成行因果周]
[第八會 一品 二千行門]
離世間品 第三十八之一
四 . 普賢菩薩의 二百答
한달에 한 번씩 문수강당에서 이 경전공부를 하는데 연 중에 딱 두 번이 덥다. 7월달 오늘 제일 더운 날이고, 오늘 안 더우면 8월 초에 제일 덥다. 그다음은 가을로 넘어간다.
딱 두 번이 더운데도 짜증이 난다.
겨울에는 두 번 춥다. 춥다는 것에 생각이 사로잡히면 굉장히 귀찮다.
오늘 공부 전에 유인물을 살짝 짚어보겠다.
저는 한 15년 전부터 어른스님 책 위주로 화엄경을 보현행원품까지 A4용지로 340페이지 분량의 도표를 만들었다.
화엄경 전체를 표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중간에 좀 잘못된 것은 고치고 내용도 더 충실하게 보완하면서 혼자 계속 그것을 보면서 공부하였다.
도표만 보면 화엄경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싹 들어온다.
전에 나눠드린 큰 도표가 있잖은가. 그런 것을 아주 세밀하게 조직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것을 전부 프린트해 드릴 여유는 없고, 혹시 이 과목들이 필요하신 분은 말씀하시면 파일로 드리겠다.
화엄경을 공부하실 때 쓰면 유용할 것 같다. 강의하시는 스님들께 특히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은 큼직하게 A3 크기로 네 페이지를 프린트해 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공양하고 아침 수업 끝나고 여기 내려와서 싹 정리했다.
유인물을 더 드리면 골치 아파서 돌아가실 분도 계실 것 같다. 그래서 넉 장만 드렸다.
오늘 공부하는 부분까지 이 내용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공부 중간에 펼쳐서 한 번씩 짚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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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수업 들어오기 전에 잠시 메모를 하면서 문외한(門外漢)이라고 썼다. 문밖의 사람이 되는 것을 문외한이라고 한다.
보통 어떤 데 솜씨가 없어서 ‘나는 컴퓨터에 문외한이다’라고 하지 않는가? 문밖의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화엄경의 문외한, 문밖의 사람은 아무것도 못 본다. 그런데 우리는 문수강당 안의 입실제자(入室弟子)다.
‘입실은 심오한 것까지 다 본다’는 것인데, 유인물이나 이런 것들도 그 심오한 것까지 보려는 우리들의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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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세간품에서 우리가 화엄행자로서 살아가야 될 내용들을 충분히 설명해 놓았다.
뭐라고 해놨느냐?
311페이지(민족사刊 제3권) 밑에서 다섯째 줄 ‘수입여래일체지지(雖入如來一切智地)’ 그 대목은 서너번 빨간 줄을 그어 도 좋겠다.
이것이 화엄경의 목적, 실천덕목이다.
우리가 문외한이 아니라 ‘비록 여래 지혜의 경지에 들어갔다할지라도’ 이것을 버리지 않는다.
무엇을 버리지 않는가? 보살행을 절대 버리지 않는다.
제가 수업 들어오기 전, 앉아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세간품의 그 구절이 번갯불처럼 머리를 팡 치는 것이다.
잠시 앉아서 이리저리 메모를 하면서 ‘내가 화엄경에 문외한은 아닌가?’문득 이 생각이 들었다.
문밖에서 서성거리는 사람은 아닌가?
문안에 진짜 들어왔다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비록 여래 지혜의 경지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보살행을 절대 버리지 않는다. 계급장을 다 뜯었다 하더라도 백의종군을 마다하지 않는다. 모든 짓는 바 업이 지혜의 방편이다. 짓지 못할 바가 없다. 온갖 세상, 모든 내 지혜 방편, 부처님 지혜 같은 지혜를 동원해서 온 세상에 낱낱 중생을 위해서 쓰는 것이다. ‘위일일중생(爲一一衆生)하야’ 내 마음에 드는 사람, 좋은 사람이든지, 내 마음에 들지 않고 고까운 사람, 미운 사람이든지 간에,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지혜 방편을 지어서 그들을 조복하고 교화한다.
주무량겁(住無量劫) 아승지겁(阿僧祗劫)토록 한량없는 동안 보현행원으로써 난가치우(難可値遇) 만날 수 없는 이 정법을 만날 수 있도록 해서, 모든 중생을 조복해서 개불당연(皆不唐捐)이라. 허망하게 한 중생도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다 거둬들인다.
그리하여 삼세제불의 청정한 행원, 보현행원을 구족해서 무량한 공덕을 성취하니 일체여래께서 무량겁에 그 공덕을 설하더라도 다할 수가 없다.
이세간품에 이런 내용들이 담겨있다. 우리가 실천해야 될 뜻을 담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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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만 봐도 머리가 지끈지끈하시겠다.
그래도 오늘 내용 들어가기 전에 제일 위에부터 표를 보겠다.
붉게 하면 열 받으실까 싶어서, 시원하게 수영하시라고 인디고 색깔로 포로족족하게 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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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세 번째 보광명전에서 7권 1품, 이세간품을 말한다, 2천 행문의 이세간품 한 품이 설해지며 설법주는 보현보살이다. 설법의식에서 반드시 설법주는 삼매에 들어가지 않는가? 보현보살이 불화장엄삼매에 들어가서 부처님의 가피를 입는다.
부처님의 가피를 입으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신업과 구업과 행업과 의업이 다 달라진다. 그래서 부처님을 대신해서 법문을 하신다, 이런 뜻이다.
부처님께서는 삼매에 두 번 드신다.
7회차에서는 찰나제삼매에 드시고 9회차에서는 사자빈신삼매에 드셨다. 그 외에는 보살들의 삼매가 주로 나온다.
부처님의 삼매를 우리는 해인삼매라고 한다.
화엄경에서 해인삼매가 나오는 품은 현수품이다.
현수품에서는 설법주가 문수보살인데 그때는 삼매가 없다.
그런데 거기서 부처님의 삼매인 해인삼매를 이야기하고 제종삼매를 말씀하신다.
우리도 설법을 할 때 기본으로 삼매를 흉내라도 낸다.
조금 전, 이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도 죽비를 치고 잠시나마 삼매의 흉내를 내고 ‘입정’이라고 들어가 앉아 있지 않았는가?
상당법문을 하든지 큰절의 결제, 해제법문을 할 때도 늘 삼매에 들어서 한다.
금강경만 보더라도 ‘반사흘(飯食訖) 수의발(收衣鉢) 세족이(洗足已)부좌이좌(敷座而坐), 부처님께서 밥그릇을 깨끗하게 다 비우시고 옷을 정돈해서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하루종일 삼매에 드셨다’라고 나온다.
강가에서나 선가에서도 경전을 그렇게 이야기한다.
부처님께서 밥을 자시고 하루종일 삼매에 앉아 계셨는데 그때 수보리가 톡 튀어 나와서 ‘희유세존(希有世尊)’ ‘응운하주항복기심(應云何住降伏其心)하리잇고이니까’ 하는 대목이 나왔다.
법화경에서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에 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삼매에 들고 법을 설하기도 하지만, 법을 설하고 난 뒤에 삼매에 드는 수도 있고, 법을 설하는 중간에 삼매에 드는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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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전체를 네 단락으로 나눌 때 첫째 단락은 무엇인가? 부처님의 결과물을 드러내 낙을 권해서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 거과권락생신분(擧果勸樂生信分)이다.
두 번째는 수인계과생해분(修因契果生解分)이다. 바라밀을 닦아서 부처님 깨달음의 결과에 계합해 나갈 수 있도록, 착착 발맞춰 나가도록, 차별인과와 평등인과를 설하는데, 거기에 대한 충분한 이론적인 근거를 마련해라. 그것이 수인계과생해분이다.
세 번째 단락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실천덕목에서 탁법진수성행분(託法進修成行分)이다. 진리, 법에 의지해서, 보현행원법, 바라밀행을 의지해서, 닦아서 정진해서 나아가서 올바른 행을, 부처님 불행(佛行)을 완성시켜라.
성불하라, 성행하라, 이것이 이세간품의 의도다.
마지막 끝에는 무엇인가?
의인증입성덕분(依人證入成德分)이다. 선지식을 의지해서 증입해서 반드시 마음, 일심의 깊은 자리까지 심오한 자리까지 뚫고 들어가서 깨닫는다.
성덕분, 부처님과 같은 훌륭한 공덕을 완성해라. 보현행원을 완전무결하게 임무 완수해라.
이런 것이 입법계품을 사분(四分)으로 나누어 놓은 대목이다.
신해행증 중에서는 증에 해당한다.
그리고 오주인과(五周因果)로서는 성행인과주(成行因果周)에 해당한다.
첫째 인과는 무엇인가? 세주묘엄품으로 해서 여섯 품이 벌어지는 제1회차 설법을 소신인과(所信因果)라고 한다.
우리가 뭘 믿는지를 알려준다. 불교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과 부처님의 의보와 정보에 대해서 확실히 믿고 거기에 대해서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가 믿을 바의 대상이 무엇이냐? 소신인과에 대해서 세주묘엄 여래현상 보현삼매 세계성취 화장세계 비로자나품에서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그다음부터는 부처님의 소신인과를 믿는다 하더라도 동등한 법성이고, 동일한 일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깨달음의 돈오돈수로 완전히 번뇌가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마다 업장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부터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 여래출현품까지 해서 차별인과(差別因果)와 평등인과(平等因果)를 설했다.
소신인과 차별인과 평등인과가 끝나고 난 뒤에 나오는 대목은 성행인과가 되겠다.
그리고 마지막 입법계품은 증입인과(證入因果)라고 한다.
여러분들께는 그런 뜻이 환하겠지만 오늘 처음 온 초학의 학인 스님들이 있어서 또 한 번 같이 짚어보았다.
2. 二十門의 十住答
(8) 童眞住
가. 菩薩의 十種辯才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辯才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於一切法에 無分別辯才와 於一切法에 無所作辯才와 於一切法에 無所着辯才와 於一切法에 了達空辯才와 於一切法에 無疑暗辯才와 於一切法에 佛加被辯才와 於一切法에 自覺悟辯才와 於一切法에 文句差別善巧辯才와 於一切法에 眞實說辯才와 隨一切衆生心하야 令歡喜辯才가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則得如來無上巧妙辯才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변재가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일체 법에 분별이 없는 변재와, 일체 법에 지음이 없는 변재와, 일체 법에 집착이 없는 변재와, 일체 법에 공한 줄을 아는 변재와, 일체 법에 의심의 어두움이 없는 변재이니라.
일체 법에 부처님이 가피하는 변재와, 일체 법에 스스로 깨닫는 변재와, 일체 법에 글귀가 차별하고 교묘한 변재와, 일체 법에 진실하게 말하는 변재와, 일체 중생의 마음을 따라 환희케 하는 변재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여래의 위없이 교묘한 변재를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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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주(童眞住)
*
화엄경 제 38권1 이세간품의 주제는 무엇인가?
보살이 처세(處世)에 불염(不染)이라.
요즘에 연꽃이 피는 시절인데 ‘여연화불착수(如蓮花不著水) 심청정초어피(心淸淨超於彼) 출어니이불염(出於泥而不染)이라’ 연꽃은 진흙에서 나와도 오염되지 아니하고 물들지 아니하고 ‘탁청련이불요(濯淸漣而不妖)라’ 맑은 물결에, 비 오는 데 연꽃이 씻기었다 하더라도 요염하지도 않고 추접하지도 않다.
여연화불착수(如蓮花不著水) 심청정초어피(心淸淨超於彼) 그것이 제일 잘 나오는 대목은 여래명호품이다. 부처님 명호중에서 그렇게 나왔었다.
보살은 처세불염이라. 보살은 중생들하고 같이 입니입수(入泥入水) 타니대수(拖泥帶水)하고 진흙에 빠지면, 진흙에 빠진 대로 물에 빠지면 물에 빠진 대로 중생들하고 오염수 속에서 같이 살아가지만 절대 물들지 않는다.
그것을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라고 말씀한다.
물들지 않는 것은 무엇이냐?
여기 이세간품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이냐?
현(現) 밝힌다, 분명하게 밝힌다, 현저하게 밝힌다.
보혜보살이 운흥이백(雲興二百) 구름이 오르는 것처럼 문단, 조건, 까닭을 200가지를 가지고 하나하나 묻는다.
‘부처님은 손이 무엇이고 부처님의 눈이 무엇입니까? 부처님의 지혜는 뭡니까?’
그런 질문에 대해서 보현보살께서 병사이수답(甁瀉二酬答)이라. 병사(甁瀉) 독에, 물탱크에 물을 쏟아붓듯이, 장맛비 줄기를 쏟아붓듯이 수(酬) 갚을 수자 답 답을 해준다.
2천 가지로 답을 해준다.
그러니까 운흥이백(雲興二百) 현하이천(懸河二千)이라. 병사이천(甁瀉二千)이라 하기도 하고 현하이천(懸河二千)이라고도 한다.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한 가지 질문에 10가지씩 자세하게 답을 해주는 대목으로 되어 있다.
서분은 그런저런 이유로 이렇게 쭉 연결이 되어 있고, 두 번째로 보현보살의 삼매에 들어서는 삼매분, 보혜보살이 200가지 질문을 한 세 번째 단락이 있고,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네 번째 단락은 보현보살께서 이천 가지로 답을 하는 와중이다.
그 중에 십신의 답은 다 배웠고 지난 시간에 우리가 이 십문 중에 십주 답을 했다. 발심주, 치지주, 수행주, 생귀주를 했고, 뒷장으로 넘어가겠다. 구족방편주 정심주 불퇴주 여기까지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했던 바이다.
오늘 할 대목은 제8 동진주부터다.
이 부분에 제가 본문에 나오는 대목 ‘보살의 십종변재’라고 해서 열 가지의 변재 이름을 다 써놓고 시리얼 넘버까지 매겨놓았다.
‘보살의 열 가지 자재’하면 열 가지 자재를 다 써놨다.
여러분들이 대장경 중에서 참고로 공부하실 것 같으면 도세품경(度世品經)이 있다.
건널 도(度)자, 제도할 도자 있잖은가? 도세(度世)의 도(度)라는 것이 이세간품의 떠날 이(離)자하고 똑같다.
축법호(竺法護) 삼장(三藏)이 번역하신 도세품경이다.
축법호 스님이 옛날에 정법화경을 번역했던가, 번역을 굉장히 잘하시는 분이다.
제가 보니 80권 화엄경에 나오는 이세간품도 일곱 권이 굉장히 훌륭하고 재미있지만 또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이세간품은 실천하는 부분이라서 신도님들한테 잘 맞지 않는다.
고심정사엔가 가서 제가 한 2년인가 이 일곱 권을 강의해본 적이 있었다. 설명하기가 난해했다.
이세간품은 스님들한테 맞는 품이 아닌가 싶다.
좀 외람되지만 그런 생각을 엊그제 어른스님께도 말씀드렸다.
“신도님들한테 하기에는 이세간품이 좋기는 한데 상당히 전달하기가 어렵습니다.”
승속이 따로 있나 하지만, 일생을 걸고 자기 머리카락을 싹 밀고 와서 먹물 옷 입고 산에 사는 사람이 화엄경을 대하는 것과, 심심풀이 땅콩으로 슬쩍슬쩍 훑어보는 것은 차이가 날 것 같다. 바깥의 분들이라도 열심히 하시는 분들은 예외다.
우리 문수강당이 화엄경 전문 강당이기도 하니까, 참고로 도세품경을 보면, 우리가 지금 보는 80권 화엄경과 다르다.
지금은 이렇게 그냥 보고 답만 쭉 나열하고 넘어가는데, 도세품경에는 답을 나열하고 난 뒤에 게송을 2개씩 딱딱 정리한다. 판본이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그래서 도세품경이 공부하기에 더 용이하지 않을까 싶다.
혹시 가능하다면, 다음 시간에 우리가 공부할 좀 짧은 부분은 유인물로 만들어 나눠드리겠다.
찾아보실 분들은 이 도세품경을 인쇄하셔서 보시면 된다.
요즘은 씨베타(CBETA)나 대장경이 너무 잘 되어 있다.
유인물 뒷부분은 이런 것들을 한다는 과표를 해놓고 넘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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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십종변재(十種辯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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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할 부분 ‘동진주를 답하라’ 하는 부분도 이 과표에 들어가 있다.
여기 동진주를 답하는 과표에 보니까 두 가지로 되어 있다.
하나는 보살의 변재, 하나는 보살의 자재다.
여덟 번째를 동진이라고 해놨는데 입법계품에도 보면 동남동녀가 다섯 명이 등장한다. 입법계품 53선지식 중에 우바이가 5명이 등장하고, 보살이 다섯 분이 등장한다.
동진이라고 하는 뜻을 야무지게 콱 짚고 넘어가야 되겠다.
불퇴주라고 하는 것이 일곱 번째 단락에 있었는데, 불퇴라고 하는 데부터 종기의 핵이 빠지듯이 아집이 나가 떨어진다. 그래서 여덟 번째에 들어오면 아이처럼 내 똥고집이 없어서 천진난만하게 된다.
8지에 가서는 이것을 부동지라고 하고, 십주에서는 동진주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십행에 가서는 존중행, 난득행,이라고 표현한다. 8부 능선을 넘어갔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이 동진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
아이, 동자가 바로 보살심을 상징한다.
불교에서 문수동자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가?
입법계품에도 문수사리 동자가 나온다.
동자는 이꼬르(=) 해놓고 청량소초에 보면 보살이다, 이렇게 해놓았다.
보살을 번역할 때 열 개(開)자를 써서 개사라고 하기도 하고 또 큰 대(大)자를 써서 달마대사처럼 대사라고 하기도 한다. 둘 다 선비 사(士)자를 쓴다.
연다고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 오온이 공한 것을 완전히 알고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순진무구한 상태가 된 정신 상태를 말한다. 그것을 동진주라고 하는 것이다.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유십종변재(有十種辯才)하니 : 변재가 오기까지 우리가 화엄경 십무진장품에서 배워왔듯이 십무진장품은 무진장 창고가 있음으로 해서 회향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십회향품 도솔천으로 넘어가기 전에 제일 마지막이 무엇인가? 승야마천궁품 야마천궁게찬품 십행품, 열 가지 바라밀행이 충족되면 열 가지의 무진장 창고가 생겨진다. 십무진장 창고를 가지고 태양의 길을 바랑을 짊어지고 떠난다.
거기에 보면 십무진장 제1번이, 믿음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신장(信藏)이다.
범어사는 입구에 들어오면 의상교라는 데를 지난다.
그분이 선근이 있어서 그런지 거기 바위에 김선근(金善根)인가 금선근인가 이름을 적어놓았다.
선근공덕을 지으라고, 선근이 바로 신심이다.
신심을 다른 말로 선근이라고 하고 신근이라고 한다.
기신론에서는 ‘유법(有法)이 능기마하연신근(能起摩訶衍信根)고로’ 라고 하였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공덕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선근이라고 한다.
범어사에는 바위에 새겨놓은 특출난 이름 세 분이 있다.
옛날부터 바위에 새겨놓은 이름들인데 김선근이라는 이름을 보고 올라오면, 생각, 사유를 끊지 말고 계속 자기의 사유를 살피면서 궤적을 살피면서 가야 된다는 뜻의 김사철(金思轍)이 있다. 수레 거자 옆에 뚫을 철자를 써서 이을 철, 밝을 철이라고도 한다.
생각 생각의 염력이 끊어지지 않도록 염불하라고 김사철이라고 하고 여기서 서너 발작 가서 왼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면 김영덕(金永悳)이 있다.
영원토록 길 영자, 참 진자 밑에 마음 심자가 있는 신심 덕(悳)자다. 신심, 선근 덕자, 선근을 짓는다는 뜻이다.
김선근 김사철 김영덕 3김이 범어사에 있다.
그런데 범어사에 30년 살든, 20년 살든 왜 다들 까막눈이 되는지 모르겠다. 강사로 살든, 학인으로 살든, 한 번도 못 보고 가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보고 자기 가슴에 새기는 사람도 있다.
보통 일주문 밖에는 계단이 다섯 개 있다. 왜 그런가?
‘오계, 신도5계, 살도음망주(殺盜淫妄酒) 이것을 조심해서 일주문에 들어서라’는 것이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보통 계단이 몇 개인가?
해인사나 범어사에 들어가면 열 개다.
‘여기서부터는 출가문이니까 더 조심해’ 하는 것이다.
대웅전에 올라갈 때는 계단이 몇 개인가?
다섯 개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단디하라’는 뜻이다.
여기서 보살 마하살은 변재가 있다.
믿음이 먼저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 특출난 도덕 정신이 있어야 되고, 계장(戒藏)이 있어야 된다. 청정 게장 게장이 아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 참장(慚藏) 자기 부끄러운 줄 아는 것, 괴장(愧藏) 남 부끄러운 줄을 알고, 그러면 법문이 들린다. 문장(聞藏)이다.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은 잘 베풀어준다. 문장 다음은 시장(施藏)이다. 베풀 시자. 베풀어 주는 사람들에겐 지혜와 방편이 생긴다. 지혜와 방편이 생긴 사람들은 기억력이 또렷해서 염장(念藏)이 생긴다.
염장이 생긴 사람들은 어느 정도 사마타 수행이 쑥 깊어서 팔부능선을 넘어가니까 자기 몸에 스며들기 시작해서 뼛속까지 스며들기 시작하면 지장(持藏)이 된다.
가질 지(持)자 완전히 수지가 되는 것이다. 이제 몸이 화엄경이 된다. 문신이 아니고 완전히 문심이 되어서 무늬가 마음에 새겨진다.
거기서부터 뱉어내면 변재 변장(辯藏)이 마지막으로 나온다.
변재라고 하는 것도 십무진장품하고 여러분들이 같이 비교해 봤으면 좋겠다.
하등(何等)이 : 하등이
위십(爲十)고 : 위십고
소위어일체법(所謂於一切法)에 : 이른바 일체법에 대해서
무분별변재(無分別辯才)와 : 무분별변재라.
동진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이미 해석을 했고 무분별로 넘어왔다.
아이들은 선악, 시비, 희노애락 분별심이 없다.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는 것이지 과도한 욕심이 별로 없다.
어일체법(於一切法)에 : 온갖 법에
무소작변재(無所作辯才)와 : 분별이 없는 변재와.
이 부분을 화엄경이 전체적으로 깨물고 있는 것이 ‘일체법에 무분별’이다. 일체법에 무소작이고, 일체법에 무소주라고 하였다. 이것을 구마라지바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고 하고, 현장법사는 도무소주응생기심(都無所住應生其心)이라고 한다.
도무소주(都無所住) 모두 도(都)자 도무소주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말아라. 응생기심(應生其心) 응당히 어디에도 머무르지 말고, 아무 데도 전혀 머무르지 말고, 마땅히 그 마음을 일으켜라.
현장법사의 번역이 구마라지바의 번역보다 더 좋다.
도무소주응생기심.
비슷하지만 구마라지바 보다 버전업된 것 같다. 저만 그렇게 느껴지나? 느낌이 더 좋지 않은가?
응무소주만 비싼 소주가 아니다. 도무소주도 있다.
그런 걸 보면 진로소주는 소주도 아니다.
소위 일체법의 일체법, 일체법에는 유위법과 무위법이 다 포함 된다. 선악,시비, 희노애락, 오온개공, 12연기법도 다 들어간다. 모든 것이 다 들어간다고 하면 색성향미촉법이 다 들어가는데 이것이 깨물고 있는 것이 화엄경 전체를 보면 승혜보살장의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 야마천궁게찬품에 나오는 각림보살장의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똑같다.
그것이 여기서는 전체로 되어 있으니까 온갖 법에 분별이 없는 변재라고 나왔다.
분별이란 말은 지혜롭게 쓸 때도 있고 망상 분별로 쓸 때도 있다. 여기는 망상이라고 하는 뜻이 있다. 전도망상(顚倒妄想)이다. 짓는 바가 없는 변재라고 하였다.
소꿉장난하는 아이들이 무슨 욕심이 있어서 그렇게 이익을 보려고 하겠는가.
어일체법(於一切法)에 :일체법에
무소착변재(無所着辯才)와 : 집착이 없는 변재와
어일체법(於一切法)에 : 일체법에
요달공변재(了達空辯才)와 : 요달공, 일체법이 모두 공한 줄 아는 것이다. 색즉시공, 수상행식 역부여시인 줄 아는 오온개공을 아는 변재와
어일체법(於一切法)에 : 온갖 법에
무의암변재(無疑暗辯才)와 : 어두운 의심이 없다고 하는 것은 무명 번뇌 덩어리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의심이 있으면 그 의심할 의자 앞에다가 돌 석 자를 붙이면 장애가 돼서 애라고 한다.
의심할 의(疑)자 앞에다가, 밥을 먹으면서 돌이 있나 없나 이렇게 조심스럽잖은가? 그것이 애(礙)다.
돌이 있으면 밥 먹을 때 돌 한 서너 개만 한 숟가락에 올라가면 참 곤란하다. 그것이 장애된다 해서 애다.
그래서 원효스님께서 해석하시기를 ‘눈앞에서 장애가 있는 것을 장(障)이라고 한다. 소지장(所知障), 번뇌장(煩惱障)이라고 한다. 드러나지 않는 장애, 은밀하게 장애가 있는 것을 지애(智礙), 번뇌애(煩惱礙)라고 한다’고 해놓았다.
지애와 번뇌애, 하나는 소지장과 번뇌장, 왜 여기는 장자를 썼고 여기는 애자를 쓰느냐? 애는 눈을 감고 가만히 점자 짚듯이 해서, 장님 점자 짚듯이 더듬어 보는 것을 애라고 한다면, 눈앞에 있는데 앞에 캄캄하게 막혀서 못 건너는 장애가 있는 것은 장자다. 앞에 딱 가로막혀버린 것이다.
촉사면장(觸事面墻)이라. 눈앞에 담벼락이 막힌 것처럼 된 것을 장이라고 한다.
원효스님께서 그것은 뜻을 밝혀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하나는 뜻을 돌려서 얘기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지장과 번뇌장, 지혜와 번뇌는 같은 것인데 이렇게 해석한다고 하면서 기신론 별기에서 자세하게 써놓으시고, 2장에서 따로 한번 더 써놓으셨다.
원효스님의 소지장과 번뇌장은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해석하는 번뇌장과 소지장 하고 다르다.
기신론에서만 하는 해석을 가지고 한다.
그것을 지욱스님께서 실차난타 번역을 하시면서 착각을 하셨다. 그래서 제가 각성강백스님께 ‘어떻습니까?’ 여쭤보았다.
“그거 원효스님이 제대로 본 거예요. 지욱스님이 그렇게 보면 안되는데 그렇게 봐버렸더만.”하셨다.
여기는 심각하게 공부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니까 그런 것도 한 번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일체법에 어둠, 의심이 없는데 이제 환하다는 것이다.
어일체법(於一切法)에 :일체법에 대해서
불가피변재(佛加被辯才)와 : 부처님이 가피하는 변재와
어일체법(於一切法)에 :일체법에 대해서
자각어변재(自覺悟辯才)와 : 스스로 깨닫는 변재와
스스로 깨닫는, 이 ‘자각어’도 범행품 말미에 같이 물려있는 게송이다.
지일체법(知一切法) 일체법을 알아라. 일체법이 어떻게? 즉심자성(卽心自性)이다. 마음은 자성으로 되어 있는데 성취혜신(成就慧身)하면 불유타오(不由他悟)라, 내가 비로자나 부처님이 되는 데 있어서 남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다. 대혜 종고스님은 서장에서 ‘장사전비(壯士展臂)에 장군이 팔을 드는데 불비타력(不備他力)이라.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다’ 고 하였다.
어일체법(於一切法)에 : 일체법의 온갖 법에서
문구차별선교변재(文句差別善巧辯才)와 : 문구차별선교변재와 글귀가 차별하고 교묘한 변재, 그것이 안 되실 것 같아서 제가 옆에 주를 좀 달았다.
프린트 한번 보시기 바란다.
프린트 동진주에 보면 ‘요지일체법 자성무소유’를 참고해 보시라고 1번부터 6번까지 친절하게 참고 표시까지 해놓았다.
여덟 번째 해놓고 유식에는 자성유식이 있고, 상응유식, 소변유식이라든지 분위유식이 있다고 하였다.
분위유식은 흔히 불상응법이라고 해서 방향이라든지 시간이라든지 모양이라든지 이런 것을 가리키는 분류법이다.
명신 구신 문신 이런 하위개념을 두고 있다.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컵이다 잔이다’ 이렇게 자꾸 이름을 갖다 붙이고 증어(增語)해서, 말을 붙여서 이름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름이라고 하는 것을 ‘증어로 위성한다’고 해놓았다.
구신, 문구, 구구절절이 하는 것은 뜻을 밝히는 일이다.
구절구절 말을 보태서 구구절절이 자꾸 한 마디 한 마디 계속 붙이는 것이 구가 되고 절이 되고 그것이 전체가 문장이 되면 명구를 의지한다. 이름과 그 구절을 의지해서 명구의 소의로 현의(顯義) 뜻을 밝힌다.
여기 글자들도 예를들어 한 일자 법자 문자 등등 누가 만들었는지 어느 생각 속에서 공통분모로 나와서 한자한자 글자로 만들어지고 자리하고 있다.
글은 뜻을 알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글만 읽기 위해서 있고 번역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뜻으로, 그 뜻을 정확하게 잘 이해한다는 것으로써 문구 차별선교라고 해놓았다.
문장, 경전을 환하게 아는 사람은 해설을 빌릴 필요가 없고, 모르는 사람은 해설을 빌려야 된다. 모르는 사람이 모르면서도 경전을 해설하려면 가급적 옛날 근거를 갖다 대서 해석하면 된다. 지금 제가 근거를 갖다 대는 것은 천친보살이 해놓은 근거다.
‘불유타오’ 같이 조금 전에 했던 것들은 화엄경을 근거로 가져왔다.
자기 임의대로 뜻도 모르면서 해석하는 것을 전도설법이라고 한다. 전도(顚倒) 확 눈이 뒤집어진 설법이다.
선가에서는 남의 눈을 까버린다고 활안종사(活眼宗師)라 한다. 돈을 받고 강의하고 설법하는 것은 오염설법이라고 한다. 그런 이야기들을 6조스님이 말씀하셨다.
그 당시에도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밥이라도 한 끼 잘해주고 법문 하루 봐주고 이런 식인가 보다.
여러분들은 그 밑의 내용을 참고해서 보시기 바란다.
오위백법도 전에 여러분들께 도표를 나눠드린 적이 있다.
혹시 못 받으신 분들은 말씀하시면 따로 나눠드리겠다. 그다음 아홉 번째
*
어일체법(於一切法)에 : 온갖 법에
진실설변재(眞實說辯才)와 : 진실하게 말하는 변재와
수일체중생심(隨一切衆生心)하야 : 마지막으로 더 중요한 것은 일체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영환희변재(令歡喜辯才)가 :그들을 환희하게 하는, 남 기분 좋게 하는 변재가 열 가지다.
제가 여기 문수선원에 와서 어느 날 도반스님과 같이 어른 스님 물건들을 정리했다. 그 스님이 욕심을 내는 스님이 아닌데 마음에 드는 물건이 하나 나왔는지 나에게 물었다.
“스님 이거 내 주면 안돼요?”
“안 된다. 어른스님 꺼니까. 조금도 손대면 안 된다. 잘 가지고 있다가 밑에 사람들 물려줘야 된다. 왜 그러냐?”
자기가 어릴 때 보던 책이라서 당신 절의 도장이 콱 찍혀 있다는 것이다. 가만보니 줘야 될 것 같았다.
“그럼 스님 가져가이소. 스님 책 같습니다. ”
“그러지 말고 스님, 기분 좋은 날 주세요.”
했다.
“오늘 내 기분 제일 좋습니다. 가져가이소.”
그것을 내어 드리고 났더니 점심때도 안 되었는데 요 밑에 가서 칼국수를 같이 먹기로 해놓고는 바랑을 들고 가려고 했다. 왜 가냐고 했더니 마음 변할까 싶어서 간다고 했다.
그 스님께 참 고마운 것이 ‘기분 좋은 날 주세요’ 했다.
우리는 남이 기분 좋든지 말든지 내가 갖고 싶으면 ‘주이소, 달라할 때 주면 될구마’ 하고 막 우기지 않는가.
그 스님은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을 텐데 ‘스님 기분 좋은 날 주세요’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모든 중생심을 따라서 그들을 환희하게 하는 마음을 낸다.
우리는 그게 안 되고 강사노릇을 오래 하다 보니 남 달달 긁고 볶고 콕콕 찌르고 이런 걸 막 하지 않는가.
시위십(是爲十)이니 : 이것이 십이니
약제보살(若諸菩薩)이 : 만약에 보살이
안주차법(安住此法)하면 : 이 법에 안주하면
즉득여래무상교묘변재(則得如來無上巧妙辯才)니라 : 즉득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무상 교묘 변재를 얻게 된다.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생략하고 또 넘어가겠다.
나. 菩薩의 十種自在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自在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敎化調伏一切衆生自在와 普照一切法自在와 修一切善根行自在와廣大智自在와 無所依戒自在와 一切善根廻向菩提自在와 精進不退轉自在와 智慧摧破一切衆魔自在와 隨所樂欲하야 令發菩提心自在와 隨所應化하야 現成正覺自在가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則得如來無上大智自在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자재가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조복하는 자재와, 일체 법을 두루 비추는 자재와, 일체 착한 뿌리의 행을 닦는 자재와, 넓고 큰 지혜의 자재와, 의지할 데 없는 계율의 자재와, 일체 선근을 보리에 회향하는 자재이니라.
정진하여 물러나지 않는 자재와, 지혜로 모든 마(魔)를 깨뜨리는 자재와, 좋아하는 욕망을 따라 보리심을 내게 하는 자재와, 응당 교화할 바를 따라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자재이니,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여래의 위없는 큰 지혜의 자재를 얻느니라.”
*
보살(菩薩)의 십종자재(十種自在)
*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유십종자재(有十種自在)하니 : 유십종자재하니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십(爲十)고 : 열 가지의 자재인가.
소위교화조복일체중생자재(所謂敎化調伏一切衆生自在)와 :소위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조복시키는 자재와
보조일체법자재(普照一切法自在)와 : 일체의 모든 법을 두루 비추는 자재와
수일체선근행자재(修一切善根行自在)와 : 모든 착한 뿌리의 행을 닦는 자재다.
착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꿀떡 같지만 악업장이 많은 사람은 마음은 있으나 실천이 잘 안 된다.
광대지자재(廣大智自在)와 : 광대한 지혜의 자재와
무소의계자재(無所依戒自在)와 : 무소의계자재와 이것도 범행품을 세심하게 살펴봐야, 의지할 데 없는 계율의 자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느 데에 근본을 두느냐? 본래무일물이다.
계율은 사람이 살아가다 보니 서로 기준을 잡아야 되니까 생겨난 것이다. 생멸하는 인연에 따라서 생긴 것이지 원래 계율이 있을 수는 없다.
부처님도 있을 수도 없다. 중생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부처님의 기준을 둔다. 이것이 범행품의 열 가지 조건으로써, 출가한 스님들을 위한 품이 범행품이다.
범행품의 제일 마지막 게송, 그 유명한 게송이 무엇인가?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초발심이라고 하는 것이 무소의를 뜻하는 것이다. 무분별 무차별 이것이 초발, 발심인데, 완전히 터전이 되는 것이다.
탁구를 치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탁구 라켓도 아니고 탁구공도 아니고 탁구 치는 사람도 아니다. 탁구대가 있어야 한다.
농사를 지으려면 씨도 아니고 농부도 아니고 제일 중요한 것은 지을 땅이다. 복전이라고 한다.
중생이 모든 수행자들의 복전이고, 부처님은 모든 수행인들이 경전이라고 한다. 우리가 부처님이 위로 받들어야 될 경전이다. 많이 거둬주면 우리에게 복이 생긴다.
부처님 나오는 불전이다.
여기서 일체법이란 말은 그렇게 해서 넘어간다.
수일체선근행, 그다음 넓고 큰 지혜, 의지할 데 없는 계율, 가는 김에 한번 짚어보자.
범행품에 무엇무엇이 나오는가?
부처님도 본래 없다. 법도 본래 없다. 수행도 본래 없다.
불법승이 딱 기준을 잡고 주춧돌처럼 버티는 자리가 어디인가? 계율이다. 불법승이 계율로 인해서 딱 지탱이 된다.
그 네 가지를 근본적으로 들고, 그다음에는 몸과 몸의 업신과 신업, 말과 구업 말과 말의 업, 뜻과 뜻의 업 여섯 가지가 나온다. 그러면 몇 가지인가? 열 가지가 본래 어디에도 없다.
어디에도 없지만 우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닦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이 계율과 불법승을 의지해서 신구의 삼업을 닦아 나간다.
여기에서 발심을 잘해라, 모든 것은 무엇인가?
지일체법이 즉심자성인 줄 알아야 된다.
그 마음을 잘 관하라 해서 초발심시변성정각, 초발심시에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범행품 말미에 해놓고 바로 초발심공덕품으로 넘어간다.
경전은 그렇게 하나씩 깨물면서 딱딱 넘어가도록 정리되어 있다. 중구난방으로 막 써놓은 것이 아니다.
여기도 마찬가지다.
순서대로 쭉 써놓았다.
경전은 그대로 읽으면 여과지를 통과해서 내린 커피 같다. 쪽 빠지게 되어 있다.
일체선근회향보리자재(一切善根廻向菩提自在)와 : 모든 착한 뿌리를 보리에 회향하는 자재와
정진불퇴전자재(精進不退轉自在)와 : 정진하여 물러가지 않는 자재와
지혜최파일체중마자재(智慧摧破一切衆魔自在)와 : 지혜로 모든 마구니를 깨뜨리는 자재와
수소낙욕(隨所樂欲)하야 : 좋아하는 욕락을 따라서.
이런 대목들이 치문에도 그냥 나온다. 중생들이 좋아하는 바 수소욕락하야
영발보리심자재(令發菩提心自在)와 : 보리심을 내게 하는 자재와
수소응화(隨所應化)하야 : 교화할 바에 따라서
현성정각자재(現成正覺自在)가 : 현성정각자재가
시위십(是爲十)이니 : 열 가지다.
혹시 졸리신가? 대부분이 안 조는데 딱 두 스님이 존다.
제가 잘 아는 스님인데 왜 조느냐? 관심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제가 어릴 때 스님한테 물어봤다.
“저는 왜 참선하면 잘 졸립니까?”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
그 관심이 어디 있느냐? 안 올 자리에 끌려온 것 같다.
제 제자라고는 얘기 못 한다.
제 바로 옆 방의 옆 방에 있는데, 얼굴이 벌게져서 죽을지경이다.
여러분은 공부가 재밌지 않은가? 제가 재밌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이미 그 뜻으로 깊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화엄경이 생소하고 먹으면 설사할 거 같은 것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약제보살(若諸菩薩)이 :약제보살이 그러니까 그 스님을 위해서 약(若)이라고 써놓았다. 이프(if) 문장은 99%가 불가능이다. 만약에 그 스님이
안주차법(安住此法)하면 : 이 법에 안주한다면, 그렇게 위로를 한다.
즉득여래무상대지자재(則得如來無上大智自在)니라 :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즉득 여래무상대지자재니라.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초발심시변성정각이라, 똑같은 이야기다.
같은 이야기가 계속 문장을 바꿔가면서 나온다.
그런데도 우리가 지겨워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얼마나 재미있는 사람들인가?
제 상좌가 있는데 옛날에 자기가 출가하기 전에 소림사 영화를 좋아했다. 이연걸이 나오는 영화를 스무 번을 봤다고 했다. 제 사형이 있었는데 13번을 봤다.
“와, 나는 니한테 졌다.”
사숙이 조카한테 졌다고 했다.
결국은 출가해서 ‘뭘 외워라’ 하니까 머리는 돌대가리인데 꾸준하게 글을 잘 외우고, 저보다 더 많이 외우고, 열심히 하였다. 그래 ‘나도 저거 좀 닮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한 줄도 안 외운 사람은 뭐 하고 있겠는가? 조실스님 되듯이 계속 존다. 푹 익어져서 외워야 된다.